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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 피해, 성경은 심판이라 말하는가

은바리라이프 2011. 3. 22. 22:51

쓰나미 피해, 성경은 심판이라 말하는가
 김환준  | 2005·01·26 01:15 | HIT : 468 | VOTE : 60 |
이 기사는 지진해일 사태에 대해 성경적 입장과, 피해를 입은 스리랑카 동족과 스리랑카의 교회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조명한 글이다. 원문은 스리랑카인 '아지스 페르난도'의 글이며 한근홍 님이 전문 번역해 보내왔다. 아지스 페르난도는 대표적인 아시아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Youth for Christ의 책임자다. 저서로는「예수님의 우월성」(The Supremacy of Christ)이 있다. (편집자 주)

    

▲ 지진해일로 마을 전체가 쓰레기장으로 변했다.(사진제공 KNCC)



이 시간 기독교인들은 지진해일 피해를 당한 동족들과 고통을 나누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힘을 얻고, 인도함을 받기 위해 성경을 살펴보며, 성경 안에 우리를 향한 말씀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스리랑카 교회 공동체에 전하는 성경말씀의 묵상을 싣습니다.

지금은 애도할 때

전도서 3장 4절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라고 합니다. 지금은 울 때이며 슬퍼할 때입니다. 성경에는 '애가'로 분류되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애가들 중 일부는 고통을 직접 당한 사람들이 기록한 글이고, 일부는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라가 당한 고통에 대해 슬퍼하며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 중에서도 '예레미야 애가'는 그 내용 전체가 나라가 당한 고통에 대한 슬픔을 애절하게 나타냈습니다.

느헤미야 선지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 관한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수일 동안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왕도 그의 얼굴의 깊은 슬픔을 눈치 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애도의 기간이 끝난 뒤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국가적인 영웅이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리더십 유형은 거의 2천 5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리더십의 예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몇 가지 애도의 형태를 보게 되는데 금식(삼후 1:12),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거나(창 37:34, 삼후 3:31), 재를 뒤집어썼습니다(에스더 4:1~3, 렘6:26, 25:34). 우리는 우리 문화에 맞는 방법으로 슬픔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나라를 위한 금식과 기도가 절실하게 요청되며 흰 깃발을 내거는 것도 우리 문화에 적당할 것입니다.

스리랑카에 개신교가 최초로 들어온 것은 감정을 공개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서구 유럽의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기에,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도 그 영향으로 슬픔을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르가가 죽고 나서 베드로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장면입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 9:39). 이런 장면은 스리랑카인의 장례식에선 흔한 모습이지만 개신교도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우리 교회 안에 어떻게 성경적인 애도 방법을 들여와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왜? 라는 질문을 할 때

    

▲ 지진해일로 아스팔트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실됐다.(사진제공 KNCC)  



하나님의 주권과 씨름을 하며. 성경적인 애도의 장면은 왜 그런 비참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질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위대한 성경인물의 예를 통해 우리도 왜? 라는 질문과 씨름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욥과 같이 훌륭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도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갈등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개 이런 씨름을 한 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고,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일은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비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은 우리가 갈등 중에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조차 하나님은 어떤 선한 것에 이르도록 하실 것을 우리는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갖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해상황 복구와 피해자들을 돕는 일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시 27)을 갖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씨름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상황이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우리가 왜 항상 하나님을 계속해서 예배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을 주는 이러한 영원한 실재들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은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고 희생적인 봉사를 시작하도록 합니다.

