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욕망론과 라캉의 욕망론의 차이
Ⅰ 서론
몸, 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사람이 관심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은 ‘나’라고 불러보는 ‘내 몸’ 외에는 달리 최종적으로 사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계시된 성경 말씀은 우리 성도보고 다른 몸을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십자가 달리신 그리스도 몸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몸과 몸의 대비요 대조다. 불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그저 이웃집 아저씨처럼 여겨지고 옛날 이미 죽었던 어느 고대인의 무심한 몸에 불과해서 신경 쓸 필요조차 없고 대조나 대비시킬 하등의 이유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본인의 이런 의사와 상관없이 성령께서 늘 그리스도 몸과의 대조를 촉구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왜 책망을 하시는가?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책망하시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현재 오로지 자신의 몸만이 감싸고 자신의 몸만이 사수하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가치와 의미와 영광과 존귀를 위해서 결사적으로 붙들고자 하는 그 몸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뜻 사이에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인간에게 몸이 있다는 말은 아무리 성경 구절을 보아도 그리스도 몸 중심으로 쓰여진 그 성경 말씀들이 결국에는 그 성경을 읽는 당사자 본인의 몸 보존 위주로 의미가 변질되어 되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주를 사랑한다’ 것 중에서, 그 ‘사랑’의 의미가 사랑하시는 분에게 쏠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에게로 도로 돌아와 버린다. 뿐만 아니라 사나 죽으나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는 사실,(롬 14:8) 그리고 우리 뜻대로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안개 같은 존재로서의 우리의 위상(약 4:14-15)은 모두 성경귀절을 대하도 즉시 그 본래의 의미는 무참하게 삭제된 채 읽는 자의 자기 공로로 되돌아오는 괴기한 일들이 ‘내 몸’을 죽자고 내가 지켜보겠다는 심사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을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성경을 읽어대기 때문입니다. 왜 그것이 죄일까? 그것은 주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랑의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즉 죄를 아담을 물러 받았던, 혹은 악한 영이 임하던 간에 내 몸이니 내가 죽도록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다. 그 외의 모든 이들은 나로부터 ‘타인’이라는 존재로 거리를 둔 채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타인이라는 항목 안에 당연히 하나님도 들어있고 예수도 들어 있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 사랑, 예수 사랑, 이웃 사랑을 외쳐 데도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모조리 거짓말이고 위선이다. 그 타인의 항목에 드는 그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나의 나 사랑에 차질을 안겨주면, 사료그릇 빼앗는 강아지 모양, 안면 몰수하고 가차 없이 물어버린다. 인간의 사상은 결국 인간들이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을 운운하면서도 결국 지독한 자신 사랑의 성질의 권역에서 떨어져 나가지 못하고 고무줄처럼 “탱∼”하고 쉽게 자기가 애써 파놓은 동굴 속으로 되돌아오는 어쩔 수 없는 이기주의다. 이런 점을 현대 철학자들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고민하면서 이런 이기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이 연구를 하면서 현대 철학자들은 놀랍게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왜 인간은 터져 나오는 욕망대로 짐승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를 따지는 윤리에서, “왜 인간은 자신의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악한 욕망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기어이 통제하고 싶어 하는가?”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는 욕망과 욕구로 넘쳐나는데 그 욕망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자아를 그저 무질서와 파탄으로 치닫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욕망 자체를 ‘악하다’는 식으로 보았던 종전의 욕망론에서 벗어나 “왜 안 악해지려고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욕망의 상반된 내용이 지금도 모든 인간의 몸에서 벌어지고 들끓고 있기에 비록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달리 믿고 사랑할 대상이 없기에 단지 ‘현실’이라는 이름하에 건사하고 돌보고 싶어 한다. 따라서 이 점이 성령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책망을 받게 된다. 왜 그리스도 몸 말고 네 몸을 사랑하느냐고.
따라서 사람들의 자기 몸 상태를 살피면서 어떤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기어이 지켜주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지 들뢰즈와 라캉의 욕망이론 (=몸 이론)을 통해서 알아본다.
Ⅱ 본론
1. 들뢰즈과 라캉의 공통점
들뢰즈의 욕망이론과 라캉의 욕망이론은 같지 않고 차이가 난다. 이 점은 몸 이론 자체만 차이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론 전체를 다하는 자세부터가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차이남을 통해서 양쪽의 견해를 한꺼번에 얻을 수가 있다.
먼저 들뢰즈와 라캉의 공통점부터 살펴보자. 그것은 바로 세상이 과학주의로 흘러가는데 대해서 공통적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사람이 기계가 되고 사람이 하나의 돌멩이처럼 사물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 없이 격렬하게 반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학주의에 의하면 인간이란 일반 생물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라는 영양분을 제공해서 60조개의 세포를 키워내면 그것이 곧 ‘인간답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과학주의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영양분 공급을 위해 필히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은 경제체제에서 얻게 되면 그것으로 ‘인생 성공’인 셈이 된다.
