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라캉과 개혁주의 신학
Ⅰ 서론
1643년 5월, 프랑스의 철학자이나 한때 군인이었던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보헤미아(현재로는 체코의 서부지방)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5월 6일자 첫 번째 편지에서 엘리자베스는 영혼과 육체가 그 특질 면에서 그처럼 다르다면 어떻게 영혼이 육체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데카르트로서는 어려운 문제였는데, 그가 연장(延長)-즉 넓이, 깊이, 높이를 가지고 있음-를 물체의 유일한 규정적 특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충 수긍하며 넘어갈 줄 모르는 공주로서는 끈질기게 보다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해서 데카르트는 곤혹케 한다.
이점은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니다. 성령의 은사성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그 개입이 어떻게 인간들의 몸으로 유지되는 이 세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궁금해 하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얻고자 한다. 이것을 추적해 나가면 필히 인간의 자아성과 마주치게 되고 집결되는데 여기서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능력과 예수님이 주신 능력이 상호 다른 결과를 낳으면서 전개됨을 보이게 된다.
즉 자기에게서 나오는 영적 능력으로 이해되는 십자가, 언약, 복음, 구원, 신앙, 삼위일체, 성령의 은사, 회개, 선함, 거룩, 교회 등등의 모든 성경 개념들이 결국 자기 구원욕구 달성용으로 다시 귀속되게 된다. 자기 존재를 고수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귀결되는 반면에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님의 능력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능력들은 늘 자아의 구멍을 내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것으로만 전환시킨다. 이 와중에서 진정한 회개가 쉬지 않고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그 구멍에 자신의 것으로 채우려고 시도하기 때문이요 성령님을 그 메워진 구멍에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뚫어서 인간들이 자기 몸을 자기 몸이라고 우길 수 있는 건더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속적인 회개다.
따라서 자기에게서 나오는 그 영적 능력은 성령을 사칭해서 나오는 인간적인 능력이며 그것이 철학과 과학과 신학 등 각가지 학문과 직능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의 모든 분유의 작업들(배 만들기, 보험업무, 통역, 농사에 있어 새 품종개발, 석유 탐색, 난치병에 필요한 치료제 개발, 약자를 위한 최소 생계법에 관한 국회 발의, 프로 야구팀 창설 등등) 곧 철학과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욘 3:4) 니느웨 사람들이 과연 철학 앞에서 회개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임에 회개했을까? 당연히 그들은 말씀 앞에서 회개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복음으로 모였다고 장담하고 신학을 말한다는 교회들에게서 회개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들의 복음과 신학이 이미 현대인의 구미에 맞춘 철학의 일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그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모든 외침이 아무리 성경 구절로서 첩첩이 동원시켜도 실은 회개가 될 수 없는 ‘생존 철학’에 불과하다.
들뢰즈와 라캉의 철학은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생존을 챙겨나가는 현대인의 실상을 폭로하는 철학이다. 오늘날 교회마저 자본주의 경제체계 안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 결사적으로 살아 버티려는 마당에 교인들에게 생존의지 자체를 문제 삼아서 회개를 촉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도리어 교회가 교인들의 생존의지를 정당화해주고 격려해주므로서 교회 내에서마저 천국에 갈 수 없는 자들을 확산시키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어쨌든 살아남고 존재하는 것만이 진리요 인생 성공이다’는 노골적인 육적 본성이 절대 진리로 자리 잡고 있기에 회개라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교회에서 이해되고 있다. 즉 “내가 있어야 하나님도 있고 천국도 있는 겁니다. 내가 못되면 아무리 하나님이 좋고 예수가 좋아도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라는 것이 교인들의 내심을 울리는 구호가 되어 버렸다. 이런 더러운 탐욕을 감추는 방도로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주의’가 동원된다. 소위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주의”를 표방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당연히 뒷전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나님과 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병들게 하거나 각종 사업이나 교회 일이나 선교일을 망하게 하거나, 혹은 나를 죽이거나 지옥 보내지 마시라고 직접 따지겠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회개는커녕 교회는 음성적으로 신에 대한 시위 현장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왜 나의 봉사의 대가를 만족스럽게 채워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걸핏하면 교회를 찾는 이유가 걸핏하면 신에게 따지기 위함이다.
즉 이토록 빈번하게 하나님을 찾는 나에게 만약에 납득할만한 만족스러운 응답이 없다면 결국 “신, 당신은 없는 거야”라는 최종 확답을 내리기 위함이다. 결코 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과연 신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계속 탐구하는 식으로 아직은 교회에 발을 걸쳐놓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나의 나 여기 있음’은 확실하지만 신은 ‘거기 있음’이 불확실하기에 확실한 나가 불확실한 신에 대해서 존재 확인에 나서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은 이런 모습들은 이 돈 만이 진리로 통해서 이 세상 분위기에 스펀지에 물 젖듯이 푹 젖은 채 태어나서 살아가는 그 존재들에게 나올 발상이다. 즉 돈의 축적만이 살아있는 진실의 증거로 통용되는 이 시대에서 결코 낯설지 않는 보편적 인생관이다. 이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는 기대 하에 교회가 나타나 종교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왜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지는 자본주의 세상관 안에서 벌어지는 바를 규명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을 들뢰즈와 라캉이 현 시대상을 가지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함과 착함’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인간들이 힘의 축적 정도에 따라 ‘선과 악’으로 구분 짓는 허구상 기준들을 자꾸만 토해내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두 철학자는, 왜 인간에게는 ‘선함과 착함 구분 짓는 시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는지 그 주체 문제를 깊이 다룬다. 쉽게 말해서 들뢰즈 철학과 라캉 철학은 인간의 근원과 근본을 다루는 철학이다.
