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5:9)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하소연은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을 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연약한 자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접하는 가를 아는 척도였기 때문이다.
느5: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8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성벽을 재건하는 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동일한 문제였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들을 책망하였다.
분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19,20)
[현대인의성경]약 1:20
인간적인 분노는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분노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여러 차례 분노를 표현하셨다.
막10: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았다. 아무래도 제자들의 과잉 충성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에 분노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시의 대상이었던 어린아이들을 자기를 대하는 것처럼 대할 것을 명하셨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다. 그런데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또 안식일을 범하는가를 주시했다. 물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법을 어기는지 어기지 않는지에 대한 판단이었다.
막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가운데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셨다. 그리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에 탄식하시며 노하셨다고 마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성전에서 정화작업을 하셨다. 물론 이것은 대규모가 아니라 소규모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하지만, 성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기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능력으로만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제사장등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의 암묵적인 묵인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막11:15 (마 21:12-17; 눅 19:45-48; 요 2:13-22)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악을 용납하고 하나님의 일을 거스리는 일에 대한 용납이 아니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감싸주지만,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5,6)
사랑의 목적은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며 배려이며 헌신이다. 이것은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인 것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것을 고쳐주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무관심을 어린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 29:15)
[현대인의성경]꾸짖고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키면 지혜를 얻게 되지만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자식이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
예수님의 분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반역하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것은 죄성에서 나오는 분노가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한 분노였다.
보통 사람들의 분노는 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이루지 못함에 대한 분노이다.
자기가 무시를 받거나 자기의 뜻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등등의 자기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는 경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것이 이루어지거나 상처 받는 것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이 무시를 당할 때 조용히 있다가 자신을 무시하면 발끈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분노와 하나님의 분노의 차이점은 무엇에 대하여 저항하고 이룰려고 하는 가에 있다.
가인은 인간적인 분노를 잘 보여준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4-7)
가인은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제사는 드리는 자가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받는 쪽이 만족을 해야 한다. 드리는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받는 쪽을 생각해야 한다. 가인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몰랐다고 가정을 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하셨다. 가인은 무엇이 선인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하였다. 그 분노는 의로운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였다. 그는 결국 죄의 종이 되어 아벨을 죽이는 자가 되었다.
민수기에서 한 사람의 분노를 볼 수 있다. 그 사람 역시 살인을 하였다. 하지만 그 살인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민25:6-8)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자신이 분노하였다.
하나님은 비느하스를 칭찬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민25:10-12)
분노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면 분노하고 하나님이 참으면 참아야 한다.
이것은 어떤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들은 알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 분노로 인하여 사람들을 살리는지, 아니면 나와 함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안위를 위하여 무시하고 있는지는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느헤미야는 여기에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내를 하였다.
그리고 모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 그것은 나는 의롭고 당신들은 완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서 회개하라는 것이 목적이었다.
느헤미야는 행동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하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느5: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느헤미야는 자기를 위하여 분노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그의 분노를 드러내었다.
분노의 목적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1-14)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는데 그것은 베드로와 모두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분노는 먼저는 자신을 향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하지 않는 자신을 향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 분노를 해야 하고 멈춰야 하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분노는 열정에서 나오고 열정은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지는 여러분들의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