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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종말신앙의 기원, 발전과 현대적 교훈

은바리라이프 2012. 9. 4. 13:13

구약종말신앙의 기원, 발전과 현대적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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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희(한세대)

1. 들어가는 말

1999년은 원래 프랑스계 유태인 의사였던 저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M.Nostradamus, 1503-1566년)가 인류 최후의 날로 예언했던 해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함께 기독교에도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의 영향으로 1999년은 인류역사의 종말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예루살렘 감람산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미 예루살렘과 그 인근 도시의 호텔들은 예약이 완료되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의 기도에서 ‘마지막 때’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여기에서 ‘마지막 때’란 물론 종말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종교이다. 또한 종교와 종말론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종교의 핵심은 곧 종말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의 근거는 구약성서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서 종말론적인 사상의 중요한 발전은 묵시사상(Apokalyptik)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묵시사상과 더불어 성서적인 종말론은 예언서속에 가장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종말론을 올바로 파악키 위해서는 종말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구약 예언서와 묵시서(다니엘서)의 종말론을 검토해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구약종말신앙의 의미, 기원 그리고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추론하고 구약성서의 종말신앙이 오늘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교훈을 정리하도록 한다.

2. 구약종말론의 의미

1) 종말론의 정의: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

종말론(Eschatologie/Eschatology)은 19세기에 교의신학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용어로서 전통적으로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Lehre von der letzten Dingen)을 의미한다. ‘마지막 일들’이란 곧 죽음, 심판, 천국, 지옥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사정들(부활, 죽은 자들의 중간상태, 예수 재림 등)을 가리킨다. 이런 개념하에서 종말론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 저너머의 세계와 역사 저너머의 시간을 지향한다.

2) 종말론의 의도: ‘때’보다 ‘삶’

따라서 자연스럽게 종말론을 연구하는 자들의 관심이 이 세상이나, 인류 역사나 시간의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를 찾는 것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종말에 관하여 소개할 때, 그 ‘때/시각’에 관하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고정되지 않은 ‘주의 날’이라는 개념이나 ‘그때에’라는 구문으로 종말의 시간 개념을 함축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역사의 종말이 언제 이루어지는가?”라기보다는 “인간 역사의 종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가 구약성서적 종말론의 관심이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의 종말론적 본문들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①인간죄의 종말: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다”(렘 33:8).

②전쟁의 종말: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 4:3).

③인간의 모든 질병의 종말: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6).

④기근의 종말: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

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하여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겔 36:29-30).

⑤생명체를 죽이거나 상하게 하는 일체 행위의 종말: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

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사 11:6-9).

⑥죽음의 종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야웨께서 모든 열국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야웨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등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종말 사상은 그 ‘때’를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관심을 가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말의 ‘때’보다 중요한 것은 종말의 때에 경험하게되는 삶의 현실이며 더나아가 이러한 종말을 준비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막 13:32-33).

3. 구약종말론의 기원

종말론은 일종의 우연에 의한 부가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약성서의 하나님 신앙을 구성하는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종말신앙이야말로 이스라엘이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속하도록 해주는 근거가 되었다. 종말신앙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엇보다도 회복의 희망이 이스라엘 안에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그 당시 수많은 나라들과는 달리 멸망당하지 않으리라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은 이스라엘적인 현상으로서, 이스라엘 이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즉 “종말론은 초기 이스라엘의 주변국가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종말론은 이스라엘 고유의 현상으로 보인다 ......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의 역사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종말론’과 ‘세계의 종말’이라는 주제는 주변국가들의 종교들에서 본질적인 관심영역이 아니었다.”

한가지 예를들면, 지상의 나라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쇠하여 망하게 되어 지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같은 나라들도 국가의 멸망과 함께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다시 재기하지 못하였다. 애굽도 제26왕조가 주전 7-6세기에 망함으로 애굽의 찬란했던 역사는 영구히 지상에서 끝났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역사도 각각 주전 7세기와 6세기를 전후하여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전 6세기 초에 바벨론에 의해 망했지만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이는 바벨론에는 종말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몰락과 함께 민족과 문화가 끝장났지만 이스라엘은 종말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전 6세기의 몰락 이후 그리스-로마의 계속된 거센 박해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신앙의 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입증되었듯이 종말신앙은 삶을 지탱시켜 주는 활력소요 존재로의 용기인 것이다. 소망이 사라진 시대에 소망과 용기를 준 것이 종말신앙이다. 그러므로 종말신앙은 생명의 위협과 존재와 비존재의 기로에 선 자들에게 생명의 보장이요 소망이다. 성서의 종말론은 흑암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소망을 갖고 책임적인 존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영원한 가치 있는 삶을 촉구하는 것이며, 절망에서 소망을 찾는 삶의 자세이다. 이러한 구약의 종말신앙은 이웃나라의 영향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야웨신앙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4. 구약종말론의 발전과정

