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도행전

[사도바울행전] 6.대학 도시 다소 / 7.바울의 친척 / 8.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 9.가말리엘의 문하생 / 10. 할례의 선교자

은바리라이프 2012. 8. 11. 20:53


대학 도시 다소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6)
[2741호] 2010년 02월 03일 (수) 16:16:31 [조회수 : 369]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바울이 출생한 다소는 길리기아 평야 중심에 위치하였고, 헬라화한 소아시아와 셈 어족(바벨론어, 앗수르어, 히브리어, 아람어 등)인 시리아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다소의 주민은 헬라인과 시리아인 및 유대인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학문이 성행하여 스토아 철학(아래 자료)이 보편화돼 일상 회화에서 인용될 정도로 주민들의 지적 수준이 높았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순리와 역리"(롬 1:26), "합당한 일"(롬 1:28), "양심"(롬 2:15) 등의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 말들은 스토아 철학에서 흔히 쓰던 것들이다.

바울 당시 스토아 학파의 저명한 철학자 아테노도로스는 이미 죽은 후였으나, 그가 끼친 감화와 영향은 다소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J. 해스팅이 편찬한 사전에 따르면 다소는 그 당시 대학 도시로 유명하였다. 아테노도로스의 뒤를 이은 네스토르도 또한 아카데믹한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로마 황제가 친히 임명한 학자로서, 다소 대학에는 그를 따르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 다소에 있는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

이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란 바울은 헬라어에 능숙하였고, 헬라 문화에도 익숙하였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이방 세계에 전도할 수 있던 것과, 능숙하게 헬라어를 말하고 쓸 수 있던 것은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바울의 편지에 헬라인 저자의 작품 속 구절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인용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 헬라의 희극 시인 메난드로스(주전 342~291)의 말. "너희 시인 중 어떤 시인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여기서 말하는 시인은 헬라의 아라토스(주전 315~240).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헬라의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주전 485~406)의 말.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딛 1:12). 주전 6세기 헬라의 종교가 에피메니데스의 말.

이 무렵에 바울은 헬라인의 경기인 권투와 달리기를 흥미롭게 보았던 듯하다. 단지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경기에 참가한 듯한 말투로 표현한 구절들이 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27).

바울은 훗날 헬라적인 경기에 빠졌던 것을 후회하여,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반성하는 투의 발언을 하였다.

바울이 젊은 날 고향 다소에서 배우고 터득한 헬라적인 교양은, 훗날 그가 예루살렘에서 랍비의 제자로서 배운 유대교의 교양에 가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라난 헬라적인 환경과 그가 젊은 날에 배운 헬라인의 학문과 교양을 제거해 버린다면, 훗날 그의 "이방인의 사도"(롬 11:13)로서의 사명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김희보/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바울의 친척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7)
[2743호] 2010년 02월 10일 (수) 11:59:56 [조회수 : 479]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바울 생가의 우물.

바울이 성장하며 감화를 받은 것은 첫째로 바리새인으로서의 유대교적인 가정 생활, 둘째로 장래에 사회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직업 훈련, 셋째로 다소의 헬라적 색채가 짙은 수준 높은 학문적인 분위기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바울의 집이 다소의 유대인 시민단에 속해 있었고, 그 시민단에 속한 다른 가족의 자제들과 깊은 교제를 가졌다(W. 램제이).

바울은 회심한 후 전도 여행 때 그들 중 여러 명과 만났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에베소 교회에 파송한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의 추천장에 그들 중 몇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7, 11, 21). 

이 친척(suggenia)이라는 말은 단지 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소에서 '같은 유대인 시민단에 소속된 자'를 가리킨다.

그들 중 우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로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롬 16:7)였다. 모름지기 이 두 사람은 팔레스틴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울이 회심한 후 다소에 머물고 있을 때 성도의 교제를 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바울이 훗날 에베소에서 전도 활동을 할 때에 에베소에 와서 바울에게 협력하다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다. 

또한 야손은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에 전도의 지지와 대접을 받은 일이 있었다(행 17:5~9).

소시바더는 일찍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에 야손이 보석금을 내고 석방시켜 베뢰아로 가게 하였을 때 거기서 만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행 17:9).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모드리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겪고,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에 잠시 머물다가, 아시아로 갈 때에 동행한 사람이다.

헤로디온의 신상에 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누기오는 누가와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의견이다. 그 근거로 '친척'으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숭게니아'의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숭게니아(친척)'는 당시 헬라적인 도시에서 국가가 인정한 시민단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숭게니아'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고, 공동으로 예배를 하였으며, 국가 정책의 운영에도 여러 모로 특권이 인정되었다.(람제이, 몰턴).

