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모세오경

노아의 이야기 창세기 6장 14-16절

은바리라이프 2012. 2. 17. 13:26

노아의 이야기



 

창세기 6장 14-16절을 보면 노아의 방주가 어떠한 규모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홍수가 나자 노아의 여덟 식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다 들어가야 하고 40주야로 내리는 그 엄청난 비를 견뎌내며 382일 동안에 방주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왜 382일이라는 숫자가 나오느냐 하면 노아와 가족들은 비가 내리기 이미 7일 전부터 방주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이 비가 내리면서 홍수가 시작되어 노아의 나이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에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참고로 노아는 물이 완전히 거친 것을 확인하고도 57일 간을 방주에 더 머물러 있었다. 또 홍수 기간은 비가 시작된 때로부터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때까지로 계산하여 정확하게 만 1년 10일이며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에서 생활한 기간은 미리 들어가 있던 7일을 더하여 만 1년 17일이 됩니다. 따라서 382일이라는 날짜가 나오게 된 것이다.


홍수가 끝난 후 지면의 물이 빠지고 땅이 마른 후에 노아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온 후에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노아의 가족들이 여러 가지 농사를 지었겠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은 포도 농사였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어서 잠든 것에 대해서 함이 고자질하고 셈과 야벳이 뒷수습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인 노아가 술에 취해 실수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노아는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술에 취한 것이 잘못이라면 노아가 잘못 한 것인데 왜 노아는 함과 그 자식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릴까? 노아가 술에 취한 잘못 때문에 저주를 내린 것이라면 노아는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노아의 잘못에 대해 왜 노아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해석이 있다.


- 해석 1 -

“포도나무는 종말을 의미하는 나무로서 포도열매는 종말론적으로 의미가 있기에 사용된 것이다. 노아라는 이름의 의미는 안식을 주는 자로서 노아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열매를 가지고 취해서 안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모습에 대해서 함의 아들은 종말론적 행위에 대해서 비웃었고 이에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저주가 목적이 아니고 구속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저주와 축복이 같이 나타났다. 즉 노아의 행동은 성경에서 종말론적 계시(이후에 나오는 구속사적 계시)를 보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그렇기에 포도나무 열매가 나오고, 그 열매로 인해 취하였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도덕론적으로 이상하게 해석해서 노아가 당대의 의인에서 자신의 실수도 인정하지 않는 쪼잔한 늙은이로 전락하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성경은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고 평가하고 있고 그 평가는 바뀐 적이 없는 것이다.”


- 해석 2 -

홍수 후에 노아가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에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고 이어서 사건이 터졌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노아는 과연 범죄를 저질렀는가? 포도농사를 지어서 그 소출로 배불리 먹고 취한 것이 죄란 말인가? 아니 조금만 먹었다면 봐줄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취하도록 먹었으니 도가 넘어서 죄인가? 함은 또 어떤가? 감히 아비의 벗은 몸을 보다니... 예절도 모르는 후안무치의 소행이 아닌가? ... 보통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명삼고 사는 영적인 사람이다. 오랜 징계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로 다룸을 받은 그였기에 다시는 범죄치 않는다(요일3:9) 그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비유요 상징이다. 포도나무는 주님 자신이요 생명나무이다(요15). 옛 창조세계는 끝나고 새 창조의 세계가 되었다. 그 포도원은 노아의 심령 안이며 회복된 에덴동산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안착한 노아는 당연히 자신의 심령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영과 생명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잔뜩 취해서 살아간다. 취함이란 기쁨과 만족이 넘치는 신령세계의 누림성을 의미한다. 죄인은 생명의 처소인 하체(양심)를 가려야 하겠지만, 주님의 보혈로 죄가 사면되어 깨끗하고 청결한 양심과 마음으로 조성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거칠 것이 없다. 이것이 복음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로 사는 자의 행복함이다(롬4:5). 자신의 어떠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이제는 복음 안에서 당당하고 떳떳하다. 그러나 함의 생각은 다르다. 비록 말씀에는 믿음으로 구원이라지만 행위가 따라주어야지 온전한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많이 양보해서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것은 맞지만 구원을 유지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가라지 씨다. 주님은 알곡을 뿌리셨지만 사단은 뒤따르면서 가라지를 덧뿌렸다. 함은 타락한 교회요 악한자의 아들들을 상징한다.(마13). 그러므로 함이 하체를 보았다는 말은 영적인 범죄를 의미한다. 여기서 보았다가 히브리 원어적 뜻에는 ‘경험하다’ ‘정탐하다’ ‘즐기다’의 의미를 갖고 있어 실제는 ‘범하다’라고 해석함이 문맥상으로 타당하다.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레 20:17)

* 성경 스스로가 본다를 범한다와 동일한 의미로 설명함

그렇다면 함이 누구의 하체를 범했다는 말인가? 성경으로 해석해보자.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레 18:7)

“사람이 그 아비의 후실을 취하여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신 22:30)

이제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함은 노아의 후실을 범했고 그 범죄의 씨앗은 가나안이었다. 실제 노아가 후실을 취했는지는 성경에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아의 본처가 주님이 세운 신실한 교회를 의미한다면 사단이 덧뿌린 가라지, 즉 악한자의 아들들과 그 모임은 타락된 교회요 후실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님으로 예표 된 야곱이 4명의 아내를 취한 비의를 살펴보자. 레아와 라헬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의미하는데, 몸종이던 실바와 빌하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각각 율법시대와 신약시대의 변질된 교회를 뜻한다. 성경에서 첩은 다 타락한 음녀교회를 상징한다. 아브라함에 있어 하갈도 마찬가지였다(갈4).

