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도행전

[사도바울행전] 1.바울 찬가 / 2.길리기아 다소 / 3.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 4.로마 시민 / 5.자비량 선교 훈련

은바리라이프 2012. 8. 11. 20:36


바울 찬가
사도바울행전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
[2736호] 2009년 12월 28일 (월) 19:05:16 [조회수 : 488]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 15:28~29).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세계의 끝까지 달려 가겠다고 다짐한다. 지중해의 끝인 서바나(스페인), 바울 시대에 서바나는 세계의 끝이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롬 10:18).
바울은 고린도 감옥에서 지중해 너머에 있는 '세계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고 달려 가고 있다.

  
▲ 사도 바울의 모자이크 초상화(라벤나,4세기)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기 자신의 삶을 달음질치는 것으로 깨달았다.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길거리에 다니며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며,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지고 달음질쳤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

바울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달음질'하는 것으로 보았다. 세속 사회에 머물며 "내 영혼아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하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천로역정'의 주인공과 같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하고 외치며 '좁은 문'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달음질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단지 인생의 수명이 짧으니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에서 "달음질하라"는 권면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만 생각하였고 실행하였다. 그는 복음 전도의 보상으로 노후의 연금도 원하지 않았고, 호화로운 주택도 원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바울에게 배설물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며 세상 끝까지 달음질하는 일, 이것은 비단 바울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치미는 충동이 아니겠는가.

김 희 보 / 서울장신 명예학장



길리기아 다소
사도바울행전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2)
[2737호] 2010년 01월 05일 (화) 18:53:57 [조회수 : 1060]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유대 땅 북쪽,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소아시아의 길리기아(현재의 터키 공화국 동남 지역) 다소에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교도의 집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사울이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행 21:39).

바울의 출생 연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대략 주 예수보다 4~6년 가량 연하로 보고 있다. 빌레몬서(주후 54년쯤)에서 "나이가 많은 나 바울"(몬 1:9)이라고 말하지만, 당시는 50세 이상인 사람을 노인이라고 불렀다.

  
▲ 바울의 고향 다소의 고갯길.
주후 30년대 초의 사건으로 추정되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던 그를 두고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9:58)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24세부터 40세까지의 사람을 가리켜 '청년'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바울의 나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길리기아 지방은 소아시아 남부를 동서로 뻗어 있는 해발 3천5백m 이상의 높은 타우로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에 펼쳐진 평야로서, 시리아 서쪽에 맞닿은 지방이다.

다소는 원래 헬라인의 시민 도시였다. 구약에 나오는 달시스는 다소, 야완은 이오니아(고대 헬라인)를 가리킨다. 바울 당시 다소는 헬라 문화를 이어받아 문화의 한 중심지였고, 운하에 이어진 항구 도시로서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로마 시대의 헬라계 지리학자이며 역사가인 스트라본(주전 64년쯤 ~ 주후 21년쯤)은 그의 '지리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다소의 시민들이 철학과 교양 일반에 걸쳐 지니고 있는 열의는 보통이 아니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시민의 수준을 훨씬 넘을 정도이다."

스트라본은 이어 길리기아 다소가 스토아 철학자 여러 명을 배출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히 황제 아구스도의 스승인 아테노도로스(전 1세기 무렵)가 훗날 다소에 돌아와 황제의 두둔함 밑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사실을 말하였다. 

바울은 라틴식 이름이다. 출생 때의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다. 사울은 회심한 후 이름을 바울로 고쳤다. 당시 유대인은 유대식 이름 외에 라틴식 이름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행 12:12)하는 구절에서 마가(마르코스)는 라틴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으로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고 하는 뜻이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사울과 바울이라는 이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울은 처음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이름을 따다가 사울이라고 하였으나, 회심한 이후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이라고 불렀다.
바울 자신은 자기 이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행 15:9).

중세의 추기경 야콥 데 보라기네는 그의 '황금전설'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은 여섯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 첫째로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복음을 전한 '나팔의 입'이며, 사랑을 말한 '사람들의 입'이며, 회심을 한 '기적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며, 자비량 전도를 한 '선택의 기적'이며, 명상을 한 '평안'이며, 겸손한 '작은 자'이다.

김 희 보 / 서울장신 명예학장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사도바울행전/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3)
[2738호] 2010년 01월 13일 (수) 14:35:20 [조회수 : 726]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지중해 둘레의 여러 도시에는 수많은 유대인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다소에도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주전 171년에 이 도시를 재건하면서 유대인 거주 구역을 만들었다. 그 이래로 적지 않은 유대인이 팔레스틴에서 이주해 왔다.

  
▲ 바울의 고향 다소의 전망. '클레오파트라의 문' 부근.
초대 교회 교부 히에로니무스(342~420)는 말하기를, 바울의 조상은 팔레스틴 북부 기스카라에서 살다가 이주해 왔다고 하였다. 기스카라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도시로서, 그 곳에서 가까운 두로에 의존하는 지방 도시이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농촌의 주민과 수공업자, 상인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모국을 버리고, 보다 좋은 생활을 구하여 외국에 이주하였다"(E. 로제)고 한다.

특히 갈릴리 지방의 경우 바울의 조상은 베냐민 지파(롬 11:1)로서, 작은 부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한편으로 상인으로서, 헬라인들과 적극적으로 교제하였다.

