김성수 목사/기본교리

14. 기적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00

14. 기적

 

(12:38-39)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신비적인 것이나 기적적인 것의 체험이나 자기의 소원이 척척 이루어졌던 것에 대한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기독교의 체험은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 "이런 환난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한가? 어떻게 나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가?"에 대한 체험입니다.

(4:12-13)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집에다가 표구해서 걸어놓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내가 감옥 같은 고난과 배고픔과 비천도 이겨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체험은 바로 그런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앙생활은 기분이나 느낌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교리의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만 말미암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듣고 읽고 배워서 그것이 이해가 되면 그 이해가 가슴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조선소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조선소에 가면 배를 만드는 철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철판을 보고 또 그 철판으로 만들어지는 엄청난 크기의 배를 보면 그 배가 물에 뜬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 시간에 부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물속의 물체는 그것이 밀어낸 물의 양만큼 가벼워집니다. p=p0-pgh 이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입해 보면 그 엄청난 크기의 배가 뜬다는 것을 확실하게 계산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인류가 느낌으로 그들의 인생을 경륜해 왔다면 비행기나 배나 자동차 같은 것은 결코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나 기분으로 하는 신앙은 절대 진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기복 적이며 주술적으로 이해를 하고 정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도 기적을 일으켰고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켰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은 병도 물리쳐 주시고 물질도 풍성하게 채워 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병을 낫게 해 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음을 우리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우리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복입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즐거워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절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음도 지난주에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기적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여러분이 그 기적의 의미들을 잘 파악하고 계시면 그 엉터리 같은 신비주의나 기복 주의에 빠지지 않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전에 설명을 해드렸으니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예수님의 신적 기원과 예수님의 하실 일과 예수 님 자신을 설명하는 sign이라는 것입니다.

(5:36)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먼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 중에 딱 일곱 개가 등장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많은 일들을 간추려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요한 음을 기록했습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게 하기 위해 행하신 것이지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면 왜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병을 고쳐 주시겠습니까? 한번에 “병 걸린 사람들 다 나아라.” 그러면 전부 나을 텐데요.

우리는 그런 체험이 없어도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과 그 분의 하신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차근차근 한번 보지요. 요한복음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기적이 뭡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교를 했습니다. 비어있던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위선적인 행위만 풍성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잔치가 진짜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적이라고 했지요?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몸을 닦는 물을 담는 항아리입니다. 그것이 비어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적 뒤에 예수님께서 그 이적의 본질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1)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그 이적은 단순히 세상의 잔치를 흥겹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포도주를 채우시는 데에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참 기쁨과 풍성이 오게 될 것을 sign으로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게 될 천국에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그 질병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참 천국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더니 그 질병이 물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왜 질병이 생긴 것입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공급되어야 할 “바라크”“생명력, 복”이 차단  되었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질병은 궁극적인 죽음의 맛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이 꽉 차있지 않은 증거, 이미 뿌리가 뽑혀버린 나무라는 증거, 점점 죽어 가는 증거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그 천국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복“바라크”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자 질병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적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라면 왜 그 베데스다 못 가의 수많은 병자 중 38년 된 병자 하나만 고치셨겠습니까? 그 이적은 우리 죄인들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런 불능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일어설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소경이요, 절름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복음의 시놉시스 인 것입니다.