20세기의 대표적 구약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네덜란드의 프리젠(Th. C. Vriezen)이 1953년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구약의 종말론을 대략 4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각각의 단계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수준에서 멈춘다. 여기서는 이를 계승하여 각 단계의 특징을 보다더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먼저 그의 분류에 준하여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누어 본다:

① 종말론적 이전(prae-eschatologisch) 단계:

고전적인 예언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주전 8세기 이전)

② 원시(原始)종말론적(proto-eschatologisch) 단계:

아모스에서 예레미야에 이르는 시대(주전 8-7세기)

③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적(aktualisierend-eschatologisch) 단계:

에스겔과 제2이사야(사40-55장)의 시대(주전 6세기)

④ 초월화되는 종말론적(transzendentalisierend-eschatologisch) 단계:

이원론적이며 묵시문학적인 본문들(주전 6세기 후반이후)

1) 종말론 이전(前) (주전 8세기 이전)

첫 번째 시기는 주전 8세기에서 5세기까지 활동한 고전적인 예언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웨의 날이란 그들이 다윗 시대에 누렸던 지위외 권세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는 영광의 날이며 구원이 성취되는 날이다. 그들의 희망은 주로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부강에 초점이 모아졌다(창 49장; 민 24장; 신 33장등). 이런 형태는 종말론 적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대는 세계를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영향력의 확대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야웨에 의해서 만들어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보다는 민족주의적 팽창주의에 더 가까왔다. 그들은 미래보다는 오히려 과거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다. 따라서 주전 8세기 문서 예언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종말사상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 원시(原始)종말론(포로기 이전 예언시대)

종말에 관한 사상으로 보이는 것은 문서 예언자들 가운데 최초에 해당하는 아모스의 메시지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전문적인 의미로 볼 때 그의 선포는 아직 종말론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종말론의 발아격인 초기 형태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아모스의 등장이 주전 760년경인 점으로 보아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때가 종말사상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아모스 이전에는 들어 볼 수 없는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그의 선포를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케츠)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치 아니하리니“(암 8:2).

여기에서 ‘끝’(ץ?, 케츠)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마지막/종말’이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헬라어 ‘에스카톤(ἔσχατον)'이라는 말이 나왔고, 또한 영어의 ‘에스카탈러지(Eschatology)'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자기 백성 전체에게 종말을 선포한 최초의 인물이 아모스이다. 아모스가 그의 앞날,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스라엘의 앞날에 관해서 보았던 것은 어두움, 단절, 그리고 파괴였을 뿐이다. 이스라엘이 온전한 구원과 복을 받게 될 날로 기대하였던 ‘야웨의 날’도 아모스에게는 심판의 날에 지나지 않는다:

“화있을 진저

야웨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야웨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같도다

야웨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이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 5:18-20).

이러한 종말을 선포하기 이전에 야웨는 이미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회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거절로 결국 이스라엘은 형집행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암 4:6 ; 참조. 4:7-12).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암 9:1).

아모스의 종말 메시지는 잇달아 등장하는 이후의 예언자들에게서도 표현을 달리할 뿐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호세아(주전 750-725년)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고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선고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종말을 뜻한다.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활동을 한 이사야(주전 740-701년경)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끝장내실 것임을 공언한다(사 28:21-22). 이사야와 거의 동시대에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미가(주전 740(?)-700년)는 결국 국가의 핵에 해당되며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고한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하시더라”(미 3:12).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언서들의 이러한 종말메시지는 약 100년이후에 활약한 예언자 예레미야(주전 626-585년)에게도 나타난다. 요시야가 죽음을 맞게 되자(주전 609년) 그 이듬해 여호야김 즉위초(주전 608년)에 유다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향하여 설교를 한다. 이 때 행한 설교가 그 유명한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렘 7:1-15과 26장)이다.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당시 백성들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남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선포한다:

“내가 실로에서 행함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예루살렘 성전)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7:14-15).