목회를 하든지, 의사가 되든지, 판사가 되든지 연예인이 되든지 그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60개조의 세포로 구성된 이 물체가 편히 누울 수 있고, 편히 입을 수 있고, 편히 먹을 수 있고, 편히 즐길 수 있는 돈만 만들어낼 것이면 그것으로 인간 존재의 고유의 목적은 달성 것으로 본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오로지 돈만 챙기면 인생 성공이다. 쉽게 말해서 윤리와 도덕도 돈이 들어올 수 있는 수단이 되는 한 윤리답고 도덕다운 것이다. 돈이 되지도 못한 윤리와 도덕은 과학주의에 의하면 비현실적으로 사는 몽상가로 사는 것이 된다.
즉 ‘바르게살기’도 좀 유명한 ‘바르게살기’로 소문이 나야 후원회가 조직되고 후원금이 들어오는 것이다. 골방에서, 혹은 산골에서 그냥 혼자서 ‘바르기 살기’하면 돈이 잘 안 들어온다. 돈이 잘 안 들어오면 가족 중 아기가 아프면, 제대로 치료시기를 놓쳐 일찍 억울하게(?) 죽는 수가 있다. 또 과학주의에 의하면, 돈을 자식에게 많이 투자 못하면 그 자식은 돈이 많이 들어오는 직장이나 직업을 얻는 경쟁에서 남들에게 빼앗겨 버리게 되어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60개조의 세포를 건강하게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쨌든 일단 돈을 벌어서 돈이 있고 난 연후에 타인에게 희생을 한다든지 고상한 문학이나 예술이나 타인에게 기부를 해서 이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변모시켜서 보람 있는(?) 여생을 즐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그 때는 그동안 ‘나의 몸’이라고 규합되었던 그 60개조의 세포가 아쉽지만 각자 알아서 이리저리 분해되면 그만이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라캉은 이런 과학주의로 인하여 이 세상이 힘 가진 자의 천국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쇠칼과 구리칼의 대결에서 보다 단단하고 힘으로 다져진 쇠칼에 의해서 연약한 구리칼들이 여지없이 작살나는 그 현장에서 쇠칼이 더욱 더 단단해 질 수 있는 여분의 힘들을 독차지하는 식의 사회를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들뢰즈와 라캉에 의하면 온통 세상이 이상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이 사회 체제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편집증 환자, 아니면 분열증 환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편집증 환자들은 많이 끌어 모았든지, 더 끌어 모으겠다는 일념으로 사는 부류라면, 거기에 비해서 분열증 환자들은, 생존경쟁에서 지쳐 나가떨어져 자포자기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부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패배를 추상적인 환상으로 보상받고자 “이 세상은 자체가 더러운 세상이다. 이 세상 인간치고 인간같이 인간 어딨어. 다 그렇게 그런 놈들이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의 처지를 달래려는 허무주의자들이 분열증 환자에 속한 반면에, “뭐 어디 새로운 멋진 투자처 없어? 선점하면 목돈 챙길 수 있는 정보라도 있으면 나에게 가르쳐줘”하는 식으로 ‘나의 것’을 키우려는 의지로 충만한 환자들이 편집증 환자들이다.
그래서 들뢰즈나 라캉은 이런 식으로 세상이 흘러가게 된 원인을 알아보니, 그것은 바로 다들 ‘주체 집착증’에 빠져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주체란 곧 ‘동일성’이다. 주변의 변화를 내 몸의 욕망층에서 적응하여 의미를 발췌하고 그 발췌된 의미를 결집하여 한시적인 주체자로 행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발췌하는 인식 방식이 완전히 과학주의에 준해서 발췌하기 때문에 자기 몸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그 느낌을 자기가 교육받은 과학주의가 괴상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강도가 칼을 들이대면서 “죽인다. 돈 내라”라면 “이 소리는 상대방이 목젖에서 울러 퍼지는 음파 에너지에 불과해”라는 인식으로 정리해도 실제 몸에서 느껴지는 공포를 제대로 버틸 수 없는 것이고, 또한 “공포라는 것은 두뇌 세포 사이에 신경전달 물질이 과다하게 흐르는 것이다”라고 아무리 과학적 논의를 끄집어내어도 그것으로 온 몸이 느끼는 생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전쟁터에서 총탄이 날아와서 몸을 관통해서 죽어버린 자기 자식을 보고, 아버지가 하는 말이 “이는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 사이를 금속 물질이 강한 에너지로 통과하는 것이야”라고 설명해도 자식 잃은 슬픔을 해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이미 주체가 몸을 가졌다고 간주한 입장에서 자기 몸을 분석하면 실제 과학적 성과로 설명하는데 무리가 가는 것이다.
