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성령 충만한 예배자의 삶
(엡5:18-20)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우리 성도들이 세월을 아껴서 해야 할 일들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 동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 구원은 왜 확실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점점 더 깊이 확실하게 알아 가는 데 우리의 시간을 써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지요.
그런데 사도는 세월을 아껴야 함을 강조한 뒤에 바로 “술 취하지 말라”는 권고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술 취함으로 대표되는 방탕한 삶은 우리의 세월을 소비하게 하는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너희가 세월을 아껴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술 취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 이후부터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들에 관해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바울은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늘 서로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 줘야 한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성도간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그들이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고 그 것을 자랑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어 못 견디게 됩니다. 그 것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모이는 예배의 시간이 되면 항상 이렇게 서로에게 권고의 노래를 불러주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교창으로 혹은 합창으로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비투니아의 행정 장관이었던 플리니라는 사람이 트라얀 황제에게 발송했던 편지가 발견 되었는데 그 편지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심지어 동트기 전에도 서로 모여 성가를 교창 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자들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에게 화답한다.”는 말은 감사와 기쁨을 아는 진짜 성도간의 깊은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 후반부“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성도들은 서로 간의 교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열심을 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교제는 어디에서 절정을 이루어 나타나게 되지요? 우리가 드리는 “공적 예배”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이 단어들은 예배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19절의 말씀은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구원을 기뻐하며 영원히 함께 살게 될 형제자매들과 함께 모여서 교제를 나누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도 열심을 내야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소홀히 여길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 밑에 20절의 내용도 역시 “예배”라는 단어로 축약시킬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엡5:20)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그들이 얻은 구원이 너무 크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를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어떤 삶이라고 부릅니까? 예배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롬12:1)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런데 그 예배의 삶을 가리켜 “거룩한 산제사”라고 표현을 하지요?
구약의 제사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예배를 제사에 견주어 표현을 하는 것은 그 제사에 담긴 원리와 정신은 오늘 날 예배와 예배의 삶에 그대로 전승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의 제사에 관해 공부를 하면 우리의 예배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우리가 살아야 하는 예배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겠죠.
그 구약의 제사에 대해 공부하기 전에 먼저 “예배“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의미부터 정리를 해 놓으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예배”는 히브리어로 “아바드”입니다. 이 “아바드”라는 단어는 노예가 주인을 섬길 때 쓰는 “섬기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고대 사회의 노예의 주인은 그 노예의 생명까지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노예는 주인 앞에서 재산이나 인격이나 이름조차도 주장하거나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내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그런 예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하”라고도 합니다. 이 “샤하”라는 단어는 “부복하다”라는 뜻입니다. 부복이라는 것은 배까지 땅에 대고 납짝 엎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주인 앞에서 나는 납작 엎드려 없어지고 그 주인만 드러나는 것을 예배라 하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배는 헬라어로 “프로스 큐네오”라는 단어로 표기가 됩니다. 헬라어의 “pros”는 "어디 어디를 향하여“라는 뜻이고 큐네오 라는 뜻은 ”입 맞추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노예가 주인의 발에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의 입맞춤을 할 때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깊은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발에 정성껏 입을 맞추는 행위입니다.
또 다른 헬라어는 “라트류오”입니다. 이 “라트류오”라는 단어는 섬기는 대상의 유일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영원히 한 주인만을 섬길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라는 것은 예배의 대상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그 예배 받으시는 분의 영광을 위한 행위여야지 내가 힘으로 섬기고 있는 다른 것들을 동시에 구하는 행위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겼던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나를 버렸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어로는 예배가 뭡니까? worship, 이 worship이라는 단어는 가치를 뜻하는 worth와 신분을 나타내는 ship의 복합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최상의 가치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신분의 어떤 분께 나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라는 개념 안에는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세월을 아껴 살아내야 하는 예배의 삶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레위기로 가서 구약의 제사가 갖고 있던 정신과 원리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번제와 소제 그리고 속죄제와 속건제 그리고 화목제 이렇게 다섯 종류의 제사는 꼭 드려야 하는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한번 보자고요. 여러분이 오늘 공부를 마치시면 남들이 수면제라 부르는 레위기가 아주 재미있는 책이 될 거예요. 먼저 번제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레1:1-9)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4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6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절을 보시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번제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고 나옵니다.
