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62) 의로우신 하나님, 의의 길로 행하는 나     (계15:3-4)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4:45

(62) 의로우신 하나님, 의의 길로 행하는 나

 

 

(계15:3-4)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서 우리 교회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고 그 천국 삶의 연장인 이 곳 세상에서 불러야 할, 유리 바닷가의 찬양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기를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모세의 노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그 노래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역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노래이며, 그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어 주신 우리 성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만국의 왕 되심과 그 분의 영광스러움과 크심에 관한 노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그 찬양의 내용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인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 보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길은 의롭다'라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강조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바로 여러분께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찬양하셔야 한다는 말인데, 여러분 '하나님의 의'가 뭔지 잘 알고 계셔요? '하나님의 의'가 뭔지를 알아야 찬양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제가 교회론 아홉 번째 설교에서 히브리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렸죠? 그 때 제가 ‘의’‘짜다카’가 어떤 의미라고 설명해 드렸습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의’‘짜다카’는 단순히 ‘righteousness, correctness’가 아니라 어떠한 존재‘네페쉬’가 다른 존재, 자연이라든지, 신이라든지, 인간이라든지 그러한 다른 존재와의 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짜다카’라고 설명해 드렸지요.

 

그럼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창조주로서 그 분이 만드신 피조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시는 것, 다른 말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겠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책임을 다 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조건을 거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돌보고 보호해 주고 복을 줄 거야, 그러니까 너희는 내 말만 잘 듣고 순종 하거라, 그러면 너희는 영원히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단다.’ 그게 뭡니까? ‘선악과’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위한 복된 조건이요 방편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책임과 의무를 다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 앞에서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우리의 의’의 행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분이 요구하시는 대로 그 분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죠.

 

(롬2:13)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애초에 창조될 때에 무죄한 상태로 태어난 인간은 바로 그 ‘의’의 문제만 해결을 하면 곧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흰옷을 입은 ‘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대표인 아담이 그 복된 하나님의 명령을 걷어 차 버렸습니다. 인간은 거기서 ‘하나님의 복’‘바라크’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복‘’바라크’를 다시 찾기 위해서‘의’의 문제뿐만 아니라‘죄’의 문제까지 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아니 왜 아담이 지은 죄를 우리가 뒤집어 써야 합니까?’

그게 성경이 말하는 대표의 원리입니다.

 

(롬3:23)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죄를 범하였다’‘하말톤’은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헬라어의 부정과거 시제는 과거의 어느 때에 ‘영 단번에’ 일어난 일, ‘once and forever’를 나타낼 때 쓰는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창세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죄를 지었다’

라는 뜻입니다. 언제입니까? ‘아담 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결과 그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의 시제는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 진행의 뜻이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로마서 3장 23절의 의미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이미 아담 안에서 그들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인 ‘하나님의 의’를 포기하시면 안 되지요? 그럼 그 분은 이미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시는 것이 되니까요.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책임’‘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그 타락한 무리 중의 어떤 이들에게 나타내십니다.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그 인간이 풀어야 할 ‘죄와 의’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 분이 사랑하는 어떤 무리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사실 딱 적합한 표현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 어휘의 한계가 거기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만 놓치지 마시고 잘 들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와 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셨는가? 하나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간의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당하심으로써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 할 ‘의’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완벽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순종해 내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해 내십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인간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해 내시고 하나님의 완전한 복을 다 받으실 수 있는 최초의 자격 있는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imputation)거저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울 신학의 핵심인union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끝까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지금 유리 바닷가의 성도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 여러분이 잘 정리를 해 두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동안 유리 바닷가의 성도들처럼 그 ‘하나님의 의’를 실제로 찬양하실 수 있고 그 ‘하나님의 의’를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에게 전가되게 되었는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대표인 아담이 죄를 짓고 나서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롬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그 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 즉 ‘죄’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하는 모든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그 ‘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롬3:10-12)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전부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인간들이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전혀 흠을 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 낼 방법을 다 강구해 놓으셨습니다. 인간들을 만드시기 전인 창세전에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과 회의를 하셨습니다.

