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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과 신앙교육

은바리라이프 2012. 9. 9. 22:21

기독교세계관과 신앙교육


                                          

                              김 성수(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



1. 서  론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려 깊은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문해 본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자성이 있다는 것은 기독교신앙을 좁은 의미의 소위 “영적인 일”(spiritual matter)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앙을 개인적인 영성(personal spirituality) 또는 “미시적 윤리문제”(micro-ethics)1) 에 거의 배타적으로 집중시킴으로서 기독교신앙의 광범위한 전망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영역을 조명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앙인의 삶 자체가 지극히 이분화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교육의 장(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동 및 청소년의 신앙인격을 형성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지식을 많이 갖게 하거나, 제도교회 안에서의 생활을 열심히 잘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인간형성 정도로 생각하고 거기에 만족해 온 형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는 왕(King)이시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삶의 전 영역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켄 허만(Kenneth Hermann)이 설명한 바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간에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나타나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창조의 모든 영역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다운 신실한 삶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측면들이 창조주에 대한 정당한 섬김의 자세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1)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인격의 여러 양태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존재 자체와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된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그 방법상 동일하다. 나의 인간 됨(person-ness)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특징짓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내가 하나님의 충실한 종 됨이 나의 모든 행위를 특징지워야 한다. 어떤 때는 내가 나의 인간 됨의 전체를 보지 못할지라도,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언제나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지는 것이다.”1)


기독교세계관과 신앙교육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은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즉, 이러한 포괄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표로 설정하고 그 삶을 독립적이며 자발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러한 인간형성을 위한 신앙교육의 논의는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으나 본 연구는 먼저 지식의 문제를 살피는 것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앙교육도 다른 모든 형태의 교육과 마찬가지로 “앎”의 문제와 결코 유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칼빈(calvin)도 참된 신(神)지식과 자신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2. 교육의 핵심 - “알게 하는 것”


“안다”는 것은 확실히 가장 핵심적인 교육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말 할수 있다. 아동 및 청소년들로 하여금 무엇을 “알게”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제 일차적인 목적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신앙교육은 특정의 교육내용을 매개체로 하여 교육대상으로 하여금 어떠한 것을 “알게(또는 할 줄 알게)” 하는 교육적 실천행위이다.


그럼, 이처럼 교육의 핵심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안다”는 것 (지식)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안다”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흔하게 쓰이고 있어서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마치 책상이 무엇이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물으나 마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책상”처럼 명백한 개념이 아니다. 예컨대 어느 학생이 “흔들이의 주기는 그 길이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그 명제의 의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반드시 그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안다”라고 하며, 또 그러한 상태에는 어떤 방법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가? 이것은 교육이론이나 실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육의 주체자가 “아는 상태”가 도대체 어떠한 상태인지를 모르고서는 교육대상을 그 상태에 도달시키는 방법을 알 수가 없으며, 그 방법을 모르면 그 상태에 도달시킬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도달시키려는 의도하에 이루어진 모든 노력의 성패여부를 평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G. Ryle은 “안다”는 말을 그 말의 용도에 따라  “--라는 것을 안다(knowing that)”와  “--할줄 안다(knowing how)”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구별될 수 있다고 Ryle은 주장하였다.1)  요컨대 전자는 “나는 빛이 직진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누가(Luke)라는 이름의 뜻은 ‘총명하다’혹은 ‘빛을 주는 자’라는 뜻이라는 것을 안다”는 등이고, 후자는 “나는 수영할 줄 안다”, “나는 바둑을 둘 줄 안다”, “나는 공동체적 삶을 영위할 줄 안다”는 등의 지식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앎”의 형태를 I. Scheffler는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과 방법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으로 구분하였다.1) 전자는 어떤 명제를 안다는 점에서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며, 후자는 어떤 행위나 기술을 해 낼 수 있는 절차나 방법을 안다는 점에서 방법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형태의 지식이 구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만약 두 지식의 형태가 구분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때에는 교육의 목표가 구분되어야 할 것이고, 또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1) Ryle은 이 양자를 구분하고 있다.