그 말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반드시 그 제물이 흠이 있는가, 없는가, 살펴보고 준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의 시간은 잘 준비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토요일 밤에 밤늦게까지 비디오를 본다거나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하고 잡담하다가 다음 날 온전한 예배를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예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TV를 보긴 봐야겠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말이 필요 없는 프로를 즐겨 보았습니다. 애니멀 채널을 거의 고정시켜 놓고 매일 밤늦게까지 동물의 왕국만 보았습니다. 그 때는 밤에 꿈을 꿔도 전부 동물만 나왔습니다. 사자, 코끼리, 원숭이, 뱀 이런 것들만 꿈에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보통 토요일은 다음 날 주일을 준비하느라 일찍 잠이 들거나 성경을 보거나 했었는데 어느 날, 그 날이 토요일인데도 토요일인 줄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동물의 왕국을 보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교회 예배에 가서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단 앞에 딱 섰는데 그 전 날 보았던 사자들의 교미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것입니다. 애써 머리를 흔들어도 자꾸 그 장면이 떠올라요. 그리고 앞에 계신 분들이 전부 기린, 얼룩말, 도룡뇽 이런 것들로 보여요. 그 날 제가 하나님을 잘 예배했을까요? 예배 시간 내내 머릿속으로 그 사자들 떼어놓느라고 그 날 뭘 했는지 생각이 안 나요.
예배는 준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준비 없는 예배가 결코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어머님 아버님 세대는 항상 새 돈이 들어오면 연보 돈으로 모아 두셨습니다. 일주일 내내 새 돈이 한 장도 안 들어오면 항상 토요일에 헌금할 돈을 다리미로 다려서 성경 책 안에다가 구겨지지 않게 잘 준비해서 연보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예배를 위해 준비하시는 분들이 예배 시간에 늦으시겠습니까? 절대 그런 일없습니다. 오히려 20-30분 일찍 가셔서 예배당에 앉아서 기도하며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저 참석만 해 주면 감사한 지경까지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계속 해서 3절을 보시면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 하시도록 드릴지니라.’
제사는 여호와 앞에 열납이 되는 것이 제사입니다. 다른 말로 올바른 예배는 내 기분이 좋아지고 내 감정을 달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이 바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바른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간과하면 이 땅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대부분 인간들이 보기에 좋은 “쇼”로 전락을 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를 보면 성악을 전공한 성가대 솔리스트들을 돈을 주고 고용을 하는 교회들이 있지요? 그거 누구 들으라고 돈 주고 고용하는 거지요? 하나님 들으시라고?
하나님은 노래 못 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은 안 들으시나요? 사람들 들으라고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성가대는 이 정도다“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지요.
교회는 용병을 사다가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교회 멤버들 중에서 은사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원해서 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제가 전에 1902년까지 무려 350년간 교황청의 남자 어린이 성가대의 목소리를 아이처럼 맑게 유지하기 위해서 교황의 지시로 그 교황청 어린이 성가대원들을 거세 시켰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정말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기뻐 받으셨을까요? 그 미성의 찬양은 교황과 그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귀에는 아름답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그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소리라면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변성기를 주셨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예배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평생 쇼나 하다가 올바른 예배는 한 번도 드려보지 못하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세요.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번제물에 안수를 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안수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했습니까? 나의 모든 죄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준비된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회개의 행위라고 했지요?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나를 그 번제물에게 전가시켜 죽여 버림으로써 그 번제물은 내가 되어서 죽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제사가 바로 드려지면 나의 죄가 사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드리러 간 사람은 자신이 죄인 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예배를 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깊은 회개를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여전한 죄인 됨을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쏟아진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절대 예배를 경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리에 가장 좋은 준비 된 옷을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격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만이 츄리닝 바람에 슬리퍼나 질질 끌고 눈곱도 안 떼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여러분, 누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고 가는 옷을 더 신경 쓰세요? 아니면 예배에 참석할 때 입는 옷에 더 신경 쓰세요?
