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59) 바보처럼 살다가 가지 마십시오.     (계14:14-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4:42

(59) 바보처럼 살다가 가지 마십시오.

 

 

(계14:14-20)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오늘 요한계시록 14장을 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기를 요한계시록 12장부터 14장은 요한 계시록 전체의 요약이며,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요약인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해 놓은 부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12장 처음에 여인이 낳는 아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로부터 출발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탄생하게 된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게 될 것이며 사탄의 세력은 그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해 나가다가 14장에 와서는 결론으로 그 마귀의 세력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으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공부할 부분이 바로 그 결론 부분입니다. 심판!

먼저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계14:14)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등장합니다. 그 분은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계시고 손에는 이한 낫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한 낫이라는 것은 날이 시퍼렇게 선 낫을 말합니다.

우리는 금방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공부했던 다니엘 서7장으로 가서 확인해 보고 가겠습니다.

 

(단7:13-14)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본문 14절에 나오는 구름을 타고 계신 그 사람의 아들과 같은 분은 바로 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금 면류관을 쓰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노스’는 승리한 자가 쓰는 관 crown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시록 1장에서도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계1:7)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 인자 같은 이가 왜 다시 오셔야만 합니까? 그 분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은 인류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그 분은 심판을 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자 같으신 예수님께서 손에 이한 낫, 날이 시퍼렇게 선 낫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낫은’ 늘 추수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는 구원을 상징하는 추수와 심판을 상징하는 추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심판의 추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심판의 낫’을 몇 군데만 참고로 찾아볼까요.

 

(욜3:13)

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슥5:1)

1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 마리가 보이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여기서 ‘날아가는 두루 마리’를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하지요? 이

‘두루마리’ ‘메기라’를 (LXX, 70인 역)에서는 ‘낫’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낫’은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보시면 어떤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감히 이한 낫을 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령을 합니다.

 

(계14:15)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그 날카로운 낫을 휘둘러서 이제 익을 대로 다 익어버린 땅의 곡식을 거두라고 명령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명령을 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밖에 없으시지요? 그럼 이 천사는 지금 누구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그 천사가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서 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그 명령을 받고, 최후의 심판을 행하셔야 합니까? 왜 굳이 이런 장면이 등장할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그 최후의 심판의 때는 아버지만 아시지, 나도 모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막13:31-33)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행1:7)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예수님조차도 언제 최후의 심판이 임하게 될지 모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심판의 낫을 휘두르시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이비들이 그 때를 예언했다가 망신을 당했었지요? 참 이 세상에는 예수님보다 더 센 사람들이 많아요. 예수님도 모르신다는 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이나옵니다. 15절에서 심판 받을 죄인들을 가리켜서 ‘땅의 곡식이 다 익었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최후의 심판은 이 땅의 죄가 최절정에 달해서 온 땅에 관영 하게 될 때’ 그 때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이 점점 악하게 무르익는다는 것은 이 세상은 점점 악하게 변해 간다는 말이겠지요? 후 천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이제 곧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점점 악해 질 것이고 사람들은 점점 더 잔인하고 포악하고 엽기적이며 추악하게 변해갈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죄악의 정점에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창15:16)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표준 새 번역)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곧바로 안 주시고 400년 동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난 후에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바로 그 가나안을 멸망시켜서 이스라엘에게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그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죄가 영글고 영글어서 추수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점점 더 추악해져서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치 못할 상태가 될 때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속에서 살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렇게 사망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힘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18절과 19절에 보시면 이제 곡식의 추수가 아닌 포도의 추수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역시 무시무시한 심판의 국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14:18-19)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18절에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왔다는 표현은 우리가 8장에서 본 어떤 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단 곁에서 금향로를 가지고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서 제단 위의 불을 향로에다가 담아서 땅에다가 쏟은 그 천사 기억나십니까? 그 천사가 불을 땅에다 쏟았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지요?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18절에 보면 바로 그 심판의 천사가 또 다른 이한 낫을 가진 자에게 외칩니다. ‘포도가 익었으니 포도를 추수해서 포도주 틀에 넣고 밟아라.‘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죄인들을 진노의 포도주 틀에 넣고 밟으실 것이라는 내용은 우리가 이미 여러 번 공부를 했습니다. 이사야서 63장 3절이나 계시록 19장15절에 역시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번의 추수가 있었습니다. 먼저 봄철에는 밀의 추수, 곡식의 추수가 있었고, 그 때를 오순절이라 하지요. 가을철에는 포도의 추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를 초절이라 합니다. 물이 귀한 중동 지방 사람들은 포도주를 음료수로 마셨기 때문에 가을철에 포도를 수확하게 되면 그 포도를 커다란 이중 돌로 된 포도주 틀에 쏟아 넣고 남자들이 올라가서 그 포도를 짓밟았습니다. 그러면 그 윗돌에서 밟은 포도의 즙이 아래 돌로 쏟아져 내려오게 되는데 그 즙을 받아서 포도주를 담갔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밟는 남자들의 옷은 물론이요 허벅지까지 빨갛게 피처럼 물이 들었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누구나 그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었습니다. 늘 주변에서 보던 장면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당시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으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20절에 보시면 그 포도주 틀을 밟는데 거기서 피가 난다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계14:20)