Ryle이 양자의 지식을 구분하는 기준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언어의 형태이다. 명제적 지식은 “--라는 것을 안다”로, 그리고 방법적 지식은 “--할 줄 안다”로 표현된다. 그러나 언어의 애매성 때문에 이것은 엄격한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데, ”빛이 직진한다는 것을 안다“와 ”빛이 직진한다는 것을 설명할 줄 안다“는 표현은 언어의 형태상으로는 완전히 서로 다르지만, 전달되는 의미에 있어서는 거의 비슷한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아는 상태와 모르는 상태간의 연속성 여부이다. 즉, 명제적 지식은 양분적(dichotomous)이고 방법적 지식은 연속적(continuous)이라고 할 수 있다.1) 예컨대, 누가(Luck)의 이름의 뜻이 “--라는 것을 안다”고 할 경우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엄격하게 구별되는 것 같다. 그러나 “수영할 줄 안다”, “공동체적 삶을 영위할 줄 안다”고 할 경우에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조금 알고, 아주 잘 아는 상태까지의 사이에 하나의 연속선을 상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셋째는, 아는 내용을 주체와 분리하여 명제화할 수 있느냐의 기준이다. 명제적 지식의 경우에는 아는 내용을 아는 주체와 분리하여 명제화할 수 있다. 예컨데, “나는 빛이 직진한다는 것을 안다”의 경우에는 그 아는 내용인 “빛이 직진한다”를 그것을 아는 주체인 “나”와 관계없이 명제화할 수 있다. 그것은 아는 내용 자체가 세계의 어떤 모습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적 지식의 경우에는 “할 줄 아는” 내용을 아는 주체와 분리하여 명제화하면 의미를 상실한다. 방법적 지식의 경우에는 언제나 그 행위의 주체가 존재함을 상정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나는 수영할 줄 안다”는 것은 “나”라는 주체와 분리되면 의미를 상실한다.1)


 요컨대,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의 구별은 그것을 가르치는 방법상의 차이가 있을 가능성 때문에 교육적으로 중요성을 갖는다. 명제적 지식은 모르다가 알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하며, 방법적 지식은 사회일반의 기대수준 만큼 잘 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방법적 지식은 특별히 장기간에 걸치는 감지할 수 없는 여러 단계를 거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주일에 나는 “스데반이라는 이름의 뜻이 면류관 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있어도, 지난 주간에 나는 양로원을 방문해 보고 사랑하고 구제할 줄 알게 되었다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명제적 지식을 배우는 과정과 방법적 지식을 배우는 과정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학습을 어떻게 촉진시킬 것이냐의 문제에는 필연적으로, 적어도 두개의 서로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육이론가나 실천가들은 모두 마치 학습을 효과적으로 촉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3. 명제적 지식의 조건


명제를 아는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데 그 상태는 어떠한 상태인가? 즉, 어떤 경우에 우리는 “X가 P(명제)를 안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I. Scheffler 는 주장하기를 “X가 P(명제)를 안다”는 것은

 1) X가 P를 진(true)이라고 믿고 : 신념적 조건

 2) P가 진(true)이어야 하며 : 진리조건

 3) X가 P의 진(true)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증거조건이 동시에 만족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고 있다.1)


