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공동서신

히브리서 11장

은바리라이프 2013. 4. 30. 17:42

1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Estin(에스틴) "...이다"의 맨 처음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이 시제를 포함하여 번역한다면 [믿음은 현재 희망하는 것의 본질이요]가 된다. 
"실상" uJpovstasi"(휘포스타시스) "확신, 실체"는 '아래에 서다, 기초에 서다'에서 나온 말로 어떤 일의 사람에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객관적인 실체를 말한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못하는 것" pragmavtwn(프라그마톤) "행위, 성취된 일, 사물,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뒤에 ouj(우) "아니다"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히6:18 "사실", 히10:1 "향상"으로 번역되었으며 눅1:1 "사실"로 나온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 말은 보이지 않은 하늘나라의 것들이 아니라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을 암시한다. 
"바라는 것" ejlpizomevnwn(엘피조메논), "보지 못하는" blepomevnwn(우블레포메논) 두 단어의 시제는 현재 수동태 속격 중성 복수로 일치한다. 현재 바라는 것과 현재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선진들" presbuvtero(프레스뷔테로이)은 '조상들'과 동일한 의미로 구약성경의 믿음의 의인들을 가리킨다. "이로써" ejn tauvth/ ga;r(엔 타우테 가르)는 "이것 때문에" tauvth(타우테)가 형용사 대명사적 지시사로 1절의 말씀을 그리키고 있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믿음" Pivstei(피스테이)는 헬라어는 문장의 첫 부분으로 시작할 때 첫 단어에 한해서 대문자를 사용하는데 본 장에서 본 절부터 31절까지 나온다. 본 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할 만큼 이 단어가 제일 많이 사용된 곳이다(18번). 히브리서의 단 한번 더 사용된 곳은 히4:2이며 행3:16행6:7행26:18롬3:28, 4:19, 20, 5:2, 11:20, 14:1, 고전16:13고후1:24, 8:7, 13:5, 갈2:20골1:23, 2:7, 딤전1:2, 4, 2:7, 15 등에 나온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 to blepovmenon(토 블레포메노)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대주의 전통에서 나온 말로 가시적인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타난 것" ejk fainomevnwn(에크 파이노메논)은 헬라의 전통 철학에서 유래한 말이다. 저자의 의도적으로 유대철학에서 기인한 단어와헬라철학에서 나온 말을 사용하여 당시 퍼져있던 플라톤과 필로의 우주론(태초에 혼돈 상태에 있었던 가시적인 물질들을 사용하여 창조했다는 이론)의 시각의 그릇된 점을 알리고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4절 저자는 2절에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는 말씀을 본 절부터 31절까지 나열하며 설명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창4:3-5을 인용한 것으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증거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본서의 저자는 그 이유가 믿음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말하느니라" lalei'(라레이)는 직설법 현재형 능동태로 현재에도 계속하여 말하고 있는 상태임을 뜻한다. 창4:10"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의 말씀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도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눅11:50-51)고 하셨다.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창5:21-24의 70인역(LXX)을 인용한 것이다. 히브리어(MT)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인데 LXX는 "옮기셨으니"로 되었다. metaqevsew"(메타데세오스) "위치 전환, 승천, 옮겨감"을 뜻하는데 '몸이 변화되어 승천한 것을'말한다. 에녹의 믿음은 죽음을 보지 않고 이 땅에서 옮기움을 받았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5:22-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옮겼다.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에녹이 '옮기우게'된 까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었고 그것은 곧 믿음이었다. 에녹에게 적용되었던 그 믿음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 주시는" misqapodovth"(미스다포도테스) "보상자, 임금을 지불하는 자"의 뜻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다(히10:35, 11:26).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비록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고 eujlabhqei;"(율라베데이스) "조심하다"의 뜻으로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순종하여 방주를 준비했다. 이로써 노아는 의인(창6:9벧후2:5)이 되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갈대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창12:1). 이 명령을 받은 후에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땅에 이르러서도 이 땅을 주시리라고 한 땅인지를 처음에는 몰랐다(창12:5-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셨을 때 비로서 알았다(창12:7).

9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외방"ajllotrivan(알로트리안) "이방인"으로 나그네처럼 살았다(행7:5). 자신뿐만 아니라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함께 그러한 처지에 있었다. "장막"skhnai'"(스케나이스) "천막"은 아직 안정된 자신의 집이 아닌 이방인과 같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천막을 치고 지내는 상태로 있었다. 창세기23:4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요구하면서 "나그네요 우거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10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바랐음이니라" ejxedevceto(에제데케토) "기다리다, 찾다, 기대하다"로 하나님께서 현재와 같이 거처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마감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안정된 집 지을 곳,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안정된 곳에 터를 잡고 성(도시)을 이룰 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다렸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원문의 접속사 kai;(카이)을 여기서는 "까지도"로 옮겨도 좋다. 즉 사라까지도 믿음으로 하나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부부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치하지 않았다면 늙어서 아이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쁘신" pisto;n(피스톤)은 "믿을만한, 의지가 되는, 충실한"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그들이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된 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창15:5창22:17,출32:13신1:10).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아기를 낳기에는 자신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롬4:19, 22).