 

제가 그 회의 내용을 제 나름대로 각색을 해 봤습니다.

하나님이 그 회의에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영원한 복과 기쁨과 충만함과 거룩함을 우리가 우리의 백성들을 만들어서 그들에게도 함께 누리게 해 주자. 그렇지만 그들이 기계적으로 우리의 말을 따르는 단순한 로봇이나 인형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닌 인격을 가지고 우리와 대화하며 우리와 교제를 할 수 있는 우리의 친구로 만들자.

 

그 한 방법으로 내가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줄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그 자유 의지를 가지고 나를 반역할 것이다. 그렇게 그 자유 의지는 하나님인 나를 반역할 모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내 친구 될 자들을 인격적으로 만들었다는 증거로 주는 것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자유 의지를 가지고 나를 거역하여 타락을 하게 되면 우리는 거룩하기 때문에 그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그 때 네가 내려가서 그들이 지은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거라, 너는 전능한 성자 하나님이니까 그 모든 죄를 짊어질 자격이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니 네가 가라, 그리고 너는 완벽한 인간으로 그들에게 가서 신성을 동원하지 말고 나의 명하는 모든 것을 지켜 내거라, 그리고 그 순종과 십자가의 대속을 창세전에 택해 놓은 나의 백성들에게 거저 주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마. 성령 하나님을 통해 그 구속의 사실이 나의 백성들에게만 믿겨지고 이해되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선물을 받게 된 자들이 나를 반역하는 데 썼던 바로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성품과 속성을 가진 존재인지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그들과 우리는 비로소 목숨을 걸고 서로를 사랑하는 친구가 될 거야, 나는 바로 그런 친구들을 원하는 거야.

 

이게 바로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 내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어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우리가 거기에 반응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는 데에 꼭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며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그 것보다 훨씬 멉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점에서는 “그 하나님의 의“의 가장 중요하고 현저한 열매가 바로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의’를 ‘구원’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쓰기도 합니다.

 

(사45:8)

8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예수 님의 부활)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6:12-13)

12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롬4:25)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사61:10)

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렇게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것이고 다른 말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롬3:21-24)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5:19)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후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저 ‘의롭게’된 것입니다. 이제 선악과를 안 먹은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었습니다.

 