먼저, 누가 P를 안다는 것은 그가 P를 믿는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지식은 개념상 신념의 일종이다. 신념의 특수한 양태를 가리켜 우리는 지식이라고 부른다. “P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P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지식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는 예외적인 용법이 있다. 예컨대, 나는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어떤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 이 말의 본래 모습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또는 의사가 )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일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화법이 있다는 사실이 “알지만 믿지 않는다”를 성립시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즉, P를 안다는 주장은 곧 P가 진이라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지식은 단순히 신념과 같은 것만은 아니다. “P를 안다”는 말은 아는 내용이 되는 진술 P가 진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P 가 진리가 아니라고 할 때 “X는 P를 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나 “X는 P를 믿는다”는 것은 성립된다. 만약  P가 진리가 아니면 실제로 X는 P를 아는 것이 아니다. 자기 혼자 P가 진이라고 믿거나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보기 어렵다. “P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아는 내용 P가 진이어야 한다. 즉 “X가 P를 안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도 P가 진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갈릴레오 이전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당시의 학교에서 지구의 모양을 가르치는 시간이 있었다면, 지구가 평평하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당시에 그 명제를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학생은 모두 자기들이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고 있었다”고 말하지,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신념은 일종의 태도로 특징지워지지만 지식은 그 이외에 진리조건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한 명제의 진, 위에 대한 주장은 그것의 증거에 의해서 뒷 받침 된다. 따라서 “X가 P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X가 P의 진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이 증거의 과정에서 우리는 증거로서의 언어적 표현과 명제 자체를 단순히 기억했다가 말하는 행동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 양자를 혼동하게 되면 아동 및 청소년의 교육결과를 평가하는 일은 단순히 명제를 기억하고 재생하는 정도를 평가하는 것에 머무르게 되고 명제를 기억하는 상태를 지식을 가진 상태, 또는 이해하는 상태와 동일시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요컨대, 지식은 진리에의 신념이다. 그러나 그 진리를 입증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지식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거 없이는 명제의 진리를 정당화 할 수 없으므로 진리조건을 성립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또 하나의 조건으로 증거조건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4. 방법적 지식의 성격


방법적 지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는 문제에 관한 시사를 얻기 위해서 방법적 지식의 성립조건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오히려 그것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밝히는 것이 보다 온당한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줄 안다(방법적 지식)” 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즉, 그가 그 행동의 규칙을 안다는 것과 그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기술(skill)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수영할 줄 안다는 것은 “팔은 크게 휘젖는 것이 좋다”, “얼굴은 물 속에 잠그는 것이 좋다“, ”목을 180도 회전해서 호흡을 한다“는 등등의 규칙을 알고 그 규칙에 따라 팔을 젖고, 얼굴을 물 속에 잠그고, 숨을 쉬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말로 표현된 규칙은 이미 방법적 지식이 아니다. 명제적 지식의 영역에 포함된다. 따라서 방법적 지식이란 어떤 면에서 “기술(skill)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1)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기술이 어떠하다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명제적 지식)”과는 같지 않다. 방법적 지식은 언어만으로는 전달될 수가 없다. 어떤 기술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그 기술 자체를 가르치는 것과 반드시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 자체는 실천을 통하여 획득되는 것이다. 즉, 언어는 방법적 지식에 도달시키는 하나의 보조수단이며, 거기에는 시범(example)과 실습(practice)을 통하여 도달될 수 있다.1)


기술을 가졌다는 것은 처방된 규칙이나 모형을 따라 어떤 행동을 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문맥에서나 “기술”이라는 말 대신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다. 예컨대, "X는 운전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X 는 운전하는 능력이 있다”로 바꾸어도 그 문맥상의 의미가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나 “기술을 가졌다”는 것과 “능력이 있다”는 것이 꼭 같은 것은 아니다.1)  “기술을 가졌다”는 말은 어떤 문맥에서나 “능력이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아이는 고통을 참는 능력이 있다”는 말은 있지만  “이 아이는 고통을 참는 기술이 있다” 는 말은 어딘가 어색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능력”이라는 개념은 노력을 통하여 획득된 것만이 아니라 자생적인 것도 포함한다.


그러나 “기술”이라는 개념은 능력과는 달리 연습을 통하여 연마된 것이라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기술은 적절한 실천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다. 기술을 가진 상태와 가지지 않은 상태는 한 연속선상의 두 극단이며, 정확하게 어느 시점부터 그것을 가진 상태로 볼 것인지가 논리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1)  따라서 방법적 지식의 경우에는 완전한 성취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학생의 의욕과 노력에 따라 끝없이 향상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교육할 때는 성취의 기준을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높일 수가 있다.


