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60) 전능하신 이 만국의 왕이시여     (계15:1-4)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4:43

(60) 전능하신 이 만국의 왕이시여

 

 

(계15:1-4)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몇 개월간에 걸쳐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12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을 모두 공부를 했습니다. 리챠드 보캄 교수님의 ‘예언의 절정’이라는 논문집을 보면 이 12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은 이제 마지막 심판의 내용인 대접 재앙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기록해 놓은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인간의 창조와 마귀와 인간들의 타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혼돈과 공허를 다시 ‘애나케 팔라이오’ 질서로 ‘재통일’시키시는 하나님의 열심,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에 대한 심판으로 결론이 나야하며, 반드시 그렇게 결론이 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12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바로 그 이야기를 점점 점진적으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무질서 속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무질서를 질서로 바로 잡으신 것입니다. 태초에 천지는 질서 속에서 아름답게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은 이제 질서가 잡혔다는 말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생육하고 정복하는 만물의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만물은 인간의 아래로 서열이 매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의미하듯이 하나님의 아래 서열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질서가 매겨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을 때 아담은 조금도 막힘없이 그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지었습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모두 파악한 후에 줄 수 있는 것이 이름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지었다는 것은 아담이 만물을 네 아래에 두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인간을 유혹했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그 질서를 다시 무질서로 엎어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에게 인간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자리에 너희가 앉으라고 미혹했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는 과정을 잘 보시면 더 명확해 지지요.

그 모습을 한번 잘 그려보세요. 마귀는 가정의 제사장인 남자, 아담에게 먼저 가지 않습니다. 인간이 다스려야 할 짐승, 뱀이 자기가 다스림을 받아야 할 여자에게 오히려 충고를 하면서 유혹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상위 질서에 있는 남자에게 유혹을 합니다. 그 결과 그 남자는 자신의 상위 질서에 계셔야 하는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이렇게 아래서부터 차례대로 질서를 깨 버리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깨지고 인간이 타락을 하게 되자 인간을 비롯해서 피조물들까지 전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제 그 죄 속에 들어가 버린 존재들은 전부 자기가 최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합니다. 짐승들은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땅도 인간들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3:16)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가 남편을 사모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저주는 단순히 여자가 남자를 오매불망 바라고 그리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사모 한다’는 단어 ‘테슈카’는 ‘지배 한다’는 말입니다. 그 똑같은 단어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창4:7)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여 버린 가인에게 ‘죄가 너를 다스리려고 할 것이지만 너는 그 죄에 다스림을 받지 말고 네가 그 죄를 다스려라’하고 충고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죄의 소원’이 바로 ‘사모 한다’ ‘타슈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자들이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득세를 하고 남자들이 점점 쪼다가 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타락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무질서 속으로 빠져버린 것들을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이제 영원히 타락할 수 없고 영원한 질서 속에서 살 수 있는 존재로 다시 재창조 해 내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 속에서도 다시 그 태초의 질서의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 위에서 내려와서 제사장인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자는 제사장으로서 여자의 모든 허물을 자기의 어깨에 짊어지고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가 앉아있던 그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경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무질서를 질서로 잡아가시는 것을 창세기부터 어떻게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계신지 몇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구원해 내시겠다는 원시 복음을 주십니다.

 

(창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를 유혹해서 한편으로 삼아버린 뱀에게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십니다. ‘지금 너는 여자와 네가 한 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겠지만 너와 여자는 원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밟아서 깨 버릴 것이다’ 이 말씀은 이제 여자는 내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심과 약속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 1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여자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결론을 이미 갖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과 셋을 통해 그 창세기 3장 15절을 설명하십니다.

타락한 죄인인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인 아벨이 죽고 셋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태어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4: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은 이렇게 의인 아벨이 죽은 대신 태어나게 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아벨의 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하던 것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히12:24)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바로 그 아벨의 피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뿌린 피를 상징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이렇게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어떻게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지는지 보세요.

