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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Parable)와 풍유(Allegory) - 노튼 스테렡

은바리라이프 2012. 10. 13. 11:52


비유(Parable)와 풍유(Allegory)

 

      비유는 보통 어떤 도덕이나 영적 진리를 전달한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사실이지만, 정말 발생한 일은 아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천국의 의미를 지상의 이야기로 엮은 것”이라고 했다.

      비유는 빗대어서 하는 것이니까, 직유의 연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흔히 “천국은 마치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다.ㅡ예, 마태복음 22장 1절ㅡ 그러나 이렇게 시작되지 않는 비유의 말씀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장 33절은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있었는데······,”라고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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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는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배경’, ‘이야기’, ‘적용’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는 배경이나 적용이 빠졌거나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에 적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사의 질문이 배경이 돼 이에 답하신 비유로서, 마지막에 메시지를 적용하셨다. 마태복음 21장 33절부터 41절에서는 권위에 대한 논쟁이 배경이며 심판의 경고가 적용이다. 마태복음 13장 3절부터 9절과 누가복음 13장 18절, 19절의 경우를 보면, 처음 것은 배경이 빠졌고, 두 번째 것은 배경과 적용이 다 생략돼 있다.

      배경이나 적용이 이야기 문맥 일부로 돼 있으면 그 비유의 해석은 쉬워진다. 그런데 양쪽 모두, 또는 한쪽이 아주 없으면 해석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

 

      배경은 흔히 해석의 길잡이가 된다. 그 예로서 누가복음 15장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반대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게 됐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뻐하신다.’는 교훈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일을 반대할 까닭이 없다.’는 가르침이 이 세 가지 비유의 주제, 중심 교훈이다.

      비유는 대개 한 가지 주된 요지가 있다. 그러니까 비유의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규명하면서 영적 교훈을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중심 교훈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께서 비유를 그렇게 적용하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이렇게 적용하셨다. 7절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절도 이 다음 비유를 같은 식으로 해석하셨다. 근본적인 면에서는 탕자의 비유와 같다. 구태여 다른 것이 있다면, 탕자의 비유는 이야기에 살이 많이 붙은 것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셨는가? 율법사로 하여금 해석을 하도록 하셨다. 이웃임을 증명한 자는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들이나, 다른 두 사람, 나귀, 돈, 주막 집 주인 등에 대해서는 어떤 특별한 의미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항상 한 가지 사실만을 비유에서 골라내지는 않으셨다.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와 ‘가라지’와 ‘씨’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자세히 적용하셨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도 같은 식으로 해석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예외적인 것들이다. 비유에는 한 가지 주된 교훈이 있는 것이 일반 원칙이다.

 

      기독교 초기의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 말씀을 우화적으로 해석해 비유의 세부 이야기에서 자못 놀라운 뜻을 이끌어 냈다. 이 중에 한 사람인 오리겐(Origen)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이렇게 해석했다.

 

      아담은 도적들에게 변을 당한 사람이다. 예루살렘은 하늘을 상징하고 여리고성은 세상을 가리킨다. 도적들은 마귀와 그의 천사(귀신)들이며, 제사장은 율법을, 레위인은 선지자들을 대변한다. 물론 그리스도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그의 몸은 사마리아인의 짐승이며, 그의 교회는 주막이다. 데나리온 둘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사마리아인이 다시 들리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이러한 해석은 적어도 몇 개의 상황에는 일치된다. 그러나 이 해석을 뒷받침할 만한 여지가 본문에는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께서 이와 전혀 다른 해석을 주셨다. 그리므로 오리겐의 해석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이런 식의 해석을 따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ㅡ역자 주: 한국에도 이러한 풍유적인 해석이 꽤 보편화돼 있다.ㅡ

 

      예수님께서는 아마 몇 가지 비유를 여러 번 말씀하신 듯하다. 잃어버린 양도 두 개의 상이한 배경에서 발견되는 비유이다.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자식을 돌보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관련돼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양편이 다 ‘하나님의 사랑에 찬 돌보심’을 주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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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튼 스테렡 [성경해석의 원리] 한국성서유니온 편집부 역 (서울: 한국성서유니온, 1978) 107쪽~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