지금까지 검토한 바 같이 포로기 이전의 고전적인 예언(주전 8-7세기)은 모두가 아모스의 종말 선포를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 메시지가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의 중심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 어느 정도 개선의 여지가 있어서 혹시 참화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태도를 취하라는 경고, 혹은 미래의 의로운 상태의 약속 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원수에 대한 위협등과 같은 주제들이 예언서에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다만 산발적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예언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예언자들은 “파멸이냐 구원이냐의 양자택일”에 관하여 예언한 것이 아니다. 이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파멸과 구원이라는 두 개의 길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길이 어디로 뻗어 있었으며 또 어디로 뻗어가고 있는가, 이 길이 이미 어디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가를 말한 뿐이다. 이스라엘은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선포한 회피할 수 없는 종말의 도래, 이것이 후대의 의미에서 아직 종말론이 아니라면 이는 최소한 성서적 종말론의 전제와 출발점이라고는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를 프리젠과 같이 원시(原始) 종말론적 단계로 볼 수 있다. 물론 심판이 일어나기 이전에 활동한 예언자들이 심판만을 예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심판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필연적인 심판 이후에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있으리라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선포에는 종말론적 심판예언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예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실현되어가는 종말론(포로기 예언 시대)

이 단계의 특징은 심판이 실현되고 있는 위기의 과정 속에서,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과 더불어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우선 아모스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종말이라는 선포는 바벨론 포로지에서 예언자로 부름받은 에스겔(주전 593-571년)에 와서도 재등장한다. 에스겔은 고국 이스라엘에 종말이 곧 임박했다고 선포한다:

“주 야웨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끝(케츠)이 왔도다,

끝(케츠)이 왔도다,

끝(케츠)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겔 7:5-7).

아모스로부터 시작되어 에스겔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선포된 이스라엘의 끝장(종말)이라는 종말론적 심판 예언은 주전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국가적 멸망 사건을 통하여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로 종말론적 구원 예언만을 선포한 주목할만한 예언자가 한 명 있다. 그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을 앞둔 주전 550-540년경에 바벨론 포로지에서 활동한 예언자였다. 그의 예언은 현재 이사야서 40-55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무명의 예언자를 성서학자들은 보통 제2이사야라 부른다. 아마도 이 예언자를 예루살렘의 이사야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으로 보아 제2이사야로 칭하는 것 같다. 제2이사야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으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바벨론 포로지의 이스라엘에게로 보냄을 받았다. 포로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내 사정은 야웨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사 40:27).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비참한 상태를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대가라고 해석한다. 그렇지만 이제 이 비참함도 끝이 났다고 선언한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야웨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 40:2).

이제 오게 될 것은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이것은 “이전 것”에 반하여 “새 것”으로 대비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 일을 약속하신다: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사 48:6-8).

이 새로운 일은 이제 곧 임박해 있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 46:13).

야웨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을 찾아 외쳐 불러야 하고 또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며”, “그가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야웨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이 구절은 전형적인 종말론적인 문장이다. 이는 신약성서의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와 매우 유사하다. 여기에서 야웨의 가까이 오심은 역사적인 사건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바벨론 제국의 시대를 종결시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 페르샤왕 고레스의 승리의 진군이 바로 그 사건이다. 제2이사야의 종말론적 구원약속은 포로생활로 부터의 해방사건으로 부분적으로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에스겔과 제2이사야에게서 종말론적 심판예언이 어느 정도 실현되는 것을 보았고 종말론적 구원예언도 부분적으로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 시기를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적 단계로 이름을 붙여 봄직하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완성된 종말이 아니라, 미래의 궁극적인 종말에 대한 하나의 선취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은 여전히 역사속에서 성취되어 가는 도중에 있다.