창조물과 함께 신음함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우주가 그 안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창 3:17, 롬 8:20). 그러기에 자연의 재앙들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실 때까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벧후 3:13, 계 21:1).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2~23).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탄식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신 장소에 혹 무슨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다른 더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쓰나미로 인해 우리나라가 탄식을 하면 우리도 또한 탄식을 합니다. 이런 탄식 중의 일부는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는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 마음 깊숙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탄식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탄식할 때 하나님도 함께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롬 8:26).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슬퍼하시고 탄식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사 16:11, 렘 48:31). 하나님에 대한 통속적인 생각과 "이스라엘의 모든 환난에 하나님도 동참하셨다"(사 63:9)는 성경 말씀은 서로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이 탄식하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세상의 고통에 대해 탄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 장차 심판이 닥칠 것을 아셨기 때문에(눅 19:41~44).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다른 이들과 더불어 우셨습니다(요 11:33~35).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울고 있는 스리랑카 사람들과 지금 함께 울고 계신다고. 우리가 울 이유는 충분하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신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위로도 주신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참혹한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심판인가 아닌가? 어떤 이들은 심지어 이번 재앙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심한 의구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과거 수천 명의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할 때 우리나라의 다른 비기독교인들도 함께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듯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동족들과 함께 고통을 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지진해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 가운데에서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 수를 헤아리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 국민들과 함께 고통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일어난 두 재앙을 말하시며 이 일이 고통을 직접 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심판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더 참혹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3:1~5). 마찬가지로 이런 일들은 우리를 일깨우고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이런 사태들은 자연은 물론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며 엎드리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심판에 관한 구절은 대부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것이며, 오직 약간의 구절만이 하나님의 언약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우리의 대적들을 향한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라'(마 5:44), '축복하라'(롬  12:14)는 성경의 명백한 명령을 따르는데 집중하는 것이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기독교인들이 일종의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나님을 대적하던 그 나라들을 벌하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그가 심판하신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 하십니다(사 16:9, 렘 48:32~36, 호 11:8~9). 설령 이번 사태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동족을 위해 통곡을 해야 하며, 마치 승리를 쟁취한 것 같이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다가올 심판 자리에 그들이 서기 이전에 그들과 모든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쓰나미가 닥쳐오는 것을 알았는데도 왜 우리에게 경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이와 같이 우리들도 다가올 심판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지 않은 책임을 묻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돕습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조로 지적할 때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이번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조차 확실하게 대답을 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의 고통을 더는 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겔 18;7~8, 마 10;42, 마 25:35~46, 약 1:27). 지금은 행동을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강건해졌고(고후 5:14), 성령의 권능을 받았기 때문에(행 1:8), 우리나라를 위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일을 해야 할 때

그러기에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필요를 알게 되면 즉시 그 필요를 채웠습니다(행 4:34~37, 11:29~30). 이런 역사적인 실천의 예를 따라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이런 구호활동의 최전선에 서 왔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기독교인의 봉사에 관한 권면은 지금과 같이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이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부르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류의 고난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 그런 고난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 예로 부인들은 남편들이 구호에 참여해 추가적인 고된 일을 하도록 놓아주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결혼생활에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하나님을 위해 이루어져야 할 일임을 깨달으면 그 고통은 줄어들고 분노를 없애줄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디모데가 어떻게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2:4). 우리는 아마도 지금 사람들을 돕는 봉사에 나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포기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위기 상황은 그에 맞는 해결책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지금 국민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려 한다면 우리 가정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치러야 할 희생을 '수고하는 농부'(2;6)와도 같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매우 지쳐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이 일은 지금과 같이 나라가 심각한 비상사태에 처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우리들이 나라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며, 열심히 애쓰고, 평상시 해오던 일들을 접어둘 때입니다. 이 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것 입니다.

지금 일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 될 수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국가가 위기에 있을 때에 안락을 누리고 즐기며 살려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암 6:1~6). 다윗은 왕들이 전쟁에 출전할 때에 집에 머물러 있었고 그때 죄를 범했습니다(삼하 11:1). 국가를 위해서 도움이 절실한 이때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8절에서 13절에 걸쳐 디모데에게 봉사를 함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임하게 될 축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모든 개인적인 희생들이 가치 있는 것이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눅 13: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가 봉사로 엉뚱한 다른 사람들이 이득을 취할 때에도 우리 기분이 별로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우리가 세상적인 보상을 가져다 줄 것 같지 않은 일들에 기꺼이 나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급이 있음을 알며,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강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으로 섬기는 그런 능력을 주시기에 작고 하찮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은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썩어가는 상처부위를 닦아내는 일, 또는 쓰레기 치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또한 커다란 특권으로 여깁니다.

