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56)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     (계14: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4:40

(56)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

 

 

(계14:1-5)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들이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666이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666은 네로도, 바코드도, 전자 신분증도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흉내 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악한 세력을 총칭하여 상징 하는 숫자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만사형통, 소원성취를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경제적, 정신적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1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12장 13장에서는 우리는 이 땅에서 짐승에게 당하게 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게 되는 것으로 성도의 삶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장에서는 또 다시 우리 성도들이 승리하여 새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반복해서, 지상의 불완전한 교회, 전투하는 교회, 핍박당하는 교회와 천상의 이미 승리한 교회, 완성된 교회를 보여줌으로 해서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 땅에서는 지는 모습으로 가게 되지만, 너희는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아라’ 이게 요한 계시록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어린양과 하나님의 백성 14만 4천이 시온 산에 서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시온 산은 성경에서 시내 산과 대조되어서 나오는 산입니다.

 

시내 산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산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돌격으로 죽게 되는 무서운 산입니다. 반면에 시온 산은 은혜의 산입니다. 시온 산의 다른 이름이 뭡니까? 모리아 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던 산입니다. 그 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죽어야 할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대신 죽게 하시고 죽어야 할 이삭이 살아난 은혜가 베풀어 진 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온 산’하면 의와 평화의 메시아 왕국을 상징하는 은혜의 산, 축복의 산을 상징합니다.

 

(미4:7)   

7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시2:6)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사59:20)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히12:18-24)

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우리는 모두 다 율법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온에 구원자를 세우시고 그 구원자에 의해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구원자와 함께 영원히 그 시온의 영광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14만 4천, 하나님의 백성, 바로 여러분은 그렇게 이미 그 영광 속에 들어가 계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그렇게 쉽게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 시온에 이미 서있는 우리의 영적 실존을 조금 씩 조금씩 이해하고 깨닫고 실감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 14만 4천의 이마에 무엇이 기록이 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이미 이겼고 승리했다는 증거입니다.

 

(계3:12)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누구에게? 이기는 자에게 그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미 이기신 분들입니다. 영적으로 이미 그렇게 이기신 분들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이기실 수밖에 없으신 분들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나약해 보이고 매일 매일 실패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러분은 분명히 이겨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매주 이렇게 혹독하게 여러분을 몰아 부치는가? 진짜 군사들에게는 악독한 훈련교관이 붙게 마련입니다. 제대하고 제일 생각나는 사람이 훈련소 조교들입니다. 고등학교 때 몽둥이 들고 다니면서 혹독하게 공부시켜 주셨던 선생님이 제일 생각납니다. 그 분들은 저를 강인한 국군용사로, 훌륭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만들기 위해 그러셨던 것을 제가 알거든요. 제가 여러분을 달달 볶아서 저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더 잘 싸우시라고 제가 이렇게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입니다. 해병대나 공수부대 대원들이 왜 무서운지 아세요? 사회에 나와서 아무리 맞아도 부대에서 훈련받을 때 맞는 것보다 덜 하거든요. 평소에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실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잘 이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더욱 여러분을 달달 볶을 겁니다. 우리 주님 만나는 날까지 아주 신물이 나게 달달 볶을 겁니다.

그 승리한 하나님의 교회 14만 4천이 시온 산에서 새 노래를 부릅니다. 새 노래는 우리가 5장에서 이미 공부를 했습니다. 그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계15:2)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새 노래는 성도들을 구원하신 어린양과 그 어린양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래는 구원받은 성도 14만 4천 밖에는 배우지 못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들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도들만이 그 구원을 감격 속에 자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상의 완성된 교회가 그 새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구원을 감격해 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그 구원과 그 구원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찬송이 우리의 진심에서 우러나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4절과 5절을 보시면 우리 성도들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나옵니다.

 

(계14:4-5)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들이더라

 

첫 번째로 성도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절이 있는 자’ ‘팔데노스’는 ‘virgin, 동정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이 구절을 문자 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자기들처럼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결혼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히13:4)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분명 하나님은 혼인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표현을 하는가?

여기서의 정절은 영적인 순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각기 다른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한 여자는 우리가 12장에서 공부한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이고 또 다른 여자는 음녀 바벨론을 말합니다.

