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 목자의 부르심은 취소될 수 있는가?(I)
(요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은 세상 밖으로 양을 부르시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취소되거나 중도에 포기되거나 실패할 수도 있는가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부르심을 받은 양들이 이 땅에서 자신들의 해야 할 바를 완수하지 못하면 그 부르심의 길에서 중도에 탈락할 수도 있는 걸까요? 쉬운 말로 은혜로 구원 얻은 자들에게 또 다시 율법의 멍에가 지워지게 된다는 주장이 옳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한 은혜가 아닌 반쪽짜리 은혜지요? 반쪽짜리 은혜는 은혜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시작부터 끝까지 적용이 되는 것을 말하며 그 어떤 것이 보태져도 안 되며 그 어떤 것으로도 보답을 할 수 없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믿음에 행위가 보태지는 것은 복음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행위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것입니다.
(롬3:27~28)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에 의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그 은혜에 의해 구원의 완성지점으로 인도되는 것이며, 그 은혜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떠한 모양의 인간의 행위도 가입(加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딤후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제가 여러분 말씀 드렸지만 은혜는 역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어느 때에 한 번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며 심지어 영원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은혜와 사랑의 역동성에 의해 존재할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롬5:20-21)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보시는 바와 같이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삶에 왕 노릇하며 우리를 영생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과 동시에 영원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번 부어진 은혜가 중도에 중단 되거나 포기되거나 실패 되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자신들의 합당한 행위의 부족으로 인해 그 은혜를 차 버릴 수도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척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막6:3)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여기에서 ‘배척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열 두해 혈루 병을 앓던 여인을 고치시며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신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었을 때에 고향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셨던 그 모든 기적과 가르침에 관한 소식을 다 듣고도 그 예수를 신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척을 했습니다. 그렇게 기적은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를 고치실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명확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손 마른 자를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이 그를 고치실 수 있나 없나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를 고치시는가, 아닌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의 내용을 잘 보시면 if he would heal him on the Sabbath 이지 if he can heal him on the Sabbath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서도 기적이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그 분의 능력까지도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 분의 기적 행함을 꼬투리 잡아 그 분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쪽 다 공히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이려 하는 사건의 배경이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도 안식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사건도 안식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안식일이라는 율법의 행위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게 했다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척이라는 단어는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행위를 조금이라도 보태려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이 ‘배척하다’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에 의해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사8:13~15)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 이니라
15절 전체의 내용을 함의하는 단어가 ‘스칸달리조’입니다. 어떤 무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거치게 되며, 넘어지게 되고, 부러지고, 걸리고,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집이라는 것은 에브라임과 유다 지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인간의 행위를 의지하여 율법을 지켜 구원에 도달하려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완전성에 흠집을 내는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은혜에 행위를 보태려 하는 이들은 절대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롬9:30~33)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도 ‘거치는 돌’로 표현된 예수님에게 쓰여 진 단어가 ‘스칸달리조’입니다. 온전한 은혜의 믿음이 아닌 행위를 의지하는 이들이 예수님이라는 거치는 돌에 부딪쳐 쓰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반석이 되시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반석이 되시고 인간의 행위를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셨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게 ‘배척’입니다.
(막6:4~6)
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그렇게 인간들의 가능성을 의지하여 전적인 은혜를 거부하고 은혜의 주님을 배척하는 죄인들이 등장하고 그들 앞에서의 주님의 무력함이 그려진 후에(‘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었다.’) 아주 이상한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이상히 여기셨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다우마조’라는 단어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도 기대하지 못한 반응 때문에 예수님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원래 ‘칭찬하다, 놀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은혜를 거부하고 당신을 믿지 않는 죄인들 앞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드러나신 그 모든 상황을 놀라며 칭찬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러한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며 그 상황을 칭찬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은혜에 의해 완성이 되는 죄인들의 구원은, 그들의 죄인 됨이 드러난 곳에 예수님의 무력함의 모습인 십자가 지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상황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불가능한 죄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며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안식일, 즉 율법을 의지하는 자들이 은혜의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한 자들 앞에서 아무런 권능도 행할 수 없는 모습으로 구원이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지혜는 칭찬받고 찬양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이 믿지 않음을 놀라며 칭찬했다라고 ‘다우마조’라는 단어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으로 가시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좀 더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막12:1~12)
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공경하리라 하였더니
7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11절에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라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기이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다우마조’입니다. 그런데 그 기이함의 내용이 뭡니까?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죄악상이 드러나고 아들의 무력함이 드러납니다. 그 악한 포도원 농부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의한 삶의 열매를 내놓을 수 없는 죄인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소출을 내 놓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요구하러 갔던 주인의 아들도 그들에게 맞아 죽습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자신을 죽인 그들을 살려내는 은혜의 구원이 참으로 놀랍고 칭찬할만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 구원이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죄악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력함의 모습으로 완성되는 구원이 놀랍고 찬양할만한 구원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도 나옵니다.