만일 여러분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비행기 사고가 나서 거의 대부분이 죽었는데 그 중에 어떤 분이 필사의 노력으로 여러분을 구출해 주고 그 분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을 기념하는 기념식에 여러분 츄리닝 입고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을 사망에서 건져주신 그 하나님을 기념하고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리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거지 동냥 던져 주듯이 그렇게 참석을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설교를 하는 사람조차도 티셔츠 쪼가리 입고 반바지 입고 강대상에 섭니다. 사람들은 그런 목사를 오히려 신식 목사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합니다. 이건 언어도단입니다. 좋은 옷을 입으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시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라고 나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전가시킨 그 제물을 직접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 제물의 가죽도 직접 벗겨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직접 그 제물의 각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직접 그 제물의 내장을 물로 씻어내야 합니다. 9절을 보세요.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죽이면서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의 가죽을 벗기면서 자기의 위선의 가죽도 벗겨 버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의 각을 뜨면서 자신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낱낱이 각을 떠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 번제물의 내장을 씻으면서 그 마음의 죄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 내 놓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그대로 우리의 예배에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자기 자신의 각을 뜨는 시간이며, 자기를 죽이는 시간이며 자기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낱낱이 열어서 내려놓는 시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용해서 그렇게 나 자신의 각을 뜨고 나를 죽일 수 있지요?
(히4:12-13)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계1:16)
16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속들이 각을 뜰 수 있는 것이고 그 말씀의 검으로 죄악 된 우리의 삶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걸 아는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 절대 졸 수 없지요? 어디 다른 곳에 한 눈 팔수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남의 전화기가 울려도, 아이가 우는소리가 나도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신자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정수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예배의 삶을 경홀히 여긴다면 그게 어찌 복음을 바로 이해한 성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소제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2:1-2)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 소제는 충성과 헌신의 제사입니다. “소”자는 “흴 소”자입니다. 그래서 하얀 옷을 소복이라고 하지요. 하나님 앞에 곡식을 하얗게 빻아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바로 이 소제의 정신도 깃들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반드시 그들의 삶에 충성과 헌신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와서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소제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그 곡식은 고운 가루여야 합니다.
그 말은 충성과 헌신과 봉사에는 나의 생각, 나의 고집, 나의 편견들이 응어리 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을 곱게 갈아서 하나님이 빚으시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고운 가루에 첨가되는 것이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아서 함께 취하여 불살라야 합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기름과 유향은 값비싼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 하는 충성과 헌신과 봉사는 내가 다 쓰고 남은 허드렛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드리는 것이 충성과 헌신과 봉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는 봉사를, 헌신을 자기의 배를 위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모든 스케줄 뒤에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하는 것으로, 마치 거지 동냥 주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에게 이익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에 나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쏟아 붓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교회 일도 좀 해 볼까?“ 이렇게 교회 일을 합니다.
찬양대 연습은 나의 가장 쓸모없는 시간 축에 들어갑니다. 그렇습니까? 그 시간에 뭔가 다른 좋은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빼먹어도 좋은 시간입니다. 그렇죠?
