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 선한 목자와 선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II)
(요10:1-5,11-15)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는 지난주에 본문에 나타난 선한목자의 특징을 통해 양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목자 사역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분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절대적 가치로 사랑해 주시며(각각 이름을 부르다) 항상 우리 앞서 가시면서(인도하여 내다) 우리의 모든 죄와 어두움, 심지어 우리의 사망까지도 다 삼켜 버리시는 참 목자이십니다.(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다)
John owen목사님의 저서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의 그 제목처럼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삼켜버리시고 당신의 죽음을 자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바로 선한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한목자의 삶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제단의 제물이 되어 죽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선한목자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고 요한계시록은 성도인 양들을 가리켜 ‘어린양이 어디로 이끌던지 군소리 없이 좇아가는 양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이끌고 가십니다. 목자이신 어린양은 자신이 이끄는 양들을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양들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곳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먼저 앞서서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며 전진하는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을 좇아가며 그 앞선 어린양의 모습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95:6-7)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선한목자는 양들이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고 온전히 복종을 하는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한 선한목자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양들을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는 선한목자의 모습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어 힌트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다 들으시면 마치 오늘 본문의 선한목자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성경 전체에 흩어져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온통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제가 몇 사람만 찾아서 소개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목자가 누구입니까? 형에게 맞아죽은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입니다.
(창4:2)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 이었더라
인류 최초의 목자 아벨은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된 자였습니다.
(창4:4)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여기보시면 하나님은 아벨 자신과 아벨의 제물, 즉 그의 삶 전체를 열납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목자인 아벨과 그의 삶을 기뻐 받으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죄 없는 자가 세상을 상징하는, 힘을 소유한 가인에게 맞아 죽어 피를 뿌림으로 그 자신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였던 아벨 자신이 제물이 되어 어린양처럼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창4:10)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여기에서 ‘호소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짜아크’는 ‘부르짖다, 예배하다’라는 의미의 단어라 했지요? 그러니까 아벨은 살아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와 짝이 되는 신약 성경의 한 구절을 찾는다면 어느 곳이 적합하겠습니까?
(빌2:8)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선한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목자인 아벨이 죽고 그 대신 죽음에 의해 이 땅에 탄생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셋입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를 잘 보세요.
(창4: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목자인 아벨의 피 값으로 대신 태어난 사람이 셋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셋에게 ‘씨’라는 단어를 붙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여러 번 살펴 본 것처럼 그 ‘씨’ ‘제라’라는 단어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 안에서 연합되어 탄생하게 되는 교회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이야기는 목자인 그가 제물이 되어 죽음으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새로운 씨가 탄생하게 되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목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죽었지만 지금도 그가 믿음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11:4)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 하느니라
여기보시면 아벨의 제사와 예물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자라 하셨답니다. 그건 단지 양을 잡아 드린 아벨의 제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던 아벨의 제사가 바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하나님께 복종했던 예수의 제사처럼 그러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동물 제사로도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가 의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10: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만 ‘의’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로 아벨과 하나님 사이가 ‘의’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이야기를 아벨의 삶이 담고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 믿음을 매개로 하여 지금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그 구절을 보면 마지막 후미 부분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받고 있는 ‘아우테스’ 라는 대명사 앞에 ‘디’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단어는 ‘~을 통하여, ~을 매개로 하여’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하여 아벨의 이야기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양을 치는 목자로서 예수님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 요즘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 공부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상속자로서 인정될 수 있는 안락한 집을 떠나 열심히 일을 하여 그 대가로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선한목자의 모습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고 배신과 모함을 통과하며 라헬과 레아 두 아내를 얻습니다. 그 이야기는 단순히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순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 예배 시간에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첫 번째 신부로 지목하시고 그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롬3:1-2)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9:4~5)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이스라엘은 구속사 안에서 하나님의 첫사랑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이 되시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사랑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구속사의 순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는데 실패하셔서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모델로 삼으셔서 인간들은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과 노력과 열심으로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마디로 죄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오로지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순서적으로 표현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순서로 볼 때 하나님께서 두 번째 아내, 즉 이방인들을 아내로 먼저 맞으시고 나중에 처음 사랑했던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으시는 순서로 구속사를 완성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처음에는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셨다가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배신을 당하시고는 화가 나셔서 이방인들을 덤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 구속사의 순서를 양치기 야곱이 라헬과 레아라는 두 아내를 얻는 과정을 통해 힌트 하시는 것입니다.
(렘31:32)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 하였음 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상징적 첫사랑이었던 이스라엘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첫 아내로 첫 사랑 라헬을 얻지 못하였고 첫 번째 아내로 이방인을 상징하는 레아를 얻었습니다. 그러한 구속사의 순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에 가보면 모세가 그 순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신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 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 모세의 말을 바울이 로마서에다가 인용해다 씁니다.