2. 들뢰즈의 주체사상
그래서 들뢰즈는 과학의 성과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과학주의’에서 버리는 방도를 취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은 바로 인간을 구성하는 기관이나 세포단위층보다 더 깊은 층인 분자 수준의 층에서 벌어지는 욕망들의 흐름을 주목한다. 이 분자 수준에서 욕망이 생산된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기계인 것이다. 이 기계는 의미를 발생시키는 재료를 만드는 공장이 된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자연적 욕망들은 어떤 형식을 갖추는 과정을 통해서 의미가 발생되는데 과학주의는 바로 이 ‘의미층’을 놓치면서 인간을 논한 것이 문제점이 된 것이다.
이렇게 분자층에서 발생된 욕망이 외부와 만나면서 연이어 차이나는 형식과 표현을 자아내게 된다. 이렇게 형식과 형식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다 보면 나름대로 동일성을 갖추면서 비로소 의미가 생겨난다. 이 동질성은 그만큼 다른 차이성을 박해하고 구박하고 억압하는 과정을 겪어서 얻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내각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 동일성에 반대하는 진영은 졸지에 야당으로 전락한다.
이 동일성은 나름대로 평지와 질서를 갖추게 된다. 그 질서를 위해 법이 차려지는데 이 법으로 인하여 차이나는 것들은 ‘위법자’, 혹은 ‘범법자’, ‘혹은 죄인’으로 분류되어 공동체와 격리된다. 이것은 비단 국가 사회 뿐만 아니라 인체가 생리적으로 구조를 갖추어 기관이 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게 된다.
따라서 핍박받은 차이성은 그 집단에서 이탈되고 탈출을 감행하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조성하여 기존 질서를 흔들면서 세계를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들뢰즈 입장에서는 주체란 기껏 한시적으로 질서를 갖춘 욕망기계에 불과하기에 늘 정주(그 자리에 죽치고 앉아있는 다른 욕망기계들)를 공격하는 떠돌이 생활(유목주의)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체성은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 체계 하에서 주체들이 보여주는 특징을 제대로 설명해준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의리고 정이고 혈통이고 종교도 뭐고 따질 것 없이 이 주체 못할 욕망기계는 자신이 의미를 취득할 수 곳으로 언제든지 옮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약간 더 대우가 나은 회사로 이직한다든지, 보다 복지 정책이 잘 되어있고 입시 경쟁이 덜한 나라로 언제든지 이민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소위 ‘고향’이라는 이름의 정주(머묾)사상 자체를 늘 이탈하도록 욕망은 반응하는 것이다. 즉 생산을 위한 욕망기계 안에서는 그 어떤 대비적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욕망의 용광로 속에다 다 녹여버렸으니.
3. 라캉의 주체사상
그런데 라캉의 입장에서 보면, 욕망의 세계 안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있음을 들뢰즈 측을 놓치고 있다고 보았다. 즉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산적인 방향으로 욕망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생산적인 것을 저지하는 욕망의 활동도 있는데 이 점을 들뢰즈식으로 하면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 쪽은 이런 상반된 욕망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주체를 설명하는가?
과학주의에 의할 것 같으면, 60개조의 세포는 원하는 대로 마냥 움직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싶어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는 항상 자기 눈에 뜨이는 타인의 모양새에 따라서 만족과 불만족이 수시로 달라지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밖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남들로부터 보이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나를 보는 타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현재 나의 삶에 대해서 대단히 만족했는데, 나보다 더 뛰어나고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나보다 많이 가졌고, 나보다 더 인기 있는 자가 등장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무시하고 깔보겠느냐는 생각하면 밤잠을 자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그 타인이 자신을 그렇게 보지는 여부는 전혀 알려진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의 세계란 실은 타인들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욕망들의 집결장소가 되고 그런 욕망들이 이리 뭉쳐지고 저리 뭉쳐짐에 따라서 나라는 주체는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내용으로 정립된다. 여기에 어떤 고리가 갖추어지게 되는데 이 고리는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를 정립하기 위해 동원되는 각가지 단어들이다. 그래서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그 타인의 욕망에 부응해주므로서 비로서 나는 그 타인 앞에 적합한 주체가 되어 나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세 다른 타인이 등장해서 기존에 정립해 놓은 주체상을 허물어 버리게 만드는 욕망을 또한 나에게 쏘아대게 된다. 그러면 그 타인의 욕망에 부응해야 하기에 그 간격이 바로 증상으로 나타나는 ‘욕망’이다. 이 증상이 바로 편집증이요 분열증세다.