아니요. 소제는 가장 값비싼 고운 기름과 유향을 함께 태워서 버리는 제사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가장 값진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려 봉사하고 헌신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으셨으면서도 왜 지금 천국에 안 계시고 여기 계시지요?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렇게 광야 인생을 살게 만드신 것입니까? 여러분은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지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하나님 말고 여러분의 힘으로 여기고 있던 것, 여러분이 하나님 말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셨던 이 세상의 것들을 태워서 버리고 올라오라고 이 땅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신앙의 여정 동안에 여러분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 땅의 가치들을 하나하나 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버려지고 여러분 안에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 여러분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일 즐겁게 노는 시간 일요일 오전 11시, 그 주일 예배 시간을 여러분은 여기 앉아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 예배 시간이 무슨 생산 적인 시간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돈이라는 힘을 여러분은 헌금 통에 넣어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번제물을 다 태워서 재로 만들어 버리듯 소제 물을 다 태워서 재로 만들어 버리듯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 말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다 태워서 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정신인 것입니다.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헌금을 하는 것은 교회가 여러분의 돈을 유용하게 잘 사용해서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주기를 기대하며 내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많이 한만큼 손해지, 많이 한만큼 여러분에게 몇 갑절로 보상되지 않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해서 죽었습니까? 안 해서 죽었습니까? 헌금해서 죽었습니다.
그냥 헌금 안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헌금을 오도해서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를 위해서 드린 바람에 죽은 것입니다.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하는 예배의 정신에 위배되었기에 그들이 죽은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과부의 두렙 돈은 그 과부가 가진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과부는 자기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헌신을 했기에 그 두렙 돈의 가치는 형편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숨과도 같은 두렙 돈을 하나님 앞에 버림으로 해서 그 과부는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헌금은 무슨 대단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도구가 아니라 여러분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내가 낸 헌금을 유익하게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핑계로 여러분이 헌금을 게을리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성전을 도적의 굴혈이라고 힐난을 하셨지만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헌금 통 맞은편에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누가 헌금을 잘 하는가 보자“ 하고 지켜보고 계셨음을 잊지 마세요. 그 말은 도적의 굴혈에 내는 헌금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적의 굴혈에 내는 헌금이 왜 가치가 있는지 아세요? 헌금은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 위해 하는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일을 하시면서 무슨 거지 동냥 주듯이 “했다 말았다”할 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세요. 그건 성령 충만한 예배 자의 헌신이 아닙니다.
300 데나리온 짜리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은 여인을 향해 가롯 유다가 경제 논리를 가지고 나무랐습니다. “그 비싼 걸 그렇게 낭비를 하다니, 그 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텐데...” 언뜻 보면 가롯 유다가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배하는 사람은 세상의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그냥 자신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성가대 지휘자께서 연습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성가대에 서지 말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때 성가대도 우열반을 나누어서 하는가? 의아했었습니다. 반은 나오고 반은 앉아 있어서 두 반으로 나눈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사정이 있었더군요. 잘 하신 거예요. 그게 바로 예배가 뭔지를 아는 분의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그렇게 아까우면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다가 정말 나의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릴 수 있을 때 그 때 하세요. 그게 소제 안에 들어있던 예배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기름과 유향은 구약에서 성령과 기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예배하는 자의 헌신과 충성과 봉사는 성령하나님의 조명 아래 기도로 행해져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시면 이 소제를 드리는 데 있어서 주의 사항이 나옵니다.
(레2:11)
11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 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소제에는 누룩을 넣지 말아라”그러십니다. 누룩은 뭐에 쓰는 겁니까? 빵을 부풀리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배하는 자들아, 너희의 헌신과 봉사를 부풀려 자랑하지 말아라“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떤 나이 드신 전도사님이 떠벌리고 다니기를 자기가 교회를 30개를 개척했다고 떠벌리고 다니셨습니다. 저희는 정말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개척 선교회“라는 개척교회를 후원하는 선교회에 매달 20불씩 3년을 헌금하셨대요. 그 3년 동안 그 선교회에서 지원한 교회가 30개랍니다. 그걸 가지고 자기가 교회를 30개 개척했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LA에 조금 알려지니까 “저를 키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대요, 복음 방송에 근무하시는 분께 들었는데 방송국에 와서 간증하는 사람, 인터뷰하는 사람 여러 명이 ”걔 내가 키웠어“ 그러시더랍니다. 전 잘 모르는 분들인데 자기들이 저를 키웠대요.