네 번째 기적이 오병 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내용만 가지고 네다섯 번은 설교한 것 같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참 생명의 떡이시며, 그 떡으로만 우리는 영원히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복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영혼의 굶주림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오병 이어를 가져오라 하셨을까요? 그냥 “모두 배 불러라”하면 배가 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 물고기 두 토막(옵사리온)과 떡 다섯 개라는 아이의 도시락을 필요로 하셨습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 아이들과 여자들을 합쳐서 2만 명이 넘는 그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데나리온(노동자의 1년 치 임금)도 모자란다고 빌립이 계산을 했습니다. 거기에 이 오병이어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하나님 나라 ,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적이 물위를 걸으신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네 번째 오병 이어의 기적과 연결이 되는 기적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6:45)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즉시 제자들을 배를 태워 벳새다로 보내십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십여 리를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역풍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아네모스 에난티오스”역풍,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역풍이 부니까 제자들이 괴로워했다고 성경은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에이도) 그들에게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밤중에 등불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역풍에 표류하는 배를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하십니다. 십여 리면 4km가 넘는 거리인데 한 밤중에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황급히 바다로 내 모신 것입니다. 당시 한 부락의 인구가 평균 3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몇 개 부락이 동시에 모인 것으로 아주 혼잡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빵과 물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그 빵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누어주던 그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시기 위해 바다로 내 몬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절대 너희들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다 위의 폭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떠나자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로 벳새다로 떠나실 때 그들과 함께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역풍을 만나자 주님은 그들에게로 걸어오셨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주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는 데는 너희들의 힘이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능력으로만, 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폭풍 위를 주님께서 밟으시는 것입니다. 그 풍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을 떼어주던 손으로 열심히 노를 젓던 제자들은 그 때 주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배우게 된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수많은 내적 외적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병이 들고,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외풍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죄로 인한 역풍도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모난 성격, 불안, 우울, 근심, 염려, 욕심.. 계속해서 우리를 거스리는 외풍과 내 풍에 우리는 시달립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어두움과 고통의 세상에서 주님께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 내신다는 것입니다.

(139:15-16)

15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풍랑 속에 함께 계십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뭘 해요? 능력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에 제한 된 인간은 자연 법칙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시고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으로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에 스스로 매이십니다. 그것을 “공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때때로 그 자연 법칙을 유보하십니다. 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기브온 민족하고 전쟁을 합니다. 이기고 있었는데 해가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태양을 멈추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태양이 멈춥니다.

또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신 적이 여러 번 있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질량 불변의 법칙을 초월하신 것이고 물위를 걸으신 것은 만류인력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예수님께서 바로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 자연법칙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6:48)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셔서 그냥 지나가려 하십니다. 성경이 왜 그런 표현을 쓸까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표현을 쓰는 곳이 몇 군데 나옵니다. 그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는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났습니다. 죄는 그렇게 저주하여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부터 약속해 오신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표현입니다.

(34:6)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나님께서 모세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그 분의 속성을 말씀하십니다. 그 분이 지나실 때는 그 하나님의 속성이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왕상19:11)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왜 역풍이 부는 풍랑의 현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인생의 고난과 환난, 그리고 죄로 인한 고통은 정말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계시는 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를 향한 징계의 채찍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대표적인 곳이 어디입니까?

(6:1-3)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웃시야 왕이 죽고 유대가 영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을 맞고 있을 때입니다.

(1:26-28)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모조리 끌려가고 처참하게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역풍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20C 위대한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인 “랄프 카이퍼”가 아주 눈이 나빴다고 합니다. 설교자가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공부할 때도 힘들고 설교 원고를 볼 때도 아주 힘이 듭니다. 랄프 카이퍼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이유로 그런 것도 아니고 설교를 하는데 불편해서 그러니 눈을 좀 고쳐 주세요.

십 수 년을 기도했는데도 눈은 계속 더 나빠졌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4장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답니다. 카이퍼야, 너는 네가 눈이 온전히 치료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네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카이퍼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좋지요’ 하고 마음속에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내 마음속에 “내가 너의 삶을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너는 왜 그것을 막으려 하느냐” 하는 하나님의 책망이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그 다음부터 자기 눈을 고쳐달라고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진화론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자생존, 뛰어난 자가 살아남고 존경 받는다“ 이런 진화론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못생기고 안 되고 못 난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실패자로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우리는 창조 을 진리로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창조론은 이 땅의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인 사람은 부자대로 예쁜 사람은 예쁜 대로 못난 사람은 못 난대로, 마른 사람은 마른대로 뚱뚱한 사람은 뚱뚱한 대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 줄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기적이 소경으로 난 자가 보게 되는 이적입니다.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소경이 왜 소경이 된 것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지금 지나가고 계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도 영적 소경인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이 저주  받은 흙에 이겨지셔서 그 저주받은 흙이 되어버린 죄인과 연합되어 그 예수 님 자신이 실로암 못에 씻겨 짐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부 그 진흙과 실로암 못이 효험이 있는 것을 생각들을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신유 은사 자들이 인기인들이 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전화 예약까지 하고 가야 겨우 만날 수 있고 아니면 전화로 치료해 주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받기도 한다고 합니다.