지금은 기도를 할 때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은 기도입니다. 바울의 생각에 효과적인 중보기도는 힘든 일이었습니다(골 4:12~13). 구약시대에 국가가 위기를 당할 때 경건한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기도하도록 요청하였고, 자주 금식을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국가적인 슬픔을 당하면 금식을 하였습니다 (삼후 1:12). 여호사밧 왕을 향해 엄청난 무리의 침략자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처음 들은 말은 "두려워하여"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대하 20:3) 하였습니다. 우리는 왕이 그 다음으로는 군대를 소집하고 그들에게 전쟁을 준비시켰을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신에 국민들을 모아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직접 전쟁에 개입하심으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개인기도와 공중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의 구호사역에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기도와 금식하도록 요청해야할 때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돌봄을 받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 주택문제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이 적절한 공급을 받고, 여성과 아이들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기독교인들이 일어나 희생적으로 효과적인 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행동과 그리스도를 증거함을 통해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이 되도록
-우리나라를 회복하는 과정에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구호와 복구과정을 위하여 이 일에 관련되어 일하는 단체들, 특별히 기독교 단체와 교회들을 위하여, 그리고 피해지역의 관리에 책임을 맡고 있는 정부 관리들을 위해서
-구호활동에 위축을 줄 수 있는 부패, 낭비, 무계획이 최소화되도록
-회복과정에 영향을 미칠 정책들을 만드는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나라를 회복시키는 막대한 과업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이 잘 조달되도록
-이번의 비극을 통해 우리나라에 평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빛나도록

지금은 주어야 할 때

아가보가 안디옥교회를 향해 예루살렘에 기근이 임할 것임을 예언했을 때, 생긴 지 얼마 안된 이 교회는 즉각적으로 헌금을 모았고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습니다(행 11:27~30). 그 후 바울은 팔레스타인 외부지역의 교회에서 모아진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의 필요에 맞도록 돕기 위하여 잘 체계화했습니다(고후 8~9).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신 15:7~11, 마 5:42, 19:21, 눈 12:33, 갈 2:10, 딤전 6:18, 히 13:16).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그들이 가진 것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가정들'을 향한 특별한 책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즉 우리의 영적인 가족들을 위한 것입니다(갈 6:10). 그러나 우리의 헌금은 우리의 영적인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서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해야만 합니다.

많은 돈과 물자가 외부에서 들어올 때 우리가 내는 정도는 외국에서 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으로 볼 때 헌금의 능력은 그 돈이 얼마나 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과부는 비록 작은 돈을 성전에 바쳤지만 예수님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하셨습니다(막 12:43).

우리는 우리 백성들이 헌금을 하도록 격려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 그들이 바치는 작은 것조차도 큰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부를 하는지, 기부금은 어디에 전달이 되는지, 그리고 언제 내야 하는 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면서 이 헌금과 관련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고후 8~9장). 바울은 또한 어떻게 연보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지 그 계획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고전 16:1~4).

지금은 계획을 할 때

바울은 마지막으로 헌금에 대해 그 수입과 지출이 무계획하게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구호와 복구과정에서도 적용돼야 합니다. 잠언은 전쟁이 적절한 작전들과 조언에 따라 수행이 되고, 가장 지혜로운 전략이 채택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잠 20:18, 24:6). 이 말씀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쟁, 즉 우리 국민들의 필요에도 적용이 됩니다.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자원들이 무계획 탓에 낭비되고 있습니다. 무계획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도움을 못 받고 있고 어떤 이들은 자기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급한 욕구들이 채워지고 재건을 하는 단계로 옮겨갈 때 계획은 각별히 필요하게 됩니다. 작은 단체들은 다른 단체들과 함께 협력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번 사태는 우리들이 다른 교회들과 단체들과 동참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함께 나누는 연합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기꺼이 자원하는 사람들과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기에 구호와 복구를 위해 자금과 전문가는 있지만, 사람이 부족한 전문단체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전도서 4장 9절 말씀의 원리가 사실로 입증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우리들 대부분은 이곳에서 최고의 작업을 행하기에는 지식이나 여러 면에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트너가 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또 이번 기회는 우리 교회들이 교회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다른 단체를 돕기 위해 그들 단체에 참여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의 백성을 향한 헌신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때입니다. 우리들은 두 세계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두 세계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고전 10:31). 그러기에 우리가 세속적인 단체에서 하는 일도 본래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으로 그 세속적인 공동체를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원리가 이웃 단체들이나 정부에 의해 계획된 구호와 복구프로젝트를 통해서 봉사할 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들과 함께 함께 참여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