4) 초월화되는 종말론(포로기 이후 예언과 묵시 시대)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주전 538년) 귀향한 이후, 많은 기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예언자들이(특히 학개와 스가랴) 보여주었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아름다운 꿈들은 역사적인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주전 539-333년), 그 후의 그리스 세력(주전 333년 이후) 밑에서 수난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실망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점점 더 멀어지게만 보였다. 말라기서는 하나님의 약속들의 실현지연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망감이 심각할 정도로 대단하였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야웨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는도다”(말 1:2).

“너희가 말로 야웨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야웨를 괴롭혀 드렸나이까”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야웨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 2:17).

“야웨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야웨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한다 하노라 함이라”(말 3:13-15).

지금까지의 전통적 이해에 의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계시의 장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를 통해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역사의 의미가 분명하고, 명백하며, 역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의 의미가 불투명하게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역사에 대한 비관적인 입장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빚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 멀도다”(사 59:9-11).

어찌하여 하나님은 의와 구원을 갈구하는 외침에 침묵하고 계신가? 왜 악한자 들이 흥하고, 의로운 자들은 고통을 당할까? 수난의 역사가 지속될수록 역사의 의미는 더욱더 모호해지고, 역사에 대한 신뢰는 감소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더나아가 이후에 나타난 페르시아의 이원론과 헬레니즘적인 사상의 영향에서 결국 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와 그 아래 땅에 있다는 운명적인 실제 세계는 분리되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초월적인 분으로만 간주되었고, 결국 하나님과 세계는 분리되었다. 이는 세계가 세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악마적인 것이 되었음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이 단계에 이르러 “미래(종말)란 더 이상 역사와의 연속성 내지는 역사와의 관련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의 역사속으로 돌진해오시는 야웨의 전혀 새로운 개입으로만 주어진다.” 이전의 세번째 단계(실현되어가는 종말론적 단계)가 시간의 틀(역사)속에서 현실화 되었다면 네번째 단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를 초월한다. 이 단계를 일컬어 초월화되는 종말론적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완전히 만개(滿開)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서의 유일한 묵시서인 다니엘서이다.

5.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성서의 종말론은 주로 예언서와 묵시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구약성서학자들은 예언서에서 언급되는 종말론을 “예언적 종말론”(Prophetic Eschatology)이라고 부르며, 묵시서에서 발견되는 종말론을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이라 부른다.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묵시적 종말론(초월화되는 종말론)은 예언적 종말론(원시종말론과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에서 발전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와 묵시자들은 모두가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앞으로 도래할 아름다운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예언자의 종말은 파국을 넘어선 역사적 희망을 말하고 묵시자의 종말은 궁극적 파국 이후에 도래할 초역사적 희망을 예시한다. 예언전통과 묵시전통의 공통되는 점은 둘 다 결국은 희망을 말하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이러한 미래의 이상적 세계가 어디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실현되느냐 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미래의 이스라엘 회복은 “역사적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역사적인 현실”로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예언자들이 전한 미래의 아름다운 꿈은 역사의 연장선상의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예언적 종말론은 “역사적 현실성”을 강조한다(역사 내적인 종말론).

이에 반하여 묵시서에 의하면 현재의 역사는 하나님의 모습이 가리워져 있는 어둠의 시기이다. 그래서 역사의 연장은 암흑의 연속일 뿐이다. 따라서 묵시신앙에서 종말은 완전히 끝을 뜻하는 것이다. 악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역사가 완전히 끝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묵시서에 따르면 이상적인 미래의 세계는 역사(옛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어 끝이 나고, 우주적인 새창조(새 하늘과 새 땅)가 이루어짐으로써 실현된다. 역사와 새 창조 사이에는 질적인 불연속성이 있다(역사 초월적인 종말론). 따라서 묵시적 종말론은 “시간적 이원론”에 입각한 극단적인 종말론(Radical Eschatology)"이라 할 수 있다.

6. 다니엘서: 구약종말론의 결정체

구약성서에서 묵시라는 문학양식을 취하고 있는 책은 다니엘서 한 권 뿐이다. 유대인 묵시서들에는 이 양식에 적합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이것들은 구약정경에 들지는 못했다. 다니엘서는 익명성, 사건 이후 예언(vaticinium ex eventu), 꿈과 환상을 통한 계시 소개, 천사를 통한 계시해석 등의 묵시적 양식의 특징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다니엘서의 내용은 주전 6세기에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를 시대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다니엘서는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세스(Antiochus Ⅳ. Epiphanes 주전 175-163년)가 팔레스틴을 지배하면서 유다 백성들을 핍박하던 때인 주전165년경에 기록되었다.

