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성경

[사전]프쉬케

은바리라이프 2013. 1. 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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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0, 프쉬케) 

영혼, 목숨, 생명.


명사 프쉬케(Homer 이래)는 프쉬코(yuvcw, 5594: 숨쉬다, 바람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네페쉬, 때로는 레브와 레바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을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지상의 외적, 육체적, '생명',

①'목숨, 생명력, 영혼(soul)', 계 8:7; 눅 12:20; 행 2:20; 계 6:9; 계 20:4.

② '지상의 목숨, 생명', 마 2:20; 롬 11:3; 마 20:28; 막 10:45; 요 10:11; 요 10:15; 요 10:17; 요일 1:3; 빌 2:30; 계 12:11; 행 20:24; 행 27:10; 롬 16:4 등.


(b)  지상의 인간의 내적 생명의 좌소와 중심으로서 '영혼, 혼'.

① 사치스런 생활의 '욕구', 눅 12:19; 계 18:14.

② 감정과 정서, 마 26:38; 막 14:44; 요 12:27; 눅 1:46; 눅 2:35; 요 10:24; 행 14:2; 행 14:22; 롬 2:9; 살전 2:8; 히 12:30; 벧후 2:8 등.


(c)  지상 생활을 초월하는 생명의 좌소와 중심인 '영, 영혼',

①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는 도움들을 올바로 사용함으로 자기의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하여 영원한 지복을 획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그러한 한도 내에서의, (인간) 영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계획된 도덕적 존재로서 간주되는 영혼': 요삼 1:2;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히 13:17;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벧전 2:11; "영혼의 감독되신", 벧전 2:25; 약 1:21;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약 5:20; "영혼의 구원", 벧전 1:9; 벧전 1:22; 벧전 4:19.

② '육체와는 다르며 죽음에 의해서도 해체되지 않는 본질로서의 영혼': 마 10:28; 육체로부터 해방된 영혼,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 행 2:31; 계 6:9; 계 20:4.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1. 고전 헬라어 문헌


1. 프쉬케(5590)는 어원학적으로 인도 유럽어의 어근 bhs와 관계가 있으며, 독일어의 '불다' blow를 의미하는 동사 blasen이 이 어근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는 원래 '호흡' breath 즉 '생명의 호흡' breath of life을 의미하였다. 프쉬케의 원초적 의미는 따라서 비(非)인격적이며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호흡을 뜻한다. "의식의 경험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영혼"의 개념에 대하여(J. B. Hofmann, Etymologisches Worterbuch des Griechischen, 1949, 428), 호머(Homer)는 뒤모스(qumov", 2372; 라틴어 '연기' smoke를 의미하는 tumus와 관계 있음, 참조: 뒤오[quvw, 2380: 희생하다 to sacrifice])를 사용하고 있다. 후자의 단어의 의미는 따뜻한 피의 흐름, 생명력, 따라서 감정(흥분, 용기, 욕망, 갈망)을 뜻한다.


두 단어는 정신물리학적 실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일찍이 호머(Homer, Ⅱ. 11, 334)가 이미 두 단어 뒤모스(qumov", 2372)와 프쉬케(yuchv, 5590)의 결합을 시도하였음을 우리도 발견하게 된다. 의식적인 영혼(qumov", 2372 뒤모스)이 무의식(yuchv, 5590 프쉬케)에 의존돼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됨에 따라 프쉬케(yuchv, 5590)의 의미는 초기 서사시에서의 고정적 용법을 넘어서서 뒤모스(qumov", 2372)의 내용을 함축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생명의, 비의식적, 비인격적인 근본으로 생각되어 왔던 프쉬케(yuchv, 5590)는 의식의 경험을 하는 기관이 되었다. 주전 6세기에 통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영혼의 전생에 대한 관념은 이러한 과정(참조: ajnavstasi", 386 부활 Resurrection, 고전 헬라어 문헌)의 결론을 지적한다: 당시는 이미 프쉬케(yuchv, 5590)가 똑같은 분량으로, 두 개의 개념, 즉 생명의 토대와 의식을 함유하게 된다. 프쉬케(yuchv, 5590)는 영구한 것으로 간주되며, 사람은 그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프쉬케(yuchv, 5590)의 의미의 이러한 발전을 조사해 보면 그 단어가 세가지 의미 영역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a) 생명의 비인격적 토대로서의 프쉬케(yuchv, 5590), 즉 생명 그 자체 (b) 사람의 내적 부분 (c) 육체와 구별되는 독립된 영혼.


