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 선한목자와 선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I)
(요10:1~5)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는 오늘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의 특징을 공부함으로 해서 절도며 강도로 불리는 왜곡된 복음의 실체를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선한목자의 특징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선한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간다는 것이고 두 번째가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먼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첫 번째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10:3)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선한목자는 우리에서 양들을 불러내는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냅니다.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선한목자는 양들 각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기억하며 그 이름으로 불러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선한목자는 양을 집단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양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 하는 자들은 양들을 집단으로 봅니다. 양들 각자의 안전과 유익에는 관심이 없고 그 양들의 발육상태와 그 양의 숫자에만 관심을 둡니다.
왜냐하면 그 양들이 살이 쪄야 자기의 수익이 많아지고 양의 숫자가 많아져야 자기의 재산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을 단지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집단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양을 개별적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화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18:12~13)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가십니까? 주님은 목자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위험에 방치한 채 그 멍청한,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산에 남겨진 아흔 아홉 마리는 뭐가 됩니까? 이 말씀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과 남겨진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전에 코스타 공동 대표이신 모 박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의 아버님은 형제가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장남이신 큰 아버님이 배를 타고 가시다가 물에 빠진 만년필을 건지려고 물에 들어가셨다가 그만 익사를 하셨답니다. 그 후로 그 분의 할머님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워 하셨다고 하는데 그만 고정하시고 기운을 차리라고 자기를 위로하는 나머지 자식들에게 그 분의 할머니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것이 ‘그 아이가 너희들 중에 제일 나았어.’라는 말씀이셨답니다. 그 말씀은 나머지 자식들이 정말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표현하시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저의 세 아들 중에 하나가 잘못되어 그 중 하나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저는 아마 그 아이를 따라 죽고 싶을 거예요. 그건 나머지 두 아이가 그 아이보다 덜 사랑스럽다거나 나머지 두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 아이를 나의 목숨과 바꿀 수 있을 만큼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시는데 그 큰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나 하나밖에 없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신다는 어구의 의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신 선한목자는 그 양들 앞에서 그 양들을 인도하여 가십니다. 본문 3절에 나오는 ‘인도하다’라는 단어 ‘엑사고’는 ‘앞에 서서 데리고 가다’라는 뜻입니다. 그 것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도적은 양들을 뒤에서 쫓아갑니다. 그리고 혹시 그 양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양들이 고통 받는 동안 자신은 도망을 칩니다. 그게 절도이며 강도입니다. 마치 야곱이 얍복강을 건널 때 자기에게 가장 덜 소중한 것들부터 앞세우고 자신은 맨 뒤에서 형 에서의 공격을 피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한목자는 양 앞에서 모든 위험을 자신이 먼저 겪으며 양들을 보호합니다. 그게 ‘인도하다’ ‘엑사고’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그 선한목자이신 예수가 우리를 앞서서 인도하여 가시는지 성경을 통해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막1:2~8)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왜 제가 갑자기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의 이야기가 바로 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보내심을 받는 사자가 무엇을 하러 오는 것인지 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2절과 3절의 말씀은 이사야서와 말라기의 말씀을 용해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먼저 말라기의 인용 부분을 보겠습니다.
(말3:1~5)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 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 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 하였느니라
여기보시면 그 사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앞서 그 분의 심판을 외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목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눅3:7)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리라
그런데 이사야서를 보시면 그 광야에서 외치는 자, 다른 말로 주의 앞길을 평탄케 하는 자에게 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40:1-3)
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렇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심판 뿐 아니라 위로와 죄 사함도 함께 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위로의 말을 했지요? 누가복음으로 가 보겠습니다.
(눅3:16)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다 죽어야 하는데 그 중 어떤 이들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건져내실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위로와 죄 사함이지요
그렇게 먼저 보내심을 받아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전했던 심판과 위로와 죄 사함이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앞서 보내져서 심판과 죄 사함과 위로를 전하도록 되어 있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시작되어 예수에게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말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장에서는 그 먼저 보내지는 사자의 이름을 엘리야라고 명확히 밝힙니다. 그런데 먼저 보내어진 엘리야의 역할이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는 역할입니다.