 

(계17:1-2,5)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바로 이 여자, (세상, 음녀)로부터의 정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유대인들의 혼인 풍습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혼을 한 후에 신랑이 그 신부의 지참금을 다 지불할 때까지 신부와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만일 신랑이 돈이 없어서 지참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에 신랑은 노동으로라도 그 만큼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신랑이 그 빚을 다 갚은 후에 신랑은 보무도 당당히 신부의 집으로 신부를 데리러 갑니다. 보통 밤에 그 신부의 집으로 찾아가서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옵니다. 그 동안 신랑의 집에서는 잔치가 준비되고 신랑 신부가 도착하게 되면 화려한 혼인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혼 기간 중에 만일 신부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그 혼인은 즉시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의 혼인관습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 혼인잔치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성도들과 정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빚을 다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마’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동안 우리 신부들은 정절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고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전6:9-11)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구원받은 우리가 완전하게 정절을 지켜낼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리고 그 정절을 지켜내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점점 밝히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신분에 대해 점점 깨닫게 되면 우리는 점차적으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맞는 삶을 추구하고 또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성도들은 4절에 있는 대로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어린양이 이끄는 곳은 전부 만사형통의 길인 줄 압니다.

그 반대입니다. 어린양이 이끄시는 길은 자기의 계획과 꿈과 야망을 다 접는 길입니다. 그걸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막8:34-35)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어떠세요. 그 어린양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 쉬울 것 같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계획을 접고 예수님이 이끄는 대로만 따라가는 것이 정말 쉽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전부 그렇게 살다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에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의 꿈을 좇아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마저도 동원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말씀대로 사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러한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마10:34-38)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때로 바른 신앙을 위해 가족들과도 원수가 되는 그러한 어려운 길로 우리를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때 두말 않고 어린양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갔다는 것입니다. 거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든지 푸른 초장이든지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좇아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해 보면 가짜와 진짜들이 금방 티가 납니다.

가짜들은 굉장히 언짢아합니다. ‘진짜 그런 길이라면 가기 싫다’ 이게 얼굴에 나타납니다.

저는 지금 성경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해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두말 않고 그 예수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갑니다. 여러분도 그럴 각오가 되어 있으신 겁니까?

그렇게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 보상을 해 주십니다. 분명 여러분은 이 땅에서 그 보상을 받습니다.

 

(막10:29-30)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 토를 버린 자는

30      금 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 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와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 토를 버리면 이 땅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 토를 백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30절의 ‘금세에 있어’‘눈 엔 토 카이로’가 ‘지금 여기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던가요? 여러분께서 예수를 믿느라고 집이나 땅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을 버리면 정말 그 모든 것이 이 땅에서 백배로 오던가요? 집이나 땅은 그렇다 치고 형제, 자매, 어미, 자식들이 백 명씩 늘어납니까?

 

집과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교회에 헌금 낸 것의 백배로 여러분에게 다시 돌려주실 것이라는 설교를 어디선가는 한번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됩니까?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께서 돌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냥 낸 만큼 손해입니다. 그럼에도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이 땅에서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고백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포기하게 되는 것들을 다시 뻥튀기해서 돌려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버린 그런 세상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상, 그게 백배의 의미입니다. 그런 세상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보상이 뭡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서 받으실 상, 그 보상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하나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게, 그게 보상이야?’하실 분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게 이생에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고전9:16-18)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 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 것 이로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받은 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받은 상이 어떤 상입니까?

이 전 같았으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자신의 모든 행동이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텐데 이제 주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이제 내가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동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을 보상은 집이나 전 토나 가족들과 누리는 행복 같은 것과는 비교도할 수 없는‘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상입니다. 그 게 정말 상인 줄 알고 자기 안에서 그러한 변화가 발견이 될 때 기뻐하고 감격하고 자랑하는 것이 바로 ‘새 노래’인 것입니다. ‘너무 좋다, 우리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런 삶이 구원을 얻고 난 뒤에 이렇게 살아지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게 새 노래 인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다시 백배로 돌려주신다는 목록에 ‘아버지’만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만 백배로 안 돌려주십니까? 거기서 왜 아버지만 빠졌지요? 여러분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23:9)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받는 상은 하나님 아버지와, 이 땅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쁨, 그게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아무리 열심히 헌금을 하고 아무리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해도 우리가 기대했던 것 같은 물질적이며 현세 적인 복이 좀 체로 잘 오지 않거든요.

