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영 분별

펠라기우스

은바리라이프 2012. 2. 18. 11:45

펠라기우스주의 로 알려진 그의 이단적 신학체계는 영혼이 구원받는 데 있어 인간의 노력이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색인 : 펠라기우스주의). 380년경 로마에 간 펠라기우스는 사제는 아니었지만 영적인 지도자로서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적 게으름에 대한 비난으로 작용했다. 


펠라기우스는 로마의 그리스도교도들의 도덕 수준에 크게 실망했다. 한 주교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에서 인용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그는 신의 은총 교리에 관한 로마의 도덕적 태만을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금욕을 위한 기도에서 하느님에게 하느님의 뜻대로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구했다. 펠라기우스는 이 가르침이 모든 도덕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이유에서 그것을 공격했다. 곧 그는 로마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그때 가장 절친한 협력자인 법률가 켈레스티우스를 알게 되었다. 


410년 로마가 비시고트족 족장인 알라리크에게 함락된 뒤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적의에 찬 비난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의 교리, 특히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한 도덕적 본성을 갖고 있고, 영적 향상을 위해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데 대해 인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비난하는 몇 권의 저서를 발행했다. 


412년경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을 향해 떠났다. 415년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고소를 당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깨끗이 하여 비난을 피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더 심한 공격과 라틴어역 성서학자 히에로니무스(제롬)에 대응하여 그는 〈자유의지에 관하여 De libero arbitrio〉(416)를 썼는데, 이 글은 아프리카의 2개 공의회가 그의 가르침을 단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1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그 단죄를 승인하고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파문했다. 인노켄티우스의 후계자인 조시무스는 처음에는 펠라기우스의 〈신앙에 대한 짧은 진술 Libellusfidei〉에 근거해 그를 무죄로 선언했지만,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새로 조사하여 펠라기우스를 단죄하는 공의회의 9개 교령을 승인했다. 그후 펠라기우스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