20      성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그 틀이 밟히니까 피가 나오는데 그 피가 말굴레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굴레’‘칼리노스’는 말의 재갈을 의미합니다. 그 피가 튀어서 말의 재갈의 높이까지 튀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악인들이 당할 극심한 고통을 나타낼 때 쓰이는’ 유대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위경인 (에스더하 15:37절)에도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라고 나옵니다.

1,600은 4X4X10X10이지요? 우리가 전에 공부하기를 4라는 숫자는 세상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지요? ‘네바람, 네 천사, 네 모퉁이, 네바람’ 이런 구절들 공부할 때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10이라는 숫자는 왕들과 관련이 있는 숫자입니다.

 

(계17:12)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그러니까 그 피가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라는 말은 ‘그 심판의 범위가 범 우주적으로 전 세계에 걸쳐 철저하고 완전하게 일어나게 됨을 상징하며, 그 심판이 이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 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잠깐 공부한 세상 왕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므깃도 골짜기에 모여서 하나님께 전멸 당하게 되는 유명한 전쟁이 뭡니까? 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 바로 그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 땅의 모든 악한 세력이 심판을 받아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 그 모습이 여기 계시록 14장 말미에 결론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16:12-16)

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 왕인 마귀와 그 세력들을 모으시고 오늘 본문의 말로 하자면 추수를 하셔서 전부 짓밟아 멸망시켜 버리실 것입니다. 그게 세상의 마지막입니다.

이 아마겟돈 전쟁은 또 21장의 백 보좌 심판과 동일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계20:11-15)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렇게 계시록 14장 후반부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을 보시면 그 무르익은 포도들은 성 밖에서 밟힌다고 나오지요?

그 성은 어떤 성을 말합니까? 우리가 거하게 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어린양과 함께 서게 되는 거룩한 산 시온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있는 자들은 전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서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그 성 밖의 심판을 면하게 되신 것입니까? 여전히 이렇게 못되고 악하고 더러운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 성 밖의 포도주 틀에서 벗어나게 되셨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 대신에 영문 밖에서, 성 밖에서 포도주 틀에 밟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포도주 틀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히13:12)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우리의 피가 튀어야 할 성 문 밖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튄 것입니다. 우리의 살이 찢겨야 할 성 문 밖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찢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저주의 포도주 틀에서부터 자유로워 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음대로 막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히13:13-16)

13      그런즉(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우리도 우리의 욕심과 야망을 따르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장차 올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며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며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며 그 다가올 도성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공부한 것처럼 그대로 이 땅의 종말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은 도적처럼 우리에게 닥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심판의 포도주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게 되듯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그 심판 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때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영원의 시작인 바로 그 때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렇게 엉터리로 사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기와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는 죽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병원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자동차 사고와 화재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아무런 준비 없이 하나님의 심판 대 앞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보다 못 배워서 죽는 거 아닙니다. 그들이 여러분보다 능력이 없어서, 가난해서 죽는 것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죽음과 심판을 인식하고 그 죽음 뒤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거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닙니다. 여러분이 ‘후’하고 내 쉰 숨을 여러분의 코가 다시 들이마시지 못하면 여러분은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비(無備)공(空)’일 뿐입니다. ‘콧구멍이 막혀버린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600년 전의 이사야도 이미 그 진리를 설파해 놓았습니다.

 

(사2:22)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표준 새 번역)

   너희는 사람을 믿지 말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아무 보잘 것 없느니.