집을 바쳤는데 집이 백배로 안 돌아옵니다. 땅을 바쳤는데 땅이 백배로 안 돌아옵니다. 십일조 꼬박꼬박했는데 여전히 비즈니스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불평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분명 그렇게 내가 주는 복을 오해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벌써 비유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가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서 놀고 있는 품꾼들을 데려다가 포도원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주인은 3시에 6시에 9시에 그리고 11시에 계속해서 나가서 놀고 있는 품꾼들을 데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의 11시는 오후 다섯 시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보통 해질녘까지 일을 했습니다. 그 시간이 우리 시간으로 대충 저녁6시쯤 됩니다. 그러니까 11시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인이 삯을 주는데 아침 일찍 온 사람과 저녁 다섯 시에 온 사람을 한 데나리온 씩 똑같이 주었습니다. 당연히 아침 일찍 와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화를 내지요. ‘아니 왜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사람과 우리를 똑같이 취급합니까? 이건 불공평합니다.’ 하고 따졌습니다. 그 때 주인이 내 것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주는데 네가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말 한 뒤에 그 유명한 구절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마20:13-16)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게 무슨 말인가? 여러분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짜 상급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짜 복은, 하나님의 성품을 좇아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상급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힘겨운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듬어져 가고 성숙해져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희열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와서 그 참된 신앙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삶을 살아 내는 것 자체가 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인 것입니다. 예수를 늦게 믿은 사람은 그만큼 세상에서 자기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게 됩니다. 예수를 먼저 믿고 그 분의 뜻에 맞게 더 긴 시간을 살아낸 사람은 그만큼 시간을 덜 허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님 옆에 달린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세상에서 할 거 다해 보고 즐길 거 다 즐기다가 그 강도처럼 막판 뒤집기로 구원을 얻고 싶어 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방탕하게 보낸 시간만큼 여러분에게는 손해입니다. 여러분은 주인의 부름을 받는 그 순간부터 신앙생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아량을 배우고 ,더러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변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게 상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한 보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온 품꾼들이 ‘왜 이렇게 오래 예수를 믿고 이렇게 많이 헌신을 했는데, 나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했을 때 ‘너희들이 도대체 구원이 뭔지, 복음이 뭔지 알고 있는 자들이냐? 먼저 된 자들아, 너희는 그 오랜 시간 헛수고 했구나’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30년 40년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아직도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나에게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상을 주셔야만 한다고’ 마음속으로 우기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나중 된 자들입니다. 아직 어린애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애시 당초 가짜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성경에서 제일 미워하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이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를 꼽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가롯 유다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먹은 겁니까? 적어도 돈이 탐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은 삼십은 120 데나리온 정도 되는 가치입니다. 가롯 유다는 돈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그 정도 돈은 언제든지 만질 수 있던 사람입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사건 바로 앞에 붙어 있는 사건이 뭐죠?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마리아 사건입니다. 그 향유가 얼마였습니까? 300데나리온 이었습니다. 유다가 그 여인보고 뭐라고 합니까? ‘그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더 좋을 텐데 왜 그 비싼 것을 예수 님 발에 붓느냐?’ 그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 향유보다도 싼값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버렸을까요? 유다는 모든 것을 현세 적이며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을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의 권세와 부귀를 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유다가 화가 난 것입니다. ‘난 당신이 우리를 로마에서 건져내고 찬란한 다윗의 왕국을 재현해 줄 메시아로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왔는데 이제 와서 죽는다고 하면 어떡하는가? 그럼 내가 당신으로부터 얻을 유익이 도대체 뭐냐?’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에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어쩌면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이었을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그 분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으면 좋겠습니까? 가롯 유다의 기대처럼 기적과 이사를 일으켜서 로마의 황제가 되어 여러분의 삶에 유익을 끼쳐 주시기를 바라시지요?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너무나 나약하게 그냥 죽어버리는 그런 예수는 별로 탐탁지 않으시지요?

당신은 곶감을 들고 있다가 내가 입을 ‘아’하고 벌릴 때마다 하나씩 넣어주어야 하는데 왜 나에게 그러한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것들로 보상을 안 해주고 묵묵부답입니까? 이게 우리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가롯 유다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로 마리아처럼 우리의 가진 것을 전부 털어서라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 거룩을 사모하고 사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유다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누구냐? 마리아냐? 유다냐?