2. (a)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영혼은 → 몸 Body과 결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육체는 그 자체의 생명을 잃게 된다(Homer, od, 14, 426). 사람의 영혼은 잡아 채어가며 그로 인하여 그의 생명은 잃게 된다(Homer, od, 22, 444). 이처럼 영혼은 단순히 생명을 뜻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위해 변호한다(Soph., OC 1326; Hdt. 1, 24, 2).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투쟁할 수도 있으며(Homer, od, 22, 245), 자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Homer, od, 3, 74). 사람은 영혼에 대한 보상, 즉 사람의 생명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Hdt. 2, 134, 4). 사람은 자기의 영혼 즉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다(Eur., Orestes 1172). 프쉬케(yuchv, 5590)는 심지어 자기의 생명과 같이 귀한 것, 예컨대 돈(Hesiod, works 696)과 자녀들(Eur., Andromache 419)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b)  프쉬케(yuchv, 5590)는 사람의 내적 부분 즉 '인격' personality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영혼은 '사람' person과 동일할 수 있다(Eur., OC 499). 육체에 묶여있지만 영혼은 인격적 능력을 강하게 나타내므로 프쉬케(yuchv, 5590)는 인간의 대명사로 사용되며 따라서 "나의 영혼"은 "나"와 동등한 것이된다(Soph., Antigone 227). 인간의 내적 속성에 의하여 인간의 영혼은 강한(Aristophanes, Acharnenses 3963), 혹은 현명한 것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강함에 따라서 분류되어질 수 있다(Hdt., 5, 124). 인간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고 한다면 인간은 영혼이다(Plato, Alcibiades 1, 130a).


영혼의 실제적 능력은 무엇보다도 영혼이 거하는 육체에 영혼이 전달하는 운동에서 보여진다(Plato, Laws 896a-b). 영혼의 개념은 '성격' character(Soph., Philoctetes 55)과 '성향' disposition(Hdt., 3, 14, 1)의 개념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사람의 안을 채우며 사람을 움직이는 이 내적 힘인 영혼의 본질을 조사하고 그것을 불과 온기로 묘사하고 있으며(Aristotle, De Anima 407b 22), 플라톤(Plato)은 영혼을 육체로부터 빼앗길 수 있다는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Plato, Laws 8732-b).


영혼은 지각, 욕망, 기쁨과 즐거움의 좌소이다(Aesch., Persae 841). "영혼"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감정' emotion 대신에 사용되고 있다. "영혼을 가진다" to have a soul는 것은 "어떤 감정을 가진다" to have a certain feeling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Demothenes, 28, 21). 따라서 육체가 아닌 영혼이 사랑, 애욕(Eur., Hippolytus 505), 배고픔과 목마름의 좌소이다. 한편 이성의 힘과 의지의 힘 역시 영혼의 일부이다. 따라서 영혼은 '생각' thought, '판단' judgment과 나란한 위치에 놓여있다(Soph., Antigone 176).


영혼의 성질은 움직이고, 관찰하며, 인식하며 특히 무형의 영적 존재이다(Aristotle, De Anima 405b 11). 이러하므로 영혼은 도덕적으로 그 능력에 따라서 평가되어진다. 영혼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임무는 돌보고 다스리며 충고하는 것이다(Plato, Republic 1, 353D). 기초가 되는 영혼이 없으면, 소피아(sofiva, 4678: 지혜 wisdom)와 누스(nou'", 3563: 이해 understanding)는 발전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헬라 철학은 일반적으로 영혼의 서로 다른 능력들 사이의 관계와 그 능력의 수와 역량에 관하여 계속하여 고찰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영혼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세가지는 '생각' thought을 의미하는 로기스모스(logismov", 3053), '의지' will를 뜻하는 뒤모스(qumov", 2372), '욕망' desire을 의미하는 에피뒤미아(ejpiqumiva, 1939)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삼자 구성을 나타냈다. 그 세가지는 양육, 인식, 생각이다(De Anima). 영혼은 육체와 전혀 다른 특별한 실체물인지, 또는 에피쿠루스와 같이(Epicurus, Epistulae Ip 19) 영혼이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있으며 따라서 조그마한 크기의 실체며 영혼이 따뜻한 증기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따뜻한 것은 생명의 요소로서 관찰될 수 있으며 영혼의 물질적 형체도 상상되어지더라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영혼이 유형적인 것으로 유형적인 물질에 의하여 양육되어지며 육체를 채운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혼은 육체와 서로 상관하고 있다. 영혼의 본질은 호흡을 의미하는 프뉴마(pneu'ma, 4151)이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출산에 기인한다. 영혼은 피의 증기와 영혼이 호흡하는 공기에 의하여 살아간다. 파데(pavqo", 3806의 중성복수: 욕망 affections)는 영혼의 가장 무서운 적이며 영혼으로부터 자유를 뺏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영혼에 부자연스럽고 비 이성적인 한계를 가져다 준다.