 

사람은 코에서 숨이 끊어지면 그냥 끝입니다. 그러면 당장 그 호칭이 바뀝니다. 아무리 힘이 없고 연약하고 심지어 그가 코마 상태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코끝에 숨이 붙어 있으면 그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코에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그의 호칭은 시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즉시 그 시체는 사람과 격리가 됩니다. 병원에서 죽은 사람은 시체실로 그 거처를 옮겨야 합니다. 집에서 죽은 사람도 병풍 뒤로 그 거처를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곧 썩습니다. 제가 무덤을 이장할 때 한번 곁에서 지켜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체가 썩는 냄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합니다. 그래서 영안실이나 병풍 앞에 향을 지독하게 피워 놓는 것입니다. 시체 썩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

 

죽어버린 인간의 몸이 얼마나 더럽고 쓸모가 없는지 그 몸 안에서 기생하던 기생충 들 까지도 인간의 숨이 멎는 순간 전부 기어 나옵니다. 여러분은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앞으로 50년 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여러분 대부분이 향후 50년 안에 전부 그 병풍 뒤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의대생들의 해부학 실험실에 잠깐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시체들 40구가 머리를 빡빡 밀은 채 실습 대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남자시체, 여자시체, 나이든 사람시체, 젊은 여인네의 시체, 커다란 용 문신을 한 시체, 온갖 부류의 시체들이 벌거벗겨진 채 누워있었습니다. 이제 실습생들이 들어오면 곧 그 배가 갈리고 내장들이 그 몸에서 떨어져 나와 실험용 병에 담기게 될 것입니다. 머리뼈가 전기톱에 의해 잘려져 나가고 그 안에 들어있는 뇌가 밖으로 떨어져 나올 것입니다. 제가 본 그 시체들은 그냥 실험용 마네킹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분명 거기 그렇게 누워 있는 시체들도 그 코에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청운의 꿈과 야망을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거기 누워있던 아낙네들이 살아있는 동안 그 얼굴에 발랐던 화장품들과 그들이 심사숙고해서 골라 입었었을 화려한 옷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도 코에 숨이 붙어 있었을 때에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투고, 시기하고, 모함하고, 행복해 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병들고,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 코끝에서 숨이 멎었을 뿐인데 그들은 그렇게 벌거벗겨져서 실험대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실험이 끝나면 그들은 1000도가 넘는 화장터의 화로 속으로 들어가거나 반 평짜리 땅에 묻혀 여지없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갈 것입니다. 그게 정말 우리 인생의 끝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공으로 없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육신의 삶 이후에 이제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해 사시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이제 곧 썩어 문드러질 그 육신을 위해서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이후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시겠습니까?

 

  (갈6:8)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러분이 평생 이 땅의 썩어질 것들만을 목표로 사시게 되면 여러분은 반드시 그 썩어질 것들과 함께 영원히 썩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어주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이 땅의 삶을 소홀히 여기라는 것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가정, 직장’ 누구보다 성실하게 사세요. 돈? 많이 버십시오. 명예? 주어지면 받으셔야지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은총의 것들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돈과 명예는 세상 사람들의 돈과 명예와 전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것만을 위해서 그들의 인생을 소비하지만 우리는 성실하게 열심히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의 힘이 주어졌을 때 자기 것처럼 교만을 떨게 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물질과 명예가 주어졌을 때 겸손하게 그 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돈과 명예가 주어지게 되면 그건 100% 그 사람을 파괴해 버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니까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아침마당’이라는 TV프로그램에 어떤 아주머니가 출연을 했답니다. 그 아주머니에게는 병약한 홀어머니가 계셨는데 아주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워 계셔서 누군가 그 곁에서 수발을 들지 않으면 대소변도 못 가리시는 그런 분이셨답니다. 그 아주머니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그 아주머니는 자기 남동생을 자식처럼 돌보며 사랑해 주었답니다. 그 남동생이 장가를 가게 되었을 때 그 아주머니가 자기 남동생이 결혼을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그 병 수발을 들게 될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자기 남편에게 동의를 얻어서 그 병든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시고 수년간 병 수발을 해 드렸답니다. 아주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는 어머니를 수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오랜 병고 끝에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그 아주머니를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답니다.