11:13-16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함
13절 이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이삭야곱을 가리킨다.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들은 하나님께 약속은 받았으나 그 실현은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이방인과 같이 외국의 땅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실망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멀리서나마 환영했다.

14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아브라함이삭야곱을 말하며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들은 아직까지 이방인과 같이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향"patrivda(파트리다) "조국, 고향"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메소포타미아를 사모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나왔으며 영원하신 본 고장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음을 뜻한다(16절).

15절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왔지만 그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창30:25창31:3).

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저들은 이 땅에 있는 고향을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 본향을 "사모" ojrevgontai(오레곤타이) "...을 향해 뻗치다, ...얻으려고 애쓰다"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있었다.

17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창22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 최대의 시험이 최대의 믿음의 결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은 선뜻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떠한 의의도 제기하지 않고 순종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창26:5)
결국 아브라함의 이 순종은 제사보다 나은 것이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11:17-40 믿음의 예시
18절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이삭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먼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2), 또한 창21:12 이삭을 통해서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굳게 잡고 있었던 것이다.

19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육체적으로 이미 아이를 날 수 없는 죽은 상태에서 아들을 낳게 하셨다(11절). 그런 하나님께서 설령 이삭이 죽는다해도 다시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하나님을 믿고있었던 것이다. "생각한지라" logisavmeno"(로기사메노스)는 부정과거형으로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이미 확고히 정리된 상태의 믿음을 드러낸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비유" parabolh'/(파라볼로스)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막4:30눅8:9, 11)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을 암시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살릴 마음으로 칼을 빼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창22:10)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멈춘 것이며 아브라함은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아브라함부터 내려오는 믿음이 이삭에게 이어지고 또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함으로(창27:27-29) 그 믿음과 축복을 이어주고 있다. 두 아들에게 축복했지만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챘으며 아울러 축복까지도 뺏은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도 이삭은 이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축복을 취소하지 않았다. 창25:23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는 것'의 하나님의 뜻에 있다고 생각하고 순종한 것이다.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 또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함으로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축복을 전하고 있다. 늘 장자권을 중요시하였으나 창48장에는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특별한 관심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들들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은 등급에 속하게 되었으며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별명이 되었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는 70인역(LXX)의 인용으로 히브리어(MT)는 "지팡이"로 또는 "침상"으로 볼 수 있어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창47:29-31)와 같다. 야곱이 죽기 전에 쇠약해져서 지팡이에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을 따르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는 창50:24-25의 인용으로 요셉은 출애굽 때 자기의 뼈를 가지고 나가도록 명령했다(창50:24-25). 그리고 이 요구는 모세에 의해서 받아 들여 졌으며(출13:19), 여호수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수24:32).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저자는 족장들의 시대에서 출애굽기의 지도자 모세로 넘어가고 있다. 출2:2에는 모세를 숨긴 사실에 어머니만 언급된 반면 저자는 "부모"로 소개한다. 이 차이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부모가 합의 하에 이루어졌거나 그 절박함에 있어서 누가 해도 그것이 문제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모세는 성장했을 때 사십세가 되었을 때(행7:23), 그는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고 애굽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끊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부리던 이스라엘 민족의 종들처럼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되기로 작정했다. 바로의 공주 아들이었다는 것은 그가 곧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거절했다(출2:11). 저자는 모세의 이러한 행위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감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더 좋아하고" eJlovmeno"(헬로메노스) "자력으로 취하다, 택하다"로 모세는 스스로 잠시의 안락함을 위해 바로의 아들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택했다.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저자는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시대에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고 계시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사63:9). 때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동일하게 생각하기도 한다(고전10:4). 
"바라봄이라" ajpevblepen(아포블레펜) '다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 한가지만 바라보다'의 뜻으로 "상 주시는, 값아 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모세는 애굽을 두 번 떠났는데 첫 번째는 이스라엘사람들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바로를 피해미디안 광야로 간 것을 말하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을 탈출한 사건이다. 여기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간 것을 말한다.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된 것은 출2:14-15에서는 두려워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것은 애굽인을 죽여서 생겨난 바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출2:14). 모세가 일단 바로를 피해 도망간 것은 두려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 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에 기록된 28절의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가 출애굽 전에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자" ajovraton(아오라톤)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분은 유대교와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롬1:20골1:15딤전1:17).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장자가 끊어진다는 것은 믿음이 전수되지 못하는 동시에 민족의 멸망을 의미한다. 바로가 이스라엘의 장자를 죽이려할 때 이스라엘 집의 문설주에 피를 발라 천사가 그 집은 넘어가게 함으로 이스라엘 장자는 보호할 수 있었다(출12:12-13). 이 일을 기억하여 앞으로 이스라엘 장자를 보호하기 위한 유월절을 제정했다(출12:14).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에서 15일의 이른 시각까지 계속하여 무교절로 넘어가는데 15일째 날에 시작하여 21일째 끝이 난다.