설사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병을 고쳤다고 해도 자기는 우리 주님의 능력의 통로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신유 은사 자들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복음이 뭔지 정확히 이해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이적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거기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1:3-4)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사건 역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죄인들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하게 되는 최종적인 정리를 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적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각 기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과 그 분의 하실 일과 십자가와 복음이 상징 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 보겠습니다.

(8: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 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14:2-9)

2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 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 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7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 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9  칠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레위기 율법에 문둥병이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제사장에게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가지고 가서 한 마리를 죽여서 그 피를 다른 새의 날개에 묻히고 그 새를 날려 버리는 의식을 합니다. 죄가 죽고 그 죽은 자의 생명을 산새에게 묻혀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이 레위기의 의식입니다. 복음이지요? 옛 몸이 죽고 새 몸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게 되는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사장으로서 문둥병자로 대표되는 저주받은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낫게 하시는 것을 잘 보면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은혜를 설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서 네 하인을 고쳐 주리라 하시니까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감당치 못 하겠습니다“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여,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나를 떠나소서.“ 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부하가 있어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며 하라하면 한다고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잘 보시면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목적보다 예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것에 따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대로 만족할 것이고 낫게 해주시면 감사하며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을 칭찬하시면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와서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율법과 혈통의 선민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의 믿음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적은 은혜로 얻는 구원과 행위를 의지한 외식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기적을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칠()() 이어로 4000명을 먹이시자 바리새인들이 또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8:11-12)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렇게 한탄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 더러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신 것을 경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해로운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속 메시야, 그러니까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다시 화려한 다윗 왕국을 재건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라면 그에 걸 맞는 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 한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그런 표적은 예수께서 보여 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런 잘 못된 메시야 관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자기들이 빵을 한 개밖에 안 가져 와서 나무라시는가 보다 하고 자기들끼리 수군 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나 칠()() 이어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의 생각처럼 이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실 메시아 왕국의 전주곡이 아니라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영적 굶주림이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려 했던 것인데 제자들이 여전히 이 땅의 떡으로 다투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아니 우리 교회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데 역시 침을 뱉어서 그 눈에 바르시고 (그 죄인과 연합 되셔서) 그 눈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소경이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고도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안수해서 또 치료해 주십니다. 그제 서야 잘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매하고 더딘 제자들의 영적 진보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환하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진리 앞에 세우실 것을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도 역시 demon possession귀신들의 소유였던 죄인들을 예수께서 건져내셔서 제자를 삼으시는 복음에 대한 진술입니다.

(5:1-8)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그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묘사를 잘 보시면 첫째로 그 사람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공통점입니다. 죄인들은 부끄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그게 부끄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런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모여 앉아서 자랑하는 게 얼마나 많은 돈을 사기 쳤나? 얼마나 많은 여자를 울렸나? 얼마나 비싼 물건을 도둑질했나? 내가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때렸었나? 이런 것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가운데 삽니다. 무덤에는 죽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무덤에서는 사람 썩는 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자기들의 의만 드러내는 썩어 가는 시체들 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귀신들린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죄인들은 힘이 있습니다. , 권력, 명예, 지식 이런 것을 자기만을 위한 힘으로 씁니다. 그런데 그 힘은 자신을 파괴해 가는 힘입니다.

5절에 보시면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더라. 는 구절이 있지요?