Ⅱ 본론
1. 들뢰즈 철학
모든 강줄기가 하나의 대양으로 합류하듯이, 그 분할된 현존들이 단일한 하나의 시간인 잠재적 실재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이다. 잠재적 실재는 하나의 대양이며 자연 그 자체이다-또한 존재의 가장 은밀한 어둠의 지대이기도하다. 그는 이원론에 따라 경험을 나누면서, 그것이 경험적 복합물이 되기 이전의 시간, 현실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거나 혹은 현실적으로 유용하지 않는 잠재적 시간으로 떠나는 것이다-정신과 물질, 과거와 현재, 기억과 지각 등은 마치 꿈속에서처럼 갈라지며 펼쳐진다.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원론의 길을 따라 본성적으로 다른 길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의 총체성으로서의 과거로 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경험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아가 경험의 순수조건에 관한 비판과 반성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들뢰즈의 반성적 이원론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다시 그 단순한 총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의식과 존재와 생명으로 구체화되는 길을 따라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들뢰즈는 이원론의 두 방향을 말하면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반성적 이원론이 아닌 잠재적 실재로부터 출발하는 적극적 이원론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생명의 질서란 바로 단순한 하나의 총체로서의 잠재적 실재로부터 (그리고 이 잠재성 속에 수축과 팽창의 모든 수준 혹은 정도들이 공존하고 있다). 두 갈래의 길을 따라 그 자신을 분화하고 현실화하는 적극적 이원론의 전개에 다름 아니다. 잠재성이 분화되어 현실화되는 과정, 즉 삶과 시간의 전개에 다름 아니다. 잠재성이 분화되어 현실화되는 과정, 즉 삶과 시간의 전개는 그 자체 발명과 창조의 과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잠재적 실재가 어떻게 우리 앞에 드러나는가이다. 단순하고도 총체적인 하나의 시간, 모든 육체들을 하나의 공존으로 포함하는 잠재적 시간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또한 그 시간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술을 통해서이다. 그가 논의하는 베르그송의 주제하는 한 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다, 바로 공간과 시간, 육체와 영혼, 양과 질 등의 본성상의 차이를 발견하는 문제였다.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목표는 그와 같은 이원론적 차이에서 어떻게 하면 공간으로부터 시간을, 육체로부터 잠재적 실재를, 대상적 객체로부터 질을 뽑아내어 그것은 순수 현존으로서 보존할 것인가에 있었다. 특히 들뢰즈의 예술에 관한 문제는 모두가 이 주제에 향해 있다. 어떻게 하면 탈영토화 할 것인가(카프카의 침묵)? 어떻게 하면 본성적으로 다른 질들을 구별하여 서로 다른 존재를 긍정할 것인가(마조흐와 사드의 서로 다른 변태성)? 어떻게 하면 순수현존의 이미지들을 분류하여 그들 각각의 존재를 드러낼 것인가(영화 이미지, 특히 운동으로부터 단절된 시간-이미지)? 어떻게 하면 육체들로부터 질적 차이를 추상하여 존재의 본질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것인가(프루스트의 횡단성)? 이 외에도 무수하고 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이 감각적 경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 물질적 대상이나 육체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영화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와 영화에 대한 그의 접근법이 어떻게 그의 방법론 일반에 대한 것을 드러내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그의 철학을 탐색할 수 있다. 그는 현대 영화 혹은 전후 영광에 이르러서야 시간-이미지 속에서 영화가 진정으로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일의적인 이미지를 매개함으로써, 사유의 지평이자 사유의 활동 조건인 시간과 공간을 보여준다. 영화의 기초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의 ‘시간-공간 블록’이다. ‘시간-공간 블록’, 그것은 개념적 활동인 철학이 과학과 예술과 교섭하는 접경지대이기도 하다. 철학이 개념의 집을 세우는 활동이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시간-공간의 좌표축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좌표축은 단순한 밑그림이나 지평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간-공간 블록은 개념적 활동이 포착해야 하는 대상인 이념의 잠재적 실존을 조명한다.
이념의 본연적 차이와 다양체적인 속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진리의 독단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감성적인 것에 민감해져야 하고, 이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감성적인 것의 종합을 통해 시간의 역량인 사건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념은 “이데올르기가 아니라 실천”이며, 이념이 환기하는 것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 미래의 혁명인 그 무엇”이다.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는 난점이 있다. 왜냐하면 삶과 사유에 대한 그의 전체 접근법은 우리가 이미 만들어진 도식들, 질문들 혹은 체계들을 가지고 문제들에 접근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관을 통해 우리는 공간화된 이미지들을 넘어서는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고, 고정된 의미들을 넘어서는 사유의 운동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모든 삶 속에 있는 발생된 요소, 그로부터 차이나는 존재들이 현실화하게 되는 그런 차이의 과정을 보아야 한다.
그는 이미지에 관한 베르그송의 명제들과 퍼스의 분류체계를 결합하여 이미지 전반에 관한 일반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절대적 체계인 물질과 정신을 두 축으로 하여, 그들 사이에 놓인 본성적으로 다른 이미지들을 다양한 수준에서 가르고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퍼스는 기호체계의 분류학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하여 물질적 순수 현존의 이미지로서의 ‘운동-이미지’, 물질이 최초로 정신적 상태로 이행하는 이미지로서의 ‘지각-이미지’, 물질에 대한 정신의 고통 혹은 자기보존으로서의 ‘정감-이미지’, 정감이 물질적 변용으로 확2장되는 ‘행동-이미지’, 정감이 행동으로 연장되기 이전에 정감과 행동 사이에 놓인‘ 충동-이미지’,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순수한 형태의 지속을 취하는 ‘시간-이미지’ 등이 그 본성상의 차이로 나뉘어 분류된다.
들뢰즈는 영화는 사건이 모든 사유를 변형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시간-이미지와 운동-이미지라는 개념들을 형성했다. 들뢰즈에게 하나의 개념은 단순한 라벨이 아니라 사유에 방향을 제공하는 창조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제 시간-이미지와 운동-이미지라는 개념들은 우리에게 철학의 개념들과 예술의 감응들 간의 관계에 대한 더 분명한 의미를 제공해준다.
영화의 감응들은 운동-이미지에 대한 감응들을 포함하는데, 그로 인해 운동 그 자체가 제공되는 것이다. 이것은 눈에 의해서 투영된 인칭적으로 조직된 운동, 예를 들어 운전할 때 집으로 가는 길을 찾거나 자신이 선택하고 파악하는 대상들을 구별하는 눈의 운동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운동-이미지라는 개념은, 운동이 근본적으로 극단적인 형식들에서, 일상적인 삶 그리고 특정한 관심과 섞이지 않는 형식들에서 무엇일 수 있는지를 사유해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의미, 목적 그리고 우리 자신의 관심들을 포함하는 구체적인 관점으로부터 이미지와 운동을 경험한다. 운동 자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운동이 자신의 순수하고 잠재적인 상태에서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운동을, 마치 그것이 어떤 고정된 점으로부터 보이는 어떤 대상의 운동이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개념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일상적 경험에서 가장 공통적이거나 빈번히 발생하는 것에 라벨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을 형성하는 특이성들이 드러내는 극단적인 점들을 사유하고 상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결코 현실적으로 순수한 운동의 세계를 볼 수는 없다. 우리는 항상 운동을 고정된 항들과의 관계에서 바라본다. 그렇지만 하나의 개념은 우리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세계로부터 그런 세계의 잠재적인 가능성들로 옮겨다 준다. 우리의 세계는 운동으로부터 구성된다. 개념은 고정되고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를 조직하게 해주는 근거인 운동 자체를 사유하려고 한다.