요컨대, 기술은 능력의 일종이며 반드시 연습을 통하여 획득되는 것이다. 학생으로 하여금 무엇을 할 줄 알게 하는 것은 언어적 수단을 통하여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직접 그것을 연습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5. 기독교세계관과 신앙교육


그러면 이상에서 논의한 이른바 “안다”는 문제와 기독교세계관, 그리고 신앙교육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서론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된 신(神)지식과 자신에 관한 지식의 바탕 위에서 영위되는 삶이다. 기독교신앙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음의 덕을 갖추어 가면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과 법칙을 깨달아 순종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해 본다면 기독교신앙이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규범임을 확신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세계관”(world-view)이라는 개념은 아주 유용한 것으로 판명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신앙교육이란 이러한 노력의 과정을 조력해 주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관이란 우리의 사고와 언어, 행위 등 모든 것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사이어(James Sire)는 그의 저서 The Universe Next Door : A Basic World View Catalog 에서 세계관을 정의하기를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혹은 가정)들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1)  세계관이란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 물질세계, 하나님, 또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기저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파악(이해)이다. “세계관이란 어느 정도 일관성있는 일련의 근본적 전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전제들은 일반적으로 각자가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서로 언급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고,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도전을 받을 때에만 생각나는 전제들이다".1)


Stan D. Gaede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관을 정의하기를 “우주와 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 그리고 인간에 관해 개인이나 사회(공동체)가 견지하는 신념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다.1)  Andrew Hoffecker도 역시 기본적으로 동의하기를 “삶(인생)에 관한 개인의 총체적 견해를 대표하는 이른 바 실재에 관한 전제나 확신의 집합”을 세계관이라고 보고 있다.1)  Gaede와 같이 Hoffecker도 강조하기를 우리 모두는 어떤 근본적인 신념 또는 가정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이들 신념 또는 가정 및 그 효과를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간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Albert Wolters는 “세계관”의 개념을 조직적이며 역사적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세계관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신념의 종합적 틀”(the comprehensive framework of one's basic beliefs about things)이다.1)  신념(beliefs)이란 사물과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인지적 주장을 의미한다. 기본적 신념(basic beliefs)이란 우리가 위탁하고 있는 바 충심으로 확신하고 있는(heart-felt) 신념과 일반적 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종합적 틀(comprehensive framework)이란 우리의 기본적 신념이 어떤 일관된 모양으로 인식할 수 있는 패턴을 형성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Wolters는 모든 사람이 명료하거나 또는 명료하지 않건 간에 삶의 어떤 관점이나 고백적 관점을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Arthur Holmes는 좀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세계관은 철학이전의 수준(전철학적 수준)(pre-philosophical level)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직 체계적인 계획이나 이론적인 의도는 없다 할지라도 세계관은 사람들의 행동근거가 되는 신념이나 태도, 가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또 세계내의 상이한 사물들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신념이나 태도, 가치 외에도 세계에 대한 어떤 특정한 감정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비분석적이고 비조직적인 세계관의 시작에 대한 성찰로부터 보다 더 주의 깊게 검토되고 조직적으로 발전된 관점이 형성된다”1)고 말하고 있다.


그는 강조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통합적이며 종교적인 관점, 즉 세계관의 시작(beginnings of a world view)을 소유하긴 하지만 실제적인 세계관 즉 보다 반성적인 개념적 도식은 이 종교적 관점이 정련되고 정교화될 때에 비로소 형성된다고 강조한다.


Wilhelm Dilthey를 언급하면서 Holmes는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종교(religion)-- 이것은 일련의 개념이나 교리 또는 신학이상의 것으로 한 개인의 전 “생활세계”(life world) 즉, 그의 지각, 야망, 행위 등 모두를 포함한다.