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애굽 군대는 출애굽을 시도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해홍해 앞까지 다가왔다(출14:10-1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역사 하신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가 갈라져 그곳을 건넜으며 애굽사람들은 홍해에 빠져 죽었다(출14:23-28).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홍해가 갈라져 기적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더 확실한 믿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후세에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되었다(출15:1-21시106:9-12사43:16-17사44:27).

30절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저자는 광야의 방랑생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바로 여리고성 함락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여준 것은 믿음생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결국 가나안 땅에 빨리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광야생활에서 지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였다(수2:1). 그러나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는 용사들의 믿음으로 6일 동안 한번씩 돌고 칠일 째 되는 날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칠 때 성이 무너졌다(수6:1-21).

31절 믿음으로 기생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라합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특히 유대인에게는 더 용서할 수 없는 기생(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중의 하나였다. 여자로서 예수님의 족보에도 올랐으며(마1:5약2:25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도와 의롭게된 것으로 나온다. 그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도와 여리고성을 점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수2:1-21).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는 광야에서 죽음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저자는 고의적인 가정법을 사용하여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지만 이미 언급한 인물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 열거하고 싶었던 인물들 이름만 더 소개한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기드론, 바락삼손입다'는 신약성경에서 본 절에만 언급되었으며 '사무엘'은 행3:24행13:20에 '다윗'은 마1:1막2:25눅20:41행1:16롬4:6딤후2:8계5:5 등에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이름이 연대순서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순서대로 정리하면 바락(삿4,5장), 기드온(삿6-8장), 입다(삿11-12장), 삼손(삿13-16장), 사무엘(삼상1-15장), 다윗(삼상16장-삼하24장) 순서이다.

33절 저자는 본 절에서 38절까지 위에서 열거한 6명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나는 데로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여호수아를 시작으로 6명의 이야기인데 다윗 왕을 때에는 절정에 달하여 많은 나라들을 이기고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이집트 국경까지 확장되었다(왕상4:20-21).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이 의를 행했지만 특히 사무엘은 '완전한 의로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삼상12:3-5, 23, 대상18:14)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는 사자굴 속에서 건져낸 다니엘을 말하는 것 같다(단6:17-22).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를 물리친 일이 있었다(삼상17:34-37).

34절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메삭아벳느고(단3장)을 말한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는 몇몇 선지자들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셨다는 것을 묶어서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윗'도 사울의 칼을 피해서 도망갔다(삼상18:11).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제일 보잘것없었던 가문의 작은 자 '기드온'(삿6:31)을 불러 3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블레셋을 이긴 것이나, 삼손(삿16:28-31) 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35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는 왕상17:17-18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과 수넴 여인의 아들이 각각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서 죽은 가운데 살아난 것을 가리킨다. 신약에서 비슷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인성 과부(눅7:11-14)의 아들이 살아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고문과 형벌을 받아도 풀려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세상과, 죄와 타협하지 않은 믿음을 말한다. "더 좋은" kreivttono"(크레이트토노스)는 질적으로 더 좋은 것을 말하는 용어이다. 즉 일시적인 살아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말한다.

36절 또 어떤 이들은 e{teroi(헤테로이) "다른"으로 앞에서 말한 사람들이 아닌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한다.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희롱과 채찍"이 많이 나타나는 마카비(외경) 1, 2서의 예를 들어 마카비 전쟁 당시 시리아의 침략군들이 신앙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혹하게 고문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가 무엇을 염두 해 두었는지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없다. 하지만 '결박과 옥에 갇힌 적이 있는' 요셉(창39:20), 하나니(대하16:10), 미가야(왕상22:26-27), 예레미야(렘20:2렘37:15)을 생각할 수 있다.

37절 돌로 치는 것과 이스라엘의 처형방법중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24:20-21)를 생각할 수 있다. 
톱으로 켜는 것과는 성경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사형의 방법을 이야기 한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가 이 방법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여호야김왕에게 죽임 당한 우리야의 경우와 같이(렘26:23)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광야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다녔던 사람중에는 엘리야를 꼽을 수 있다(왕하1:8). 예수님에 의해서 오리라한 엘리야로 지목된 세례요한의 경우도 이와 같았다(마3:4). 그러나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약시대의 일반적인 선지자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슥13:4).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이런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로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는 70인역(LXX) 시106:4 인용으로 박해가 있을 때 피하여 숨은 곳을 말한다.

39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증거"는 어근 marturevw(말튀레오) "증인이 되다"에서 파생한 용어로 marturhqevnte"(말튀레덴테스)인데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에 그러한 체험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한번 있었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인물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약속" ejpaggelivan(에팔겔리안)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히9:15),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은 받지 못했다. 또한 이들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같은 약속도 받지 못했다.

40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약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처럼 한정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기는 하였으나 영원한 기업을 받지는 못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옛 언약아래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만 이루시게 하시지 않았고 결국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저들로 하여금 온전함을 함께 이루도록 하셨다.
"좋은 것" krei'ttovn(크라엣톤)은 대명사 비교급 단수로 '증거와 약속'을 비교하고 '더 좋은 것'은 결코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