개념→운동 ( × )
운동→개념 ( ○ )
들뢰즈가 이런 개념들을 어떻게 생산하고 사용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방법이 지닌 근본적인 성경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에 대한 그의 저작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전체 임무는 특이성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우리의 합성된 질서 잡힌 세계로부터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그것이 합성되게 해주는 그런 차이들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철학과 예술은 여기에서 나란히 작동하게 된다. 예술은, 조직화하고 의도를 가진 관점들로부터 자유로운, 특이한 감응들과 지각들을 제공한다. 철학은 이런 특이성들의 가능성을 ㅏ유하려고 한다. 운동이 무엇이기에 이런 모든 차이들을 생산하는가? 이것은 규칙적인 사례들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인 사례들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공통감각(=상식), 즉 일상적이거나 전형적인 것을 보는 것에 의존하는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공통감각(=상식)의 질서로부터 특이성들의 카오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예술의 이런 계시들에 좀처럼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식이 되었든, 들뢰즈에게 사유의 윤리학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놓여 있지. 그것이 이미 주어진 항목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기는 일반화하기가 아니다. 모든 차이들을 놓쳐버리게 되는 개별자들을 쌓아 올리고 그 다음에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어떤 공통 특징들을 제안해내는 대신에, 들뢰즈는 특이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주장한다. 보편적인 것은 각각의 특이한 사건이 그것이 무엇인지(=그것의 본질)로 새롭게 생성하게 되는 방식, 그것이 달라지게 되는 특정한 역능(변화)을 포착한다. 보편적인 것은 모든 예들 속에 얼마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반화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반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인간 존재들을 취해서 그 다음에 그것들의 공통된 특징을 인간적인 것으로 나열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알았던 모든 인간들이 우연히도 5피트 이상의 신장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인간성이 부분적으로 어떤 신장 기준으로 정의된다고 말하게 된다.
반면 보편자는 주어진 성질들을 단순히 대조하는지 않는 그것은 어떤 것을 특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그것의 본질)가 되게끔 만들어주는 것을 식별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4피트의 신장을 가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주어진 것을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새롭게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즉 기존의 가치처럼 합리성이든지 아니면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역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보편적인 것은 매우 선택적이고 잠재적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게 들뢰즈는 영화가 일반적으로 혹은 전형적으로 무엇일 수 있는지를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화를 취해서 그것들이 영화에 대해 스스로 영화적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 존재들이 근본적인 사유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유는 독특하게 인간적인 역능이다. 모든 영화들이 이미지들의 바로 그 힘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미지들을 고정된 관점들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역능이나 잠재성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는 차이들을 창조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삶이 사유를 통해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이미지들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변형시킨다. 영화적인 이미지의 보편자를 본다는 것은 어떻게 이미지들이 달라질 수 있고, 어떤 공통된 형식으로 환원불가능한지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편자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들을 창조한다는 것은 삶의 윤리학에 있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만일 보편자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의 고유한 차이나 삶의 고유한 양식을 사유하도록 한다면, 보편자는 우리를 도그마들, 선입견들 그리고 편견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셈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성들이 아닌 특정한 차이들을 사유하게끔 이끌어준다. 사유의 윤리학은, 차이를 공통된 형식들로 환원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방향에 있다. 우리는 차이에 직면할 때 사유한다. 이것이 들뢰즈에게 우리가 윤리학을 ‘인간이나 ’인간의 본성‘이란 공통된 이미지 위에 세워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의해서, 우리가 누구로 혹은 무엇으로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영화의 도래는 우리에게 횡단적인(transversal) 생성의 한 형식을 제공한다. 존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시간을 통해서만 자신을 전개하는 생성이 아니라, 각각의 새로운 조우에 따라 변화하는 생성을 말이다. 생성은 단순히 어떤 것이 무엇인지(=어떤 것의 본질)의 전개만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것과 같은) 것은, 자기와 같지 않은 것, 이 경우에는 카메라와 조우함으로써 자신의 전체 생성방식을 변형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만일 우리가 영화의 카메라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도전하는 어떤 것으로서 조우할 경우에만 가능해진다.
내가 영화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보았을 때, 나의 심장은 고동치고, 나의 눈은 깜박거리고,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거나 개념화하기 이전에 어떤 결정에도 우선하는 반응의 요소가 존재한다. 감응은 외연적(extensive)이라기보다는 강도적(intensive)이다. 외연은 세계를 공간적으로, 즉 분배된 구역(blocks)들로 조직한다. 질서 잡힌 그리고 종합된 지각작용들은 우리에게 다양하게 연장된 대상들로 이루어진 외적 세계를 제공한다. 그 세계에서 대상들은 공통된 공간에 단지 정도에서만 차이나는 방식으로 투영된다.
일상적 시선은 이런 외연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매 순간 변동하는 색들, 분위기들과 감촉들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나는 대상들을 서로 떨어져 있고, 시간을 통해 안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단일하고 획일적이고 연장된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 연장은 세계를 미리 가정된 목적들과 의도들에 의해서 투영하고 종합한다. (나는 내 사무실로 들어가서 내가 읽을 책들, 내가 앉을 의자 등등을 본다. 나는 세계를, 시간을 통해 연속적인, 구별되는 기능들을 지닌 세계로 ‘본다’) 그러나 감응은 강도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가로질러서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각하거나 의식할 수 있는 것으로서 대상화하거나 양화할 수 없는 것이다. 감응들은 종에 있어서 차이나는 (=질적으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우리의 눈을 깜박이게 하는 빛, 우리를 출발하게 하는 소리, 우리의 체온을 올리는 폭력의 이미지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연장된 대상들의 집합과 획일적이고 측정가능한 공간의 부분으로 본다면, 이것은 우리가 강도들을 이미 종합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감응들을 단일한 판단의 눈이 지닌 통일시키는 역능으로부터 이탈하게끔 해준다. 영화 속에서 눈은 통일된 행동으로부터 이탈되고, 눈에는 인식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감응적인 반응들을 촉진하는 이미지들이 제공된다.
들뢰즈에게 이것이 정치적인 함축들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몸들로서 우리가 파시즘과 같은 형식들에 반응하고 욕망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감응들을 욕망하기 때문에 억압적인 통치들에 복종한다. 생산적인 감응의 역능에 직면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들을 통해 박동치는 삶에 조직되지 않는 지각들이 활동한다는 말이다.
그 지각들로 인하여 몽타주가 장만된다. 몽타주는 운동의 지점들을 변화나 변경으로써 모은다. 부패를 겪는 몸, 성장하는 몸, 변형중인 또 다른 몸을 제공하는 것이다. 시간의 단일한 노선이나 시간 내의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이 모든 차이나고 통약불가능한 운동들을 생산해 내는 전체로서 간접적으로 상상될 뿐이다. 운동은 시간 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더 이상 이미 주어진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운동의 힘 자체로서, 시간은 항상 차이나는 방식들로 열려 있고 생성하고 있다. 운동은 하나의 물체를 한 지점으로부터 다른 지점으로 옮겨 놓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운동들에서 물체들은 변형되고 생성된다. 그래서 각 운동은 새로운 생성들을 생산함으로써 시간 전체를 변형시킨다.
