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64) 진노의 일곱 금 대접     (계15:5-8)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5:04

(64) 진노의 일곱 금 대접

 

 

(계15:5-8)

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제 우리는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에 당도했습니다. 16장 1절부터 드디어 마지막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 그 대접 재앙 안에는 우리가 궁금해 하는 아마겟돈 전쟁을 비롯해서 무시무시한 일곱 재앙이 등장합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그 16장의 대접 재앙으로 넘어가기 전에 15장 말미에 등장하는 대접 재앙의 서론 부분입니다.

 

우리가 이제 한 절 한 절 보겠지만 이 서론 부분에는 대접 재앙이 세상에 부어지게 되는 이유와 근거, 그리고 그 대접 재앙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5절을 보시면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또  이 일 후에' 혹은 '내가 보'”라는 구절들은 요한 계시록에서 장면이 바뀔 때 등장하는 구절이지요. 이제 유리 바닷가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던 장면에서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으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증거 장막의 성전'은 동격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증거 장막과 하늘의 성전은 같은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증거 장막이라는 단어를 구약의 어디에선가 보셨을 겁니다.

 

(민17:7-8)

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성경에서는 성막,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를 가리켜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 곳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릅니까?

 

(출25:16,21-22)

16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 속에 둘지며

21      속죄 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 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은 십계명 돌 판을 증거 판이라고 부르시고 그 증거 판이 들어 있는 법궤를 증거 궤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 궤가 들어 있는 성 막을 증거 장막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증거 장막은 십계명 돌 판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십계명 돌 판은 하나님의 율법이며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의 수준에 맞게 낮추어 보여 주신 것이라고 예전에 설명 드렸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참이신 하나님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십계명 돌 판은  거룩과 공의, 사랑과 용서 같은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 자신을 증거 하는 돌 판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 판이 들어 있는 법궤도 역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와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상자이지요. 법궤의 위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공의와 심판과 사랑과 은혜가 동시에 드러나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궤입니다. 그 법궤가 들어 있는 성 막과 성소 역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 즉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이 증거 되는 곳입니다. 그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사랑과 용서가 동시에 나타난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장막,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2:19-21)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성전, 증거 장막은 하나님의 속성과 임재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될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임재가 증거 되는 그 성막과 성전,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은 거룩하게 구별되어 취급되어져야 했습니다.

 

(민1:50-53)

50      그들로 증거 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장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장막 사면에 진을 칠지며

51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52      이스라엘 자손은 막을 치되 그 군대대로 각각 그 진과 기 곁에 칠 것이나

53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증거 장막, 성소는 아무나 범접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습니다. 그 ‘성전이 열렸다’라는 말은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공의로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한 번에 보여주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곱 대접의 서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일곱 대접 심판은 바로 그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심판과 구원이 완성되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 장막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존재하고 있고 이미 열려있습니다.

 

(고전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가 그 증거 장막의 성전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존재함으로 세상이 그들과 우리가 다름을 느껴야 하고 그들이 우리와 다른 자리 곧 심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용서를 삶으로 전달해서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보여주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은 민수기에서 그 증거 장막의 성전은 항상 어떻게 취급되어졌다고 합니까?

거룩하게 구별되어서 취급되어졌습니다. “이방인이 가까이 오면 죽여라“ 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실 정도로 거룩하지 못한 것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런 거룩한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 된 삶을 사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계12:17)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보세요,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이 된 우리의 신분이기도 하지만 그 신분을 바르게 인식하고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는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심판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계속해서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완성되는 마지막 재앙을 들고 나오는 천사들이 바로 그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나옵니다.

 

(계15:6)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재앙을 쏟아 부을 천사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심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세요.

 

(계15:7)

7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네 생물에 관해서는 우리가 4장 공부할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 네 생물은 천상의 그룹이라고 했지요. 생각이 안 나시는 분들은 4장 강해를 다시 들으세요. 제가 전에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이사야서6장의 내용과 비교해서 설명해 드렸지요? 잘 기억해 보세요.

그 네 생물에게서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금 대접을 받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금 대접은 우리가 전에 공부했던 5장과 8장에 나오는 성도의 기도가 담겨 있던 그 대접입니다. 5장 8절 한 절만 보고 넘어가지요.