이제 그 셋의 후손 중에 노아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뱀의 머리를 밟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방주를 통해 보여 주십니다. 셋 한 사람에서 이제 노아의 여덟 식구, 가족으로 점진되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기식하는 것들이 저주의 비를 맞고 다 죽어야 하는데 방주가 그 저주의 비를 맞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품안에 여덟 식구를 품어서 살려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여덟 식구의 구원에서 한 민족의 구원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고 가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애굽의 장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십니다.

구약 시대의 장자는 남자를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한 가족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자하면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그 레위 지파는 누구를 대신하던 지파였습니까?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를 모두 살려 주셨으므로 너희의 장자는 모두 내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이 전부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그 것을 준비하는 일만 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 모든 장자들을 대표해서 한 지파 전체가 하나님 섬기는 일을 맡고 나머지 지파가 그들을 먹여 살리게 된 것이 레위 지파입니다. 그러니까 장자는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세력의 머리를 모두 밟아서 죽이시는 그 심판의 현장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자녀 교회가, 메시야를 상징하는 모세의 품에 안겨 구원을 받는 것이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고전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마귀의 세력은 이렇게 계속해서 무질서 속으로 인간들을 끌고 들어가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내셔서 질서 속으로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민족에서 이제 다윗이라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상징하는 한 인물을 통해서 블레셋의 머리통을 밟게 하시고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정복하게 하심으로써 한 국가의 구원으로 구속사를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신약으로 넘어 와서 이제 한 개인으로, 한 가족으로, 한 민족으로, 한 국가로 상징적으로 설명하시던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이 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과율에 근거해서만 사고를 하게 되어버린 타락하고 우매한 인간들이 한 번에 그 구원의 이야기를 다 이해 할 수 없음을 하나님은 아시고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그 구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밝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공부하는 요한 계시록에 와서 그 뱀의 머리가 밟히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와 그 세력에 동조하는 자들의 최종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가시적으로 선명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이제 마지막 심판인 대접 심판에 당도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사도 요한이 이 대접 재앙을 가리켜서 ‘마지막 재앙’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계15:1)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의 재앙과 나팔 재앙을 공부했습니다.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인의 재앙과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은 모두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내용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고 설명한 것이 인의 재앙이요 나팔 재앙이요 대접 재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여기에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그 단어의 뉘앙스가 마치 인의 재앙과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이 시간적인 순서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기서 ‘마지막 재앙’이라는 단어의 뜻은 ‘마지막 환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재앙의 환상 중에 마지막 환상이라는 뜻이지 시간 적으로 마지막 재앙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계시록은 재앙의 크기나 그 재앙이 미치는 범위까지도 점진적인 기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인의 재앙에서는 4분의 1이 날라 가고 두 번째 나팔 재앙에서는 3분의 1이 날라 갑니다. 그리고 세 번째 대접 재앙에서는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재앙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넓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다 날라 가는 이 대접 재앙의 환상의 서론에다가 ‘마지막’‘에스카토스’라는 단어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절을 보시면 또 유리 바다가 등장합니다.

 

(계15:2)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우리가 그 유리 바다에 관해서는 4장 공부할 때 자세히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놓여 있던 그 유리 바다는 혼돈의 바다, 공허의 바다, 짐승이 나오는 바다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재창조된 수정같이 맑은 하늘의 바다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 유리 바다가 상징하는 것이 뭐였습니까? 궁창 아래의 짐승이 올라오는 그 바다와 대조해서 그 저주의 바다가 물러간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이었지요.

 

창세기에서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수면 위에 성령이 운행하시고 말씀이 그 위에 던져 지자 질서가 잡힌 것처럼 유리 바다는 바로 그 재창조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바다가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라고 묘사가 되어있습니다.

그 유리 바다가 불이 섞인 것 같이 보였다는 것은 이제 곧 심판이 땅으로 쏟아질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유리 바다 가에 누가 서있습니까?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여러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심판의 대접은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이 심판의 대접은 우리가 전에 공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때부터 이제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그 때까지의 기간 동안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여러분은 유리 바다 가에 서 계십니다.

