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52 - 목자의 부르심은 취소될 수 있는가?(II)     (요10:1~10, 28-29)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03

52 - 목자의 부르심은 취소될 수 있는가?(II)

 

 

(요10:1~10, 28-29)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목자의 부르심에 관해 장시간 공부를 했습니다. 목자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정하심과 택하심에서 비롯되어 의롭다 하심과 영화로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 확인을 했습니다. 그것을 조직신학에서는 견인이라 한다고 했지요? 오늘 본문에도 28절과 29절에‘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고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고 그 견인 교리에 관한 명확한 주님의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길), 그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진리),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생명)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구원에 이르는 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이곳 10장에서 뿐만 아니라 그 전체에서 구원과 심판을  궁극적으로 예정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예정론은 우리가 예정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원의 예정론 적 설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정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정론은,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놓치지 않으신다는 견인 교리를 확증해 주는 것이지 숙명론 적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해 드린 것처럼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 교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 보이는 구절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오늘은 그러한 구절들 중에 대표적인 구절들을 찾아서 그 구절들이 말하는 진의를 밝혀봄으로 해서 성경의 일관성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비유부터 해결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8:11~15)

11      이 비유는 이러 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 니라

언뜻 보면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잠깐 믿기도 하던 자가 중도에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어구는 13절의 ‘뿌리가 없어’입니다. 뿌리가 없다는 말은 생명이 있어 보이지만 정작 생명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 짝밭이나 가시 떨기는 진짜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요2:23~25)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여기 보시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많은 이들이 그 분을 믿었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정작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 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믿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슷한 예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요6:60~66)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 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

여기에는 ‘제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들 중에 유다를 비롯하여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제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제자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들에게 ‘아버지가 오게 하지 아니한 자들은 주님께 올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자 실제로 하나님이 오게 하지 않은 자들이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 때는 이렇게 믿음이 없는 자들이 마치 믿음이 있는 자들처럼 섞여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떠나버리는 일이 비일 비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배교자라 부른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부르심을 입은 자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배교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교자는 원래부터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으로 가면 초대교회에 잠입해 있던 가짜들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딤전4:1-2)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사도 바울이 지금 믿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후일에 믿음에서 떠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지요? 그 사람들 또한 예수님을 믿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탈락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 후서에 보면 실제로 그렇게 믿음에서 떠나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딤후2:15~18)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 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보시다시피 바울이 디모데 전서에서 경고한 미혹케 하는 영이며 귀신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는 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자신들도 가짜 믿음을 소유한 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을 떠나는 자들 또한 진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왜 그들이 거짓 가르침에 속아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일2:18~19)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 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 이니라

잘 보시면 초대교회에서 배교를 하고 교회를 떠난 자들이 있었는데 요한은 그들을 ‘우리에게 속해 있던 자들’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교회의 멤버를 아무렇게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던 때이기 때문에 검증에 검증을 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만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요단강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나는 이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진짜 신앙인인줄 알고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도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던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가짜 가르침을 받고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제외되었던, 요한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던’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바로 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딤전1:19~20)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후메내오가 또 나오지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양심을 버린 행동을 했고 믿음에 있어서 파선한 자와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교회에서 아주 쫓아내 버렸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는 나중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을 쫓아내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못 견디고 떠나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회개케 하여 참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고린도 전서에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고전5:1~5)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아비의 아내를 취하고 음행을 일삼는 어떤 교인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이유를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밝힙니다.

