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타난 회개
차준희 교수
I. 들어가는 말
구약성서에는 '회개/참회'를 뜻하는 명사로 된 전문용어가 없다. 다만 '방향을 바꾸다/되돌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슈브)가 이러한 개념을 대신하고 있다. 이 동사는 본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용되는 세속적인 용어이다. 이 동사는 구약성서에서 약 1056번 사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종교적인 의미로 쓰인 예는 대략 118번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중요한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모스서에서 5번, 호세아서에서 7번, 이사야서에서 7번, 예레미야서에서 28번, 에스겔서에서 20번, 역대기 역사서(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서)에서 16번, 신명기서에서 3번, 제2이사야에서 3번, 스가랴서에서 3번, 말라기서에서 3번, 그리고 시편에서 5번 사용된다.
이 동사는 '∼로부터 돌아오다(turn back from)'와 '∼로 돌아가다(turn to)'는 의미를 갖고 있다. '떠남'의 대상은 주로 '약한 행실', '지금까지의 행실', '악', '악한 행동', '폭력', '우상', '가증한 것', '죄' 등으로 언급된다. '향함'의 대상은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야웨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또한 향함의 대상으로 토라가 한 번 언급되기도 한다(느 9:29). '떠남'과 '행함'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하면 회개란 한마디로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미 생활방식을 바꾸고 생활전체를 새로운 쪽으로 돌린다는 회개나 회심의 본질이 표명되어 있다.
위의 용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회개)이라는 주제는 주전 8세기이후 예언자에 와서야 중심주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례가 주로 예언서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보아 회개 주제는 예언선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나타난 회개의 제의적 형태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을 정리하고, 이어서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개와 그 이후, 즉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회개이해에 대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II. 제의를 통한 회개의식
하나님의 벌로 말미암아 재앙이 닥쳤을 경우, 혹은 그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을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의 뜻을 표시하는 제사의식을 거행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예를 들면 금식을 하거나(삿 20:26; 왕상 21:8-10), 옷을 찢거나 굵은 베옷을 걸치거나(왕상 20:31-32; 왕하 6:30; 사 22:12; 욘 3:5-8), 재 위에 눕거나(사 58:5)하였다. 때로는 목놓아 울기도 하고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삿 2:4; 욜 1:13; 2:17).
솔로몬의 성전봉헌기도에 의하면 포로기 이전 이미 회개의식/회개의 날이 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왕상 8:33-34). 예레미야 시대에도 금식의 날(회개의 날)이 언급된다(렘 36:6, 9). 구약성서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도 회개의식이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스가랴 8장 19절이 이점을 증거하고 있다:"만군의 야웨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 9장의 참회(회개)의 날에 거행된 기도도 또 하나의 좋은 증거가 된다.
III. 제의적 회개의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회개를 하곤 하였다:
"오라 우리가 야웨께로 돌아가자(슈브)
야웨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야웨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야웨를 알자
힘써 야웨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은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1-3).
그러나 호세아는 백성들의 이러한 회개가 신실하지 못한 거짓 회개임을 간파하고 이를 질타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헤세드)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들의 회개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아침구름이나 이슬 같아서 지속적이지 못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불성실한 회개요 거짓회개이다. 그들은 회개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이 야웨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야웨께서 그들 쪽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란 것이다. 그들의 회개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헤세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엘로힘)이 결여되어 있다. 호세아는 이점을 비판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사야 58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금식)란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의식적인 행위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스가랴도 포로기 이후 공동체가 포로기 때부터 습관처럼 지켜왔던 회개의 날을 비판하고 있다: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 때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 7:5-6)
스가랴는 이러한 습관적인 회개의식 대신 이미 과거의 예언자들이 선포하였던 사회정의의 실천을 요구한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너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슥 7:9-10)
마지막으로 요엘은 '마음을 찢는' 철저한 회개가 결여된 '옷을 찢는' 외형적인 회개를 비판한다:
"야웨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슈브)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웨께로 돌아올지어다(슈브)"(욜 2:12-13)
우리는 요엘 2장 12절에서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식을 요구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언자들은 회개의식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회개의식 비판은 백성들의 회개가 단순히 지나간 죄를 고백하고 후회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회개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결여 되어 있다. 회개는 죄를 참회하여 용서를 구하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한 간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죄의 본질자체에서 뛰어 나오는 것이다. 또한 죄의 본질로부터의 떠남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감과 다르지 않다:"너희는 나(야웨)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뜻이 담겨진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예언자들의 선포에 나타난 회개는 죄의 고백인 동시에 바른 삶의 차원까지 포함한다.
IV.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개
예언자들이 보는 회개란 한마디로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예언자들의 회개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본래의 이상적 관계로 되돌아감'이다. 이러한 이상적 관계를 호세아는 부부관계로 표현하고(호 2:7), 이사야는 부자관계로 묘사한다(사 1:2). 이러한 이상적이고 본래적 관계의 파괴가 곧 '야웨로부터의 떠남'이며 이는 죄이다: "무리가 나(야웨)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렘 1:16). 야웨께 대한 왜곡된 태도가 죄라면 원래의 이상적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전존재가 야웨께로 향한 상태로서 그분의 뜻에 전폭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전 7세기에 이스라엘의 종들을 풀어주었던 사건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회개란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 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지 칠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년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슈브),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렘 34:13-15, 표준새번역).