(롬10:19~21)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 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성경은 지금 교회에게, 이스라엘이 먼저 선택되어졌다가 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림으로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그러한 순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측에서의 어떤 노력이나 열심으로도 주어질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순서를 택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유대교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이스라엘이 샘이 나는 때가 올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유대교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다스리는 다윗 왕국이 건설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그렇게 시대마다 분산되어 각자의 역할을 하며 구원으로 돌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양치기 야곱이 그의 삶 속에서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선한목자가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보세요.
(창31:38~42)
38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목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지요?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양들을 보살피며 양들이 낙태하지 않도록 보살폈고 아무리 배고파도 삯군목자들처럼 양들을 잡아먹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목자인 이삭이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지극 정성으로 잘 보살펴서 결국 신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지금도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보살피시며 결국 어린양의 신부로 완성시켜내시는 것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러한 목자 야곱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요17:12)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 이니이다
이사야는 선한목자이신 예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떻게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인지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40:11)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 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게 바로 야곱의 그림에 나타난 선한목자이신 메시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곱의 수고에 의해 값이 지불되고 산 바 된 신부와 양떼들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야곱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양의 우리에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 밖으로 불려나와 목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좇아가는 교회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으세요?
그 야곱의 모습은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가신 그 목자를 좇아 십자가를 지고 역시 영문 밖으로 몰려 나가는 양들의 모습과 동일한 그림인 것입니다.
(히13:12~14)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렇게 자신을 따라 나온 양들, 신부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시45:10~11)
10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 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 지어다
11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 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 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구원은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지 이 저주받은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신부를 온갖 수고를 무릅쓰고 얻어내어 그 신부들이 오랫동안 정들어 살던 아비의 집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의 신부들은 절대 이 세상에 뿌리박고 머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마4:18~22)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여기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데에 그들을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물고기가 물에서 낚여 올려지면 그 물고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아 올려서 죽이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 낚아 올린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 아모스서 4장입니다.
(암4:2)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 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이 아모스서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 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여러 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와 사망과 심판에 푹 젖어서 익숙하게 살던 자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올라와 심판 받아 죽는 것이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으로 가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시는 그 에피소드 바로 아래에 이런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막1:21~27)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 하는도다 하더라
지금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 사건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그 속에 섞여 있는 귀신들린 자를 건져내십니다. 낚아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귀신들린 사람은 분명 한 사람인데 24절을 보시면 그 귀신들린 사람이 ‘우리’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은 지금 자기와 함께 회당에서 예배를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로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귀신들린 자로 부름으로 해서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유대주의에 빠진 모든 이들을 가리켜 ‘귀신들린 자’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귀신들린 자들 앞에 주님이 서셨더니 귀신들린 자의 대표가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하고 외칩니다. 여기서 상관이라는 단어는 전쟁 용어입니다.
(삿11:12)
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그러니까 지금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왜 나를 공격하러 왔느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귀신들린 자를 공격하여 심판하시러 그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게 사람을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귀신들린 자의 외침과 비슷한 대목이 구약에 나옵니다.
(왕상17:17~18)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하고 외치지요? 하나님의 거룩이 죄인 앞에 서게 되면 그 죄를 공격하기 때문에 죄인들이 그 앞에서 ‘왜 나를 공격하느냐? 왜 내 죄를 생각나게 하느냐? 왜 내 아들을 공격하여 죽게 했느냐?’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 낚아 올리라 하신 것은 그들을 물속에서 꺼내어 심판하고 공격하여 죽여 버리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지요?
여러분, 복음이 죄인들에게 떨어지게 되면 그 즉시 그 자리에 죄가 폭로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경외의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속에서 나온 물고기에게 떨어질 저주와 심판이 주님에게로 떨어져 주님이 죽고 물고기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고기는 이제 다시는 저주의 물과 심판의 홍수와는 아무 관계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며 그게 사람을 낚아 올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낚아 올리라는 말씀 바로 다음에 귀신들린 자들 틈에서 낚아 올려져서 이제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귀신들린 자를 상관하셔서, 다른 말로 공격하셔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시고 그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그 유대교의 회당에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유대주의라는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완전히 뽑아내시고 힘의 원리에 젖은 옛 사람을 온전히 죽여 버리심으로 그를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이야기는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사역으로 신부가 되어 세상에서 나오게 되는 어린양의 신부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양들의 이야기를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요셉의 삶도 선한목자의 삶을 힌트 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 애굽 백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 백성들과 함께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는 선한목자로서의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무죄한 주님이 은 삽 십 냥에 팔리신 것처럼 무죄한 요셉도 형들에 의해 팔렸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고소를 당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요셉도 거짓 고소를 당하고 무덤과 같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찬란한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무덤에서 나오셔서 만유의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요셉도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실세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애굽을 다스립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풉니다. 요셉이 7년간의 풍년 기간 동안 양식을 비축하는 선견지명을 보이지 않았다면 애굽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애굽 사람들까지 돌보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속사가 완성이 되기까지 악인과 선인에게 일반은총을 골고루 내려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5:4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구속사가 완성되기까지 애굽 사람들에게도 일반은총으로 함께 하십니다. 부와 명예, 건강 등은 모두 일반은총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앞서 보내신 것은 애굽 사람들을 구하려 하심이 아니라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만을 구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특별 은총입니다.