천사가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세례요한의 수태고지를 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눅1:17)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정말 그렇게 되었나요? 세례요한의 사역으로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돌아왔습니까? 이 말라기의 예언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비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지금 말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타락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심으로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다시 돌이켜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자녀들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그 마음을 돌이켜 아비에게로 향하게 하실 것을 가리켜 엘리야의 사역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 님 앞서 와서 예수님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엘리야 사역은 예수님의 엘리야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시작을 한 것이지 그 요한의 사역 자체가 아비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을 화목하게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삶에 이루어질 심판과 죄 사함과 위로의 선포의 시작이 세례 요한에게서 시작이 되었기에 예수님은 참 엘리야이신 당신의 이름을 세례요한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마11:13-14)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17:10-13)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주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먼저 온 엘리야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11절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일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심판과 죄 사함과 위로에 대해 외치다가 간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에 당신의 사역을 연결시켜 성경에서 예언 된 엘리야의 사역을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먼저 보냄을 받는 엘리야 사역을 처음 시작한 세례요한과 그 엘리야 사역을 완성하실 당신을 하나로 묶어 엘리야라고 지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인자도 이와 같이, 세례 요한과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삶이 예수님의 삶의 예고편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도저히 임신이 불가능한 태에서 태어나지요? 그리고 천사가 수태고지를 합니다. 그가 광야에 살며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때웠듯이 주님도 공생애를 광야의 금식으로 시작을 하십니다. 그리고 회개를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다가 세상의 왕에게 잡혀 죽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주십니다. 그리고 역시 세상의 왕에게 잡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삶과 사역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축소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심판과 위로와 죄 사함을 완성하실 것인지를 그의 삶을 통해 미리 조금 보여주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성경에서 광야는 생명 없음과 위험함과 어두움의 대명사임) 짐승 같은 죄인들과 악의 세력에게 둘러 싸여 온갖 시험을 다 겪으시고 결국 세례 요한처럼 세상의 왕에게 처형을 당하는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으나 결국 다시 살아나심으로 심판과 죄 사함을 동시에 성취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심판의 경고가 마침내 우리 주님에게 모두 쏟아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이미 받아 버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진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 앞서 보내어진 사자는 우리에게 심판의 경고만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우리 앞서 오셔서 자신의 몸으로 다 받아내심으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위로라는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게 앞서 보내진 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신 그 사자는 지금도 우리의 인생을 앞서 가시면서 우리가 겪을 모든 환난과 고난을 다 겪고 계십니다.
(출23:20)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그렇지요? 그 사자는 우리를 하나님의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기 위해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인도하며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항상 제자들보다 먼저 그들이 가는 곳에 가 계셨음을 성경이 이렇게 암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26:32)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여기에서 ‘가리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프로악소’라는 단어는 ‘앞서서 인도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단순히 그들이 갈릴리로 가기 전에 먼저 가서 기다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갈릴리로 가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역시 같은 단어가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막16:7)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우리의 선한목자는 부활하셔서 그렇게 양들 앞에서 양들을 인도하여 가시면서 ‘다 비켜라, 내 양들이 간다’하고 그 양들이 겪어야 할 고난과 고통과 질병과 외로움과 심지어 죽음까지 파하시며 행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파하시는가 하면 자기가 그 모든 것들을 가져가심으로 그것들을 멸하십니다. 그게 십자가의 제사입니다. 원수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원수를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는 역동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이 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한 번 부어지고 만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간섭하시는 다이내믹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제가 지금도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계신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앞에서 인도하고 계시는 선한목자의 모습입니다.