인류의 문명이 결국은 인간을 아주 가치 없고 값싼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키운 힘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이외에 자신이 힘이라고 여기고 있고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기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마귀의 속임수 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우상을 섬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우상에게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겨 버리는 것, 그것을 우상을 섬긴다고 하고 그런 자들을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65:1-5)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켜 무덤 사이에 사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어디서 봤지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해를 하면서 바알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자는 바로 세상의 가치인 우상 속에서 그 것이 진짜 가치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demon possession 된 자에게 예수께서 오십니다. 예수가 오셔서 그 귀신들을 돼지 떼에다 몰아 넣으셔서 바다에 넣어 몰살을 시키십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지요? 홍해에서 애굽이 모두 빠져 몰살당하는 장면입니다.

왜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면 되지 애굽을 다 몰살시키십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매력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충분히 인간들이 자신의 힘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바다에 넣어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하필 돼지인지 아세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부정한 짐승이 돼지였습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돼지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 돼지 같은 우상들, 세상의 가치들을 모조리 바다에 몰살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이적은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거짓 가치들로부터 벗어나서 참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41:21-24)

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22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23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24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고 있는,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우상은 전부 신기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그 모든 우상들을 일거에 몰살시키시고 우리를 참 진리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짐을 받은 자들이 바로 “제자“라는 것입니다.

(5:18-20)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 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병을 낫게 하신 후에 한번도 “나가서 너에게 일어난 일을 자랑하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사람에게만 가서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방인 데가볼리에서 전도를 합니다. 20절의 ”전파하니“라는 말”케릿소“는 ”설교하다, 전도하다”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누구에게 그러한 일을 맡기셨지요?

(3:14)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그 일을 이 거라사 광인에게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고후4:5)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같은 단어입니다. 그는 최초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모형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갖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빛에 어둠이 물러가듯이 마귀의 세력은 쫓겨 가고 그 세력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12:28)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리고 같은 마가복음 5장에 열두 해 혈루 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5:25-34)

25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혈루 증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생리현상이 아닌 지속적인 자궁 출혈(disfunctional uterine bleed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철분이 함유된 비타민도 없었을 것이고 먹는 것도 부실한 시대에 12년 동안 하혈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여자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그 병은 더 중하여 졌습니다.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돈도 다 써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그 혈루 증에 좋다는 약으로, 타조의 알을 갈아서 베옷에 넣고 다니면 된다거나 흰 암나귀의 똥 안에 들어있는 보리알을 지니고 다니면 낫는다거나 하는 민간 처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타조나 흰 암 나귀는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돈이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허사였고 병은 더 중하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마가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레위기 율법에 보면 혈루 증을 앓는 여인들은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15:6-8)

6  유출 병 있는 자의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7  유출 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8  유출 병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렇게 혈루 증을 앓는 여자는 문둥병자처럼 마을에서 함께 살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예배  하는 자리에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사력을 다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9:20)

20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겉옷 가가 어디냐면 겉 옷 맨 아래의 옷 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 입던 겉옷은 그 옷 맨 아래에 술을 달았습니다. 그 옷 술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옷 술을 보면서 율법을 다시 상기하고 묵상하고 하기 위하여 옷 술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 정 죄를 받아야 하는 한 부정한 여인이 그 율법을 잡은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율법에 의하면 정 죄를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5:34)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자신은 부정하여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거룩을 의지하여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 여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0절을 보시면

(5:30)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자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100정도 충전하고 다니시면서 병을 고치실 때마다 능력이 조금 씩 조금씩 나가는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능력“”뒤나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메시아로서의 권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부정한 자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열두 해 혈루 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은 그 영광의 주님의 권세를 그 자리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혈루증이 나았는데도 그 여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 벌벌 떱니다.

(5:32-33)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왜 병이 나았는데 기쁘게 펄펄 뛰지 않고 두려워 떱니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물 한 가득 고기를 잡았을 때 기뻐서 펄펄 뛰지 못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이야기 한 장면하고 똑 같지요? 아까 백부장이 “주여, 내가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하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면 경외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주어질 새 생명, 구원의 이야기를 혈루 증 여인을 통해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혈 증 여인을 만나실 때 어디로 급히 가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급히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만 그 야이로의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5:34-35)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께서 이미 병이 나은 혈루 증 앓던 여인에게 굳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조급해하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36절에서 한 번 더 야이로에게 믿음을 강조 하십니다.

