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65) 진노의 대접과 은혜의 대접   (계16:1-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5:05

(65) 진노의 대접과 은혜의 대접

 

(계16:1-11)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3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        세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8        네 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0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이제 본격적으로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이 일곱 대접 재앙의 내용을 공부하기에 앞서 우리가 꼭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들을 몇 가지 확인하고 내용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이 대접 재앙은 인의 재앙이나 나팔 재앙과 같은 내용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기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의 재앙이나 나팔 재앙이나 대접 재앙이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디즈니랜드의 입체 영화관을 생각하시라고 했지요?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확인하고 넘어 가지요. 오늘 본문 2절을 보세요. 거기 첫 번째 대접의 내용이 나옵니다.

 

(계16:2)

1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2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집니다. 그럼 우리가 전에 배운 첫 번째 나팔 재앙으로 가 볼까요?

 

(계8:7)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둘 다 재앙이 땅에 쏟아지지요? 오늘 본문 3절에서 두 번째 대접의 내용을 볼까요?

 

(계16:3)

3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대접이 바다에 쏟아지니까 바다가 피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공부한 두 번째 나팔 재앙은 어디에 쏟아졌습니까?

 

(계8:8-9)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역시 바다에 떨어졌지요? 그랬더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대접을 보지요. 본문 4절을 보세요.

 

(계16:4)

4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세 번째 대접은 강과 물에 쏟아집니다. 그럼 세 번째 나팔은 어디에 떨어졌습니까?

 

(계16:10-11)

10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역시 강과 물 샘에 떨어졌습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대접을 보세요.

 

(계16:8-10)

8        네 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0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네 번째 나팔로 가보지요.

 

(계8:12)

12      네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어떠세요? 내용이 거의 흡사하지요?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나팔 재앙에서는 삼분의 일이 파괴되고 대접 재앙에서는 전부가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의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은 말세의 기간 동안에 이 세상에 일어날 심판과 재앙의 내용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라는 게 확실해졌지요? 1/3에서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본 이 재앙들은 구약의 어느 곳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다.

어디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출애굽 열 가지 재앙에서 그대로 인용이 된 것입니다.

첫 번째 대접이 땅에 쏟아져서 악하고 독한 헌데가 생기는 재앙은 애굽의 여섯 번째 재앙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풀무의 재 두 움큼을 가져다가 하늘에 날리니까 애굽에 독종이 일어났지요? 두 번째 대접이 바다에 쏟아져서 바다가 피가 되고 세 번째 대접이 강에 쏟아져서 강이 피가 되는 사건은 애굽의 첫 번째 재앙입니다.

 

그리고 해가 어두워지는 사건은 애굽의 아홉 번째 재앙입니다.

그러면 이 애굽의 재앙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으면 요한 계시록의 일곱 재앙들이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애굽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해내는 구속사를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의 일곱 재앙들은 전부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일어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점층적이며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장차 올 마지막 심판의 preview이며 예고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곱 재앙 속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세상은 지금 그들의 삶 속에서 작은 심판들을 계속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것이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이며 경고의 대접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 바로 그 것이 이 일곱 재앙이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개념을 머릿속에 잘 새기고 우리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절을 보세요.

 

(계16:2)

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지니까 악하고 독한 헌데가 사람들에게 생겼습니다. 여기서 ‘헌데’‘헬코스’는 ‘궤양, 종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재앙의 내용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의 재앙과 나팔 재앙에서 이미 충분히 공부를 했습니다. 전체가 다 어떤 내용이었지요?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였지요? 이 대접 재앙의 내용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대접재앙에서는 그 재앙의 내용을 파헤치는 것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 내용은 어차피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정신적 피폐니까요 - 그 것 보다는 그 재앙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어떠한 결과가 초래  되는 가에 더 초점을 맞춰서 오늘 본문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대접 재앙은 영적인 면에 초점을 두고 해석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 일곱 재앙들은 이 말세의 기간 동안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공히 내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재앙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는 그 재앙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내렸다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세대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 4장의 내용이 우리 성도들의 휴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4장에서 휴거가 되었기 때문에 이 대접 재앙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6장에 나오는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설명이 안 되지요. 게다가 만약에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이 맞다 면 지금 우리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부분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죠? 우리는 이미 4장에서 휴거가 되었는데 그 뒤의 일을 뭐 하러 공부합니까? 다 찢어버릴까요? 아닙니다.