(창45:5)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렇지요?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앞서 내려오셔서 수난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선한목자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던 애굽 사람들은 목자를 아주 싫어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목자를 좇아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46:33~34)(표준 새 번역)
33 바로 임금께서 형님들을 부르셔서 '너희의 생업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거든,
34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집짐승을 길러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이 다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의 특징은 자신들을 위해 은혜로 십자가를 지시는 선한목자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지요. 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 하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요셉의 삶을 묘사하면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도우셔서 그가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22절부터 24절까지를 쉬운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창49:22)(쉬운 성경)
22 요셉은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샘물가에서 자라는 풍성한 포도덩굴과 같다.
요셉은 담 위에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다
23 사람들이 그를 화살로 맹렬히 공격하고 무섭게 활을 쏘아댄다
24 그러나 요셉의 활이 더 잘 맞고 요셉의 팔이 더 힘세다. 요셉의 힘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온다
이렇게 요셉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참 목자의 모형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도 역시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목자의 모형으로 모세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목자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양들을 인도하여 이끌어 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히11:24~25)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예수님도 세상의 왕이 되게 해 주겠다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지요? 그리고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마4:8~10)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모세는 하나님의 양들을 애굽에서 모두 이끌고 나왔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출10:26)
26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예수님도 아버지의 양들을 한 마리도 잃지 않고 다 데리고 나가십니다.
(요18:9)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리고는 마치 목자가 양들을 먹이는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목이 마르다고 하면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 떼를 훈육하고 가르치는 목자처럼 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단치기도 하고 징벌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선한목자의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도 역시 양들을 각각 불러내어 그들 앞서 가며 그들을 주인이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여 가셨던 선한목자이신 주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중요한 목자의 모형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는 즉시 고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왕이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뒤를 좇습니다. 군사를 동원하기도 하고 창을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 세상 왕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때까지 목자인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결국 세상 왕이 죽고(신약의 표현을 빌리면 ‘결박당하고’)다윗은 왕위에 등극합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참 왕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양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다가 결국 왕위에 오르시게 되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품고 있는 것입니다.
(겔34:22~24)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 이니라
다윗을 가리켜 목자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다윗 왕보다 400년 쯤 뒤에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언이 다윗에 대한 예언일 수는 없습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을 다윗이라 이름 하는가? 그 왕으로 등극하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바로 다윗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그 어떤 것도 해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목자이십니다. 선한목자의 모형인 다윗이 어떻게 양을 쳤는지 볼까요?
(삼상17:33~35)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를 지키시는 선한목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입을 찢어버리고 수염을 잡아 뜯어내면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결국 모두 그 다윗이라는 목자에게 굴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짐승 같은 세상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는 선한목자 예수님이 지금 왕으로 등극해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자의 이빨에서 곰의 발톱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튼실하고 멋진 양만 보살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약하고 병들고 보잘것없는 양에게 더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겔34:16)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보세요. 우리의 목자는 잃어버린 자와 쫓긴 자, 상한 자, 병든 자에게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나 같은 것도 하나님이 사랑하실까?’라는 불경한 말은 절대 가당치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연약한데, 나는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신앙생활에 성실하지 않는데, 그런데도 하나님이 날 지켜주실까?’ 네, 주님은 병든 자를 위해, 약한 자를 위해, 상한 자를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래서 우리가 양 아닙니까? 각기 제 길로 밖에 갈 수없는 양이요. 그 천방지축 양들을 위해 목자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양들을 목자로 완성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목자이신 주님을 선한목자, 큰 목자, 목자 장으로 부른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건 아주 중요한 점진적 표현입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십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의 생명을 탄생케 하신 분입니다. 그게 선한목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큰 목자이시기도 합니다.
(히13:20-21)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선한목자이신 우리 주님은 각기 제 길로 가던 천방지축 같은 우리 양 떼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큰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제 선할 뿐 아니라 크신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이제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성경은 그 큰 목자가 우리를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목자의 삶을 살도록 만드시기 원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큰 목자를 목자장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벧전5:2~4)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목자장이라 부르십니다. 그 말은 그 목자를 따르는 양들도 그 목자의 삶을 좇아 선한목자로 큰 목자로 다른 이들을 섬기며 사랑하며 먹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한목자가 나중에는 목자 장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또 다른 작은 목자들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각각 절대적 가치로 사랑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거나 나에게 유익이 될지 안 될 지로 그들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그들 앞서 나가며 그들의 위험과 손해를 내가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완전한 자기 부인의 자리로 우리는 힘써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완성해 놓으셨고 목자이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선한목자를 좇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선한목자가 어디로 여러분을 인도하든지 기쁘게 따라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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