영혼의 본질적 특성은 운동하며 그 자체를 움직인다는 사실에 있다(Plato, Phaedrus 245e).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 중에서 인간은 신이 가장 능력있는 영혼을 부어준 자이다(Xenophon, Memorabilia 1, 9, 14). 더욱이 영혼은 신성을 띄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영혼으로 사람을 다스리기 때문이다(Xenophon, Memorabilia 4, 3, 14). 영혼은 자체의 여러 가지 재능에 의하여 단련 받게 된다. 한편 가장 중요한 일은 소크라테스가 가르치듯이(Plato, Apology 30b) 부귀 혹은 행복보다는 영혼을 개발하고 돌보는(에피멜레이스다이, 헬1959)것이다. 그 이유는 덕은 부귀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사적인 생활과 공중생활에서 부귀와 다른 어떤 좋은 것들의 습득은 미덕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영혼의 돌봄에 대한 개념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 즉 육체내의 존재 이전과 이후의 영혼의 생명에 관하여 숙고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참조: ajnavstasi", 386 부활 Resurrection, 고전 헬라어 문헌). 여기에서 교육의 새 이상이 상상되며 영혼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것은 오르퓨스교의(Orphic) 영혼의 귀신, 혹은 아티카(Attic) 비극에서 나타난 영혼, 혹은 호머의 서사시 중의 에이돌론(ei[dwlon, 1497: 지하에 존재한다는 그림자 같은 인간의 형상)이라는 개념(W. Jaeger, Paideia, Ⅰ1, 89이하; The Theology of the Early Greek Philosophers, 1947)과 관계가 없다. 영혼이 통찰할 수 있고 사리를 분별하며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혼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이다. 영혼은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우주와 조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다스림으로 이 조화에 이를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인간은 자신을 운명과 자연에 굴하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영혼은 육체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c)  호머의 서사시들은 영혼의 떠남, 즉 생명의 상실에 대해 언급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영혼들의 거처에 관한 것들도 말한다. 여기에서는 영혼을 육체에 비교하여 사색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깨닫고자 하는 시도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고대인들에게 흔히 있었던 초 심리학적 경험의 결과를 보게 된다. 이것이 파트로클루스(Patroclus)의 유령묘사의 배경이다. 즉 파트로클루스(Patroclus)는 죽었으나 저승에 가지 못했다. 그 유령은 신장과 목소리와 옷 입은 자세가 마치 파트로클루스를 닮았다. 그의 영혼은 바스락바스락, 찍찍, 윙윙(박쥐처럼, Homer, od, 24, 5이하) 소리를 내면서 증기와 같이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아마 그 영혼이 훌쩍 날아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영혼은 당사자와 닮은꼴(ei[dwlon, 1497 에이돌론)이다. 그러나 그 사람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그 영혼은 육체와는 다른 별개의 실체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 영혼은 육체에 자신을 결합시키고 다시 그것을 떠난다(Homer, Ⅰ1, 23, 64이하, 100이하; od, 11, 387).


영혼이 내세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여행의 개념 혹은 빛의 세상에서 육체(참조: ginwvskw, 1097 지식 Knowledge)로 들어가거나 땅으로 내려갔다가 퀴클로스 게네세온, 즉 출생의 순환에 의하여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여행의 개념이 사상적으로 이와 관련돼있다. 또 다른 개념은 영혼들이 영원한 향연에 참예할 것인가 아니면 지하세계의 수렁에 빠질 것인가에 대한 판결은 듣기 위하여 지하세계의 들판에 영혼을 불러모은다는 개념이다. 그 영혼에 관한 그러한 개념과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풍습들 이면에서 실재로 주도하는 힘은 오르퓨스교(Orphism)의 신앙운동이다. 영혼이 독립해 있다는 개념 즉 육체에 얽매여있지 않고 어떤 때에는 육체를 떠났다가 다시 육체로 돌아온다는 개념은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에서도 발견되고 있다(참조: 예를 들어 M. Eliade on Shamanism in RGG3 V 1386이하; and in the GK. World, W. Burkert, Weisheit udn Wissens chaft, 1962, 198이하; and Goes, Zum griechischen Schamanismus, Rheinisches Museum, Neue Folge 105, 1962, 36이하).

플라톤(Plato)은 우리에게 영혼이 몸담고 있는 육체에서 빼앗겨져(Laws 873a-b) 육체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육체에서 분리되며(Phaedo 66e-67a) 또한 그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상을 제공해 주고 있다(Republic 10, 608d; phaedo 70; phaedrus 245c-e). 그는 사람의 생애가 도덕적 투쟁을 하기에 너무 짧다는 이유로 영혼불멸의 필요성에 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확실히 여러 차례에 걸친 영혼의 성육신 경험을 모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은 육체 이전의 존재에서 얻게 되는 궁극적 실체의 형상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육체는 영혼을 위한 옷(페리볼론, peribovlaion, 4018) 혹은 어떤 일종의 감옥(desmwthvrion, 1201)이다. (Plato, Cratylus 400c). 이러한 감옥에서의 영혼의 해방은 구속을 하사하는 신의 은혜를 통하여, 바쿠스 숭배(Bacchic) 의식으로써, 또는 세상의 존재에 대한 금욕적 포기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불멸의 영혼들은 헤르메스(Hermes)에 의하여 지하세계에 인도된다. 그곳에 자격 없는 자들 즉 아뮈에토이(amyetoi)와 아텔레스토이(atelestoi)에 대하여 지하계의 수렁(borboros)이 기다리고 있다(Plato, Phaedo 60c).


영혼해방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은, 그 해방에 따라 영혼이 일련의 새로운 성육신, 즉 일종의 영혼의 전생(transmigration)의 빛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개념이다. 그 영혼의 특별한 행위는 그 영혼의 새로운 존재의 성격을 결정한다(우리는 인도 종교에서 이와 비슷한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의 Karma는 완전히 비인격적이며 더욱이 자기고갈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관념들은 영혼이 육체와 완전히 독립해있고 그 자신의 실체와 불멸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에 의존하고 있다.