 

지금 이 대접 재앙에서 독하고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만 임한다는 표현은 이 땅에 내리는 재앙의 영적인 국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똑같이 재앙에 노출이 되지만 그 것이 우리에게는 심판과 재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시사(詩詞)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앙이 짐승의 표, 666을 받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과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만 임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는 예수를 믿게 되면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시사(詩詞)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전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이게요? 여기서 전쟁, 기근, 질병, 자연 재해에 한번이라도 노출이 된 적이 없는 분 계셔요?

 

두 번째, 세 번째 대접도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풀면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계16:3-4)

3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        세 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우리가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성경에서 바다 혹은 물 하면 무엇을 상징합니까? 저주, 심판, 죄, 악, 그 악의 세력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바다가 있지 않고 그 저주의 바다와는 다른 유리 바다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계시록 17장에서는 세상을 미혹하는 음녀가 물위에 앉아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계17:1)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그렇죠? 그럼 그 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15절에 보면 그 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자체 적으로 해석을 해 줍니다.

 

(계17:15)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음녀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이라는 단어가 쓰일 때 그 것은 세계 거민, 모든 인류를 지칭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바다와 강과 물에 쏟아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되어서 악의 세력을 좇는 세계 모든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쏟아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이외의 모든 악한 무리들을 바다, 강, 물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의 첫 번째 재앙과 흡사하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고 있던 나일 강을 피로 만드신 사건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일 강을 피로 만들어 버리셨다는 것은 그들이 섬기던 신인 나일 강의 신을 죽여 버리는 것을 상징하는 재앙이었습니다. 상천하지에 오직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다와 강과 물에 떨어지는 대접 재앙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무리들이 신으로 섬기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죽여 버리시는 재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사단도 역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무리들의 신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신 적 존재로 추앙을 받게 해 주는 힘, 돈과 권력과 지식, 세상 적인 행복 같은 것들도 역시 악한 세상이 섬기는 신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신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이 아닌 그러한 세상 적인 힘과 재물만을 추구하는 그 악한 무리들을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단지 그들이 갖고 있던 소유를 빼앗아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 풍요해 지고 더 부유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막지 않으시고 오히려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것으로 말미암아 그 악한 무리들의 영혼은 점점 파리하게 죽어 가게 될 것이라는 게 바로 이 두 번째 세 번째 대접 재앙의 내용인 것입니다.

 

(시106:15)

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구한 것을 주셨는데 그 게 그들에게 복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만드는 저주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자 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무리들은 모두 사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보면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라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웃사가 죽었습니까?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법궤를 싣고 가는 소가 뛰어서 그 법궤가 떨어질까 봐 그 법궤를 잡았던 웃사를 왜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했습니까?

사무엘 하 6장 6절에 나오는 그 ‘붙들다’‘아하즈’라는 말은 소유의 개념이 들어있는 단어라고 했지요. 그 사건은 마치 그 법궤가 자기의 소유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도 내 아래 두고자 하는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이 추구하는, 힘을 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짓는 것입니다. 베레스는 히브리말로 ‘쳐내다’라는 뜻이고 ‘웃사’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신으로 섬기고 좇고 있는 것들을 모두 쳐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무리들도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악한 무리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방치해 두고 계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세 번째 재앙을 경제적인 재앙으로 해석을 하는 학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고대 시대 바벨론이 바다를 이용한 교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제적인 손실을 가리켜 바다에 부으시는 재앙이라고 해석들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별로 거기에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성경에는 말세 기간 동안에는 시편 73편의 말씀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부유하고 형통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된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무리들에게 경제적인 물질적인 재앙을 내려서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해석은 왠지 모순된 해석처럼 보여 집니다.

 

그런데 셋째 대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대접이 강과 물에 쏟아지는데 단순히 강과 물이 아니라 강과 물의 근원(헬라어로는 ‘페게’)에 쏟아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모세가 강을 피로 만들었을 때 애굽 술사들도 똑같은 재주를 피웁니다. 역시 그들도 강을 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요한 계시록에서 강과 물의 근원에 대접을 쏟았다는 것은 이제 그 재앙은 어떤 재주로도 피할 수 없는 저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술사들의 얄팍한 마술은 강과 물의 근원까지 피로 만들 수 있는 전능자의 능력을 결코 흉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어떤 재주로도 피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계16:5-6)

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세 번째 대접이 쏟아지고 난 뒤 물을 차지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물을 차지한 천사는 7장1절의 바람을 통제하는 천사와 14:18절에 불을 통제하는 천사와 비교될 수 있겠죠.