(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 이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야이로가 어떻게 예수 을 알았습니까? 어떻게 그 분이 죽어 가는 자기 딸을 살리실 것을 믿고 그 분을 모시고 가는 것입니까? 야이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믿겨졌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먼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살아있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야이로는 믿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믿음의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바쁜 와중에 혈루 증 앓는 여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갈 길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야이로의 딸이 죽습니다. 야이로는 허탈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나는 이제 절망이구나.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아니, 믿는 것도 어느 정도 실낱같은 것이라도 남아있어야 믿는 것이지 이제 딸이 숨이 끊어졌는데 뭘 믿으라는 것입니까?” 왜 이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12살 먹은 딸이 이제 곧 시집도 가야하고 손자도 보여주고 할 그런 딸이 죽을병이 들어서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찾아간 예수라는 사람이 오는 길에 지체하는 바람에 자기 딸이 죽었습니다. 야이로는 이제 완전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에게도 일부러 늦게 가시고는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고 말씀하셨지요? 왜 주님은 그런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시고 거기서 믿음을 요구하실까요?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자라서 죽음을 이기는 믿음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뭉개서 없애버리신 그 사망을 이기는 믿음을 우리가 우리 안에 실력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사망을 이기는 믿음은 역경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절망적인 상황인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너희를 버려도 하나님은 안 버리신다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역경 속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마고 약속하시고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태까지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왜 한나의 태를 그렇게 오랫동안 닫으셨다가 여시는 지 아십니까? 한나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야이로에게도 절망 속에서 그러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야이로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 믿음이 딸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소녀에게 가셔서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역경을 통해 자라난 믿음이 사망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야이로의 딸과 혈루 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소중하고 누가 덜 소중하고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믿음으로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유지인 회당장의 것이나 저 부정하고 가난한 혈루 증 여인의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귀신을 쫓아주신 사건과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5: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먼저 2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려고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요? 지금 마가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5:14-17)

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애굽의 수고한 것과 구스의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족속들이 다 네게로 돌아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15절에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십니까?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즉사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막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기로 하셨습니다. 성막 안에 숨어 계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알아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 보면, 그 여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매몰차게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전에도 설명해 드렸지만 구속사의 진행상 유대인에게 먼저 구원이 있다는 것이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진행시키시면서 유대인을 먼저 택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교회를 설명하시고 그들의 실패로 전체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교회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그렇지만 구약 시대에는 어찌 되었든 이스라엘 민족 안으로 들어와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라고 하시고 이방인을 개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의 뜻은 ”예수 님, 그래도 당신은 모압의 룻과 여리고의 라합과 아람의 나아만을 건지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에게도 그 떡 부스러기를 허락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떡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그 복을 우리에게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의 말대로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그 여인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27:5-6)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숨어 계신 주님 안으로 우리를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자로서 당연히 예수의 수난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기적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영적 청각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정리를 해서 복음을 설명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걸 알아듣는 사람은 옆에서 가슴을 칩니다. “왜 그걸 못 알아들어?“ 그런데 못 알아듣습니다.

(7:11-1)

11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6:10)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7:51)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게다가 죄인들은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세워주고 살리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깎아 내리고 험담하고 욕하고 하는 데만 혀가 빠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말이 어눌합니다.

(18:21)

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제발 남 욕하지 마세요. 험담하지 마세요.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하세요. 세워주고 높여주고 사랑해 주는 말들을 하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혀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따로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주님께서 그의 외로움과 고적함과 소외됨에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incarnation'입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귀머거리 말이 어눌한 자와 연합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저주받은 질병을 가져오시고 예수님의 그 거룩을 그에게 덮어 씌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분 안에 숨겨지는 것이며 그 분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가 듣고 말을 합니다.

이 사건은 그러한 영적 귀머거리 말이 어눌한 자인 죄인들 속으로 incarnation 하셔서 그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죄인들의 저주를 예수께서 가져오시고 예수님의 거룩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물하시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를 다 아시고 체휼하셨습니다.