상징적인 의미로 프쉬케(yuchv, 5590)라는 말은 또한 국가구성의 고무적 힘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소크라테스(Isocrates)는 성읍의 영혼에 관하여 말하며(12, 138),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는 인간의 덕을 그리스도의 영혼으로 묘사하고 있다(60, 23). 세상의 영혼이 우주의 생명의 원리라는 사상, 그리하여 우주 그 자체가 영혼이며 지배원리(헤게모니콘)라는 개념이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크리시푸스(Chrysippus)에게서 발견된다.


2. 구약성경.


1. 70인역본에서(외경포함) 프쉬케(yuchv, 5590)는 900회 이상 쓰이고 있으며 여러 성경에 매우 골고루 분포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페네쉬(원래는 목 throat, 식도 gullet, 그 다음에 호흡 breath, 증기 exhalation)의 역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또한 25회는 → '마음' Heart '속 사람' inner man을 의미하는 레브의 역어로 사용되며(특별히 시편, 역대상 ? 하, 이사야서에서, 그밖에 레브는 보통 카르디아로 번역되고 있다), 5회는 '살아있는 것' living thing을 의미하는 하이야(그 외 이 단어는 조온으로 번역되고 있음, 생명 Life)의 역어로, 두 번(창 41:8; 출 35:21)은 '영' spirit을 의미하는 루아흐(그 외 이 단어는 프뉴마로 번역된다)의 역어로, 한 번(레 17:4)은 '사람' man을 뜻하는 이쉬(그 외 이 단어는 아네르 혹은 안드로포스, 사람 Man)의 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호흡' breath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네샤마는 일반적으로 '바람' wind, '호흡' breath(→ 영 Spirit)을 뜻하는 프노에(pnohv, 4157)로 번역되며 프쉬케(yuchv, 5590)로는 결코 번역되지 않는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sw'ma, 4983, 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yuchv, 5590)로 번역되어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있는 혼' living soul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하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은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 soul for soul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 life for life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 Blood는 실질적으로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이하; 레 17:11; 레 17:14; 참조: 신 12:23; 피 Blood; 화해 Reconciliation).


(b)  네페쉬를 역하고 있는 프쉬케(yuchv, 5590)는 자아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애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 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 with all your soul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인격 곧 인간의 전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프쉬케(yuchv, 5590)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에서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c)  쿰란(Qumran)문헌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전적으로 구약성경 구조를 따르는 반면에(예: IQH 2:7-35; 19; 5:12-39; 9:7이하; 28, 33: CD 16:1-9), 묵시문헌에서는 헬레니즘의 영향이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식별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 몸 Body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찾아볼 수 없는 반면에 여기서는 육체와 영혼을 대조시키고 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가 영혼에 압력을 가한다(솔로몬의 지혜서 9:15). 의인의 영혼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솔로몬의 지혜서 3:1). 영혼의 부패에 관하여 또한 언급하고 있다(솔로몬의 지혜서 14:26). 영혼을 위한 치료가 발견되지 못할 때는 특별히 가련하다. 따라서 그러한 영혼은 영구히 멸망하지 않으면 안된다(솔로몬의 지혜서 16:9).


2. 요세푸스(Josephus)는 역사와 여러 측면의 인물들에 관한 그의 기사에서 강력한 헬레니즘의 개념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교육과 훈련의 결과이다.


(a)  그에게 있어서 프쉬케(yuchv, 5590)는 역시 일차적으로 외적 지상적 생명의 좌소이다(재산이 아닌 영혼을 구하다, Ant 9, 240; 영혼의 위험 즉 목숨의 위태로움, war 1, 193).


(b)  프쉬케는 육체와 상반된 속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war 1, 430). 프쉬케는 의지와 덕의 소재지이며(Ant.2.9. 선한 태생과 영혼의 덕은 구별된다), 감정(Ant, 20, 83; 혐오, Ant, 169, 93)과 성질(사악한 것, Ant, 16, 301)의 좌소이다.


(c)  끝으로 불멸의 영혼은 인간의 육체와 대조된다(war 2, 154; 참조: Ant, 18, 18, 인간의 영혼을 불멸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에세네파[Essenes]에 대하여). 영혼이 타락되지 않으면 다른 육체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영혼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war 2, 163). 마사다(Masada)에서의 폭동의 지휘자인 엘리자르(Eleazar)의 입을 빌려 요세푸스(Josephus)가 표현한 말도 또한 언급되어야 한다(War 7, 341이하). 여기에서 또한 요세푸스(Josephus)는,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육체에서 떠난 영혼과 그 영혼의 진정한 생명의 불멸성에 관해 헬레니즘 사상의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심지어 인도 사상이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Josephus)는, 불멸의 영혼이 육체에 의해 결정되고 지배되는 이상 영혼의 불멸성과 그 영혼과 영생의 관계가 헛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d)  요세푸스(Josephus)는 더 고찰함이 없이 같은 문맥에서 프쉬케와 프뉴마(영혼 Spirit)를 사용한다. 그는 이들의 개개적 기능에 대하여 아무것도 논하지 않고 있다. 명백하게 프뉴마는 인간의 고차원적 양심을 의미하며 반면에 프쉬케는 생명력 그 자체를 뜻한다(Ant. 11, 240).