그 천사가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시다’라는 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 그 심판이 의로운 이유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지요?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도 피를 마시는 것이 정당하다’ 그게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우신 이유입니다.

 

(계17:4-6)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이렇게 악한 세력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그 피에 상응하는 재앙을 지금 그들의 시간 속에서 받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 영원한 보복을 당하게 될 것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 일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발현이기 때문에 필연적이라는 것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분의 자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 분은 그 분의 자녀들의 피를 흘리게 한 악한 무리들을 그냥 놔두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천사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고 중간에 추임새를 넣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18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계18:5-6)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하나님은 이렇게 복수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의 자녀들의 편이십니다. 그 분의 자녀들만을 위해 이 우주를 경륜해 나가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세상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사시기 위해 세상에서 피를 흘리고 계셔요?

 

(딤후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는 분명 이러한 피를 흘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건한 삶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조롱하는 그런 피 흘리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피의 값으로 복수를 해 주지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으면서 요한 계시록의 이 계시가 진리라고 믿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분명 성도는 피를 흘리게 되고 하나님은 그 피의 값을 세상 사람들에게 물으실 거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는 교회에는 전혀 성경에 계시된 내용이 사실로 일어나지 않고 있잖아요. 뭐가 잘못 된 거죠? 우리가 잘 못된 거죠. 그러니까 이런 구절들을 읽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계신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러한 구절들을 접하게 될 때 힘이 나는 것입니다.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나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위인의 자리에 올려놓고 박수만 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100세에 난 아들을 바칠 수 있었을까?’‘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었을까?’‘바울은 어떻게 그런 고난을 견뎌 냈을까?’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분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도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보라고 아브라함과 다윗과 바울이 등장하는 것이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낸 사람들의 전기문이 아닙니다.

 

나찌의 장군이었던 롬멜을 누가 영웅으로 만들어 줬는지 아세요? 독일 사람들이 아니라 영국군이 롬멜을 위대한 장군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대영 제국의 황제의 군대가 한낱 독일군에게 연전연패하고 있을 때 영국군들이 자기들의 열세에 핑계를 대기 위해서 상대 적군의 장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저런 훌륭한 장군 때문에 우리가 졌다’라는 좋은 핑계를 만든 것이죠. 여러분, 피 흘리며 싸우다 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그런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고 부러워만 하는 것은 우리의 파렴치한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은 자기의 유익 때문에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지는 않잖아요. 적어도 여러분은 자기 충신의 아내를 겁탈하고 그게 발각 날까봐 그 충신을 죽이는 그런 잔인한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여러분은 자기와 교리가 다르다고 사람들을 시켜 돌로 때려죽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제 완성된 복음까지 한 권으로 갖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왜 관중석에서 박수만 치고 계셔요? 필드로 나가셔야 지요.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박수를 치고 아무리 열심히 응원을 한다 해도 나중에 시상식 때 여러분 머리에 면류관 안 씌워줍니다. 여러분은 이제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냥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멀리서 박수나 치면서 부러워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움직이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건을 향해 여러분의 팔 다리를 움직이시면 세상은 반드시 여러분의 피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이 흘리신 피를 하나님께서 세상에 갚아 주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계속해서 8절과 9절을 보세요.

 

(계16:8-9)

8        네 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이 넷째 대접의 재앙에서 성도들은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게 7장에 미리 나왔었습니다.

 

(계7:15-17)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렇게 무시무시한 대접 재앙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장막으로 덮여진 성도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릴 때 어떻게 이스라엘이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땅 ‘고센 땅’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살고 계셔요? 여러분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늘의 유리 바닷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계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무서운 대접 재앙 속에서도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전히 이 땅 사람들하고 똑같이 이 땅의 것들만을 추구하고 계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들처럼 살고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그 하나님의 재앙에 그대로 타 버리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10절과 11절을 보시지요. 다섯 번째 대접입니다.

 

(계16:10-11)

10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다섯 번째 대접이 짐승의 보좌에 쏟아지니까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집니다. 이 재앙은 애굽의 아홉 번째 재앙과 흡사하지요? 다섯 번째 대접이 쏟아지자 사단의 나라가 어두워집니다. 이 어두움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을 때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입니다.