 

그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접 재앙,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같은 대접 재앙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노출이 된다 해도 그 것이 우리의 신분을 어떻게 바꿀 수 없으며, 그러한 환난과 고통들이 오히려 유리 바다 가의 그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 가는데 필연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은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이라는 말은 이해가 쉽지 않지요? 그의 이름의 수가 어디서 나왔었습니까?

13장 666 공부할 때 나왔었지요?

 

(계13:16-18)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17절에 보면 이 표는 그 짐승의 이름의 수이며 그 수를 666이라 한다고 정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666을 하나님을 대적하며 삼위의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를 내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아니다, 그 666은 전자 신분증이다, 바코드다, veri chip이다’ 이렇게 우기셨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내용에 그 바코드나 veri chip을 넣어서 풀어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코드를 이긴 자들이다’ make sense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자 신분증을 이긴 자들이다’ 맞아요?

 

그 이름의 수라는 것은 666을 말하는 것이고 그 666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삼위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 자들을 이긴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절과 4절을 보시면 그들이 부르는 찬양이 등장합니다.

 

(계15:3-4)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무사히 건넌 뒤에 불렀던 노래를 말합니다. 본문은 그 모세의 노래를 어린양의 노래라고도 합니다.

‘모세의 노래’에서의 소유격은 주체적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노래하는 사람이 모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노래’에서의 소유격은 ‘목적적 소유격’입니다. 거기서는 그 노래의 주체가 어린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함께 붙여 놓은 것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게 될 구원을 미리 상징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본 것처럼 성경은 신구약 전체가 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역과 그 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구원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영적 출애굽을 가시적으로 사건화 시켜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9:28-31)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말씀을 나누십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켜 ‘별세’‘엑소더스’라고 표현을 합니다. ‘엑소더스’가 뭐지요? departure, 탈출, 출애굽기를 헬라어로 ‘엑소더스’라고 하지요? 이렇게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전부 예수님의 ‘엑소더스’‘예수님의 출애굽’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리 바다 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를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우리가 전에도 함께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세히 살피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의 노래의 내용 중에 우리에게 참 위로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이’‘만국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며 만국의 왕이시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그 분은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만국의 왕이시라는 말은 이 세상 만국은 지금 그 분이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믿겨지세요? 뭐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신 분이 여러분을 지금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불만투성이 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환난과 고민과 고통들이 우리를 늘 괴롭힙니다. 그런데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께서 그렇게 놔두십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분이시라 다 막아 줄 수 있고 모두에게 우리가 원하는 만사 통의 삶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신데 그냥 이렇게 놔두십니다. 왜 이렇게 통치하실까요? 지금 뭐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 그 능력을 다 발휘하셔서 나를 이 지경에 놔두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통치를 하실까요? 하나님의 목적은 하늘 백성을 만드시는데 있으시지 이 땅에서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시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백성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고난입니다.

 

(빌1:29-30)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딤후1:8)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2:3-4)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롬8:17-18)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왜 꼭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제가 여러 모양으로 여러분께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만 우리가 어떻게 그 이유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이 맞고 우리가 틀립니다.‘ 하고

고백할 뿐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땅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도록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행13:2)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실 일이 뭘까요? 선교? 봉사? 구제?

 

(요6:28-29)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실 일은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삶 속에서 잘 구현해 내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행20:22-24)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권고한 말입니다.

바울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너에게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깝지 않게 여긴다고 고백  합니다. 그가 받은 사명이 뭡니까? 그가 받은 사명은 1차 적으로 선교, 전도가 아닙니다.

 

그 자신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울의 1차 사명입니다. 바울은 그의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시며 그 분이 얼마나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자신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체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렇게 그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어 가는 여정에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거십니까? 아니면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여러분의 편안함과 행복과 쾌락과 자랑을 위해서 목숨을 거십니까? 

노벨 문학상과 퓰리쳐 상을 수상한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이 있지요?

