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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의,“어거스틴 대 펠라기우스논쟁”에서 새롭게 느끼는 소감 ‘그리스도의 사람’29호(2010. 7-10월호)의 권두문(원본의 부분 수정본)

은바리라이프 2012. 2. 18. 12:28

교회사의,“어거스틴 대 펠라기우스논쟁”에서 새롭게 느끼는 소감

‘그리스도의 사람’29호(2010. 7-10월호)의 권두문(원본의 부분 수정본)

 

 교회사에서 어거스틴(주후354-430)과 펠라기우스(주후360?-420?)는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 각각,“은혜론”과“노력론”을 대표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거스틴에 있어서는 타락전의 인간 상태는 하나님과 일치되었으나 타락으로 그 관계가 파괴되었으며 파괴된 일치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해서만 회복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신앙적 관점에서는 인간 의지 자체도 타락하여 그것을 자유케 하려면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의지로서 진정한 무사(無私)의 선행이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당신의 은혜로서 행해진 인간의 선행을 하나님은 마치 인간이 행한 것처럼 보상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을 회복시키는 이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를 주실 때는 인간으로서는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핵심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은혜만(sola gratia)’의 사상도 바로 이 어거스틴의 사상이었다.

 

 한편, 펠라기우스주의의 핵심사상은 구원에 있어서 신의 은혜보다 인간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강조하는 어거스틴과 가장 대척점에 서는 부분이었다. 펠라기우스도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은혜는 그 개념 자체가 어거스틴과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은혜라는 것은 어거스틴의 경우처럼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인간 본성에 직접 주어짐으로써 본성에 덧붙여져 연약한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초자연적 특성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 또는 율법 자체가 은혜이며, 또 직접 인간의 의욕과 행동을 도우시지 않고, 의욕과 행동의 가능성만을 도우신다는 것이 그의 은혜관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선한 일을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할 수 있다(If I ought, I can).”는 말은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양자의 대립은 기독교의 인간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은총론이 인간의 노력론에 승리하고 정통설로 확립된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여 왔던 것인데, 이를 다시 읽으며 이들 상반되는 양 사상과 관련, 그 주창자들의 성장과 생활배경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즉 어거스틴의 ‘은혜론’과 펠라기우스의‘노력론’은 바로 그들 각자의 삶의 경험에서 나온 사상이라는 것. 즉, 어거스틴의 인간 구원론은 한때 자신이 방탕하며, 죄 된 삶을 돌이켜보면서 철저히 죄 문제와 관련하여 접근했던 것이고, 펠라기우스 또한 경건한 수도사로서 철저히 극기와 도덕적 삶의 경험에서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진실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자는 아는 것이다. 성서의 증언대로 자신은 죄에 팔려 하나님의 의의 요구에 철저히 무력한 자라는 것을. 사실 어거스틴의 은혜론은 하나님 앞에서 죄와 고투하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상의 고백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교회가 어거스틴의‘은혜론’을 수용하고 펠라기우스의‘노력론’을 정죄한 것은 그 자연스런 귀결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또 기독교는 그 특성이 무엇이고, 이 예수의 종교는 어떤 관점으로부터 접근해야 그 중심에 도달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다시 한 번 명백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우리가 '고백록'을 통해서 잘 아는 바와 같이 어거스틴은 이른 나이부터 방탕한 생활에 빠져 아들까지 낳은 사람이었다. 로마서 13장 13-14절,“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 자신의 죄 된 삶의 정곡을 찌른 것으로 받고 결정적인 회심을 한 사실과, 회심 전에 극심한 고뇌에 빠져,“나의 젊었을 때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주소서, 언제 분노를 거두시렵니까?”라고 한 기도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그는 영리한 청년이었으나 그의 삶은 부도덕한 죄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의 은총론은 바로 자신의 이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자신의 삶과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그분의 은총이 아니면 자신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신앙의 삶의 과정에서의 철저한 순종의 삶은 인정하되, 그것과 전혀 관계없이 자신의 구원을 그 궁극적 근원되신 존재에게 돌렸던 것이다.

 

 의지와 노력주의 교리를 주창한 펠라기우스도 자신의 주장이 본인의 삶의 경험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은 어거스틴과 같다. 펠라기우스는 영국의 수도사로서 4세기말 경에 로마로 와서 몇 년 동안 거기에 머물렀다. 그는 엄격하며 금욕적인 수도사로 알려져 있는데, 로마에 도착하여 수많은 로마인들의 방종한 삶을 보고 분개하여 그들을 교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던 중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당시 로마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어거스틴의, “나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크신 자비에만 있습니다.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라는 기도문은 엄격한 도덕 실천론자인 펠라기우스에게는 이것이 도덕적인 무기력으로만 보였다. 그에게 어거스틴의 이런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훼손하고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자기 의무를 행할 수 있는 충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의 사례가 우리에게 기독교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죄 된 삶을 살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기독교 신앙에 들어가는 첩경은 죄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음은 명백하다. 동시에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산 큰 아들은 돌아온 탕자가 자기 같은 죄인을 반겨주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수도원에서 극기와 도덕실천의 삶을 구원의 길로서 매진해온 펠라기우스에게는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대해 느낀 감사와 은혜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주장 중 펠라기우스가 가장 반대한 것은,“불가항력적 은총”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써 인간에게는 의지의 실현과 도덕실천이 가능하다고 믿는 엄격한 노력주의 수도사 펠라기우스에게는 인간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하나님의,‘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그의 믿음과 사상 속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자신의 삶과, 신앙에 들어온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의‘은혜론’은 저항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그 은총이 아니었다면 자기 같은 것은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경험적 고백이었던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말하자면, 예수께서,“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는 말씀에서, 인간 편에서 문을 열어야만, 즉, 인간편의 의지의 허락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은총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정도를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불가항력적 은총’은 그것을 뛰어넘는 신학 사상이었던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의지의 자유와 인간노력주의로서는 기독교인 박해를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의 의지를 꺾어 바울을 만드시는 하나님, 인간 편에서 문을 열지 않더라도 열게 해서 들어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의,‘저항할 수 없는 은총’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도 여전히 현대의 펠라기우스들은 많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들은 교회사에서 교훈을 얻어 인간의 도덕실천력을 믿고 그것을 발휘해서 하나님께 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은총에 맡겨 자신의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하나님께 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