잎은 시들고 색깔을 잃어버리면서 떨어져 죽는다. 이것은 식물의 삶과 지속의 부분, 즉 그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이다. 새는, 새를 기르기 위해서 이주하면서 하늘을 가로지른다. 이 새의 운동은, 응결되어 비를 생산하려는 구름의 운동을 가로지른다. 각각의 운동은 전체 내에서의 장소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움직이는 물체, 자신의 운동에 다름 아닌 물체 자체의 변형인 생성이기도 하다. 인간 관찰자는 자신만의 지속으로부터 이런 세 가치생성들 (잎, 새, 구름)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지만, 카메라는 운동을 가로지르는 운동을 제공하고, 운동들을 서로 병치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움직이는 부분들’이다.
시간은 부단히 새로운 사건들을 생산하는 미분적인 생성의 과정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유할 수 있다. 삶은 어떤 근거나 목적 혹은 단일한 의도를 지니지 않는, 연결들과 증식들의 과정이다. 기계들과 연결들의 증식을 통해 우리는 사건들을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사건은 시간 안에 자리 잡지 않는다. 사건은 시간의 새로운 노선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의 삶과 같은 하나의 사건을 모든 시간과 사건들의 기원으로 봄으로써 시간을 동질화하고 근거를 마련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하여금 기초로서 기능하게끔 한다면, 우리는 시간의 능동적인 힘을 그것의 결과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에 복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반동주의(reactivism)의 오류다. 이것은 삶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삶의 역능을 그것의 미래로부터 분리시키면서 노예화하는 것이다.
단지 영원회귀의 학설만이 삶의 능동적 도전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유일한 참된 반복은 삶의 창조적 차이를 영원히 재긍정한다는 점에서 차이의 반복이다. 철학과 예술은 마닐 그것들이 새로운 사유행위와 함께 차이의 도전을 회복할 수 있다면 영원한 것의 역능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절대적인 탈영토화를 약속할 것이다. 단순히 이러저러한 도그마나 이미지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이미지들의 자유로운 흐름과 무한한 창조 자체로서의 탈영토화를 말이다.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에 대해 가장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닫혀 있는 역사적 시기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것의 증식을 고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항상 교환의 원리에 기초해 있는 예정된 새로움일 뿐이다.
들뢰즈가 요구한 것에 따르면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제약된 관점(혹은 삶을 판단하는 관점)을 넘어서서, 모든 가치들을 삶의 흐름의 결과들로 보는 확장된 관점으로 이행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에는 선과 악이라는 대립되는 체계가 있다고 가정하게 되는 도덕성을 넘어서 윤리학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인간이 신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 윤리학에서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관점을 넘어서 삶을 하나의 전체로서 팽창시키는 그런 역능들을 창조하고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라는 기초에 근거해가 아니라 (왜냐하면 이것은 가치나 목적을 삶 안에 설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가 (삶을 그것이 지닌 가장 충만한 잠재성으로까지 확장하면서) 생성될 수 있는 자라는 기초에 근거해야 창조하고 선택한다. 우리의 생성은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초월의 환각들, 즉 우리 자신이 아닌 (혹은 우리 자신 안에) 단지 복종하거나 드러내야만 하는 근거나 법칙이 존재한다는 환각으로부터 해방시킨다면 우리는 향상될 수 있다. 극대화된 생성은 일의성의 인정이자 우리를 가로지르는 모든 창조들과 차이성에 대한 긍정이며 동시에 우리를 구성하지만 한 번에 우리를 정의내리지 못하는 유전적, 역사적 그리고 감응적 투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대부분의 욕망 이론들이 욕망을 우리가 상실했거나 결여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방향을 지닌 것이나 혹은 삶의 이면에 있는 것으로 향해 있다고 이해하고 있는 반면, 들뢰즈가 가리키는 욕망은 삶에 적대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삶은 욕망이고, 욕망은 창조와 변형을 통한 삶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동물-되기는 존재나 소유가 아니다. 동물-되기 속에서 어떤 외부의 목적도 지니지 않는 행동의 각 기점에서의 변형이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창조적 반응이다. 천국에서는 밀어내는 힘이 나온다. 그래서 천국가고 싶은 자가 결국에는 그 천국에는 자진해서 가고 싶어 하지 않게 만든다.
물질은 근본적으로 빛을 낸다. 베르그송은 물질 및 이미지가 인간 지각과 연속적인 동시에 변별적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한다. 그는 지각작용이 주관적이라는, 즉 인간이 물질에 대해 나름의 그림을 그린다는 견해를 수용하지만, 그에 따른 차이는 정도의 차이지 종류의 차이가 아니다. 인간의 시각은 실질적으로 4× ∼7× cm의 파장으로 전파되는 방사선에 제한된다. 한편 청각은 16,000∼20,000Hz의 주파수대로 한정된다.
베르그송의 은유를 빌리자면,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인간의 몸은 에너지·물질·운동이 전달된 데 대해 작용-반작용하는 전화교환수 같다. 이미지는 몸이 여과하고 중계하는 이 전달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지 방식으로 이미지에 두 체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물질에 내재한 보편적인 것(내재적인 평면으로서 이미지)이며 다른 하나는 생리적 제약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여과는 몸체적인 것(가장 평범한 의미에서의 이미지)이다.
베르그송은 전자를 ‘현재의 이미지’라 일컫는다. 우주 전체와의 관계에서 현재의 이미지는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객관적 실재는 현재의 이미지가 각각의 지점들을 통해 다른 이미지의 지점에 작용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모든 것을 전달하며, 각각의 작용에 동등하고 상반된 반작용을 대립하도록 강제하는 필연성이다. 간단히 말해 이는 일종의 길과 같다. 이 길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우주의 광대함을 통틀어 변양이 전파된다. 모든 물질이 이미지이고, 우리는 모든 표면과 모든 부분들 속에서 서로 작용-반작용하는 이미지들의 전체 집합체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몸체와 뇌는 에너지의 전파와 물질의 힘에 작용-반작용하는 수용적 표면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주체성이란 몸체가 감각-운동적 관계 속에서 작용-반작용할 준비를 갖춘 것에 다름 아니다. 베르그송은 이 경우 뇌가 수용된 운동의 분석 도구이며 수행될 운동의 선택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때 지각은 이미지들의 또 다른 체계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 인간의 필요에,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에 대응한다. 물질이란 이미지들의 집합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미지들, 다만 나의 몸이라는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의 가능한 작용을 가리키는 이미지들을 물질에 대한 지각이다.