(살후1:5~10)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10절을 보시면 바울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분이 성도들에게 영광을 얻으시고, 성도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얻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광을 얻다’와 ‘기이히 여김을 받다’라는 어구는 동격의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기이히 여기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능력과 하나님 되심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상태, 즉 하늘의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영광, 독사’라 한다했지요? 따라서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폭로되고 그 앞에서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인들의 구원이 되는 십자가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오래 참음과 공의 등이 모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상히 여기다, 기이히 여기다, 다우마조’의 진의인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에는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악함과 더러움이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앞에서 그 더러움에 맞아죽는 비움과 손해와 상함이 아울러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도 놀라고 찬양하고 칭찬하신 복음의 패러독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완성에 우리의 행위가 보태져야 하며 그것이 부족할 때에는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그런 주장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은혜로 점철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반석이시며 동시에 걸림돌이기도 하신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벧전2:4~10)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지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는 반석이신 예수님을 가리켜 ‘산돌’이요 ‘모퉁이 돌’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반석이신 예수님은 살아계실 뿐 아니라 사셔서 무엇인가를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이들에게는 걸리는 돌이 되시는 주님을 산돌이요 모퉁이 돌로 영접하게 되는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즉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자들은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은혜의 왕 노릇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울러 성경은 우리 성도가 산돌이시오 모퉁이 돌이신 주님을 좇아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 성도가 우리의 행위와 율법을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반드시 산 자로서 어떠한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중도에 부르심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성도들을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신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산돌로서, 모퉁이 돌의 역할을 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돌’이 우리 성도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모퉁이 돌’은 우리 성도들의 사명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퉁이 돌의 역할부터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모퉁이 돌이 뭐하는 돌입니까?
모퉁이 돌은 어떤 건물을 지을 때 한 쪽 구석을 차지하며 벽과 벽을 연결하고 그 구조물을 단단하게 붙들어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스스로의 자원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의 안전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인간들 간의 수평적 관계는 경쟁관계, 혹은 적대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어떤 무리에게 은혜를 선물하셔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력을 다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서로 연계하고 연결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지체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회복된 관계의 초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서, 산돌이 되셔서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미움과 분열과 다툼과 질시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던 관계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들이 한 몸이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는 진정한 이웃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모퉁이 돌의 역할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교회에게 산돌이시며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고 요구를 하는 것은 교회의 본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하여 알려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각자가 모퉁이 돌이 되어 나로 하여금 다른 이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섬겨주는 이들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금 살아서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삶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산돌로, 모퉁이 돌로 좇아 사는 사람이 아니라 거치는 돌로 여겨 그 거치는 돌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거치는 돌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닮은 산돌로, 모퉁이 돌로 살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교회의 초석인 베드로와 베드로의 고백을 가리켜 반석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16:16~18)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울러 그 반석은 예수님 자신이시기도 합니다.
(고전10:4)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생수를 뿜어내어 원수를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공히 맡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산돌이시며 모퉁이 돌이신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산돌이요 모퉁이 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프리칭 투데이(preaching today)라는 잡지에 난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참 재미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분은 오늘날의 성도들의 불성실함과 이기심을 꼬집으며 자기 집 개에게도 세례를 주어 자기 교회 교인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글을 쓰셨습니다.
자기 교회 교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자기 집 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도 전부 세례를 받고 성도라 자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 개도 자기 교회 교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도 없고 연구도 하지 않으며 기도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집 개도 자기 교회 교인들처럼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편리 위주의 삶을 살고, 여전히 쾌락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자기 집 개와 자기 교회 교인들이 뭐가 다르다고 자기 개에게는 세례를 줄 수 없다는 것이냐는 것이지요. 참 부끄러운 지적입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살아서 역동성 있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죽어있는 돌은 다른 이들에게 거치는 돌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살아있는 돌들은 자기의 손해와 상함과 희생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고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러한 자들로 완성해 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부인시키시고 결국에는 우리 안에서 모퉁이 돌의 삶을 사시는 당신을 드러내고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치는 돌이 되어서 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걸려 넘어지는 삶을 사시면 안 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하라’의 명령과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라’의 명령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아시겠지요? 율법은 우리에게 하지 않으면 탈락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이지만 은혜는 우리에게 ‘너희는 원래 그렇게 살아야 행복하도록 지어졌고, 그래서 내가 반드시 너희를 그렇게 만들고야 말 것이므로 너희는 그렇게 살라’는 사랑과 은혜의 권고인 것이지 안 지키면 탈락시키겠다는 협박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절대 중도에 포기되거나 탈락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한 번 부르심을 입은 이들이 중도에 탈락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말씀을 받고 믿었는데도 중도에 탈락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곳은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다시 돌아온 일곱 귀신에 관한 장면이고 또 다른 곳은 마태복음 18장의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누구든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미 빚을 탕감 받은 자를 그의 행위를 근거로 다시 감옥에 넣는 일이 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에도 그러한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이 세상의 떡을 주러 오지 않았다. 그러니 생명의 떡을 사모하라’고 말씀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떠났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제자들인데도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열매 없는 나무는 찍어서 불사르겠다는 주님의 일갈이 나오고 로마서 8장에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고 하는 마치 행위를 강조하는 듯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전서 10장에는 바울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마시고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런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디모데 전서 1장 19절에는 착한 양심을 버린 어떤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같은 책 4장에는 믿음을 떠나 귀신을 쫓게 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모데 전서 5장 11절은 한 번 찾아보고 가지요.
(딤전5:11~12)
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여기도 보면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과 처음 믿음을 저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딤후2:11~12)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베드로 사도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그의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벧후2:20~22)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 하였도다
(벧후3:16~17)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계3:5)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골1:20~23)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히5:8-9)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고전9:26~27)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 이로라
(고전15:1-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히2:1-3)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히6:1-9)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 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히10:26~31)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 진저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로 완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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