그게 바로 누룩입니다. 남이 한 일은 우습게보면서 자기가 한 일은 커다할게 부풀려 떠벌리는 것,
그리고 꿀을 넣지 말라는 말은 헌신과 봉사에 달게,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제에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3절을 보세요.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제에 소금을 치라는 것은 나는 그 헌신과 봉사에 녹아 들어가 절대 겉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소제에 소금을 친다는 것은 구속사 적 관점에서 “소금 언약”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주일 날 편안하게 하나님을 예배하실 때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소금 같은 숨은 손길들이 있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찬양 가사나 성경 구절을 이 스크린을 통해 보시기 위해서는 하루 전에 그 내용을 타이핑하는 숨은 손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편안하게 주차를 하실 수 있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주차에 수고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화장실을 불편함 없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매주 휴지를 사다가 갈아 끼우고 화장실 청소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식사를 위해 매주 김치를 담그시고 부엌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다 나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이들이 쾌적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그 방 배큠을 하시고 페인트를 하시고 책상을 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과 봉사가 바로 소금을 친 제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헌신과 봉사와 충성은 절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당도하게 되지요?
세 번째로 속죄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속죄제는 말 그대로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속죄의 뜻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레4:3-29)
3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13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22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23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 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27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28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
29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희생을 번제소에서 잡을 것이요
잘 보시면 제사장이나 족장 평민 회중 할 것 이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죄가 드러나면 속죄제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에서처럼 성직자들은 죄를 사하여 주는 권한이 있고 평민들이나 회중들만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속죄제를 언제 드리게 되어 있습니까? 28절 보세요.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는 즉시“ 죄를 깨달은 즉시 속죄제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말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죄의 지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늘 말씀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속죄제도 역시 자기가 제물에 안수를 하고 자기가 제물을 잡아야 하고 자기가 각을 떠야 합니다. 이 말은 속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완결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속건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속죄제와 속건제를 잘 구별을 못하십니다. 속죄제는 이미 저질러 버린 돌이키지 못할 죄에 대한 속죄를 할 때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고 속건제는 자기 잘못에 대한 보상의 여지가 남아 있을 때 드리는 제사를 속건제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드릴게요. 만일 살인을 했다거나 안식일을 범했을 때 그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상이 되지 않지요. 그 때는 속죄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은 300냥을 부당 이득을 취하고 난 뒤 처음에는 그게 죄인 줄 몰랐다가 나중에 말씀 속에서 그게 죄인 줄 깨달았을 때 그 상대방에게 자기가 부당이득을 취한 부분을 다시 되 돌려주고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속건제라고 부릅니다.
(레5:14-16)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5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만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을 드리지 않고 취했을 때는 그 원금에 5분의 1의 벌금을 가산해서 제사장에게 주고 속건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럼 사람에게 행한 죄는 어떻게 속건이 되는지 보자고요.
(레6:2-7)
2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 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4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5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6그는 또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올지니 곧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 올 것이요
7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바른 예배를 하기 위해서는 예배당 안에서만 경건한 척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우리의 삶이 그 예배의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남의 돈을 엄청나게 떼어먹고 그 사람에게 커다란 피해를 준 후에 자기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다 고하고 사함을 얻었다고 앉아서 예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돈을 떼먹힌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 하나님은 너를 용서했을지 몰라도 나는 너 용서 안 했어” 그럴 거 아닙니까?