 

그 병든 할머니에게는 서울 변두리에 아주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걸 자식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답니다. 그 어머니가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면서 ‘얘야, 그 집은 네 남동생 주자’ 그러셨대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그 말을 듣자마자 “만일 자기 옆에 과도가 있었다면 그 어머니를 찔러 죽이고 싶었답니다. 그 리고 그 옆에 도끼가 있었다면 도끼로 어머니를 찍고 싶더래요‘ 십 수 년 간 어머니를 모시면서 한 번도 어머니를 원망해 본 적도 없었고 기쁘게 어머니를 모셨었는데 그 사이에 돈이 들어오니까 갑자기 그 어머니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재작년에 형이 동생을 죽인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평소에 아주 의가 좋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4,500만원의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형에게 3,000만원을 남기시고 동생에게 1,500만원을 남기셨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다 치르고 동생이 형에게 자기 몫인 1,500만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이 동생을 자기 차에 태우고 양산에 까지 가서 그 동생을 살해하고 열 손가락을 다 잘라서 산 속에다가 묻었습니다. 지문 때문에 그랬겠지요? 그런데 집에 와서 그 동생 소지품을 정리하다 보니까 그 동생이 생명 보험에 들어 있었습니다. 유족은 자기 한 명뿐이기 때문에 그 동생의 보험금은 당연히 자기가 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의 손가락을 전부 잘라서 묻어 버렸으니 그 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형이 그 동생을 암 매장한 산 아래에 있는 주유소에 어디 어디로 가면 시체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이니 신고하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필적 감정에 의해 잡혔습니다. 그 아버지가 남긴 돈 4,500만원만 없었더라도 그 두 형제는 평소처럼 사이좋게 성실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 때문에 형제의 의가 갈라지고 심지어 살인까지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들한테 유산 물려주지 마세요. 제가 늘 저희 아버님께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혹시 자식들한테 물려줄 거 있으시면 빨리 살아생전에 좋은 곳 찾아서 기부하세요, 만일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시거든 아무도 모르는 데 가셔서 땅에다 묻어버리세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한테 뭐 물려줄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곳에 잘 쓰세요. 그리고 자식들한테는 올바른 신앙을 물려주십시오.

 

여러분, 돈이라는 것은 그 것을 감당할 실력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재벌 자녀들이 그 많은 유산을 가지고도 형제끼리 끊임없이 소송하는 걸 보세요.

자기의 땀 없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술과 여자 도박, 마약으로 자기 인생을 망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우리가 옆에서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그 돈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돈을 ‘세상 신’‘맘몬’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맘몬 사상이 교회까지 들어와서 예배당에서도 돈 없는 사람을 괄시합니다.

신앙을 거룩의 문제, 성품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는가?’로 신앙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사업이 망했다거나 몸에 병이 들거나 하면 ‘당신 혹시 하나님 앞에 뭐 죄지은 거 없어?’ 이렇게 무식한 소리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은 한 때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에서 자기 입으로 ‘나는 카톨릭 신자였지만 지금은 그 천주를 버렸다’라고 배교를 선언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그 정약용의 셋째형인 정약종은 끝까지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땅을 굽어보며 죽을 수 없다’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망나니가 헛 칼질을 했을 정도로 서슬이 퍼랬다고 하지요.

 

그런데 카톨릭에서 발표한 ‘위대한 카톨릭 신자 100인’에 정약종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정약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왜죠? 정약용이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적인 성공 앞에서는 순교조차도 빛을 잃어버립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똑같습니다.

기독교가 예수를 이용해서 병이나 낫고 돈이나 많이 벌고 자식들 좋은 대학 들여보내는 것으로 기독교가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나를 죽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다른 것들은 전부 사망과 함께 썩어져 버릴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쌓아 가세요. 왜 수의에 주머니가 없는 줄 아세요?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망자들이 입는 수의에 주머니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이 땅에서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 잘 분별하시고 신앙생활 하세요. 여러분이 쌓아 올린 그 모든 것들이 다 불타버릴 심판의 날이 분명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 끝을 생각하고 그 심판 이후의 삶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창4:26)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가 태어나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의 뜻에 맞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대 위에 서게 됩니다. 그 때를 준비하세요.

도적처럼 그 죽음이란 녀석이 여러분을 덮쳤을 때, ‘난 정말 바보처럼 한 세상을 살았구나.’

하고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을 열심히 사세요.

마지막으로 딤전6:7-14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딤전6:7-14)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