창9장에서 은밀히 감추어진 함이 아비의 후실을 범한 것은, 루우벤과 빌하의 통간으로 재연되고, 실제 구약과 신약의 교회사에서 이렇게 실현 되었다. 그리고 이 씨의 열매인 가나안은 율법과 종교의식으로의 가득 찬 신약의 음녀교회의 실체인 기독교이다. 결국 큰 성인 바벨론 교회를 말한다(계18).


-해석 3 -

홍수 후 노아의 행동은 홍수 이전과 너무 달라 우리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노아는 처음에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신의 장막에 누워 있는 노아를 보고 세 아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보다"와 "알리다"가 핵심 단어를 이룬다. "가나안의 아비 함은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다"(22절). 그러나 "셈과 야벳은 … 뒷걸음질 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은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다"(23절). 여기에 나타난 함의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하였다. 어떤 이는 함이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는 것은 완곡어법(euphemism)으로 함이 노아의 아내와 관계를 맺고 그로 말미암아 가나안이 태어났기 때문에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한다(Bassett 1971). 그러나 "누구의 벌거벗음을 보다"(ra'a 'erwa)는 말은 성경에서 수치스럽게 노출되었거나 감출 수 없이 드러난 것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하체를 범하다"(galla 'erwa)와는 다르다(레 18:6-7). 또 어떤 이는 여기에 근친상간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만약 함이 근친상간을 범했다면, 두 형제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 당시에 벌거벗음 자체가 큰 수치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은 "함의 잘못" 대신에 "가나안의 잘못"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본문은 함을 그의 두 형제와 대조한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이다. 노아는 함의 후손들을 저주하며, 셈과 야벳의 후손들을 축복한다. 만약 함 대신 가나안이 잘못했다면, 왜 함이 축복에 포함되지 않았겠는가? 본문은 함의 잘못 때문에 가나안에게 저주가 임했다고 한다. 따라서 함이 아버지의 노출을 본 것은 당시의 도덕적 규범을 깬 것이며, 노아의 명예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함은 자연적이고 신성한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플라톤과 노자, 맹자는 "자식이 부모의 죄를 보면 고발할 것인가, 혹은 덮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며, 결론으로서 "부모를 엎고 멀리 도망쳐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은 셈과 야벳의 태도와 일치한다. 함의 행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의 벗은 것을 노출하는" 행동과 같다(출 20:26). 그의 행동은 후에 가나안의 성적인 부패와 연관된다(레 18:7-8, 24-30). 특히 가나안에는 제의적인 매음이 성행하였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신을 가리기 위해 "세마포 속옷"을 입어야 한다(출28:42-43).

노아의 아들들은 두 종류의 인간을 보여준다. 한 부류는 부모의 수치를 가리지만, 다른 부류는 오히려 들추어 낸다. 셈과 야벳은 함과는 달리 "그 옷"으로 그를 덮었다(23절). 이것은 함이 노아가 자신을 가렸던 옷을 가져와서 완전히 벗겼다는 암시일 수 있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벗음을 보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나아가 아버지의 수치를 덮는다. 노아는 이들의 행동을 의로운 행동으로 보고 그들을 축복한다.


- 에필로그 -

전통적으로 노아의 장막 사건은 노아의 저주로 증거 되어 왔지만 본문의 내용은 저주의 내용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 본문의 말씀은 노아의 저주가 아닌가? 만약 본문의 내용이 노아의 저주라면 함이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함이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아도 회개해야 한다. 잘못은 함이 하였는데 함의 후손이 저주를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실제 함의 실수를 제공한 원인은 노아였습니다. 그런데 똥싼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이 잘못하고 후손을 저주하는 것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적 바른 원리를 따른다면 노아가 통회자복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노아가 회개한 내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함이 저주 받은 내용도 없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잘못 이해되고 있고 잘못 증거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노아가 저주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노아가 행한 것은 예언이었다.

노아는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으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으며 예언자이기도 하였다.


노아는 심판이 있기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래서 방주를 예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증거 할 수 있었다. 물론 회개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노아의 증거는 곧 예언이었다. 구약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선지자였다는 뜻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9:25절 말씀을 보면 이에 가로되로 시작한다. 그리고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즉 가나안이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9:26절의 말씀을 보더라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창9:27절 말씀을 보더라도 야벳은 창대하게 될 것이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 모든 내용들은 노아 시대가 아닌 미래의 어느날 그와 같이 된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인 것이다.


노아의 예언은 후대에 가서 성취되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정복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노아의 사건에 있어서 오래 전 건국대 최창모 교수는 그의 저서(금기의 수수께끼)에서 함이 그 아비 노아에게 동성애적인 성범죄를 범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유대 랍비들의 전통적 해석에서도 함이 동성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노아가 살았던 세상은 홍수 심판을 받아 멸망하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남은 자로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이 후 역사에 전개되는 심판과 구원의 모델이 된다. 이리하여 노아의 홍수는 미래 심판의 모형이 되며, 노아와 그 가족의 구원은 모든 사람의 구원의 모형이 된다(마 24:37-39). 노아의 "물"은 이후 심판의 수단, "의인" 노아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형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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