3. 영혼에 대한 필로(Philo)의 교의에서 구약성경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는 창조에 대한 그의 교리는 더 발전된다(Migr, 34). 그에게 있어서 영혼은 하나님의 능력과 가능성을 갖춘 인간 존재의 한 면이다. 그 영혼은 하나님의 영에 속에 있으며(Virt, 217), 그 영혼의 첫째 능력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능력이다. 필로(Philo)는 영혼의 지배원리(헤게모니콘) 즉 누스(nou'", 3563: 이해 understanding)에 특별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Leg. All. 1, 39; 이성 Reason). 이 지배하는 부분의 본질, 즉 영혼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이다(Rer. Div. Her, 55).


(a)  필로(Philo)는 또한 '생명' life이라는 의미에서 프쉬케를 이해하고 있다. 이 전체의 존재는 피에 있으며(Det. Pot. Ins. 84), 따라서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있다.


(b)  헬라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필로(Philo)가 영혼을 이성과 비이성적인 능력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보게 되며(Agric. 63) 또한 영혼의 개념을 감정들 특히 미덕의 좌소로(Det Pot. Ins. 59) 따라서 생명의 좌소로 간주하고 있음도 발견한다. 누스의 능력은 사고, 의지, 생기게 하는 능력과 인식에서 표현되고 있다.


(c)  구약성경과는 현저히 다르게 필로(Philo)는 육체 없는 영혼들이 존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Sacr. 5; Som. 1, 135). 그는 우주에 -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하나님의 성소이다 - 순수한 영적 본성을 지닌 육체 없는 영혼들, 즉 천사들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천사들과 비교하여 인간은 이성과 비이성의 혼합체로 나타나고 있다(Spec. Log. 1, 66). 그는 어떤 기간 동안 죽어야 할 육체와 합하여 살다가 그 후 육체를 떠나버리는 고등존재에 관하여 쓰고 있다(Plant. 14). 영혼은 덕의 획득과 실행으로써(conf. Ling, 161), 특별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Op, Mund, 155) 영생을 얻게 된다. 영혼은 마지막으로 죽어야 할 육체의 부분을 뒤에 두고 떠나서(참조: 상기(a)), 만물이 멸절되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세상으로 들어간다(Migr. 18). 영혼의 본향은 진실로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이다. 따라서 육체에 있을 때 영혼은 낯선 곳에 존재하는 셈이다(som, 1, 181). 항구적인 움직임 속에서 그는 하나님에게 속해있다. 하나님 자신이 세상의 영혼이며, 항구적인 움직임 안에 있기 때문이다(Aet. Mund. 84).


4. 헬레니즘의 영향은 또한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특히 마카베오사서에서는 죽을 때 육체에서 분리되는 불멸의 영혼에 대한 개념으로써 그러한 것을 증거하고 있다. 죽음은 불멸로 가는 길이다(마카베오사서 14:5). 승리자의 덕에 대한 보상은 영생, 즉 영혼의 영생이다(마카베오사서 17:12). 임종시에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족장들의 영접을 받는다(마카베오사서 5:37; 13:17). 헬레니즘의 사상을 채택한 분명한 실례는 A. D. 1세기 중엽 자카이의 아들 요하난(Johanan ben Zakkai)에서 보여진다. 그는 게헨나(Gehenna)를 형벌의 중간장소로 말하고 있다(Berakoth 28b 23; 참조: Ab. R. N. 25:7a 51). 전도서(3:21, 22a)에 대한 미드라쉬(Midrash)도 또한 그러한 면을 추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악한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의로운 영혼들은 죽어서 심판을 받기 위하여 하늘의 높은 곳에 올라간다. 누가복음 중 두 곳의 배경 속에 이러한 견해가 존재한다(사도행전에서도 누가는 전형적 헬레니즘 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쉬케가 그 중에 특별히 언급돼 있지는 않다: (a) 눅 16:23에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 안겨 있으며, 부자는 고통의 장소에 있다: (b) 눅 23:43에 잘 알려진 말씀으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낙원 Paradise)에 있으리라"는 구절이 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 분리된 심판의 개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분리해서 심판을 받는다면 영혼은 육체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부활 Resurrection에 대한 묘사를 가지고 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영혼과 육체를 함께 부르시어 그 다음에 같이 심판하신다. 따라서 육체가 정욕의 좌소라는 개념과 또한 영혼이 사상, 생각, 도덕적 확신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라는 개념의 여지가 전혀 없다. 영혼에 대한 헬레니즘의 개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과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전형적 유대 소망이 존재한다. 오직 그때 가서야 하나님의 의가 활동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육체와 영혼을 심판하신다(Sanhedrin 91a). 역시 묵시문헌에서도(에스드라하 7:78이하) 우리는 죽음 직후의 영혼에 대한 심판 사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에 따라 영혼은 유쾌함과 평화와 7배의 즐거움의 장소에 보내지거나 혹은 괴로움과 7배의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는 장소에 보내지기도 한다. 예컨대 에녹(Enoch)은 죽은 의인들의 거처를 보았는데 그들은 간청하며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며 기도하고 있었다(이디오피아어 에녹서 39:4이하). 이와 마찬가지로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71:16은 죽게 되면 의로운 사람들은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에녹서의 결론인 권고부분(paraenetic)은 그와 같은 논지를 따르고 있다. 즉 죄인의 영혼은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반면 의로운 사람들의 영들(spirit, 여기에서는 영혼[souls]과 같은 의미임)은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죽지 않는다(이디오피아 에녹서 103:4, 7).