그 말은 바울이 그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준 이유는 ‘육’, 즉 옛사람의 습관과 더러운 성품과 모난 인격 등을 죽이고 새 사람의 삶을 살도록 징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리를 하여 징계를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거룩을 도우려 한 것에 일차적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들을 가짜로 정죄하여 쫓아내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다른 가르침을 가지고 다른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언젠가 스스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가 판단하고 정죄하여 끊어내 버리는 것은 우리가 자칫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되는 불경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기다려 줘야 하고 그들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며 품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조금은 난해한 구절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벧후2:20~22)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 하였도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더러움’이라는 단어입니다. 20절을 보시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된다.’고 하지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구원 받은 이후에 한 번도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가 다시 그 더러움에 져 본 적이 없으세요? 의의 도를 알고 난 후에 거룩한 명령을 한 번도 저버려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저는 아주 많습니다. 이 구절이 그렇게 구원을 받은 이후에 세상의 더러움에 지게 되면 구원에서 탈락 될 수도 있다는 그런 말일까요? 잠깐 베드로후서 1장 4절로 다녀오겠습니다.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에는 더러움이 아니라 썩어짐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성도는 더러움이 아니라 썩어짐에서 피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더러움’ ‘미아스마’라는 단어는 웅덩이나 진흙탕 같은 곳에 빠져서 겉을 더럽게 하는 것을 묘사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썩어짐’이라고 번역이 된 ‘프흐도라’라는 단어는 ‘부패, 멸망’이라는 뜻으로 ‘본질의 매우 깊은 곳의 부패’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후서 2장 20절 이하의 내용은 썩어짐에서 벗어난 구원받은 자들의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만 번지르르하게 더러움에서 피했다가 다시 더러움 속으로 빠져 들어간 가짜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베드로 사도가 속담을 하나 인용하는데 개와 돼지를 들어서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속담을 인용합니다.

바로 이 모습입니다. 개나 돼지가 본질의 변화는 없이 잠깐 그들의 더러움에서 피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본질을 인간이나 원숭이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썩어짐(프호도라)’이라는 본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단지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쉬운 말로 바리새인적인 깨끗함을 잠시 유지하다가 도로 개, 돼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가짜 교인들의 타락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정말 이론(異論)이 많은 베드로후서 2장 1절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벧후2:1)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언뜻 보면 잘 이해가 안가지요? 베드로가 말하기를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출몰하며 멸망케 할 이단을 끌어들여서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어구가 ‘자기들을 사신 주’라는 어구입니다. 주님에 의해 사신 바 된 자들도 그 주님을 부인하고 멸망 속으로 빠질 수 있다는 말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보통 예수님을 가리키는 ‘큐리오스’와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서 ‘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헬라어 ‘데스포테스’인데 그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눅2:29, 행2:24, 딤후2:21, 유4, 계6:10)

그리고 여기서 ‘사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구속’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냐하면 베드로는 지금 신명기 32장의 내용과 단어들을 인용하여 베드로후서 2장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후2:12~13)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이 구절은 신명기 32장 5절의 내용과 단어들을 그대로 인용한 구절입니다.

(신32:5)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계속해서 신명기 32장6절을 보시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사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32:6)

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여기서 ‘얻으신’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카나’가 ‘사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금 신명기 32장을 들어 초대교회를 향해 경고로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종종 하나님께서 사신 백성, 즉 애굽에서 구원해 낸 백성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지금 ‘자기들을 사신 하나님을 부인 한다’라고 표현을 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 사신 백성이 된 유대인들이, 다른 말로 하나님에 의해 애굽에서 건져진 유대인들이 거짓 선생들이 되어 이단을 끌어들여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신 바 된 이스라엘 사람 속에서도 이단을 끌어들여 멸망에 이르게 될 사람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 값 주고 사신 교회가 멸망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해결됐지요?

이제 요한계시록으로 가보겠습니다.

(계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입니다. 에베소에는 카이스터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에 무역을 위한 항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주변 산들에서 내려온 침적(沈積) 토 때문에 점점 강이 낮아져서, 그럴 때는 항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다시 도시를 재 정비해야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에베소 교회이기에 교인들은 5절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의 부분에 ‘회개치 않으면 내가 속히 임해서 촛대를 옮기리라’ 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섬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촛대가 옮겨지면 그 곳이 얼마나 황폐케 되는지를 항구를 옮기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것이라는 말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에베소라는 지역 교회 전체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근거하지 않고 행위만 무성한 교회가 되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는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의 목양을 받던 북 아프리카의 교회들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시록 3장 1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계3:16)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한 것들은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도 믿으려면 확실히 믿든지 아니면 차갑게 식은 물처럼 믿지 말든지 해야지 덥다가 미지근해 진 것은 토하여 내치시겠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까이에는 차가운 생수로 유명한 골로새와 뜨거운 온천수로 유명한 히에라 폴리스가 있었습니다. 식수가 부족했던 라오디게아는 수로를 이용해서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와 히에라 폴리스의 뜨거운 온천수를 끌어다가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오는 동안에 미지근하게 식거나 덥혀져서 먹기도 곤란하고 생활용수로도 부적합한 그런 물이 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러한 생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뜨겁던지 차갑던지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입니다. 결코 미지근하게 믿으면 중도에 탈락시키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서로 가보겠습니다. 거기에도 해석이 난해한 구절이 나옵니다.