따라서 '숭게니아'는 '같은 혈통'이나 '친척' 또는 '같은 도시의 공동체'와는 그 개념이 약간 다르다. 로마서 16장 7, 11, 21절에서는 '친척'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로마서 9장 3절에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누가복음 1장 58절에는 '친족'으로 번역되었으나, 사도행전의 백부장 고넬료에 관한 기사에는 '친척'으로 번역되어 있다(행 10:24). 

요컨대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다소의 시민단'과의 교제는, 바울이 회심한 이후 전도 활동을 할 때 좋은 협력자로 등장하게 된다.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8)
[2743호] 2010년 02월 24일 (수) 14:33:35 [조회수 : 613]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주 예수께서 일찍이 시험하는 자들을 향하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고 가르치셨다.

바울은 주 예수의 교훈에 충실하였다. 원래 로마인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가이사와 아구스도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바울의 이와 같은 로마 정부에 대한 충성은 그가 젊은 시절 다소의 시민단에 속한 생활을 통하여 얻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이 다소 시민단의 규정에 따른 생활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으로 끝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면을 더욱 강조하는 생활이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빌 1:27~28).

위에서 "섬겼다"와 "생활하다"의 원어 "폴리테우오(politeuo)는 '시민으로서 생활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이 다소의 시민으로서 자각과 긍지를 가지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한 모습이 우리의 눈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로마의 통치 시대에 살았던 바울에 관하여 말할 때 그의 이름을 빠뜨릴 수 없다. 헬라인의 이름은 통상 본인의 이름뿐으로서 가족의 이름 곧 성은 붙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알렉산더라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세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인 카이사르(시저)의 경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사)라고 하는 식이다. 첫째가 개인의 이름(가이우스), 둘째가 씨족의 이름(율리우스), 셋째가 가족의 이름(성^카이사르)이다.

바울의 이름의 경우 회심 이전의 '사울'은 개인의 이름이고, 회심 이후의 '바울'은 로마적인 씨족 이름이다. 이 씨족 이름은 로마 시민권과 이어지는 데 중요한 부분이었다. 바울은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지만, 법적으로는 헬라인이기 때문에 조상 이래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가문으로서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디아스포라의 자랑스러운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당시 로마 헬레니즘 세계의 진보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이와 같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자유롭게 살던 바울에게 새로운 생애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뛰어난 랍비 문하에서 이스라엘 사람의 신앙적 전통의 뿌리인 토라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날이 이르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 유학은 바울 자신의 희망이기보다는 부모의 강한 소원이었을 것이다. 젊은 바울이 헬라의 문화에 깊이 빠지는 모습을 보고, 부모는 불안했을 것이다. 바리새인의 본거지에서 율법을 배워 아이덴티티를 찾게 하려 했을 것이다.

김희보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가말리엘의 문하생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9)
[2744호] 2010년 03월 02일 (화) 16:40:57 [조회수 : 1050]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행 22:3).

마침 바울의 누나가 출가하여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다. 훗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에 누나의 아들(생질)이 바울에게 알려준다.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행 23:16). 바울 당시 다소에서 예루살렘에 가려면 육로보다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훨씬 편리하였다. 바울은 고향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가서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다. 바울의 나이 이십 전후의 일로 추측된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바리새파의 양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힐렐파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인 반면 샴마이파는 보수적이었다. 이 두 학파는 율법 해석 문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울이 입문한 랍비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로서, 그 당시 힐렐파를 이끄는 석학이었다. 가말리엘은 비록 온건한 것으로 소문난 힐렐파였으나, 율법을 지키는 일과 전통을 존중하는 점에서는 엄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무척 공평하고 독실한 인물이었고, 역사적인 상황에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산헤드린에도 세력을 가지고 있는, 모든 국민에게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베드로와 사도들을 위해 변명을 하기도 한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행 5:34).

바울은 고백하기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행 22:3), 그 결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행 26:5).

예루살렘에서 랍비의 학생으로 공부하는 청년 바울의 태도는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 열심은 청년의 정열을 모조리 율법 연구에 퍼붓는 데서 오는 정열의 결과였다. 바울 자신이 이렇게 술회하였다.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비슷한 나이 또래)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고"(갈 1:14),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은 디아스포라 출신의 유대인이다. 다소에서의 일상어는 모름지기 헬라어를 썼을 것이고, 성경은 랍비에게서 배울 때는 히브리어를 썼을 것이지만, 일상에서는 대부분 '칠십인역 헬라어 성경'을 이용했을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길리기아 출신자들의 회당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행 6:9)라고 하는 구절이 그것을 말해준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공부하며 엄격한 바리새인의 생활 방법을 보고, 다소에서의 유대교도 생활을 반성한 낌새가 있다.