3. 신약성경


1. 신약성경에서는 70인역본 중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쉬케(yuchv, 5590)가 모두 101회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 중 37회는 공관복음서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15회는 사도행전에서, 10회는 요한복음에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용례는 신약성경의 기사(narrative) 부분에서 발견되고 있다.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모두 13회 쓰이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에서 7회,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 각각 6회,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 요한일서에서 각각 2회, 요한삼서에서 한번 사용되고 있다.


2. (a) 신약성경에서 영혼을 의미하는 프쉬케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병행구 막 16:25, 눅 9:24; 참조: 막 10:39; 눅 17:33; 요 12:25)는 잘 알려진 말씀에서와 같이 또한 생명의 좌소 혹은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진실로 그것을 얻게 된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 자신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실례로부터 분명해진다. 따라서 진정한 생명은 희생을 통해서만이 얻게 된다. 막 10:45과 병행구 마 20:28의 말씀에서도 아주 뚜렷하게 프쉬케는 생명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선교사역은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참조: luvtron, 3083 구속, 신약성경). 또한 역시 눅 14:26에서 "자기 목숨(soul)까지 미워"한다는 의미는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뜻이 된다(참조: 눅 9:23 자기 자신을 부정함). 눅 14:26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계 12:11의 대응구이다.


프쉬케(yuchv, 5590)는 자신에 관심을 두고 자신을 항상 돌보는 모든 자연적 존재와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 6:25은 프쉬케를 위하여, 즉 프쉬케의 음식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목숨(yuchv, 5590)과 육체(소마)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람들이 매우 염려하고 있는 음식과 옷보다 더욱 중요하다. 눅 12:19에서 부자는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걸고 있다. 즉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는 자신의 프쉬케 즉 자신의 생명이 일순간에 그의 육체로부터 빼앗김을 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행 2:27의 시 16:10의 인용문은 프쉬케를 - 다시 생명이 위치한 좌소의 의미로 - 하나님에 의하여 음부에 버려지는 것 또는 음부에 넘겨지는 것으로(참조: ajnavstasi", 386 부활 Resurrection), 즉 그 화자(話者)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영혼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함을 의미하고 있다(빌 2:30).


요 10:11은 예수께서 양을 위하여 자신의 프쉬케를 버리신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자를 사랑하신다(요 10:17). 같은 표현이 요 13:37에서도 기록되고 있는데 거기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내어놓겠다고 말한다("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여기에서는 '버리다' lay down를 의미하고 있으나(요한복음), 보통 '놓는다', put '두다' place를 의미하는 동사 티데마이(tivqhmi, 5087) 및 '주다' give를 뜻하는 동사 디도미(divdwmi, 1325, 마 20:28; 막 10:45)와 프쉬케는 '목숨' life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 두 동사를 어떠한 의미로 해석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롬 16:4에서 바울은 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까지 내놓았던 자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행 15:26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들의 프쉬케, 즉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프쉬케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숫자를 기록한 신약성경에서 또한 발견되고 있으며(행 7:14,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souls]; 행 27:37, 멜리데 해안의 난선 위에 있는 이백 칠십 육 "인"[souls]; 벧전 3:20, 노아 Noah의 방주에서 구원 얻은 여덟 "명"[souls]),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모든 영혼이라는 표현에서(행 2:43, 행 27:22; 롬 2:9; 롬 13:1)도 사용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영혼"("every living soul," 개역한글, "모든 생물")이라는 표현은 또한 구약성경의 의미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시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 넣으심으로 인하여 흙이 "살아있는 혼"(living soul, 개역한글, "생령")이 되었다(창 2:7). 사도바울은 고전 15:45에서 이 개념을 취하여 자연적 지상적 생명의 능력이자 주도하는 힘인 "산 혼" living soul(개역한글, "산 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살려주는 영 Spirit"과 대조하고 있다.