베르그송의 유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사유의 내적 운동(시냅스의 순간작용과 신경계를 통과하는 흐름들)을 지배하는 법칙은 물리적 몸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과 다르지 않다. 이미지가 운동에 내재적이라면, 내가 지각하는 움직이는 대상 속이 아닌 내 머리 속에 이미지가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철학이 의식이라고 일컫는 것은 유아론적 환경이다. 이미지는 몸체들이 서로 주고받는 운동들의 집합에 내재적이다. 이미지를 산출하지 않는 운동이란 없다. 즉 실행된 운동에서 분리할 수 있는 이미지란 없다.
들뢰즈는 이미지와 기호에 대한 자신의 분류법이 기호론(semiology)이 아니라 기호학(semiotic)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보다 퍼스의 철학을 선호하면서, 퍼스의 기호이론에서 근본적인 네 가지 논거를 수용한다. 첫째 논거는 모든 사유가 기호들 내에 존재하는 한 기호는 언어와 등등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유에 가깝다는 것이다. 퍼스의 기호학은 논리학이지 언어학이 아니다.
들뢰즈는 퍼스를 의지하면서 기호론에 내재된 언어학적 모델의 중심성을 극복한다. 이미지와 기호의 모든 유형들은 본래적으로 탈영토화하는 형상이며, 언어 기호 역시 어떤 특권이나 우월성도 없는 여느 유형 중 하나일 뿐이다. 나머지 세 논거는 그 맥락상 베르그송적이다. 둘째 논거는 우리가 사유나 기호에서 세계를 이해하며, 이때 사유 및 기호는 세계와 일원론적으로, 즉 실체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퍼스의 기호학은 ‘근본적인 나타남’으로 정의되는 ‘페네론’(φανερον)으로서의 이미지에 기초한다. 퍼스는 실재에 대한 기술적(descriptive 과학 또는 기호학적 리얼리즘을 주장하는데 여기서 정신과 물질은 연속체상에 존재하며 동일한 실체적 정체성을 지닌다. 셋째 논거는 사유가 비물질적·반영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적인 것, 즉 역사적인 것만큼이나 실재적인 행위,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처럼 행동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논거는 사유가 연속적 운동, 근본적으로는 사건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무한한 기호행위(semiosis)라는 관념에서 자명해진다. 기호는 오직 또 다른 기호 내에서 해석됨으로써 의미를 획득하며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더구나 퍼스는 두 가지 항을 끊임없이 하나로 일소하는 수목형(arborescent)의 이항 논리보다는, 어떤 종류의 다양체라도 산출할 수 있는 삼각 구도의 조합을 제안한다. 네 가지 논거를 통해서 퍼스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반대한다. 몸체가 운동 중에 있다고 말하지 운동이 몸체 중에(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가 사유 중에 있다고 말해야지 사유가 우리 중에(안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실용적·기호학적 접근 방법은 영화 이비지, 기호, 서사의 논리에 대해서 운동의 내재성을 회복시킨다. 그런데 기호학의 일종의 원초적 질료로서의 운동에서 파생되거나 연역된다고 할 때, 이 ‘운동’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이미 운동-이미지의 네 가지 변종은, 첫째로 중심 없는 변이의 보편적 체제인 내재성의 평면 또는 이미지의 전체 집합이 있다. 다음으로 ‘운동의 지각’이 있다. 그것은 비결정의 중심, 특이성을 띤 몸체나 대상, 우발적인 공간적 집합을 형성하는 간격의 열림 등과 함께 출현한다. 세 번째로 가장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운동, 즉 경과한 공간적 궤적으로서의 운동이 있다. 그리고 운동-이미지의 네 번째 변형은 운동·물질·이미지·시간의 동일성에 대한 직관, 새로운 창조적 진화의 출현, 변화, 생성이다. 이로써 물질에서 정신으로의 경과가 완료된다.
사진이 부재하는 지시체를 보존하면서 그것이 이전에 존재했음을,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반대로, 들뢰즈는 운동-이미지가 유사의 의미에서는 아날로그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재현하는 대상을 달지 않는다. 운동-이미지는 대상이다. 그것은 지속적 기능으로서의 운동에 포획된 사물 자체다. 운동-이미지는 대상 자체의 변조다.
부드러운 봄비가 나뭇잎에 흘러내릴 때, 연못의 표면에서 빗방울들이 튀길 때, 빗방울 하나가 조심스레 창문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갈 때, 푹 젖은 우산을 쓰고 거리를 바쁘게 걷는 도시민의 모습 그 어디에도 ‘비’는 없다.
2. 라캉 철학
라캉 철학은 정신병으로부터 출발한 철학이다. 마음의 병이란 이 세계와 화해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주체의 고유한 표지들이다. 정신병에 대한 라캉의 테제는 ‘아버지의 이름’의 폐쇄와 그로 인한 남근적 의미효과의 폐쇄로 집약된다. ‘아버지의 이름’은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를 은유화하는 것이며, 그러한 은유에 이해 만들어진 의미효과가 바로 남근이다. 이 아버지의 이름이 신의 이름이다. 이것은 쪼개진 ‘나’의 파편이 언어를 통해서 조립된 것이다. 은유의 부재로 인해 실재 침범을 말한다.
무의식→무의식으로 나아가면서 의식층은 도중에 사라져주어야 합니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잠시 올라왔다가 도로 무의식으로 내려가 버린다. (정신)분석이란 반드시 네 명의 서로 다른 참여자들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포커에서 브리지 게임과 같은 것인데 주체(S)와 a′(분석수행자의 자아)는 파트너를 이루고 분석가의 자아(a)와 더미(dummmy=Other)와 타자도 파트너를 이룬다. 더미란 죽은 자이요 비어있는 자리다.
주체와 더미(대타자)는 상징계축을 이루고, 분석자의 소자아(a)는 분석수행자의 자아와 상상계 축을 이룬다.(a′) 자아로서의 분석자는 더미라는 파트너를 가졌으며 자아로서의 분석수행자 또한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없는 자산의 무의식이라는 파트너를 가졌다.
분석자의 목표는 자아로서 분석수행자로 하여금 자신의 파트너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알아맞히게 만드는 것이다. 즉 자신 안의 무의식적인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미-빈자리-분석가는 좌절을 유도(무시하므로) 환자는 상상계의 에고를 없앤다.
분석수행자에 의해 분석가가 맡게 된 역할 이 곧 타자(A)이다. 분석가를 말(발화)을 사용하게 되는데 말(speech)이란 의식적인 목적을 넘어선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언어란 타자의 장소다. 주체가 타자와 마주치는 가장 근본적인 사건이 언어다.