할례의 선교자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0)
[2745호] 2010년 03월 09일 (화) 17:33:10 [조회수 : 379]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당시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회당에는 유대인 이외 이방인들도 많이 예배에 참석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유대교 회당에서 요구한 것은 다음 네 가지였다. 즉,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일, 식사 규정에 따르는 일, 그리고 율법이 명하는 도덕적 명령에 순종할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할례' 받는 의식까지는 요구하지 않았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유대교도로 개종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자기의 국적을 버리고 '유대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으며, 엄격한 바리새인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신앙이 너무 느슨하다는 것을 느꼈던 듯하다. 다소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할례를 받으라고 권고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열성적인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고"(마 23:15) 있었다. 열심으로는 바리새인인 바울은 유대교 회당에서 예배하는 이방인들은 마땅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제 바울은 바리새파 중에서 이방인에 대하여 할례를 강요하는 할례의 선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훗날 그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의 과거를 회고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1~12).

할례를 받아야만 의롭게 된다고 하는 할례의 선교자였던 바울은 회심한 이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할례는 소용이 없다고 하는 신학을 주장하였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8~19).

젊은 바리새인 바울은 충실한 율법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무렵 갈릴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이단자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훗날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전 5:16).

육신에 따라 나사렛 예수를 알게 될 때 예수는 인간 예수일 뿐 결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하는 신앙 고백이 있을 수 없게 된다. 바울은 이 사실을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청년 바울은 주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 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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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철학 [Stoicism, ― 哲學]

철학|브리태니커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철학.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스토아 학파는 처음 형성된 후 2세기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이후 사상의 발전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후기 로마 시대와 중세에 이르는 동안 스토아 도덕철학의 일부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 등이 인간과 자연, 국가와 사회, 법과 제재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 데 적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스토아 철학의 개인중시 사상 및 갈등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설은 실존주의와 비정통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초기 그리스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은 낡은 행위규범과 인식방식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변화의 시대에 생겨났지만 과거의 학파가 남긴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최초로 나타난 그리스 밀레토스 학파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주목했으며, 일원론자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각각 이성의 위력과 변화의 영원함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상징으로 지혜를 몸소 깨우쳐 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해주었다.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은 이 학파의 창시자 키티온의 제논이 주로 강연을 했던 장소 스토아 포이킬레(채색 주랑)에서 나온 말이다. 초기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제논은 철학을 논리학·물리학·윤리학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스토아 철학의 원리를 세웠는데, 후기 스토아 학파에서도 이 원리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제논에 따르면 논리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이며, 자연학은 올바른 행동을 결정하는 수단을 제공하고, 윤리학은 자연에 따른 삶을 인간의 행복으로 본다. 제논의 뒤를 이어 학파를 이끈 아소스의 클레안테스는 유명한 책 〈제우스 찬양〉에서 우주의 질서와 이성 및 법칙을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칭송했다. 스토아 학파의 3번째 지도자는 솔리의 크리시포스로 초기 스토아 철학의 가장 위대하고 생산적인 인물이었다. 크리시포스는 논리학 분야에서 메가라 학파와 회의주의에 맞서 확실한 지식 개념을 방어했으며 연결사를 갖는 비분석적 명제를 연구하여 고대 논리학과 그이후 논리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크리시포스는 자연학에서 운명과 자유의지를 서로 배제하지 않는 개념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의 원리를 세웠다.

후기 로마 스토아 철학

중기의 스토아 철학은 BC 2세기에서 1세기초에 번성했는데, 이 시기를 대표한 사람은 로도스 출신의 파나이티우스와 그의 제자 포세이도니우스였다. 파나이티우스는 로마에서 스토아 학파를 세웠으며 이 학설에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포세이도니우스는 파나이티우스와 함께 크리시포스에 반대하여 스토아 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관점을 고집했다. 또한 포세이도니오스는 키케로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키케로의 〈신의 본성에 관하여 De natura deorum〉 제2권은 포세이도니오스가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파나이티우스와 포세이도니오스는 도덕철학과 자연과학에 관심을 기울여 스토아 철학이 로마에서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데 이바지했다. 그들은 또 법률, 세계시민, 자연, 신의 섭리, 이성과 같은 주제들을 스토아 철학의 중심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스토아 철학이 실용적인 경향을 띠게 했다. 이러한 경향은 1~2세기에 등장한 루키우스 세네카에픽테토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후기 로마 스토아 철학자의 저작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사도 바울로와 교부철학에 나타난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이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로의 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크지만, 바울로가 아테네에서 행한 강연 중 신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믿음과 인간이 신 덕분에 존재한다는 믿음에 관한 논증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종종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3세기의 퀸투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초자연적 정신과 인간정신의 일치, 세계이성, 영혼과 육체의 관계 등 여러 주제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3세기에 살았던 카르타고의 주교 성(聖) 키프리아누스는 세계시민이라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노예도 주인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법칙에 따라 살고 똑같은 영혼과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로 보아 당시의 노예학대 관행을 비난했다.