(2) 또한, 어떠한 종교에도 나타나는 통합적이며 포괄적인 관점 또는 세계상(world picture)이 있다. 그리고,


(3) 세계관(world view)--보다 주의 깊게 검토되고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념적 체계(formulated conceptual scheme)이다.


Holmes는 설명하기를 최초의 세계상에서부터 세계관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 창의적으로 제안된 과학적 모델이 일관된 전체 속으로 신념과 가치의 범주를 이끌어 드리는 안목을 가지고 우리의 이해를 보다 충실히 하듯이 개념들이 정교화되고 수용된 실재들이 개념화된다고 설명한다.1)  이러한 비분석적이고 비조직적인 시작에 대한 성찰로부터 보다 더 주의 깊게 조직적으로 발전된 관점(세계관)이 형성된다. 세계관과 관련해서 Holmes는 분명히 개인의 기본적 신념의 지적, 이론적인 정확한 정교화를 강조한다.


이러한 고찰에서부터 우리는 “일상적 세계관“(lived world view)과 ”정교화된 세계관”(articulated world view)을 구분할 수 있다. “일상적 세계관”은 Homes의 세계상과 또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세계관은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든지 않든지 간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예컨대, 개인위생에서부터 주일예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사고 팔고 저축하는 일에서부터 학문의 실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정교화된 세계관”은 Holmes의 세계관에 대한 정의를 말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정의된 바와 같이 의식적이며 일관성 있는, 또한 보다 명백한 세계관의 형성을 말한다.


기독교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신앙교육이란 아동 및 청소년들로 하여금 말씀에 기초하여 그들의 기본적인 신념의 종합적인 틀을 더욱 명료히 하고, 그것을 자신의 모든 생활영역에 적용해 갈 수 있도록 조력해 주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세계관을 말씀의 빛 아래 조명해보고 성경적 세계관을 정교화 해 가는 것은 신자들이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데 더욱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신앙교육은 본질적으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세계관을 부단히 성찰케 하고 다듬어 나가며, 그것을 시간의 흐름 속에 구체적인 족적을 남겨가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6. 맺는 말


신앙교육은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이 그 핵심을 이룬다. 피교육자로 하여금 성경적 제 명제를 알게 하는 교수활동에서 우리는 명제적 지식이 갖추어야 하는 조건들을 만족시켜 주는 상태에로 그들을 인도해 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관된 기독신자로서의 삶을 실천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덕목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줄 아는” 방법적 지식의 습득이 필요하다. 특별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개별학문을 탐구하는 일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그 지식이 연마되고 습득되어지는 영역이다.


교육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다 정교화하고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실천해 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이 정교화해 가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내용을 바로 알고, 그 내용을 올바로 실천해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내용이 진리여야 함과 동시에, 그 내용을 아동들이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나아가 단순한 언어적인 진술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자신이 믿는 바를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인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세계관이라는 틀에 올바른 내용을 담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성한 신개념과 실제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불일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교사가 어떻게 교육대상으로 하여금 그들의 세계관의 틀에 참된 지식의 내용을 담게 할 수 있으며, 하물며 그 내용을 믿고 증명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올바른 신앙교육은 결국 교수적인 용어(instructional term)가 아니라 고백적인 언어(confessional language)로 진술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나아가 신앙교육은 “--라는 것을 안다”(knowing that--)와 “--할  줄 안다”(Knowing how--)만의 지식이 아니라  “--과 더불어 아는”(knowing with)지식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세계관, 특별히 “일상적 세계관”은 형식적인 교수과정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체득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신앙교육을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는  “경향성의 학습”(tendency learning)이라고 불렀다.1)


신앙교육이란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나라에서 학습자인 동시에 교사로서 부름 받아 우리가 믿는 바를 바로 알고, 그 아는 바를 올바로 실천함으로서 인간의 종교의 뿌리인 마음을 계속적으로 하나님에게로 향하도록 갖추어 가는 “마음의 교육”(equipment of heart)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