발화자의 메시지는 단지 다른 사람을 향할 뿐만 아니라 역시 제 자신을 향한다. “인간의 말에서 송신자는 동시에 수신자가 되게 마련이다” 이 두 가지 점을 함께 고려한다면 자신에게 향하는 메시지의 일부는 메시지 뒤에 남아있는 무의식적 의도이다.
분석가에게 말할 때, 피분석자는 역시 자기 자신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이를 알지 못한다. 분석가의 임무는 피분석자로 하여금 피분석자가 무의적으로 자신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피분석자의 단어들을 해석함으로써 분석자는 피분석자의 메시지와 그 진정한 무의식적 차원에서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끔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라캉은 분석적 소통을 “송신자가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수신자로부터 전도된 형태로 수신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주체가 타자의 세계에 출현함으로써 겪게 되는 소외로부터 주체의 근원적 상실감을 발견하게 된다. 타자에 의해 명명되고 호출됨으로써, 또 타자를 소환하기 위해 타자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주체는 존재 상실이라는 시련을 겪어야 한다. 이러한 존재 상실은 또한 육체의 상실이다. 쾌락적 육체가 타자의 언어(타자에 대한 요구와 타자의 요구)를 경유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상실이다.
이러한 상실감은 원초적 우울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즉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기초적 우울증, 잠재성으로서의 우울증이다. 이러한 우울증은 언어(타자)에 의한 죽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쾌락의 감소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감소는 그것을 보상해주는 쾌락을 불러오기에 인간은 원적 결핍과 원초적 우울증을 망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망각에 기대어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잉여물과의 연동에 의한 상실의 보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주체의 결핍이 타자의 결핍(타자의 욕망)에 의해 매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확보된다. 주체는 타자 또한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소외를 보상받는다. 즉 주체를 겨냥하는 타자의 욕망을 현재화하는 대상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치유 받는 것이다. 이러한 치우 과정이 바로 소위 말하는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현재화 하는 대상을 자신의 원인으로 삼는 욕망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실’과 ‘잉여’의 변증법은 상실을 치유하는 애도 작업의 필수적 전제이다. 상실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먼저 상실된 대상을 환유적 대상들로 치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토대로 대상의 추출이 일어져야 한다. 애도는 상실된 최초의 대상을 새로운 대상으로 대체할 수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대체는 현실 속의 대상이 욕망의 원인인 대상과 환유적 관계를 맺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따라서 병리적 의미에서의 우울증, 다시 말해 불가능한 애도는 이러한 환유적 관계를 완성하지 못해 주체가 최초의 상실감, 원초적 우울증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우울증자는 언어의 세계에 입성함으로써 자신의 쾌락을 타자에게 몰수당하지만 타자의 욕망이 부재함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의 원인을 정립하지 못하며 따라서 상실을 보상해줄 수 있을 만한 대상들도 세계로부터 도출해내지 못한다. 결국 그에게 보상되지 않는 원초적 욕망의 끊임없는 출혈, 쾌락의 절대적인 감소만이 남을 뿐이다.
원초적 상실감이 세계에 대한 욕망으로 환전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원초적 욕망의 지속적 출혈 속에서 세계가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무감각한 덩어리로 환원되어버림은 당연하다. 세계는 욕망의 공식으로 들어오지 않는 찌꺼기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러한 찌꺼기의 망령이 주체에게 드리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주체는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그 찌꺼기 속에서 자신의 신세를 확인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쓰레기일 뿐이다.” 버림받은 것은 나 자신이며, 그 원인 또한 나 자신에게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울증자의 끊임없는 자기 비난이 시작된다. 세계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며 나의 오류이다.
이러한 나르시즘적 자책감과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 타자 사이에게 주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길은 바로 타자의 결여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타자에게 결여된 것을 스스로 구현하는 것이다. 즉 “타자가 나를 잃을 수 있을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주체는 타자에게 결여된 대상이 됨으로써 타자 속에 결핍을 위한 자리를 도려낸다. 이렇게 해서 바닥없는 상실감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주체는 죽음의 문턱을 기웃거리게 된다.
라캉은 주체의 언어화, 의미화 과정 속에서 존재의 사라짐을 존재의 ‘분말화’라고 표현하고 있다. “언어의 효과를 통해서 주체는 언제나 대타자 속에서 더 많이 자신을 실현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언어의 사발통문식 환유 작용 속에서 더욱더 분할되고, 분말화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언어에 의한 존재의 분말화 과정은 앞에서 본 대로 미분화된 자연 상태의 존재에 언어적 기호가 작용하여 그것을 분절하는 과정을 점선으로 표시한 소쉬르의 도식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분말화된 존재, 분절되어 사라진 존재에게서 어떤 실체성, 주인성을 찾기란 힘들다. 그 존재는 그것을 대표하는 글자, 즉 기표에 대해서 ‘존재’하고 있다기보다는 ‘외-존재’ 즉 글자의 밖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체의 문자화’ 과정에서 주체의 존재적 차원이 문자 속에 완전히 흡인되어 그 곳에서 행위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 끈질긴 자기주장을 시도한다는 형이상학적 관점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글자 속에서 주체를 보는 것과 글자를 주체로 보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주체의 문자화 과정에서 주체의 존재적 차원은 배제되고 소외된다. 라캉의 표현은 이러한 상황을 잘 전달해준다. 주체의 존재는 언어에 의해서 ‘먹힌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 존재는 기표 밑으로, 뒤로 미끄러진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언어에 의한 존재의 타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구멍 뚫린 주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한 존재의 소외화 과정은 그 속에서 아무런 요소도 포함되지 않는 공집합{Ø}에 비유될 수도 있으리라. 이 과정을 지나면서 존재는 상징질서 속에 ‘자리 표지’의 흔적만 남기고 몸통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의 실체성, 주인성. 지하 구조적 견고한 토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이 ‘의미 연쇄의 끈질긴 자기주장을’ 끈질기게 주장하면서 무의식의 주체에 어떤 주인성의 가능성을 실어줌으로써 그의 추종자들을 헷갈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그는 “기표의 연쇄 속에서 의미가 끈질기게 자기주장을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러나 그것의 요소들 중 어느 것도 그 순간에 가능한 의미 내용에 있지 않다”는 말과 대구를 이루어 의미의 결정이 기표와 기의의 행복한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한 기표가 다른 기표로 대치되는 기표의 연쇄 고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현상에 대한 라캉의 기본 입장을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미로서의 기호적 주체가 운행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주체의 문자화, 기호화 과정에서 존재는 언어 속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면서 주체를 탄생시켰고 이후부터 주체의 운명 방식은 철저하게 언어의 법칙, 은유와 환유의 구조. 의미 연쇄의 규칙을 따라간다. 이 법칙과 규칙은 흙더미에 깔린 고대 영웅의 몸부림같이 집요하고 엄격해서 끈질긴 자기주장이라고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점에서 의미로서의 주체는 기표들의 연쇄 고리 속에서 끈질기게 자기주장을 시도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니 이것이 곧 무의식적 주체의 형이상학적 본질론이나 ‘주체 속의 주체’와 같은 이중인간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말하는 존재로서의 기호적 주체는 언술 행위 속에서 균열 작용 이상의 존재성을 보이지 않는다. 언어의 질서에 의해서 갈라진 균열성만이 주체의 존재를 담보한다. 다시 말해서 ‘주체는 바로 이러한 분열성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말을 거꾸로 표현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 분멸성이 주체적 존재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무의식의 주체는 의식의 질서에 단속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전복적 힘과 같은 것이다. 이 힘은 반드시 기표의 논리에 따라 자기표현을 시도한다. 발화 행위는 무의식의 주체가 자신을 현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 주체는 결코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짐의 불빛 속에서 언뜻언뜻 자신을 실현하는 ‘실체 없는 실체’이다. 라캉의 주체론이 해체론자들이 비판하듯이 형이상학적 전통으로 회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체론 시대에 풍미하고 있는 ‘주체의 죽음’ 이론에 동조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논변하고 있다.