 

(계5:8)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여기서 네 생물과 24장로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금 대접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생물이 가지고 있는 금 대접과 동일한 대접입니다. 그런데 그 금 대접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성도들의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오늘 본문과 잘 연결시켜 보세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가 금 대접에 담겨 하나님께로 올려 집니다.

그 성도들의 기도는 ‘빨리 악이 멸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조속하게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 성도들의 기도의 내용에 관해서는 요 한 계시록 강해 31번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으니까 기억이 안 나시면 다시 한 번 들으세요.

 

이제 그 성도들이 기도가 담겨있던 그 금 대접을 일곱 천사가 받아서 이제 16장부터 세상에 쏟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전부 우리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쏟아지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계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가장 간절히 드리는 기도가 어떤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까? 악의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는 비단 내 밖에 있는 악의 세력뿐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의 습관, 더러운 집착, 중독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의 완성에 대한 염원도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어두움의 찌꺼기들이 완전히 사라질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구절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금 대접이라고 번역이 된 ‘피알라스’는 연회에서 포도주를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성경은 그 그릇을 ‘잔’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보통 ‘포도주 잔을 마신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던져진 자들’을 가리킬 때 씁니다.

 

(암6:6)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가리켜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대접’‘미즈라크’가 70인 역에서 ‘피알라스’로 번역이 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14장에서 공부했다시피 그 진노의 포도주 잔은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잔이기도 하지만 사단의 수하에 있는 죄인의 무리가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마시는 진노의 포도주 잔이기도 합니다.

 

(계14:8-10)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이게 바로 대접재앙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접재앙은 말세의 기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서 제외된, 짐승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은 마귀를 추종하는 무리들,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 아래 놓인 죄인들이 스스로 그들의 악함으로 괴멸되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접재앙의 원형이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사51:17-23)

17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하였도다

18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19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당하였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

20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였도다

21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22      네 주 여호와, 그 백성을 신원하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23      그 잔을 너를 곤고케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찌기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의 앞에 네가 네 허리를 펴서 땅 같게, 거리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신 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고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으로 떨어질 자들 중에서 어떤 무리, 즉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는 하나님께서 그 진노의 포도주 잔을 거두시고 거기에 선택되지 못한 그 나머지 마귀의 무리에게만 그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무리 대신에 그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셔 버리신 것입니다.

 

(마26:39)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 결과 어떤 무리들, 바로 성도들은 그 진노의 잔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나머지는 그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그들의 인생동안에 그리고 내세에서도 영원히 마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될 그 사람들이 바로 지금도 그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바로 지금 재앙과 심판과 저주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혹 이런 질문 안 드세요?

‘아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유롭게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거 다 마시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일요일도 편안하게 여행하고 골프 치고,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데 그들이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고 있다는 겁니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예배드리느라 놀 시간도 없고 사업에 있어서도 손해를 봐야 하고 먹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 가려서 마셔야 하고 오히려 우리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분명 이런 질문이 드실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안 믿고 사실 때를 한번 떠 올려 보세요? 그 때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죠? 죄 짓고 싶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지었습니다. 술 취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술 취하고 거짓말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거짓말하고 나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을 모함해서라도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그 때가 정말 행복하셨습니까? 정말 평안하셨습니까?

 

중국 청도에 가면 예전에 그 청도를 다스리던 독일 총독 관저가 있습니다. 그 독일 총독 관저가 얼마나 근사한지 모택동이 혁명에 성공을 하고 독일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뒤 그 독일 총독 관저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만 머물 수 있는 호텔로 용도 변경이 되었습니다.

그 총독 관저에는 총독이 머물던 침실을 비롯해서 직원들의 방과 하인들의 방까지 합쳐서 아주 여러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훌륭한 시설을 갖춘 방은 독일 총독이 쓰던 침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청도를 방문해서 그 곳에 머물게 되었을 때 그들이 전부 어디서 잤는지 아세요? 전부 1층 구석의 하인방에서 쪼그리고 잤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테러범들이 무서워서 일부러 구석방에 숨어서 잔 것입니다. 아무리 경호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테러범들이 1차 공격 지점을 분명 그 총독 침실로 잡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 호화스러운 방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 하고 하인들 방에서 하룻밤 묵고 얼른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편히 잘 수 있었을까요?

그게 진노의 포도주 잔인 것입니다.

 

부모가 남긴 재산으로 형제들이 소송을 하고 다투고 갈라지고 하는 것 많이 보시지요? 소송에 이겨서 많은 재산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행복할까요?