(b)  프쉬케는 자아, 인격에 상당하고 영혼의 여러 가지 능력이 있는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 고후 1:23에서 바울은 근엄한 서언의 형태인 자신에 대한 일종의 저주로써 자신의 "영혼"을 걸고 맹세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러한 언급은 목숨뿐만 아니라 그가 믿고, 소원하고 노력하는 모든 것과 아울러 자신이라는 인간전체에 관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살전 2:8에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이 밤 낮으로 일하면서 교회를 돌보는 가운데 그들의 "목숨"(souls), 즉 살아있는 정력의 힘, 혼신의 모든 힘을 다한 자들까지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혼"(soul)은,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헤오스 포테 프쉬켄 헤몬 아이레이스)?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라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의 질문을 기록한 요 10:24에서 '인격의 의식적 능력' the person with its conscious powers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휴식과 평화를 필요로 하고 있는 영혼들(souls, 개역한글,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다(마 11:29). 영혼(soul)의 깊은 곳에서 고민을 경험하게 된다(마 26:38 병행구 막 14:34; 참조: 시 42[41]:6). 눅 1:46-47에서 영혼(soul)이 영(spirit)과 나란히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 두 개의 단어는 입술과 언어의 외적인 면과 대조를 이루는 인간내부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 쓰여진 영혼은 헬라에서 쓰고 있는 영혼에 대한 사상을 초월한 의미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것은 신앙적 생명의 좌소이며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의 좌소이다. 육체는 외적으로 상처입히는 칼과 직접적으로 대조시켜 눅 2:35에 언급한 것은 인간생명 속의 이러한 신앙적 뿌리이다. 여기는 영혼의 감추어진 내적 경험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신앙적 생명은 요삼 1:2의 주제이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이러한 의미에서 "의로운 영혼" righteous soul이라는 표현이 벧후 3:8에서 신앙적인 사람을 뜻하는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살전 5:23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이(사람의 삼분설), 혼(soul)과 영(spirit)의 대조이다. 여기에서 대조한 것은 영(soul)과 혼(spirit)이 아니라 →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다. 이 문맥에서 영(spirit)은 필로(Philo)와 플라톤학파(Platonism)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있어서 보다 고귀한 면을 의미하며, 필로(Philo)의 헤게모니콘에서 멀리 벗어나지 아니한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참조: 고전 헬라어 문헌 2 (c)). 따라서 혼(soul)은 생명, 즉 살아있는 존재라는 사실과 의지와 감정과 관계 있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고후 2:14에서 바울은 안드로포스 프쉬키코스와 하나님의 영으로 계화된 사람을 의미하는 안드로포스 프뉴마티코스를 대조시키고 있다. 전자는 생명력이라는 의미의 영혼으로 채워져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며("생혼," living soul 창 2:7이하; 참조: 고전 15:45), 영적인 사람과 구별되는 자연인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영' spirit(살전 5:23의 영과 구분됨, 상기 논술을 보라)은 '하나님의 영' God's Spirit이며, 자연인 속에도 존재하는 인간 구성물의 일부인 모종의 고차원적 정신적 능력은 아니다. 이와 같이 영(spirit)과 대조되는 점에 있어서 혼(soul)은 인류학적 차원의 상이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존재양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용사 프쉬키코스(yucikov", 5591)는 부활의 성격에 대한 바울의 논거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에서 이생의 몸과 부활한 육체를 대조시키고 있다. 전자는 프쉬키코스이며 후자는 프뉴마티코스(pneumatikov", 4152)이다. "육의 몸(소마 프쉬키콘)으로 심고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소마 프쉬키콘)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을 산 영(프쉬켄 조산)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토 프뉴마티콘)가 아니요 육이 있는 자(토 프쉬키콘)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토 프뉴마티콘)니라"(고전 15:44이하).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도바울은 부활이 우리의 육체의 소생으로 생각하는 바 그 불합리성에 대한 이의를 반박하였다. 개역표준성경(RSV)는 여기의 형용사를 "physical"로 번역함으로써 시공간의 조건하에 있는 생명과 부활의 생명의 차이점을 올바로 밝히고 있다. 약 3:15에서도 개역표준성경이 그 단어는 "unspiritual"로 번역함으로써 그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여기에서 대조하고 있는 것은 세상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이다. 즉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unspiritual-RSV) 마귀적이니"(약 3:15).


끝으로 유 1:19에서 개역표준성경은 그 단어를 "worldly"로 번역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worldly-RSV)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각 경우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영이 없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다른 한편 히 4:12이 혼(soul)과 영(spirit)을 서로 분리함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순수한 개념 그대로 생각하며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 내부 깊은 곳의 능력의 구별을 분간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 존재에 대한 가장 깊숙한 구석까지 감찰하시고, 잠재의식의 동기를 밝히신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이다(F. F. 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NLC, 1964-82). 히 6:19(영혼[soul]의 닻)에서 "영혼"(soul)은 의지, 이성, 감정의 능력을 지닌 인간의 온전한 내적 생명을 다시 가리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의 통찰력, 의지, 기질, 감정, 도덕적 능력을 의미하는 프쉬케의 용법에 대하여 또한 언급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또한 "네 마음(soul)을 다하고"(마 22:37 병행구 막 12:30, 눅 20:27; 참조: 신 6:5; → 명령 Command; →  사랑 Love)에서의 의미와 같다. '마음으로부터' from heart를 의미하는 엑크 프쉬케스(엡 6:6; 골 3:23; 각 경우가 그 서신 중의 유일한 용례이다)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소화시켜야 한다(참조: 또한 집회서 6:26; 기타 등등).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한 마음으로' with one mind를 의미하는 미아 프쉬케라는 표현(빌 1:27)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 영 안에서' in one spirit를 의미하는 엔 헤니 프뉴마티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의 배경은 아마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몸은 인간의 육체와 비슷하게 영혼으로 채워져 있고 교회가 교회의 내적 능력을 단일화하여 몸된 교회의 통일성을 완전하게 할 때 교회 그 자체가 진실되고 살아있게 된다는 개념일 것이다. 행 4:32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된 마음' common mind을 의미하며 이러한 마음은 교회가 한 마음, 한 영혼으로 뭉쳐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 지체들의 내적 능력이 히 12:3에서는 '영혼에 있어서, 즉 내적으로 피곤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권고의 표적이 되고 있다(한글개역은 불분명 대조성서 Ⅱ 참조). 확고하게 바로 서지 못한 영혼은 유혹에 빠지기 쉽고 미혹되기 쉽다(히 10:39).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내적 욕망과 통제되지 않은 영혼의 움직임이다. 영혼은 또한 잘못되고 악한 길로 빠져들 수 있다. 따라서 영혼은 해독을 받을 수도 있다(행 14:2).


