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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강해(4) 너무나 오래 되었지만 날마다 새로운 계명 -박흥규 공동서

은바리라이프 2008. 7. 31. 23:37
요한1서 강해(4) 너무나 오래 되었지만 날마다 새로운 계명 -박흥규 공동서신 설교

2008/07/2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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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2장7-11

요한1서 강해(4) 너무나 오래 되었지만 날마다 새로운 계명

박흥규 목사  주후 2007년 4월 15일 주일 대예배 설교문




<가난한 날의 사랑과 행복, 네 가지 삽화>

저는 수필가 김소운(金素雲) 선생님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1908년생이시니 아직 살아 계신다면 연세가 근 백세나 되었을 옛 어른이십니다.

그 분이 쓴 수필을 읽어보면 아주 솔직 담백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절절이 배여 있습니다.


소운 선생이 쓴 글 중에 "가난한 날의 행복"이란 수필이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가난한 부부 세 쌍의 이야기를 전하는 수필이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아주 유명한 수필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가난한 신혼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보통 가정에서는 남편이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아내는 집 안에서 살림을 하지만, 이 부부는 정반대였습니다. 

남편은 집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 다녔습니다.


어느 날 아침, 얼마나 가난했던지 쌀이 다 떨어졌습니다.

굶고 출근하는 아내가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남편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 때까지만 참으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신문지가 덮인 상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상 위에는 남편이 어디에서 구했는지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간신히 쌀은 구했는가 본대, 반찬은 마련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 위에는 남편이 써놓은 종이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시장기만 속여두오."

그 쪽지를 잃는 순간, 아내의 눈가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자기가 왕후가 된 것 이상으로 물밀 듯 행복감이 밀려왔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가난한 젊은 시인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침, 시인인 남편이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다 삶은 고구마 몇 개를 담아 들어왔습니다.

시인은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다는 것이 영 부담스러웠지만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요량으로 제일 작은 것만 하나를 골라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시인의 아내는,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하나만 더 드세요."

아내는 웃으면서 또 한 개의 고구마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마지못해 또 하나의 고구마를 집어들었지만 왜 아침상을 들이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여보, 이제 출근할 시간이 다 됐는데 밥상 좀 빨리 들여요." 채근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 "지금 아침밥 들고 계시잖아요.

이 고구마가 오늘 우리들의 아침이에요."

그 순간, 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쌀이 떨어졌구나!" 미안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쌀이 없으면 없다고 말을 하지. 사내 봉변을 시켜도 유분수지!."


그 때 시인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의 작은 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지혜롭고 조신하기 짝이 없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시인의 가슴속엔 형언 못할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어떤 중년 여성이 소운 선생에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이 젊었을 때 남편이 거듭 사업에 실패하자

내외는 엄청난 가난 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일어나 사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사과를 사서 강원도 춘천에 갖다 팔면 약간의 이윤이 남는 아주 힘든 장사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춘천으로 떠난 남편이 이틀이 되어도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8.15 직후였기에 전보도 제 구실을 못해서 아무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다섯째 날 춘천으로 떠났습니다.

춘천을 그저 손바닥만한 작은 동네 정도로 알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도대체 어디에서 남편을 찾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찾았지만 도대체 남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할 수 없이 역전에 가면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 갔다가

매표구 앞에 늘어선 행렬 가운데 초라한 몰골의 남편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내는 너무 반갑고 원망스러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사연은 이랬습니다.

트럭에다가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남편은 가는 길에 사람을 몇 명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과궤짝을 깔고 앉는 바람에

사과가 다 상해서 제값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도저히 손해를 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춘천 친구 집에

기식을 하면서 어젯밤 늦어서야 겨우 다 팔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통신망이 발전하지 못해 연락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함께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목을 꽉 쥐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네 시간이나 걸리던 경춘선,

남편은 그 네 시간 동안 아내의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는 한 손을 남편에게 맡긴 채 너무나도 행복해서 그저 황홀감에 잠길 뿐이었습니다.


그 남편은, 그러나, 6.25 동란 때 죽었다고 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고생을 한 것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이 김소운 선생에게 한 말은 이랬습니다.

"이젠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이 설 것도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모두 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전하는 수필입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들 아닙니까?

아마 요즘 젊은이들은 잘 경험하지 못하는, 흘러간 옛 이야기들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먹을 것이 없어서 아침밥을 굶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주 드문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은 남편이 춘천에서 닷새씩이나 아내에게 연락을

못했다는 말을 들으면 왜 핸드폰으로 하지 그랬느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지금이 옛날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입고 더 편리하고 더 신속하게

훨씬 더 잘 사는 것 같은데 과거보다 더 행복했는지 물으면 썩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김소운 선생의 수필 제목이 "가난한 날의 행복"이 아닙니까?