(롬5: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기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디 카이오 뗀테스’는 과거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뭡니까? 그렇게 의롭게 된 자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이라고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렸지요. 의롭게 된 자들은 절대 하나님의 그 요구를 경 히 여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롭게 된 자들로서 열심히 또 그 우리가 그 분 앞에서 의로운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백성들의 삶의 내용을 설파하시는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자들의 네 번째 특징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은 복을 상실한 자들이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면서, 복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채워야 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 산상 수훈의 조건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복을 받고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바로 그 내용을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훈련하고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산상 수훈을 바로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신 자로 하나님 앞에 합격점을 받으셔서 우리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만들어 주셨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으로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기의 삶 속에서 그 의를 추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단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 말은 이미 의롭게 된 자들이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알고 찬양을 하는 유리 바닷가의 성도들이 그 의로우심에 반응하여,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사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의’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를 성실하고 바르게 수행해 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 그렇지요? 그 것을 삶 속에서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결해 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 거룩한 삶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힘쓰는 사람’ 그게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돈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명예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자기 자랑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런 것들은 너희가 이 땅에서 주려하고 목말라할 것들이 아니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55:2)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우리 타락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 전부 뭐라는 것입니까?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거 말고 무엇을 하라고 하세요? ‘나를 청종하라’‘나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그게 진짜 우리가 목말라 하고 주려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고 너희 마음이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또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알아들으시면 안돼요. 이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게 되면 진짜 복, 하늘의 복을 받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만족하게 되며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5:26-33)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 주님은 우리가 정말 이 땅에서 구해야 할 것, 목말라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과 명예와 건강을 추구하며 예수님을 나의 삶의 방법으로 불러 내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타는 목마름으로 분투해야 합니다.’ 그게 의로운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로워 졌지만 의로워진 우리가 영육 간에 완성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어 우리를 옭아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7:22-24)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는 분명 의로워졌는데 내 안에 여전히 옛 사람의 성품이 남아서 나를 괴롭힙니다. 그건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나 좀 도와주세요, 이 더러운 걸레조각 같은 나의 옛 사람을 잘라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는 이 외침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의 외침입니다. 우리 의인들은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로서 더 이상 이렇게 불의 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강한 열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마태복음에서 읽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그냥 단순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아닙니다. ‘페이나오, 디프사오’라는 이 단어들은 목이 마르고 굶어서 거의 죽게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슴은 식도가 셀로판지처럼 되어있어서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않으면 이 식도가 붙어서 죽습니다. 그러니까 사슴은 절대 목이 마르면 안 됩니다. 그의 목숨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슴이 오랫동안 물을 찾지 못했을 때 그 사슴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물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성결과 거룩을 열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차 대전 때 팔레스타인 사막에서 싸웠던 유명한 (Major Gilbert)라는 유명한 장군이 쓴 (The last crusade)라는 책에서 이 목마름에 관한 아주 생생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의 일부를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머리가 아팠다. 번쩍이는 섬광에 눈은 충혈 되고 침침해져 있었으며 불볕 같은 태양 빛에 눈앞이 가물가물 해지고 있었다. 물병이 바닥났으며 태양은 사정없이 하늘에서 이글거렸고 독수리들은 먹이를 찾아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혀는 붓기 시작했으며 입술은 검은 자줏빛으로 변한 채 마침내는 터져버렸다.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 채 죽어갔다. 그러나 우리 군대는 필사적으로 시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시리아에는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질 무렵까지 시리아에 도달하지 못하면 수천 명이 목마름과 배고픔에 죽게 될 것이다. 우리는 퇴각하는 터키 진영의 후미에 있는 시리아 영에 들어갔다.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차갑고 맑은 식수로 가득 참 큰 돌 항아리들이었다. 그 물 항아리들은 그 병사들을 모두 미치게 만들었다. 드디어 물을 마시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부상자들부터 물을 마셨다. 그들이 모두 물을 마시는데 무려 네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모두 브엘세바에서 시리아로 행군해 오는 동안 성경이 말하는 교훈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와 같이 갈망한다면 또 전폭적인 욕망을 가지고 그와 같은 것들을 바란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풍부한 성령의 열매들이 맺힐 것인가?

이게 바로 ‘페이나오, 디프사오’‘목마름과 굶주림’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거룩한 삶을 그렇게 갈망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엉뚱한 것에 목말라하고 굶주려 하면서 정작 우리가 구해야 할 것들을 놓치고 계십니까?

 

위대한 설교자요 신학자인 랜스키는 의롭게 된 자들의 그 의에 대한 목마름과 굶주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계속되며 사실 채워지고 해소되는 그 순간에 더 커진다. 이것은 의롭게 된 자들의 순간순간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다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온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의 삶 속에 의로움을 향한 열망이 없고 여전히 나태와 게으름과 안일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직접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일으키시는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 또한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는 계속해서 ‘주의 영광을 내게 더 보여 주소서’ 라고 기도를 합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 돌 판을 받은 후에도 그는 또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더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출33:18)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성화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점점 더 그 완성의 자리로의 목마름과 굶주림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사도 바울은 주님을 세 번이나 직접 만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직접 만났고 고린도 교회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삼층 천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거기서 뭘 더 바라겠는가?’하겠지만 바울은 ‘난 계속 달려간다. 난 잡은 줄로 생각지 않고 계속 달려 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빌3:12-16)

12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16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절박함입니다. ‘하나님, 왜 저는 여전히 이 모양입니까? 도저히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저를 좀 변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제게도 좀 나오게 해 주세요’ 이런 목숨을 건 절규가 여러분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예배당 출입을 하시면서 진정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하시면서 사셔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살아가십시오. 엉뚱한 것들 구하지 마세요.

