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태4: 1-11)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첫째,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둘째,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셋째, 내게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는 것이다. 첫째 시험은 빵과 돈 즉, 경제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며 둘째 시험은 기적 즉, 종교적인 문제이고, 세 번째 시험은 권력의 문제이다. 철학자 베르쟈에프는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일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시험”이라고 말했다.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그렇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에 농축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질문에는 인류의 모든 역사가 단 하나의 체계 속으로 응축되고 예언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이 지상에서 받게 되는 온갖 역사적 모순이 한데 모여 세 가지 유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나는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사단의 뜻대로 응하였더라면 예수님의 신적 권위가 더 잘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따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이야 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아, 저 사람이 메시야가 아닌가!, 저 사람이 하는 일을 보라!” 고 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시험에 그대로 응하지 않으시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인간의 욕망, 도스토예프스키, 세 가지 시험 | | | | |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 | |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결혼 생활은 엉망진창이었고 일단 도박을 하면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는 간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음주와 마약에 늘 취해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혁명 사상에도 심취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비밀 조직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도스토예프스키는 그 곳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수형 생활 초기에 나탈리아 폰비치나라는 여성이 찾아와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하고 신약성경을 전해준 덕분에 그는 누구보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형을 치르는 동안 성경책을 늘 베개 밑에 두고 시시때때로 꺼내 읽었다. 감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분노를 무기삼아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쪽으로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런 후에 그는 그의 여러 작품을 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대심문관’ 편에서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을 다룬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이기도 한 리꼴라이 베르쟈예프는 “대심문관은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절정”이라고 말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세계문학사의 압권’이라고 말했다. 추기경, 유혹을 거부한 예수를 심문하다 대심문관은 16세기 스페인 세비아에서 일어난 무서운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500년 만에 군중 속에 갑자기 나타난 예수를 군중들은 금방 알아본다.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는 심문을 마치고 나오는 90세의 대심문관 추기경의 눈에 금방 띄고, 대심문관은 즉시 예수를 체포하여 종교 재판소에 딸린 낡은 건물에 있는 비좁고 음침한 아치형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날 저녁 늙은 대심문관은 손에 등불을 들고 예수가 있는 감방으로 간다. 철문은 굳게 닫혔다. 그리고 심문이 시작된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요?” 대심문관이 던진 첫 마디이다. “모든 것을 당신 스스로 교황에게 인수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이 교황의 소유이다. 이제는 제발 이 곳에 찾아오지도 말고 방해하지도 말라.” 이어서 대심문관은 예수님을 향하여 말한다. “영혼의 자유보다 빵이 더 중요하며 지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면 권력과 기적에 복종해야 한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예수가 지상 낙원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성이 깊고 자유에 충만해 있으며 그들 스스로 자기들의 자유를 우리한테 가져와서 우리 앞에 공손히 바쳤소.” 대심문관은 예수가 이루려는 사업을 1500년 당시 카톨릭이 구축한 종교 체제가 예수의 이름으로 마침내 완성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1500년대는 카톨릭이 천하 만물을 다스리던 시대였고 마치 예수님이 거절했던 3가지를 다 이룬 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는 세 가지를 단호히 거부했다. “왜 당신은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았소? 왜 당신은 땅에 뛰어내리더라도 살 수 있었는데 뛰어내리지 않았소?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소? 당신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시험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라고 생각했소?” 대심문관의 말처럼 인간들은 기적과 빵과 권력을 너무 좋아한다. 그것을 거부할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을 거부한 데 대한 추기경의 항의로 일관한다. “당신이 했던 일(세 가지 시험을 거절한 일)들을 인간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은 인간을 너무 존중했기 때문에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소.” 대심문관처럼 오늘의 기독교는 예수님이 원하지 않았던 기독교가 되었다. 오히려 예수님이 거절한 것들을 묘약으로 생각하고 온 몸으로 찾으려 하고 있다. 너무도 아이러니컬하다. 대심문관은 “우리들은 당신의 유혹을 손질해서 기적과 신비와 권력을 반석으로 삼았소. 그러자 사람들이 몹시 기뻐했고 그렇게 가르치고 행하는 우리들이 옳은 것 아니요?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 앞으로 절대 찾아와서는 안돼오.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말하고 모든 심문을 끝낸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처럼 그들이 예수님이 거절했던 일들을 기꺼히 다했노라고 기고만장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와 자유다 | | | | | <까라마조프씨네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대우 역/ 열린책들 | | | ‘대심문관’의 구조는 대심문관의 끈질긴 질문과 예수님의 절대적인 침묵 속에 이루어진다. 대심문관은 논증하고 설득한다. 그는 강력한 논리와 확고한 계획을 실현시키려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묵묵부답, 부드러운 침묵으로 대심문관의 강력한 논증보다도 더 큰 감화력을 주고 있다. 대심문관은 사회주의와 같이 강제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조직화에서 인류의 자기실현과 행복과 구제를 기대하고 있다. 이 시험들은 인간 정신의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거부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정신이 빵과 기적과 지상의 왕국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기독교의 본질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와 자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적 자유의 신비가 골고다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억누르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골고다의 신비는 자유의 신비다. 예수님은 인간정신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해 이 세계의 힘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시험은 적그리스도의 유혹의 본질이다. 이것은 새롭게 다듬어진 악이며 항상 선에 탈을 쓰고 나타난다. 적그리스도의 악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선과 유사한 것이 있으며 언제나 혼합과 대체의 위험이 남아있다. 대심문관은 시험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지상낙원을 만들기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돈과 권력과 기적을 거부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당신을 거부하고 악마를 따랐소” 오늘 한국교회는 기복주의를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의 기독교는 예수님이 거부하였던 것을 다시 추구하는 대심문관과 같이 되었다. 추기경이 말한 대로다. “우리들은 당신을 거부하고 악마를 따랐소.” 과연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악마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생각해보라.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 우리의 구원과 삶에 필요한 것이라면, 예수께서 왜 거부하셨겠는가. 철학자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현대 산업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자신이 매몰되어가고 있는 것조차 모르며, 구성원들이 사는 사회에 대한 모순을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상태를 비판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쟈크엘룰은 ‘인간예수’에서 “인간의 존재의 양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된 것이다. 우리가 기술을 선택함으로 세상을 얻게 되었지만 명백히 존재를 상실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욕망과 심심풀이로 대신 채우는 텅 빈 인간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칼빈의 말로 결론을 내리자. “사단은 날마다 우리를 동일한 방법으로 유혹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박철수/ 분당두레교회 목사·<축복의 혁명>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