바울은 디모데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하는 장면에서 디모데에게 "법대로 경기하는 자"(딤후 2:5)가 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게 달리다가 구르거나 넘어지게 됩니다. 슬프게도 구호활동에 열심히 일해 온 많은 사람들이 어겨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규칙을 안 지킴으로써 큰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래서 구호를 할 때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규칙들과 기독교인 봉사의 기본적인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홀로 하는 시간이나 배우자와 만나는 시간을 한두 번 빼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너무 오래 지속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시간을 너무 오랫동안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 건강을 상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우리 배우자와 가족들과의 시간을 너무 오랫동안 갖지 않게 된다면, 우리 가정은 건강을 상실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잠을 안자고 쉴 틈 없이 일만 한다면, 우리의 육체와 감정은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것이고 우리는 쇠약하고 정서가 불안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가끔 이런 과도함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고, 우리가 기독교인다운 행동을 멈추게 합니다. 기쁨은 기독교인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갈 5:22). 기쁨은 우리에게 아무리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을 계속 섬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느 8:10). 때로 우리는 주위에 생기는 참혹한 일들로 인한 슬픔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생활 가운데 마음 속 깊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슬픔 중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구호활동의 역사 중 한 가지 슬픈 사실은 많은 성적인 범죄와 다른 죄들이 구호활동가들에 의해 벌어져 왔고, 그들의 가족들이 이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어왔다는 것입니다. 또 많은 구호활동가들이 탈진하여 다시는 그런 종류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계속 우리를 잘 돌아보아야 할"(딤전 4:16) 때입니다. 사람들은 피곤하면 부주의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경계를 늦추게 됩니다. 예로써 피곤한 사람들이 쉽게 성을 낸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피곤할 때 우리의 개인생활에서 특별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전문적인 활동에서도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방법으로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봉사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무 소용이 없고, 마지막 심판 때에 불에 타버리고 멸망될 것입니다(고전 3:12-15). 우리가 조심해야 할 몇 가지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과장하거나, 우리의 보고가 자신에게 영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로 인한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시 115:1, 사 48:11). 우리는 자신과 우리 단체의 영광을 목표로 계속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있기에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민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받은 기금들을 사용하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긴급하게 실행해야할 일들이 많다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회계의 원칙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슬프게도 구호활동 중 많은 속임수가 행해져 왔고, 몇몇 경우는 잘 알려진 사람들이 절차상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도움이 절실한 상황 가운데 살고 있고, 많은 자금은 이런 필요를 돕기 위해 보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금들의 일부를 우리 자신들을 위한 사치스런 물품이나 지출에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몇 몇 구호활동가들의 사치스러운 삶은 수치스러운 것이며, 기독교인들은 그런 일과는 관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스리랑카 전체와 이를 실천함으로 진실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위로를 하고, 위로의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바울은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고 묘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심한 피해를 당하고, 슬픔에 잠겨 있고, 누군가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치료 요원으로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은 구호활동가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매우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을 위로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상처 입은 사람들과 자주 함께 하고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각하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처지에 있지는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천국에서 떠나 우리 곁으로 오신 것 같이 우리도 역시 우리의 고통 받는 민족들을 위해서 우리의 안락한 장소를 떠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심한 두려움, 고립과 침묵, 분노, 불면, 충격, 그리고 울음 등과 같이 아주 과도한 반응들은 이런 종류의 비극을 당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증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육신적 사역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필요는 이 "위로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의 메시지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길에 관하여 사람들과 변론을 하십니다(사 1:18).

단순히 기독교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과 생각으로 믿게 되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의 가장 깊은 필요에 대한 해답을 마련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 나라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라와 국민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는데 정성을 다합시다.

Ajith Fernando
Youth for Christ
120/1b High Level Road, Kirulapone,
Colombo 6, 스리랑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