(히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 선한목자께서는 우리의 질병, 가난, 모함, 시기, 질투 그 어떤 것도 우리 혼자 감내하도록 놔두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십니다. 그 말은 단순히 맛만 보신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다 가져가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서 ‘질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 ‘호리’는 ‘질병, 재난’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시고 우리의 재난을 가져가신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일들이 상징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마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렇게 예수님 당시에 귀신이 나가고 질병이 치유가 된 사건들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기적적인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두움을 다 가져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셨을 때 그 문둥병이 예수님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혈루 병 앓던 여인을 고치셨을 때 그 혈루 병이 예수님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곧 함께 공부하겠지만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을 때에 그의 죽음이 주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은 주님이 예수를 믿는 사람의 모든 병을 다 고쳐주시고 그들의 재난을 다 없애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이나 질병, 재난 등은 모두 죄에서 기인한 사망의 증상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사망의 증상들을 자기 것으로 가져 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질병을 겪으며, 재난을 당하며, 고통을 감내하며 하마터면 영원한 사망 속에서 이러한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고통을 영원히 받아야만 했던 우리의 사망을 대신 가져가신 주님을 오히려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겪었고 앞으로 겪어야 할 모든 질병과 재난과 실수와 실패는 모두 우리 주님이 먼저 겪으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양들 앞에서 양들이 감수해야 할 모든 위험을 파하며 그들을 인도해 가는 선한목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선한목자는 이렇게 우리 앞서 우리의 모든 질고와 연약함을 자신이 다 가져가시고 우리의 미성숙함과 실패와 실수를 자신이 완성시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막1:7)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세례요한의 이 겸손함을 보세요. 그러나 이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요13:4-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실제로 주님이 제자들의 신 들메를 푸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게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목자의 일입니다.
선한 목자의 ‘선함’의 둘째 요소는 11절에 나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선하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 목자가 선합니까? 어떤 양치기가 밤에 자기 양을 물고 달아나는 늑대를 좇아가 싸우다가 그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고 쳐 보자고요. 이 사건을 두고 누가 “아, 그 목동은 참 선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열의 열은 필경 “참, 어리석은 사람이야”하고 혀를 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 마음대로 양을 대하는 목자는 ‘악한 목자’라고 규정합니다. 양이 행복해지도록 일하고 희생할 줄 아는 목자가 ‘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연장해 볼까요? 백성이 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가 선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제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이 주인을 위해 몸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업원이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종업원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섬김과 헌신과 희생의 방향을 180도 완전히 돌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혁명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 누리기 위한 것 아닙니까? 종업원은 사장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고, 부하는 보스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연구원은 교수가 시키는 일이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힘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법칙이 아닙니까? 힘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부리고, 힘없는 사람은 힘 가진 사람을 위해 일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사는 것을 ‘악하다’고 규정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우리 인간을 착취하고 부리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당신의 가장 귀한 것까지 기꺼이 희생하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예수님께서 몸소 살아 보이셨던 것입니다. 골고다에 선 십자가는 바로 그 사랑의 법칙의 결정판인 것입니다.
(막 10:43-45)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이게 바로 두 번째 선한목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셨기에, 즉 나를 절대적 가치로 사랑하시고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기에, ‘선한’ 목자라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사28:16)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 하리로다
오직 주님만 선한목자의 시험에 합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이들의 앞에 서서 그들의 위험을 내가 막아주고 그들의 질병과 고초도 내가 가져와 그들을 전심으로 섬겨주고, 비워주고, 죽어주는 선한목자의 삶은 제물이 되어 죄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어린양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선한목자의 삶은 구약에서 제사의 제물로 등장하는 선한양의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목자이신 주님을 성경이 선한 양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두의 어린양의 삶을 그 뒤를 따르는 다른 양들이 좇아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계14:4)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성경은 이렇게 우리 성도를 어린양의 삶으로 선한목자로 인정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 감사히 좇아가는 자들이며 우리 또한 그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선한목자들이 되어 다른 양들을 인도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딛2: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지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목자의 삶, 선한 양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를 불러내시고 인도하시는 선한목자처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가치로 대하며,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상대방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뒤집으면 악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을 상대적인 가치로 대하고,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나를 자랑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려 하면, 우리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좇아오라고 하셨지요?
주님은 우리더러 선한 목자인 당신을 좇아오면서 선한 목자의 삶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한 목자에 의해 각각 이름이 불려 진 우리 양들은 앞서 가는 그 선한 목자의 은혜를 깨닫고, 그 분의 삶을 본받으며,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선한 목자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고한 목적이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린양이 자기를 어디로 이끌고 가든 열심히 불평하지 않고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님을 좇아가던 다윗이 이런 시를 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를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하리로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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