 

(요1:5)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골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일2:11)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성경은 사단의 나라를 어두움, 흑암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그 악한 무리들은 지금 현재 다섯 번째 대접재앙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영원한 흑암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칠 흙 같은 어두움 속에서 눈이 멀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저주받을 자들을 그대로 그 흑암 속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11절에 보시면 그럼에도 ‘그들이 회개치 아니하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재앙들은 ‘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 재앙들이 자기들에게 임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이나 자연재해 같은 물리적인 고통을 허락하시거나 아니면 그들의 죄악 된 삶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초하는 정신적인 불안함이나 피폐함이 오게 될 때 죄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흑암 속에서 이 세상의 힘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삶 자체가 지옥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몸부림 자체가 지옥과 다름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만족과 행복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다빈치 코드니 유다 복음이니 하면서 들고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4,000만 부가 팔려 나갔습니다. 그 소설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 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들을 낳고 잘 살다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후손들이 살아있다고 주장합니다. 원래는 그 소설이 나오기 전에 영국의 BBC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을 찾아 확인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의 모태가 된 것이죠. 지금 그 소설이 영화화되어서 다음 주에 개봉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그냥 웃음이 나지요?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눈을 뜨셨어요? 하나님께서 뜨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 흑암 속에서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두움 속에 있는 분별없는 사람들의 주장에 웃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기독교 총회에서 법원에다가 그 영화의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그 영화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거라는 노파심에서 들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의해 흑암에서 광명으로 옮겨진, 눈을 뜬 사람들은 그런 영화 때문에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이렇게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을 대적 하는구나’ 하고 더욱 더 그들의 신앙을 굳게 다지게 되지 절대 거기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제 대학동창 녀석하고 통화를 하다가 이 다빈치 코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친구는 성경을 소설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무지해서 소설책을 믿고 소설처럼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성경은 성령 하나님께서 쓰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까? ‘에이, 거짓말, 네가 봤어? 증거 대 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네 이름은 누가 지어줬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셨지’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에이 거짓말, 네가 봤어?’ 그랬더니 ‘아니 못 봤어, 근데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나도 하나님이 쓰신 것은 못 봤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분명 내가 성령의 감동으로 너희를 교훈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성경이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는 걸 믿어’ 그랬습니다. 어차피 눈이 먼 사람들하고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눈 먼 사람들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영화를 보고 ‘역시 예수와 성경은 가짜였어.’로 가지, 진짜 눈을 뜬 사람들은 전혀 해 될 것 없습니다. 재미있게 보세요. 유치하게 촛불 들고 ‘그런 영화 보지 말자‘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신데렐라 맨, 아폴로 13을 만든 론 하워드 감독이 만들었으니까 오죽 잘 만들었겠습니까?

 

유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일은 완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배신자 유다를 재해석하는 책이 유다 복음입니다. 그 유다 복음은 최근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벌써 2세기 초대 교부 중 한 분인 이레니우스나 에피파니우스 같은 분들의 책에 그 유다 복음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유다 복음이라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 이단이었던 영지주의 자들에 의해 비롯된 엉터리 책입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에 와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제가 그 내용을 죽 읽어보니까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근거한 그냥 어처구니없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렇게 빛으로 옮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분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거짓 주장들에 미혹되어서 사망으로 가게 되지만 오히려 우리 성도들의 신앙은 그런 가짜들로 말미암아 더욱 더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인하려는 시도가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 속에 던져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머지않아 영원한 흑암 속으로 들어 갈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해야 하는 빛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눈을 뜬것처럼 밝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이켜 회개를 한 것입니다. 회개라는 단어의 의미는 유턴이라는 의미입니다. ‘돌아서서 고치다‘가 회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같은 저주의 대접이지만 우리에게는 회개의 촉매가 되며 우리의 거룩을 완성하는 은혜의 대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러한 진노의 대접들이 나타나고 진노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여러분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대접이 쏟아지게 된다는 것 잊지 마세요. ‘재앙의 대접, 전쟁의 대접, 기근의 대접, 질병의 대접, 자연 재해의 대접, 미혹의 대접’ 그러나 그러한 대접들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은혜의 대접이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오늘도 행복하게 기쁘게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