신약성경 중의 구약성경 인용문들에서 "나의 영혼 my soul"과 "나"라는 일반적 대등어구가 동일한 표현으로 답습되고 있다. 예컨대 하나는 스스로가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인격을 특징짓는 모든 것, 즉 그의 사랑, 진노, 미쁘심 등등을 포용하고 있다(마 12:18, 참조: 사 42:1; 히 10:38, 참조: 합 2:4).


(c)  헬레니즘적 유대주의는 영혼의 타락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개념에 친숙하다. 이러한 노선의 사상은 신약성경의 후기 서신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불멸의 영혼을 영생의 보증 혹은 본체로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런 구절들은 헬레니즘의 명확한 자취를 보여주고 있으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구절들은 성경의 전통과 근본적인 종말론적 직관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 경험을 통해 약간 다른 수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예를 들면 크세노폰(Xenophon)이 "너희의 생명들을 구하라" save your lives는 의미에서 "너희의 영혼들을 구하라" save your souls고 말한, 생명과 관련된 이 부름은(Cyr. 4, 4, 10)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고 순종하라는 권고로 변한다. 영원에로 예정된 영혼들을 돌보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임무이다(히 13:17). 미켈(O. Michel)은 여기에서 "영혼" soul을 "종말론적 생명" eschatological life으로 해석하고 있다(Der Brief an die a Hebraeer, KEK 13, 1966, ad loc).


약 1:21과 약 5:20은 위험에 있는 영혼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다. 영혼이 거기에서 구원받는 다고 말한 바로 그 → 죽음 Death은 영원한 죽음이며,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배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혼의 구원은 신앙의 목표이자 하나님의 전 구원행위의 내용이며 하나님은 침례 받은 모든 자로 하여금 여기에 동참하게 하신다(벧전 1:9). 벧전 1:22이 영혼의 청결과 거짓 없음, 즉 내적 생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영혼을 거스려, 즉 영혼의 의지와 복종을 거스려 육체의 정욕은 투쟁하고 있다(벧전 2:11).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우리들의 한 부분인 영혼은 하나님의 미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로 되어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대조되는 것은 영(spirit)과 혼(soul)과 육(body)이 아니라 영혼(soul)과 육체의 정욕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으로 말한 벧전 2:25의 뜻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영혼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환들과 관련하여(벧전 2:18) 예수 그리스도와 불의하고 독단적인 그들의 지상적 감독들을 대조시키고 있다. 자기들의 영혼을 돌보는 참 "감독" bishop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은 이 종들에게 인내하고 사랑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지 않을 수 없다(벧전 2:25).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보존하시기 때문에 박해의 때에도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라는 벧전 4:19의 권고에서도 역시 "영혼들" souls이라는 단어가, 영원한 생명과 사망에 대한 승리로 예정되었다는 의미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 10:28(참조: 눅 12:5)도 또한 이러한 범주에 들어 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께로 오직 영혼을 향하게 하고 있다.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기 때문에, 그리고 영혼은 그 자체를 부름 받도록 허락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이 영혼은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홀로 영혼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살릴 수도 있고 또한 멸할 수도 있으시다. 이와 비슷하게 계 6:9; 계 20:4에서 하늘의 하나님의 제단 아래 있는 살해당한 영혼들, 즉 지상성전의 대응물인 하늘성전의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유적 표현은 아마도 희생의 제물이 된 피가 성전제단 앞에 뿌려졌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레 4:7; 참조: quvw, 2380, 구약성경3. 신약성경5).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린 순교자들은 희생제물에 비교된다. 그러한 것은 바로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있는 이유이며, 영혼 즉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사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획득되고 구원 얻고 그를 믿으며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보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들은 하나님의 목적과 영역의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미래의 예정 속에 장차 지상에 출현할 하늘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3. 헬레니즘의 용어인 프쉬케(yuchv, 5590)가 신약성경의 후기 서신에서 다른 부분보다 더 자주 사용되고 있으나(참조: 2[c]) 영혼을 인간의 실질적인 귀중한 부분 곧 영원하고 영구한 요소로 보는 개념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독일의 이상주의 특성과 일치하고 있는 이러한 유형의 사상은 영혼의 불멸성과 영구성을 영혼 자체의 특성에서 추론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가 아니다. 영혼은 단순히 생과 사,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기로에 서 있다. 나아가서는 신약성경에서 프쉬케에 관한 모든 진술은 생과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진술의 문맥과 관계 있다. 그러한 문맥 외에서는 이 사상노선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상 맥락의 일부가 하나님이 심판자시며 그의 심판으로 인하여 영혼이 구원 얻든지 아니면 멸망 당하든지가 결정된다는 가르침이며, 영혼의 구원이 항상 육체의 → 부활 Resurrection 즉 영혼의 새로운 형체와 관계하여 이해된다는 사실이다

- G. Har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