진노의 포도주 잔입니다.

 

술이나 담배, 마약 인간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좋은 도구인 것 같지요? 하면 좋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들에 손을 대는 순간 인간은 망해 갑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망가뜨리듯이 우리의 죄악은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의 포도주 잔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 것들을 추구하여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들이 여러분의 눈에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들은 지금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막아 버리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것을 진노의 포도주 대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에 취해서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최후를 맞게 될 것인지 분간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49:25-26)   

2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 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26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이렇게 죄는 자해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뒤로 미룬 채 여전히 죄의 습관에 빠져 허우적대는 삶을 산다면 그는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를 멀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복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확신까지도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 아들아, 내 딸아 거룩하게 살아라.’하고 안타까운 권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경주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우리가 이 원리를 잘 인식하고 있게 되면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원수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달라지 게 됩니다.

나를 곤경에 빠뜨린 사람이나, 억지를 부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자기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 나를 희생시키는 그런 사람, 우리가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죽이고 싶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들이 이미 그러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밀을 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롬12:14,17-21)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요?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가 분노한다는 것은 ‘밟는 자가 이기는 것이고 밟히는 자가 지는 것이라는 ,내가 지는 것이 손해’라는 세상 적 관점을 버리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남을 밟는 자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고 밟혀주는 자를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들의 원수를 대할 때 진노의 포도주 잔에 취해 있는 불쌍한 자로 여겨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한 주간 내내 이 로마서 12장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계속 암송하고, 묵상해 보고, 기도하면서 또 생각해 보고, 하면서 얼마나 마음에 평안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왜 내가 누군가에게 분노하는가?’‘왜 나는 마치 그 사람이 영원히 승리할 것처럼 분노하는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옳고 그 상대방이 그르다면 하나님께서 분명 그 사람에게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실텐데 왜 내가 이렇게 조바심을 내는가?’‘내가 복수를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내 마음이 정말 통쾌해 질까?’‘그 통쾌함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그리고는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올려 보냈습니다.’‘하나님,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세상에 그랬더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한지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분명 신명기 32장 35절에서‘“복수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가서 몇 대 쥐어박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복수를 그 사람에게 해 대실 것인데 왜 내가 분노해서 나의 몸과 마음을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의 잔을 받고 치를 떨게 될 그 사람을 위해서 정말 진지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진노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그 사람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기도를 하게 되더라고요.

 

1972년에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그 때 팔레스타인 게릴라 11명이 올림픽 선수단 숙소에 침입해서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이스라엘 수뇌부가 모여서 복수를 하기로 하고 중앙정보부인 ‘모사드’를 시켜서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리더들 11명을 지목해서 한 명 한 명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팔레스타인 리더들을 한 사람 죽이면 팔레스타인은 여객기 하나를 납치해서 200명씩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목을 하나 죽이면 금방 그 후임자가 나타나서 그 자리를 메워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복수전이 끝이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모사드의 리더였던 사람이 회고록에서 이렇게 그 때의 심경을 적었습니다.

 

‘이 복수가 과연 끝이 날 것인가? 내가 이 복수를 다 끝내고 나면 과연 이스라엘에 평화가 올 것인가? 이 물고 물리는 복수전에서 우리 양쪽이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한 사람 한 사람 목표물이 사라질 때마다 우리 팀 모두는 기쁨보다는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사로잡혀 갔다. 그리고 그 허탈감과 함께 우리 팀원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갔다. 아마 우리에게 복수를 했던 그 사람들에게도 우리 모사드는 또 다른 복수의 팀을 보냈을 것이다.’

여러분 이게 ‘분노를, 복수심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녹여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 마시고 있는 진노의 포도주 대접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때리고 죽이면서 스스로 진노의 잔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진짜 진노의 포도주 대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 진노의 싸이클에서 떨어져 나온 거룩한 자들입니다.

 

복수는 조금 미뤄 두십시오. 미움도 하나님의 진노 뒤로 던져 버리세요. 그리고 그들을 모두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버리세요. 여러분은 그 때 비로소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자고요. ‘하나님, 어서 빨리 제 안에서도 거룩한 투쟁이 일어나게 해 주시고 완성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어서 그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게 해 주세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서 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우리 이 거룩한 기도를 오늘도 그 하늘의 금 대접에 담아서 하나님 앞으로 올려 드리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