(고전9:27)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

여기서 ‘몸을 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휘포피아조’는 격투기 경기에서 쓰이는 단어로서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앙생활에 힘쓰지 않는 사람은 중도에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여기서 ‘버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아도키모스’는 ‘칭찬받지 못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사도는 지금 고린도 전서 9장 전체에서 전도자와 사도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마지막 절에서 그 전체 논증의 절정이요 그 논리의 귀결로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전도자와 사도와 목회자로서의 그의 모든 일들과 수고가 결국 소용없이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에서 그 구절을 결론으로 붙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5장의 내용도 직무와 기능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15:1-8)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 구절들은 자칫 오해를 하면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두 중도에 탈락시키신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이 구절들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있는 진짜 가지들은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열매라는 것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행위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성도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는 자기가 부인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얼마든지 마음에도 없는 바른 삶과 종교적인 열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었고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열매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비록 지금은 다른 이들보다 화려한 행위들을 내어놓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간섭하셔서 그 자신을 부인시키시고 결국에는 그 안에 사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야 마는 그런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인생과 역사를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부인이 되지 않고 여전히 서슬이 퍼렇게 살아서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성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지요?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롬11:11~21)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 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 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 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 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 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 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부분도 많은 오해가 있는 부분입니다. 혹자들은 이 구절들을 해석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도 중도에 버리신 것처럼 교회로 들어온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중도에 탈락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 로마서 11장은 로마서 9장에서부터 연결이 되는 장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음을 피력합니다.

(롬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 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게 로마서 8장의 결론입니다. 그리고는 9장부터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선민의 자리에서 탈락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변증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원래는 모두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 분을 죽여 버림으로 그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롬9:6~13)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원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전체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녀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모델로 택해진 것이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예수를 믿고 교회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롬11:1-5)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두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속에서도 다 남겨져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구속사의 역사적 순서에서는 많은 유익을 선점했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롬3:1-2)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9:4-5)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렇지요?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으며 율법과 제사와 언약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구속사 속에서 먼저 택해진 그들의 신분을 ‘참 감람나무’라 묘사한 것이고 이스라엘 밖에 있던 이방 사람들을 ‘돌 감람나무’라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 감람나무로서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유기된 자들을 들어서 이방인들 중에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선택을 받아 많은 유익을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 중에도 가짜가 그렇게 많았다면 너희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가짜들이 있겠느냐? 그러니까 너희들도 교회의 멤버가 되었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고 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고후13:5)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바울은 교회의 멤버가 되었다고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진짜 구원 받은 성도인지 시험하고 확인해 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마 만큼 초대 교회 안에는 구원받은 것 같이 보이는 가짜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를 가리켜 ‘섞여있는 대중’이라 불렀습니다. 교회가 완전하게 정결케 되고 영화롭게 되기까지는 그 안에 가라지 들이 많이 섞여서 진짜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이런 구절들의 임무는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인지 아니면 죽은 믿음인지, 잠시적인 믿음인지를 시험하고 확인하여 보다 성실하고 진지한 신앙생활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주어진 구절들인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많은 가짜들이 진짜 속에 섞여서 결국은 찍혀 버렸던 것을 잊지 말고 그처럼 되지 않도록 올바른 신앙의 길을 찾고 또 찾으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마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심지어 그 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도 그 분께서 끝까지 지키시며 완수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딤후1:12)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일단 한 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완성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의 열심을 격발해 내시고야 마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맞는가 하고 늘 시험해보고 확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삶을 통해 성숙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군인에게 주는 혜택이 참 많습니다. 군대에 가게 되면 신분 문제가 조속히 해결이 되기도 하고 대학 교육이 용이해 지며 세금이나 이자 혜택 등이 아주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혜택과 동시에 국방의 의무라는 막중한 책임도 함께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혜택만 챙기고   책임과 의무는 하나도 수행하지 않는 군인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군인일 수 있는 것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목자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부터 상상할 수도 없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완성의 지점까지 가는 길에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 숭배 교에 빠져 열심히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왕 대접 해드리는 그 자리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4-8절과 히브리서 10:26-29절은 제가 요한계시록 강해 79번 가짜 신부 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지요? 그 구절들은 그 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선한 목자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