그런데 십자가와 거룩은 어디로 가고, 전부 곶감 타령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은 물질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성품의 문제요 인격의 문제인 것입니다. 보세요, 성경이 구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롬6:6)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엡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죄를 벗어버리고 거룩을 입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가난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죄를 벗고 거룩을 입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활을 통해서 하루하루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 가는 거룩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조금 씩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감격하게 되는 것 ‘아, 난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맞구나’하고 확인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인 것입니다.

 

저는 설악산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아버님께서 매 주말마다 산행에 데리고 다니셔서 그런지 저는 산이 아주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설악산을 아주 좋아합니다.

미시령, 진부령, 한계령 고개 길도 좋고 산자락 끝으로 나있는 동해 바다도 참 좋습니다.

아버님께서 설악산 울산 바위 앞에 콘도미니엄을 갖고 계셔서 저는 시간 날 때마다 일주일씩 열흘씩 설악에 머물곤 했습니다. 제가 아내를 처음 만나서 데리고 간 곳도 설악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설악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 설악산에서 머물 때였습니다. 벌써 한 20년쯤 전이네요. 늦은 가을이었는데 때 이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는데 출출해서 설악 입구에 있는 순두부 집에 가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있었습니다. 비 오는 평일 낮에 순두부 집에 손님이 있을 리 만무(萬無)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 안에 저 말고 다른 손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아주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청년이었는데 저보다 한 열 살은 많아 보였습니다. 괜히 그 분이 뭐하는 분인지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 분과 합석을 해서 막걸리 잔을 돌리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은 설악산을 오르내리며 짐을 날라다 주시는 지게꾼이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17살 때부터 설악산에서 지게를 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순박한지 몰라요. 그 후로는 설악산도 좋았지만 설악산에 계신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설악산엘 더 자주 갔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분이 신문에 났더라고요.

 

그 분은 지금까지 그 설악산에서 지게를 지고 계셨습니다. 보통 건장한 청년이 설악산을 맨손으로 걸어서 대청봉까지 올라가는데 8시간에서 10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 길을 이 분은 매일 새벽 다섯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12시간을 80kg에서 120kg의 짐을 지고 오르내리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한 달에 60만원에서 80만원입니다.  

미국 돈으로 환산하면 한 달에 600불에서 800불정도 버시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한국에서 그 정도 벌이로 세 식구가 살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그 분은 늘 점심을 반찬 없이 밥만 드신답니다. 그것도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는 도중에 계곡 물을 조금 받아서 거기에 말아서 훌훌 마십니다. 그리고는 또 지게를 지고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 수입의 절반을 양양에 있는 장애인들과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들을 위해 쓴답니다. 매달 쌀이며 라면을 사서 그 분들을 찾아가신 답니다. 얼마 전에 그 분이 강원 도민 봉사 상을 받으셨다고 하네요. 그런데 거기서 받은 800만원의 상금을 자기가 돕고 있는 홀로 사시는 노인들 제주도 여행 경비로 다 내놓았습니다. 그 양반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그 불쌍한 노인들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신 것입니다. 그 노인들이 제주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 그 임기종씨는 120kg의 상업용 냉장고를 지고 대청봉의 산장으로 배달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름 장마 때는 우비를 입고 한 겨울에는 아이젠을 신고 매일같이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며 번 돈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는 데 쓰고 있는 그 분이야 말로 진정한 거인 아니겠습니까?

그 분은 ‘나는 이웃에게 빚진 사람의 마음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무식하고 못 배워서 내가 남들한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굶는 사람 쌀이나 사다주고 배고픈 사람 라면이나 사다주는 것밖에 못한다고  수줍게 웃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자 아니겠습니까?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잘 쓰는 사람을 우리는 부자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이 예수를 믿으신 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격과 성품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정말 다시 설악산에 가서 그 분과 함께 지게를 지면서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그 분이 하시는 일보다 어려우세요? 여러분 한 달 월급이 그 분보다 적으신 분들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그 분 보다 못 배운 분 계세요? 여러분 중에 그 분 보다 작고 못 생기신 분  계십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그 분이 느끼는 그 행복이라는 것을 못 느끼고 사십니까? 우리는 신앙인이 이 땅에서 받는 상급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평만 하는 가롯 유다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승리하신 분들입니다. 승리한 여러분은 분명 이 땅에서 백배의 상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상을 받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가롯 유다처럼 엉뚱한 상을 바라며 오늘도 그 예수를 팔아먹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