라캉에서 주체란 형이상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존재와 부재, 나타남과 사라짐, 연속과 불연속 사이를 넘나드는 어떤 사건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무의식의 주체는 발화 행위로부터 떨어져 있는 어떤 ‘누가’라기보다는 출혈적 사라짐으로부터 점화된 바로 그 말하기 사건 속에 외-존재하는 존재이다. 무의식의 주체는 이 사건과 등가물이다. 그것은 지하층이라는 의미에서의 주체가 아니고 종국적으로 그 사건을 전유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그러한 사건의 외-존재적 자리이고 흔적이며 흔적 만들기이다.
라캉은 다른 기표들의 대응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원초적 기표를 단일 기표라고 명명하였다. 단일 기표는 의미와 존재 사이에 위치하고 비의미를 특징을 한다. 그것이 의미 체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을 상호 비판적으로 받쳐주어 은유화 과정을 작동시킬 수 있는 대응 기표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도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의미로서의 단일 기표는 이와 같이 의미화로의 길도 막혀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의 환원의 길도 막혀 있다.
그것의 환원 불가능성은 살아 있는 존재가 의미 차원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것이 다시 존재 차원으로 환원되는 길이 영원히 막혀 있기 때문이다. 존 밀턴의 메타포를 빌리자면 존재 차원에서 의미 차원으로, 자연에서 문화로의 ‘실낙원’은 존재해도 그것의 역인 의미 차원에서 존재 차원으로의 근본적인 회구기인 ‘복낙원’은 불가능하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대상 ‘오브제 a'를 통해 판타지 형태로만 어렴풋이 내다보일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에 의해서 비의미로 정의된 단일 기표 혹은 S₁도 의미 불가능성 라기보다는 잠재적 의미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일단 기표인 한 그것도 이미 존재 차원이 아니라 의미 차원에 편입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비의미, 혹은 무의미이지 ‘반의미’가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단일 기표는 지금은 적절한 짝을 만나지 못해 외로이 떠돌고 있지만 적당한 조건이 충족되면 의미의 세계를 활짝 열어갈 의미의 근원이고 토대이며 가능성이다.
라캉의 대수학에서 대타자는 A(Autre)로 표시되고 소타자 a(autre)로 표시된다. 라캉은 이러한 차이를 아는 것이 분석의 실행에서 근본적이라고 주장한다. 분석가는 A 와 a의 차이에 대해서 철저하게 고취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분석가는 소타자의 위치가 아닌 대타자의 위치에 자신을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 A
소타자는 실제로 타자가 아니라 자아의 반영과 투사인 그런 타자이다. (그 까닭은 상징 a가 상호교환적인 소타자와 자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사자인 동시에 거울상이다. 그러므로 소타자는 전적으로 상상계에 기입된다. 라캉의 저작에서 상징 a의 발달에 대한 보다 세밀한 논의 대타성 개념에서 참조되어야 한다.
대타자는 근본적 타자성, 즉 상상계의 착각적인 타자성을 초월하는 그런 타자성을 가리키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동일시를 통해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러한 근본적 타자성을 언어와 법에 등치시키므로 서 대타자는 상징계에 기입된다. 사실상 대타자는 각각의 주체에게 특수화되는 한에 있어서 싱징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대타자는 근본적 타자성과 동화될 수 없는 특이성 있어서 또 다른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그 다른 주체와의 관계를 중재하는 상징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다른 주체로서의 대타자’의 의미는 ‘상징계로서의 타자’의 의미에 비해 분명히 부차적이다. “대타자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장소, 즉 말이 구성되는 장소로 생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주체가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고 다른 주체를 위하여 대타자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즉 부차적인 의미에서 주체로서의 대타자에 대해 말 할 수 있게 된다. 말이 자아 속에서, 또는 주체 속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 속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하면서 라캉은 말과 언어가 우리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또 다른 장소에서, 의식의 바깥에서 유래하기에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 대타자를 장소로 인식하면서 라캉은 무의식이 또 다른 장소로 이루는 프로이드의 심적 소재성의 개념에 대해 넌지시 언급한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대타자의 위를 차지하는 것은 어머니인데, 아이의 원천적인 울음과 특수한 메시지로서 그 울음을 사후적으로 확인하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에 아이가 이러한 대타자는 완벽하지 않고 대타자에 결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거세 콤플렉스가 형성된다. 달리 말해서 대타자에 대해 형성된 기표들의 창고로부터 실종된 하나의 기표가 있다.
신비스럽게 완벽한 대타자(A)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 빗금질 친 A는 불완전한 대타자다. 대타자는 대타성이다. 대치성은 남성의 주체이든 여성 주체이든 간에 항상 여성이다. “여기서 남자는 교체자로서 행동하는데 그에 대해 여자는 남성에 대해 대타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도 이러한 대타자가 된다. 대타상 a는 그것이 상상적 지위를 상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점자 실재계에 대한 함축을 획득하게 된다.
a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대상을 지시하며, 실제로 욕망이 지향하기 보다는 욕망의 원인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a를 욕망의 ‘대상원인’이라고 부른 이유다. 타대상은 욕망을 작동시키는 어떤 대상, 특히 욕동을 정의하는 부분대상이다. 욕동(충동)은 타대상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주위를 맴돈다. 타대상은 불안의 대상이며 결국 환원될 수 없는 리비도의 저장소이다.