스토아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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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stoa)란 원래 전방을 기둥으로, 후방을 벽으로 둘러싼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에 있어서의 일종의 공공건축(公共建築)을 의미한다. 이 학파의 창시자 제논이 아테네의 한 '주랑(柱廊)'(스토아)에서 강의를 한 데서 연유하여 이 말이 학파 전체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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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역사

키티온의 제논.

이 학파는 통상 역사적으로 3기로 구분되어 기원전 3세기를 '고(古) 스토아' 시기(제논클레안테스크리시포스), 기원전 2~1세기를 '중기스토아' 시기(파나이티오스포세이도니오스), 기원후 1~2세기를 '후기 스토아' 시기(세네카에픽테토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 고찰한 경우 고스토아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중기 이후는 주로 로마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있다. 또 파나이티오스를 제외하고 이 학파에는 순수한 그리스인이 없고, 대부분 소아시아의 신흥무역도시 출신의 셈계(系)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출신계층과 직업도 상인의 자제·고학생·노예·황제와 같이 잡다했다.

[편집]사상

스토아는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형성·계승되어 고정화된 사상체계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내용은 다양성을 갖고 있다. 스토아파 사람들은 학문을 우주의 구성·생성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자연학'과 '논리학'·'윤리학'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3개 부문은 각각 독립하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을 매개로 하여 상호 관련되어 자연학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다만 사람과 시대에 따라 초첨의 추이는 엿보여 고스토아에서 후기로 넘어감에 따라 윤리학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스토아 사상은 윤리학 면에서는 주로 키니코스 학파의 계보를 좇고,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갖가지 요소가 혼재하며 절충되어 있어 선행하는 특정 학파와 관련짓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다만 이 학파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인 현상은 외적 권위나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고 금욕과 극기의 태도를 갖고자 하는 것인데, 실천적 경향과 유물론적 일원론은 각각 키니코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이전과 같이 좁은 특정의 폴리스(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동·서 양세계에 걸친 지배권의 확립이나 로마 제국의 성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생활 공간이 확대된 시대이며, 또한 정치적으로도 과도기이던 사실에 기인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개인은 생존 근거를 추상적인 공론이나 정치적·사회적 현실 중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라든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스토아의 근본 특징은 이 세계(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체이며, 어떤 불과 같이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자연학에 있다. 신 조차도 예외는 될 수 없이 인간이나 그것을 둘러싸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물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만물은 이 근원적부터의 생성과 그 곳으로의 환귀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결정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물체로서의 신이 마치 봉밀이 벌집 속으로 번져나가듯이 우주 만물을 관철하여 순환하는 것이 섭리이며, 인간의 측면에서 말하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토아에게는 우주 만물은 동질이며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한발 나아가 신·자연·운명·섭리는 동의어로 되어 있다. 다만 작용을 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과의 상위가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작용의 원천도 감각(물체로부터의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에서 구해지고 있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인간은 우주라는 큰 도시의 시민(코스모폴리티스)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발상도 이상과 같은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한 스토아의 입장은 유물론적 일원론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근원적 물체가 '프네우마'라고 표현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어딘가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유물론과 표리 관계에 있는 유심론으로 전체계를 전환시켜 버릴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실 스토아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스토아의 유물론적 일원론은 앞서 본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범신론과 표리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의 사상은 전체로 볼 것 같으면 이러한 모순된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면상의 주장 내지 학파가 창설된 당시의 주장과 상반되는 사실이 점차 강조되어 온 경우가 있다. 가령 윤리학 면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성 중에서 "인간이 여하히 자유를 획득하여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필연과 자유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일관하여 산다" "자연에 순종하며 산다"라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강조한다. 이는 본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유덕한 생활에 의해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택하면서, 우주의 커다란 흐름에 순응하여 조화있게 살고자 하는 주체적·적극적 태도를 의미했다. 논리학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법칙의 인식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후기가 되면서 자기의 권능내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후자를 선악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시 내지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려 한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아파테이아(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는 것)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도 후기로 옮아감에 따라 소극적 의미로 강조되었다.

[편집]영향

스토아의 사상은 고대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종교·문학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을 스토아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도 그리스도교를 신학으로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스토아의 입장을 원용하고 있다. 자연사상의 성립이나 브루노·스피노자의 사상 등 근세에 있어서도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려는 스토아의 관점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후기 스토아의 윤리사상은 몽테뉴등의 모랄리스트들에게 일종의 처세훈으로 애독되었다. 현대에 있어서는 논리학 분야에서 말과 말의 관계가 아니라, 명제 상호의 관련을 문제 삼으려는 스토아의 논리학이 재평가되고 있다.

[편집]참고 문헌

[편집]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