"부유한 날의 행복"이 아닙니다!

연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시대만 하더라도 옛날 다방에서 사랑했던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바람맞고 무참히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즈음 학생들이 들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핸드폰이 있기에 상대방이 어디에 있든지 다 연락을 할 수 있기에

무작정 기다릴 필요도, 바람맞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연애하는 방법이 옛날의 연애

방법보다 더 낭만적이고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때로 오래 기다리는 인내와 아픔을 동반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저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위하여 몇 가지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이왕 내친 김에 감동적인 실화 한 편을 더 말씀드리지요.

"칭찬합시다"라는 TV 프로에 나온, 한 50대 후반에서 60대 초쯤

되어 보이는 어느 지방 대학 교수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비좁은 아파트에 살면서 대부분의

수입과 시간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쓴다고 합니다.


그 때 아내가 남편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할 때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남편이 한창 공부하느라고 바빴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기에

아내가 한국 식당에서 일을 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 갔습니다.

어느 날 식당일이 끝난 뒤, 설렁탕이 많이 남아서 아내는 남편에게 주려고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먹으려고 하는 순간, 설렁탕에 담배꽁초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 동안 먹을까 먹지 말까, 말을 할까 하지 말까 망설이다가

설렁탕 안에 담배꽁초가 있는 것을 아내가 알게 되면 실망할까봐

일체 티를 내지 않고 설렁탕 한 그릇을 남김없이 다 비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뜰로 나가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한참을 울었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하다가 먼 훗날

남편의 제자한테서 들어서 비로소 알았다고 합니다.

가난을 함께 겪어 본 부부만이 알 수 있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지요!


<너무나 오래되었지만 날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랑은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이미 강조했기에 옛계명입니다.


이른바 '쉐마'(Shema)라고 하는 신 6: 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또한 레 19: 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예수님은 이와 같은 구약 성경의 두 계명을 최고의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막 12: 29-3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 22: 37-39; 눅 10: 27).


예수님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계명, 이것은 이미 멀리 구약 성경의 모세 율법에서부터 강조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다시 강조된 최고의 계명이요, 아주 오래된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은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 초대 교회 시대, 아니 오늘 우리

시대까지 매순간 계속 실천해야 할 최고의 계명들이기에 새로운 계명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요 13: 34-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렇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옛계명이기도 하면서 새계명이기도 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강조된 계명인 동시에 매순간 새롭게 지켜야 할 새계명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서 요한 일서 기자는 사랑의 계명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본문 9-11절 말씀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사도 요한의 영향권 아래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 빛과 어둠입니다.

빛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생명, 진리, 구원과 관계되어 있는 반면에

어둠은 사탄, 죽음, 거짓, 멸망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 빛 안에서 삽니다.

그런데 빛 안에 산다고 말은 하면서도 행동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형제 자매 사랑이 빛 안에 사는지 어둠 속에 사는지를

가려주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때문에 11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어둠 속에, 즉 사탄과 죽음과 거짓과 멸망의 세력 안에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어둠 속을 걸으며 방황하는 사람들인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10절의 말씀처럼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이들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므로 그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

항상 떳떳하고 자유가 있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없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공동체 내에 이단 종파가 출현하여 형제 자매

사이를 이간질하고 서로 미워하고 비방하도록 부추겼기에 이 말씀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웃에 있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빛 안에 있고 떳떳하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형제 자매를 미워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빛 안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이들은 아직도 어둠 속을 걸으며

언제 어디에서 어떤 올무에 빠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섬을 사랑했던 사람>

데이빗 로렌스(David Lawrence)가 쓴 소설 『섬을 사랑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 싫고 미웠기에 혼자 살고자

그동안 은행에 저축했던 돈을 모조리 찾아 무인도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떠나 홀로 살면 행복해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더 큰 외로움과 더 큰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섬이 나빠서 그렇겠지 생각하고 또 다른 섬으로 이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섬 저 섬을 찾아 이사를 다녀보지만 자신이 원하는

평화를 찾지 못했던 주인공은 정신병에 걸린다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빚어 만든 사람은 사랑이 그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어둠에서 벗어나 빛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자매를 미워할 때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빛 안에서 사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방황하시겠습니까?

형제 자매를 사랑하면 빛 안에 있습니다.

형제 자매를 미워하면 어둠 속에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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