(53:3)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 주님은 우리처럼 소경이 되시고 우리처럼 귀머거리가 되시고 우리처럼 어눌한 자가 되시고 우리처럼 문둥병자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아픔이 되셔서 우리가 나은 것이고 그가 귀머거리가 되심으로 우리의 귀가 뚫리는 것입니다. 그가 벙어리가 되시면서 우리에게 온전한 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고후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가 외쳐야 할 그 비명을 우리 주님께서 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35:6-10)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9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여러분들이 살펴보셨듯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예수께서 바로 이 천국, 하나님 나라이시며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이 완성이 되었고 그 기적들이 모두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이렇게 밝히 계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은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깨끗해 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부정하고 저주받은 자의 상징으로 나타났던 병든 자, 문둥이, 소경, 귀머거리, 말 어눌한 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면서 부정한자, 저주받은 자들을 정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이상 기적으로  신유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물론 자녀가 병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그 병을 치유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대교회 때처럼 하나의 은사로서 존재할 필요는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발 그러한 신비주의 좇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마시고 그 기적들이 설명하려고 했던 예수를 더 열심히 명확하게 공부하십시오.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근거로 올바른 신앙 위에 서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 경험 같은 것에 흔들리게 되고 마귀는 거짓 기분, 거짓 감정, 거짓 체험으로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기분이나 감정으로 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병 고침을 받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은 이빨이 금이빨이 되는 그런 신비한 경험들에 심취하게 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마귀의 장난입니다.

우리가 장시간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고치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들어 온 사망의 증상들인 질병과 귀신들림 같은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몰아내시고 사망을 죽여 버리실 것이라는 하나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정확하게 나옵니다.

(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지요? 여기서 질고‘호리’가 질병입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증상인 질병을 다 짊어지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마태복음에서 성취됩니다.

(8:26-2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즉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은 모두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분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계시의 차원이었지 사도들에게 임한 어떤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바울 같은 사람은 사랑하는 디모데의 위장병도 못 고칩니다. 성경이 완성이 되면서 그러한 기적들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기적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병과 죽음, 귀신들림 같은 사망의 증상들을 모두 예수께서 짊어지시고 우리는 그러한 사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구속의 메시지가 그 기적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쫓겨 가고 질병이 치유되는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되는 사망의 세력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현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러한 질병의 치유나 축귀, 기적 같은 것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즉 구원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질병과 귀신들림, 죽음 같은 것들은 사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세상 사람들을 총칭하는 개념들입니다. 우리가 귀신들림 하면 벌벌 떨면서 입에는 거품을 물고 예수님을 욕하고 하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건 정신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림의 정확한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풍속과 원리를 좇아 복음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암에 걸리고 불치병에 걸리는 것을 질병이라고 정의하지만 성경 적 관점의 질병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적 불구자, 영적 감염자들을 질병을 가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교회에서 ‘귀신이 나갔다. 질병이 치유되었다.‘ 라는 것은 단순히 암이 낫고 정신병이 치유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를 알게 되는 사건을 ’질병치유, 축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노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감정과 기분을 자극해서 진짜 은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 들린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귀신 들린 자들입니다. 다시 한 번 표적에 있어 중요한 구절인 마태복음 12 39절을 보겠습니다.

(12:39)

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보세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귀신들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시는 모든 표적은 요나의 표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복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우리가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시 병에 안 걸리나요? 정신이상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영원히 삽니까?

오히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결국 육신은 썩어질 유한한 것이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 소망해야 하는 곳은 저 하늘나라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배웠다면 그게 복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영적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침으로 우리가 마땅히 영적으로 얻어 누려야 할 기쁨을 육 적 기쁨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그게 어찌 귀신들린 자가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복음에 의한 영적 기쁨이 아닌 육 적 기쁨을 세상에 쏟아 부음으로써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기적 같은 것 좇지 마세요. 뭘 또 보고 싶으세요? 여러분은 보지 않아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 믿음을 공고히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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