인간이 이미 태어나면서 주변 어른들의 욕망에 의해서 맞춰진 주체상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새로운 타인의 욕망이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그 불안증을 어떤 식으로 내부적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면 그만큼 정신병자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타인의 욕망으로 변신을 거듭해야 한다. 아무리 달려가서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히지 않는 목표와 목적이 있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상인이야”라는 이 주체에서 늘 상실의 자리가 생기게 마련인데 그것은 인간에게는 욕망뿐만 아니라 충동이라는 것이 발생된다. 이 충동은 인간이 주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난데없이 들이닥치게 되는데 그 충동의 원천지는 바로 쾌락이다. 이 쾌락의 바다를 조사한 라캉은 두 종류의 상반된 방향으로 쾌락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현재를 즐기고 싶은 쾌락과 그 즐김을 죽음으로 마감하고 싶은 쾌락이다. 즉 “어서 죽어버리는 쾌락을 맛보았으면…”라는 쾌락이다.
쉽게 말해서 현재 만져지고 있는 이 몸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를 파괴시켜보고 싶은 그 충동이 증상으로서 의식의 표면 위에 흠집을 내면서 올라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라캉의 욕망론은 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타인의 욕망으로 주체를 정립하는 순환구조와 다른 하나는 손 쓸 겨를도 없이 난데없이 올라오는 즐거움, 곧 죽고 싶은 즐거움이다. 욕망 구조는 타인으로부터 명령받아 그대로 순종하므로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주체가 되고자 하는 구조인 반면에 충동 구조는 그런 주체 정립 행위마저 스스로 다 부셔 버리고 싶은 욕망구조가 또 있다.
앞에 욕망사슬은, 스스로 죽음을 여겨내고 연기시키는 영역이라면, 뒤의 충동구조는 그러한 시도에 구멍을 내는 구조다. 그런데 이 구멍 내는 시도가 서글픈 것이 아니라 진작 정말 해보고 싶은 순수한 즐거움인 것이다. “아, 내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힘을 장착하고 있다니, 나는 이로서 얼마나 행복한 존재냐!”
이로서 죽음의 힘은 언제 어디서 삶의 힘보다 항상 우세하다.
Ⅲ 결론
예를 들어 어떤 한 부인네가 계시는데 그분이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오로지 십자가 피만을 의지했다. "이제 진짜 죽을 때가 된 모양이다. 이참에 오늘 죽더라도 낙원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도록 신앙면에 있어 철저히 하자"라는 심정으로 열심히 복음을 사랑했다.
그런데 자기 예상 밖에 남편도 잘 풀리고 자식들도 기도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다 성공했다. 이 때부터 이 부인네는 십자가 복음을 외면했다. 즉 “예수님은 피흘러 죽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잊기 시작했다. 너무 참담하고 부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은 신학을 받아들였다.
“내 것이 잘 되었으니 이 내 것 안에서 마음껏 즐기겠다. 나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겠다. 나는 내 이름, 나는 내 가정의 이름으로 즐거워하겠다. 어려울 때 알게 되었던 신학과 소위 복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곳곳에 멘토(정신적 스승) 노릇을 하면서 신앙적 수준 낮은 자를 가르치는 이 즐거움을 만끽하겠다. 어쨌든 나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겠다”고 나섰다.
이 부인네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즐거워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그럴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였다. 육체를 가진 모든 이들이 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다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현대 욕망론은 명쾌하게 설명한다. 즉 “모든 인간은 자기 몸으로 즐거워하는 존재!” 그렇다면 이러한 설명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현대철학은 악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늘의 존재로 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약에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본다면, 졸지에 이 세상은 에베소서 2:2의 말씀처럼 모든 인간의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필히 낯선 영적 존재인 악마와 결부된 몸 이론, 욕망 이론이 펼쳐져야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연쇄적 질문이 성립된다. 이 세상에서 악마가 이길까 인간이 이길까? 당연히 악마가 이긴다. 그렇다면 인간이 성경 말씀을 봐서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없을까? 당연히 인간은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건져내는 강한 능력을 접하게 되면 인간 몸으로 행하는 행함을 구원의 근거로 제시할까 아니면 건져내어주신 분의 행함만을 증거할까? 당연히 건져내어주신 분만을 증거하게 된다.
마태복음 12:28-30,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렇게 건짐받은 입에서 다음과 같은 대조가 나온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5-16)
사도의 이러한 복음적 결론에 성령받지 못한 자는 당연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몸의 욕망이 가만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몸으로만 즐거워할거야!” 이것이 십자가 피 앞에서 발악하는 악령에 잡혀있는 종들의 순수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