그것은 분석자가 자신을 타대상의 모사, 즉 피분석자의 욕망의 원인으로 자리매김하는(신마저 교정하려고 둠) 라캉의 치료개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곧 실재계 이면에 남겨진 잔여이다. 주인의 담론에서 하나의 기표는 모든 다른 기표들을 위한 주체를 표상에서 불가피하게 잉여가 생산된다. 이러한 잉여가 타대상이고 잉여의미이며 그리고 잉여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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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식은 원래 라캉의 네 가지 담론 중 ‘지배자 담론’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의미화 과정을 통한 분열된 주체의 탄생과 그 결과를 잘 보여준다. 우선 여기에는 라캉의 공식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중요한 기호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제시되어 있다. : S₁, S₂, $, a. 의미화 과정 S₁→ S₂가 분열된 주체 $를 만들어내고 그 상실의 흔적으로 오브제 a를 남겨 놓는다. 상단 S₁→ S₂가 소외의 과정을 말해준다면 하단 a→$는 뒤에서 말하게 될 분리의 과정을 대변한다. 소외 과정이 대타자에의 복종을 통해 진행된다면 분리 과정은 타자, 혹은 타자의 욕망과의 대결을 통해서 성취된다.
a→$가 정면에 부각된 담론이 가장 ‘인간적인’ 담론인 ‘분석가 담론’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로서 하나님에게는 과거완료,(롬 8:30) 인간에게는 미래완료가 된다. 이것은 미래완료형적 사후적 기호화를 통해서 처음의 욕망은 S₁으로 자리매김 되고 원초적 기표, 아버지의 이름은 S₂로 자리 잡는다.
곧 정신병이란 S₁→S₂로 발전하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로 그 자리에 응결되어 고착화 되자 S₁/$의 지배 구조가 형성되고 이 환자는 이 지배 기표의 노예가 된다. 예를 들어 ‘Glanz'(반짝거림)라는 소리만 들어도 성적으로 흥분한다. 그 단어는 이미 그에게 하나의 주물(呪物)로서 작용한다.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기표 지배는 무의미를 전제로 한다.) 그는 주물로서의 그 지배 기표 S₁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바로 이러한 고립된 지배 기표를 활성화하여 그 고립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것의 변증법화이다. 이 변증법화란 라캉이 어떤 지배 기표가 다른 제2의 기표를 만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S₁이 S₁→S₂의 관계로 발전하여 S₁/ $의 지배 구조를 S₁→S₂/$의 열린 구조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분석적 듣기는 발화 내용보다는 발화 행위에 집중되어야 한다. 발화 내용에 대한 일종의 ‘중단’ 현상이다. 발화 행위는 발화의 형식적인 측면으로서의 기호 형식인 기표로 표현되는 반면 발화 내용은 발화의 내용적인 측면으로서 기호 내용은 기의로 표현된다. 대타자 담론을 형성하는 무의식이 기표로 구성되어 있다면 자아 담론은 그것의 내용적인 측면인 기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분석가의 대타자의 목소리 듣기를 목표로 하면 반석 현장에서 분석가가 할 일은 그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는 그가 어떻게 말하느냐를 분석하는 것이다. “나는 밥을 먹고 있다”는 말에서, 밥을 먹고 있는 ‘나’와 그 말을 하고 있는 ‘나’는 다르다. 말에 의해, 주체가 말하는 주체와 그 말의 대상-주체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발화 행위의 주어와 발화문의 주어로 나뉜다.) 라캉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는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순간적으로 나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주체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그 말을 하는 주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주체가 문장의 표면에 몸을 드러내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크레타 사람의 역설이 그것이다. 거기서 그 말(의 내용)이 참이라면 그 말을 한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고, 그 말을 한 크레타 사람이 거짓말 쟁이라가 아니라면, 그 말은 거짓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진정한 타자요, 진정한 주체인 타자에게 말을 건다. 그들은 언어의 장벽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원칙적으로 거기에게 있는 그들에게 닿을 수 없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내가 진정한 말을 할 때마다 목표로 하는 것들이지만 내가 반사 작용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은 항상 그 대자들이다. 나는 항상 진정한 주체를 목표로 하지만 언제나 나는 그것의 그림자에 만족해야 한다. 주체는 언어의 장벽에 의해서 대타자, 진정한 타자로부터 결별되어 있다.
Ⅲ. 개혁주의신학의 문제점
예수님과의 만남은 마주침이 아니라 부딪침이다. 마주쳤던 사람들은 무수하다. 하지만 부딪쳤던 사람들은 소수였다. 마주침은 상대를 본인이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거리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해도 그 중에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본인이 작정하고 나선 ‘마주침 일정’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주침은 본인 스스로 안고 사는 미흡함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가 된다. 즉 “왜 교회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가”에서 오는 격분과 분노 같은 것이 ‘마주침’에 적극적으로 감행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 되풀이되면서 본인은 점차 ‘도인같은 신자형’이 되어 간다. 자신의 목숨마저 담보로 하여 불의와 싸우는 그 와중에서 자신은 영적으로 깨친 자로 규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불꽃 가운데 부딪쳤다.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보편화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뭐든지 행함으로 전환되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수립할 것도, 또한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소개해 줄 것도 없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에서 주장하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란 딴게 아니라 인간들 끼리 행함을 매개로 해서 소통하는 것으로 늘 현재 ‘있음’을 긍정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현재 있음’을 구획하고 재단하고 자리바꿈으로 일관되게 처리하게 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권력이 된다. 현 인간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긍정의 흐름과 움직임을 주관하고 주도하고 있는 실세로서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문법 안에는 소통을 성사시키는 권력에 행세한다. 그 문법적인 질서를 현실로 표출하려는 것이 바로 역사 의식이다. 이 모든 것이 주체의 동일성 시도와 확장과 관련 있는 모습이다.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신학은 변화를 야기하는 권력 주체로서 나서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다. 문법이란 언어에 질서를 잡는 것으로서 ‘주어+술어’의 시스템 속에다 동일성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담고 동일성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한다.
예수님과 강도 바라바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총독 빌라도의 제안에 대해서 (마 27:16-26) 민중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 총독 빌라도나 예수님을 고발한 성직자나 민중들이 모두 예수님을 자기 권력과 질서 안에서 선택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문법화’이다.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짐으로서 그들이 기획하고 재단해 나가는 작업 자체를 통해서 자기만의 굳건한 세계를 진리로 수긍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판단을 자신들의 평가하지 그 어떤 외부 인사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저의가 계속해서 뿜어 나오는 것이 이 어두운 세상의 모습인데 그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Ⅳ 결론
모든 성경 말씀을 절망을 야기하는 하나님의 배짱으로 뭉쳐져 있고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거론하는 것은 세상을 제대로 정죄하기 위함이다. 오직 회개하는 자만이 세상을 정죄할 자격이 있다. 다 자신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달성하신 요나의 표적의 가치성이라는 그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