 

(빌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나서 자기 자신을 위해 쌓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배설물’이라고 번역이 된 ‘스퀴발론’은 ‘똥’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물들과 세상 적인 힘을 전부 똥처럼 여겼다는데 왜 우리는 예배당에 와서 전부 그 똥을 달라고 아우성들입니까?

여러분의 목표지점이 바뀌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헛수고만 하시다가 지옥가실 겁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탄은 우리의 시선을 항상 그 똥에 고정을 시켜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미혹에 빠져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지 않고’’똥에 목마른 삶‘을 사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1869년에 뉴욕의 카디프라는 마을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집주인이 우물을 파다가 10피트가 넘는 거인상을 발굴한 것입니다. 10피트짜리 거인상이 뭐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기독교가 개입을 하면서 그 거인 상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그 거인 상을 창세기에 나타난 네피림의 화석으로 단정 지었고 사람들은 그 네피림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 주인은 한 사람 앞에 25센트씩을 받고 그 거인 상을 구경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거인 상에 입맞춤을 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불치의 병이 깨끗이 낫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세계 각 처에서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더욱 더 많이 몰려들었고 그 집주인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 ‘링글링 브라더스 서커스단’의 창시자인  PT 바넘이라는 사람이 자기도 떼돈을 벌어 볼 심산으로 똑같은 거인상을 만들어서 언론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것이 진짜이고 카디프의 거인상은 가짜 모조품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각 일간지에 냈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떤 게 진짜인지 재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언론 플레이에 능한 PT 바넘이 승리를 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 PT바넘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PT바넘의 거인상으로 몰려들었고 서커스단을 운영하던 그 사람은 서커스단과 함께 그 거인 상을 가지고 전국 투어를 했습니다. 병을 고치고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찾아왔고 PT 바넘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오죽하면 그 때 당시 미국 교회 목사님들의 단골 설교 주제가 바로 그 카디프의 거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 카디프의 거인을 무료 광고 해 준 셈입니다.

 

교인들이 단체로 그 거인 상에 입을 맞추러 갔고 거기서 실제로 병이 나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처음 그 거인 상을 발견한 사람이 그 PT 바넘을 사기죄로 고소해 버렸습니다. 재판부는 특별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그 두 거인상을 면밀하게 조사했습니다. 예일 대학의 교수들까지 동원된 그 조사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둘 다 가짜라는 판결이었습니다. 검사가 그 둘을 취조를 했습니다. 취조 결과 둘 다 가짜였다는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 이었습니다.

 

그 집주인이 마을 목사하고 성경에 관해 말다툼을 했는데 목사가 그 구약의 네피림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우겼답니다. 그래서 이 집주인이 홧김에 자기 집 앞마당에다가 10피트짜리 거인을 만들어서 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사와 기독교계가 검증도 없이 그 거인 상을 네피림이라고 보도를 해 버렸고 그 때부터 일이 커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주인이 더 놀란 것은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렇게 소문만 믿고 거액을 들고 병을 고치러 오는 기독교인들이 수 십 만 명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기독교가 이렇지 않습니까? 대 다수가 가는 길은 검증도 없이 맞는 길이겠거니 하고 넋 놓고 좇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 아닙니까?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부자도 된다고 가르친 사람들의 교회가 커지고 그 사람들을 좇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전부 그게 진짜 기독교려니 하고 좇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 불쌍한 무리 속에 들어가 실제로 병도 낫게 해 주고 부자도 만들어 주고 하면서 전부 지옥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 오늘 날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고 그 분은 그 의로우심을 발휘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고 그렇게 의롭게 된 자들은 그 똥 덩어리가 아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산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부 카디프의 거인을 좇아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신 차리십시오. 눈을 뜨tu요. 귀를 여십시오. 그리고 실체를 보세요. 그리고 보셨거든 열심히 여러분의 의로운 삶을 챙기십시오.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며 사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무엇인지, 그 하나님의 열심이 도대체 누구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셨는지 이미 아시고 그 분의 의로우심을 찬양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 의로움에 반응하여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배우셨으니까 오늘부터 그 삶을 살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