우리 성도라는 사람들이 이 속건의 정신을 너무 외면해 왔기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욕을 먹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평가하기를 “기독교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저 하늘에서도 자기들만 좋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열을 내는 이기적이며 독선적인 집단”으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을 진심으로 사죄하고 사과하는 행위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빌레몬이라는 골로새 교회 신자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가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났다가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그 오네시모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당시 노예의 주인은 노예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노예가 주인을 떠나 도망을 쳤을 때는 십자가형으로 죽여 버릴 수 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처지의 오네시모에게 다시 네 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오네시모가 훔친 것은 바울이 대신 갚아 주겠노라고 편지를 씁니다. 그게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그게 오늘 날 예배의 정신으로 들어있는 속건제의 정신인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갚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라고 우리에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라고 했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은 실컷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자기만 구원받았다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가짜 구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마5:23-24)
23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이게 바로 예배 속에 들어 있는 속건제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나의 허물을 갚아야 하는 상대방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5:6-8)
6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
7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8만일 죄 값을 받을만한 친족이 없거든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수양 외에 돌릴 것이니라
그 죄 값을 받을 본주가 없을 때는 그 친족에게 그 죄 값에 오 분의 일을 보태서 주어야 합니다. 만일 친족도 없을 때는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것을 오늘날에 적용을 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 값을 받을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는 헌금을 해라“라고 적용을 하면 됩니까?
(마25:40)
40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까마득한 옛 날에 죄인 줄 모르고 저질렀던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나지요? 그런 죄들은 어떻게 속건을 하는가? 우리 주변의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많은 준비와 노력과 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화목제라는 것이 있지요. 이 화목제는 잔치제사입니다.
화목제에는 세 가지의 제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감사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일이 있을 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서원제입니다. 서원 제는 하나님께 서원을 할 때나 서원이 끝났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세 번째가 낙헌 제입니다. 자원 제라고도 하지요. 그저 하나님이 좋아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화목제에는 다른 제사와는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레7:15-18)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잘 보시면 감사제에 드린 제물은 당일 날 다 먹어야 하고 서원 제나 자원 제에 드려진 제물은 그 다음 날까지 다 먹어야 합니다. 만일 삼일 째 되는 날에도 고기가 남으면 그 고기는 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태우지 않고 먹게 되면 그 제사는 무효가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되는 것이 화목제의 특징입니다.
유일하게 이 화목제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고기를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보통 소를 한 마리 잡으면 700에서 800kg의 고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기름은 떼어 태우고 가슴살과 왼 쪽 뒷다리 한 개만 제사장에게 주고 나머지는 전부 제사 드리는 사람이 먹어야 하는데 그게 보통 300kg, 500근 정도 되는 양입니다.
감사제의 경우 그걸 해지기 전까지 먹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면 다음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소를 잡고 각을 뜨고 내장을 씻고 기름을 태우고 나면 오후쯤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질녘까지 두세 시간이 남게 되는 데 그 두세 시간 동안 고기 500근을 먹어치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눠줘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누어 줘 가지고는 그 걸 다 소화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내가 미워하는 사람, 아니 내 원수까지 다 나누어 줘야 겨우 그 고기를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사 드리는 사람은 화목제를 지내면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올바르게 드려지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원수까지도 섬겨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원수에게까지 나의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그 제사는 무효가 될 뿐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되는 그 제사의 정신이 오늘 날 예배에도 그대로 흘러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나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죄 된 습성들과 집착들을 각을 뜨는 것이며 내 이웃의 아픔을 돌아 보는 긍휼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이 흘러넘치는 성도들의 교제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충성과 봉사의 열매를 나타내는 행위이며 원수까지도 섬기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축제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이고 진지한 열정이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시간이 끝나게 되면 여러분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역시 그 예배자의 삶을 사시면서 여러분의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좀 더 예배에 진지하게 참여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십니까?
그리고 성령 충만한 자로서 일상의 삶 속에서도 예배자의 삶을 성실하게 사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지금도 잘 하고 계시지만 조금씩만 더 신앙생활에 진지해 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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