쿠바에 사는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의 이야기입니다. 그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젊은 시절 쿠바 하바나의 팔씨름 왕이었던 사람입니다. 용모도 아주 수려하고 뛰어난 낚시 실력을 갖고 있던 행복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산티아고가 노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매일 매일 낚시를 나가지만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끼니도 거의 외상으로 때우고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항상 꿈을 꿉니다.‘“나는 큰 물고기를 잡을 거야, 그래서 지금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그 큰 고기를 팔아 빚도 갚고 좋은 것도 먹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보답도 할 거야’

어느 날 산티아고는 먼 바다에서 정말 엄청나게 큰 청새치 한 마리를 잡습니다. 무려 길이가 8 피트나 되고 무게가 1500파운드나 되는 어마 어마한 고기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늙었고 그의 배는 아주 낡았기 때문에 무려 나흘간을 그 고기에게 끌려 다닙니다.

 

그렇게 산티아고가 그 청새치에게 끌려 다니는 도중에 산티아고는 중간 중간 그의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합니다. 헤밍웨이는 그 나흘간의 사투를 그 산티아고라는 노인의 전체 인생의 요약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결국 그 청새치를 잡습니다. 산티아고는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청새치로 하여금 자기에게 환호를 보내 줄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 청새치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어질 물질을 생각하며 행복해 합니다.

 

그 청새치가 너무 커서 배에 싣지 못하고 그 배 옆에 묶어 놓고 보무도 당당히 집으로 돌아오는데 상어 떼가 나타납니다. 그 상어 떼가 조금 씩 조금씩 그 청새치를 뜯어먹습니다. 산티아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 상어 떼들을 쫓아보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그 청새치는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고 산티아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자기 오두막으로 돌아가 긴 잠을 잡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전부 이렇게 허무한 것입니다.

 

뭔가 잡을 듯 잡을듯하지만 결국 빈 뼈만 가지고 긴 잠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헤밍웨이는 그 인생의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 입에다가 장총을 쏴 자살해 버렸습니다. 제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전혜린이나 헤밍웨이 같은 천재들의 자살을 이해하고도 남았습니다. 신동엽이나 기형도 같은 그런 천재들도 자살은 아니지만 인생의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술과 담배와 과로로 자신을 학대해서 죽여 버렸다는 것에서는 자살과 다를 바가 없지요. 왜 천재들이 그렇게 목을 매달까요? 그 좋은 머리로 생각을 해 보니까 부귀와 영화 명예 같은 것들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질곡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그리고 답도 모르겠고 하니까 그냥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인생은 그렇게 허무한 것이기에 난 오늘 목을 매달 거야’ 가 아니라 ‘인생은 그렇게 허무한 것이지만 그 인생 뒤의 삶이 나에게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을 알기에 그 삶을 준비하며 오늘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그 소망만을 바라보며 꿋꿋이 살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베드로가 물위를 잘 걷다가 중간에 빠져 버렸습니까?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걸을 때는 그 물 위를 맨 땅처럼 걸었는데 자기 발 밑,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그 세상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폭풍의 바다를 유리 바다처럼 걸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유리 바다 가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이 땅에서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그 폭풍들은 절대 여러분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한 폭풍들이 여러분의 삶에 닥칠 때 그 요동하는 바다에서 눈을 들어 저기서 여러분을 향해 팔을 벌리고 “어서 와라” 하고 반기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만국의 왕이십니다. 그 분이 지금 여러분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분의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제일 좋은 것 주시기 위해 뭐든지 다 하실 수 있는 그 분께서 지금 그렇게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이겨내십시오.

 

‘노인과 바다’에서 그 산티아고 노인이 돌아오지 않자 평소에 그 노인을 잘 따르던 소년이 바다에 대고 그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그 산티아고 의 딸 안젤라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는 듣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허공에 흩어져 버리고 마는 거야’ 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외친 것이 ‘듣는 사람이 없어 그냥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소리’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