스트라본은 '지리서'에서 "유대인은 이미 모든 폴리스(도시)에 진출해 있었다. 무릇 사람이 살고 있는 땅치고 유대 종족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 또는 그들의 세력이 뻗지 않은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자기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고후 11:22).

이 경우의 '히브리인'은 단지 유대인 내지 이스라엘 사람과는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생활 양식 및 기질면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습에 지극히 충실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바울은 자기가 유대교의 전통에 열심인 바리새인이라고 강조하여 말하였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바울은 자기를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행 21:39)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시민'이라는 말이 헬라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헬레니즘 사회의 도시에서는 시의 행정에 참가하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시민은 그와 같은 권리를 가지지 못한 '주민'과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디아스포라로서 외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 대부분은 '주민'으로서, '타관 사람'으로 소외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식구는 '시민'이었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인을 다소로 이주시킬 때 그들에게 헬라 시민권을 준 것으로 학자들은 고증하고 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하고 고백하는 바울의 말에서, 그의 조상이 다소에 이주해 온 최초의 유대인 이주자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따라서 바울과 그의 일가는 다소 시에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유력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 시민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4)
[2739호] 2010년 01월 19일 (화) 18:55:37 [조회수 : 427]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다소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문'. 달리 '바울의 문'이라고도 말한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인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하였다. 로마 시민은 황제가 살고 있는 황금의 도시 로마에 살고 있는 시민과 같은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행 22:27). 
바울을 체포한 천부장은 돈을 많이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그러나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바울이 로마 제국의 각 지방을 자유롭게 다니며 전도할 수 있던 것은 그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행 22:25~26).

일찍이 주전 47년에 카이사르가 다소를 방문하였고, 주전 42년에는 안토니우스가 방문하면서, 다소는 자유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주전 31년에 아구스도가 로마의 권력을 쥐면서, 다소의 주민들 대다수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바울의 조부는 이 때에 로마 시민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신분이 보장되며, 로마 시민이 아닌 자는 로마 시민권자에게 사형을 언도할 수 없다. 심지어 로마 시민을 재판하는 경우 결박할 수 없고 채찍질할 수도 없다.

로마의 정치가로서 웅변가이며 저작가인 키케로(전 106~43)는 시칠리아 총독으로 재임 중일 때, 베레스를 탄핵한 것으로 해서 유명하다. 그는 주전 51년에 길리기아 주지사로 다소에서 근무면서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다. "로마 시민을 결박해서는 안 된다. 로마 시민을 채찍질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로마 시민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부모를 살해한 죄에 해당한다."

바울은 훗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부당한 취조를 받게 되었을 때 세 번에 걸쳐 자기의 시민권을 주장하였다. 빌립보에서 재판도 하기 전에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행 16:35~38), 예루살렘에서 바야흐로 채찍질을 당하게 되었을 때(행 22:25~29),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유대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을 때(행 25:9~12).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장애가 있을 때에만 내세웠다. 만년에 가이사랴에서 갇혀 있을 때,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한 예루살렘에서 재판 받기를 거부하고, 로마 법정에서의 재판을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행 25:10~12).

바울은 로마 시민권보다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더 자랑스럽게 알았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갈 1:15~16).

바울은 어머니의 기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신앙의 가정에서 품위 있게 성장하였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행 26:4~5).

김희보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자비량 선교 훈련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5)
[2740호] 2010년 01월 29일 (금) 11:53:47 [조회수 : 446]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다소 교회에 있는 키도누스 강.
바울은 훗날 제2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바울은 천막 제조업을 하는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일을 하며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3).
이 천막 제조는 염소 가죽을 다루어 부드럽게 해서 만드는 방법과 길리기아의 특산물인 염소 모직(길리기아 천)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바울은 두 가지 제조 방법에 두루 익숙하였다. 

바울이 아시아와 유럽에 수많은 개척 교회를 세울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자비량 전도 때문이었다.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행 20:33~35).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7~9).

바울은 어디에 가서든지 자기의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천막 제조의 기술을 고향 다소에서 지낼 때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듯하다.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랍비로서의 신학적 훈련을 받으면서, 그 커리큘럼 중 필수 과목인 직업의 실습에서 터득한 기술일 수도 있다. 

바울 당시 유대인은 젊은 시절에 가업(家業)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들로서의 의무였다. 주 예수께서도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목수일을 배우셨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 13:5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도 갈릴리 해변에서 가업을 배우다가 주의 부름을 받았다.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막 1:19~20).

바울의 아버지는 천막 제조업으로 추측되는 사업을 하면서, 금융면에서도 크게 활약했던 듯하다. 바울 서신 중 '손익(損益)' 따위 금융상의 용어가 나온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빌 3:7). 이 말씀에서 '유익(kerdos)'은 '이익'으로, 그리고 '해(zemia)'는 '손해'라는 뜻으로서, 금융업에서 자주 쓰는 '손익(계산)'이라는 용어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돈을 비롯하여 명예 등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손해보고 더 나아가 배설물로 여길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얻는 이익을 얻게 된다고 말하였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8).
부유하고 신앙이 깊은 유대 사업가의 집에서 출생한 바울은, 주 예수의 제자들 대부분이 "학문 없는 범인(凡人)"(행 4:13)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