1)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

주전 333년 역사적인 이수스(Issus)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제국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승리하였다. 이로써 페르시아제국의 시대는 끝이 나고(주전 539-333년), 헬라시대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죽자, 그가 이룩해 놓은 거대한 제국은 그의 부하였던 4명의 장군들에 의하여 사분 되었다. 팔레스틴 지역은 애굽을 분할받은 프톨레미(Ptolemy)의 지배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프톨레미 왕가는 피지배자들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주의 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이 기간동안 팔레스틴의 유다인들은 평온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주전 198년 셀류시드 왕가(Seleucid: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지역의 통치자)는 프톨레미 왕가로부터 팔레스틴 지역을 빼았고, 그곳을 자기들의 통치영역으로 귀속시켰다. 셀류시드 왕가의 통치정책은 모든 통치지역을 헬라문명(Hellenism)으로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에게도 헬라문명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세스가 등장함으로 사태는 악화되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종교를 탄압하여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상징했던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시키고 성전 안에 제우스(Zeus)신을 위한 제단을 세우게 하고, 유다인들이 금기로 여기는 돼지고기를 희생제물로 바치고 또 강제로 먹게 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외경 가운데 하나인 마카베오상 1장 41절에서 50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후 안티오쿠스왕은 온 왕국에 명을 내려 모든 사람은 자기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헬라문명의 강요, 필자주)고 했다. 이방인들은 모두 왕의 명령에 순종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왕의 종교를 받아들여 안식일을 더럽히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쳤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분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 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2) 다니엘서의 의도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인들은 현실에 적응하려는 헬레니스트(Hellenists/Hellenizers)와 죽음을 무릎쓰고 신앙을 고수하겠다는 하시딤(Hasidim)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가(안티오쿠스)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헬레니스트)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하시딤)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단 11:32).

다니엘서는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투쟁을 하였던 “하시딤에 의해서”, “하시딤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다니엘서는 종교적 박해 가운데서도 ①변절하지 말고 끝까지 신앙을 지킬 것과, ②임박한 종말의 비전을 보여줌으로써 “하시딤”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③아울러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하게 하기 위해 기록된 묵시서이다.

7. 나가는 말: 구약종말신앙의 교훈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같이 구약성서의 종말신앙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상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시되고 발전된 사상이다. 아모스로부터 시작하여 포로기 이전까지는 종말론의 태동기로 원시(原始)종말론적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이후 포로기(주전 587-539년)에 활동한 에스겔과 제2이사야에 와서는 종말론적 메시지, 그 가운데 주로 종말론적 심판예언이 성취되는 시기이며, 종말론적 구원예언도 부분적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 시기는 종말론의 성장기로 실현되는 종말론적 단계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마지막 단계로 주전 6세기 후반 이후의 종말론적 선포는 점진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경향을 보인다. 종말론적 선포가 성취되는 자리가 점진적으로 이 땅이 아니라 저 땅으로, 현 역사와 단절된 새로운 역사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주전 2세기에 나타난 묵시적 종말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단계를 초월화되는 종말론적 단계로 볼 수 있다.

구약의 종말신앙은 우리에게 몇가지 교훈을 던져준다. 첫째,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모든 과정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확신이다. 구약성서가 제시하는 미래의 역사는 결코 인간의 노력과진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소망은 죄많은 인간들을 용서해주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심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개입하시지만 역사의 최종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한 결정적인 행위가 있을 것이다. 셋째, 따라서 그때가 이를 때까지 당대의 삶이 아무리 악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비극으로 가득 차 있어도 염세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으며, 또한 미래나 죽음 이후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해서는 않된다. 종말신앙은 철저히 소망의 신앙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얻게 되는 축복에 관한 소망이 헛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가운데서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넷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 억압과 핍박 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비추어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구약의 종말신앙은 결코 “저 피안”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암시적이긴 하지만 이 땅에서의 인간 개개인의 운명을 목표로 할 뿐이다. 종말의 “때”보다 종말을 준비하는, 아니 종말의 시간속에서 사는 “삶의 때도”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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