2)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 신뢰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을 거부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주관을 믿지 못하는 것 또한 죄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온 백성아,
이제 너희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네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틀림없이 은혜를 베푸실 것이니,
들으시는 대로 너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셔도,
다시는 너의 스승들을
숨기지 않으실 것이니,
네가 너의 스승들을 직접 뵐 것이다."
또한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 예를 들면 외교적 동맹이나 원조 같은 모든 인간적인 도움과 이방신들과 우상들의 도움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슈브).
네가 지은 죄가 너를 걸어 거꾸러뜨렸지만,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께로 돌아와서(슈브)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의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를 찬양 하겠습니다.
다시는 앗시리아에게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외교적 원조).
군마를 의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는
고백하지도 않겠습니다(우상).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호 14:1-3, 표준새번역).
3)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남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모든 것과 일체의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이다. 회개의 이러한 측면은 앞선 예언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와서 '∼로부터 떠나다'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로 행함'이라는 추상적인 표현보다 '∼로부터 떠나다'는 표현이 더 구체적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혹시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수도(슈브)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거둘 것이다"(렘 26:3, 표준새번역).
4) 인간 스스로의 회개의 불가능성
예언자들은 이러한 회개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포로기 이전, 적어도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예언자들이 회개를 언급할 때 이것은 등한히 여겨 이미 놓쳐버린 기회로 말한다:
"그러나 이 백성이 자기를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슈브) 아니하며
체바오트 야웨를 찾지 아니하도다"(사 9:13)
호세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회개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그의 하나님에게
돌아가지(슈브)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야웨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호 5:4)
주전 8세기 예언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개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그들은 왜 회개에 대하여 말하는가? 그들의 선포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단어는 "돌이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는 점은 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하여 언급한 것이다. 예언자들의 선포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회개의 의지도 회개의 능력도 없었다(사 30:15). 따라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심판뿐이었다(암 9:1-4). 그들에게는 죄로 인한 심판을 경험한 이후 혹은 심판 중에서 회개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 회개의 주도권도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심판 이후의 회개도 하나님의 치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의 회개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내가 저희의 패역(메슈바탐)을 고치고(라파)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슈브)이니라"(호 14:4)
V.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회개 이해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와서 회개에 대한 이해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1) 회개의 개인화와 회개의 가능성 강조
포로기에 와서 예언자의 회개 촉구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기 보다는 각각의 개인을 향해 선포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에스겔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음으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리다"(겔 18:2) 는 이스라엘의 속담에 제동을 건다. 그는 미래가 과거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즉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9-20)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겔이 말하는 회개는 우선 개인의 회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악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슈브)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다"(겔 18:21; 참조. 겔 18:27; 33:9, 11, 12, 14 등)
그는 더 나아가 회개의 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기도 한다:
"주 야웨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슈브)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슈브)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야웨의 말씀이니라 죽을자가 죽는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슈브) 살지니라"(겔 18:30-32).
에스겔이 여기에서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마음과 영"은 다른 곳에서 야웨의 선물로 간주되고 있다:"또 새 영을 너희 손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참조. 11:19). 따라서 에스겔은 회개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하는 점에서 포로기 이전의 선배 예언자들과 차이가 있지만 회개와 새로운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점은 선배들과 다르지 않다.
2) 회개는 율법준수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율법적 특성의 부각이 회개에 대한 이해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회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야웨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슈브)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신 30:9-10)
신명기 사가(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의 저자)는 요시아왕을 "야웨께로 돌이킨 자"로, 곧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수한 자로 높이 평가한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야웨께로 돌이킨(슈브)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정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의 장문의 참회 기도문에서도 회개는 율법으로의 돌이킴으로 이해되고 있다:
"돌이켜(슈브) 주의 율법(토라)대로 바로 살라고, 주께서 엄하게 타이르셨지만 그들은 거만하여 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키기만 하면 살게되는 법을 주셨지만, 오히려 그 법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주께 등을 돌리고, 목이 뻣뻣하여 고집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느 9:29, 표준새번역)
3)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
포로기 이후 공동체에서 회개는 하나의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말라기서의 경우 회개는 곧 원래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헌물을 원 주인에게 되돌리는 구체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너희 조상 때로부터
너희는 내 규례를 떠나서 지키지 않았다.
이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너라(슈브)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겠다(슈브)
나 만물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돌아가려면(슈브)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는구나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말 3:7-8, 표준새번역)
여기에서 회개, 곧 야웨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정확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성전유지와 성전 봉사자들의 생활 그리고 공동체의 약자들을 위한 몫이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또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 손으로 하는 봉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VI. 나가는 말
구약성서에서 회개라는 개념은 '방향을 바꾸다/되돌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슈브'를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 이 동사가 '야웨께로 돌아가다'라는 주제로 쓰인 예는 주전 8세기 예언자들로부터 시작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통한 형식적인 회개에 머무는 것을 질타한다. 그들에 따르면 회개는 죄의 고백인 동시에 바른 삶의 실천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회개는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을 뜻한다. 예언자들은 회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회개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와서 회개의 개인성이 강조되고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체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약성서가 말하는 회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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