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
(The Desolate Face)
* 다음의 글은 A. 레이시 목사님의 「예수님의 얼굴」(도서출판 두루마리)에 있는 내용입니다.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판사와 저자를 언급해주시기 바라며 무단 복제를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웹스터 사전을 보면 "고독한"(desolate)라는 단어의 뜻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홀로 있는, 버림받은, 절망적인, 자포자기한.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깃들인 고독함을 보아왔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의 고독하고 쓸쓸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부모에게 따돌림을 당한 아이들의 자포자기한 얼굴도 보았습니다. 자신의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야위고 망가진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끔찍한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약 6,000년 정도되는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사람이 이 지구상에서 살면서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때는 오직 한번밖에 없었습니다. 완전한 자포자기가 닥쳐왔을 때 이 땅위의 어떠한 존재도 하나님의 얼굴에 있는 고독함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이 완전한 어두움에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섯 시로부터 어두움이 온 땅을 덮어 아홉 시까지 계속하더니"(마27:45∼46)
유다인들의 하루는 아침 6시에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7시는 유다인들의 한시이며 8시는 두시이고, 9시는 세시입니다.
"때가 세 시가 되어, 그분을 십자가에 다니라."(막15:25)
위의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어두운 날,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읽어본 바와 같이 어둠이 여섯시에 온 세상을 덮었다고 마태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때는 아마도 정오였을 것입니다. 그 어둠은 무려 세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어둠이 가실 무렵,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고독함으로 일그러졌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영어에서 매우 비참한 단어 중에 하나는 "버림받다"(forsaken)라는 단어입니다. 저는 심각한 문제에 빠져있는 한 남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주위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남자를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또 병들고 의지할 것 없고 가난한 어떤 부인일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녀 곁에 있겠다고 결혼 서약을 한 남편은 그녀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녀는 버림받은 자신을 바라보며 울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두 볼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텅빈 집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배고프고 추위에 떨며 낙담한 꼬마를 저는 머릿속에 떠올려 봅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험난한 사회와 종종 무관심한 사회의 외로운 희생자로 남겨놓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이 가장 어려울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비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바로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 중에 가장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창조된 이래로 지구 전체가(눅23:44) 어둠으로 뒤덮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십자가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신음 소리를 들었지만, 다음과 같이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울부짖음은 무엇보다도 가장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갈보리의 사건이 있기 훨씬 전에 예수님께서는 버림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셨습니다. 그분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분의 고향도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분께서 한 시민으로 속해있던 그 나라도 그분을 저버렸습니다. 이스카룟 유다도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고쳐주시고 낫게 해주신 사람들도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런 것들 때문에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이러한 배신으로 인해 찡그려지거나 야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버리셨을 때에만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영원부터 그때 그 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단 한번도 예수님께 등을 돌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땅에 사실 때에도 매 순간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다가가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황급히 산 정상에 가셔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저버렸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늘 하나님 아버지의 부드러운 사랑과 우정 속으로 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의 어둠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예수님의 입술에서 고통에 찬 외침이 우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밝은 방에 있다가 매우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게 되면 어둠침침한 방에 있다가 들어갔을 때보다 훨씬 더 컴컴하다고 느낍니다.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눈부신 빛을 받던 그분께서 하나님의 버리심이라는 무서운 어두움에 강제로 들어가셨을 그때야말로 참으로 예수님께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처럼 버림받은 것에 대한 공포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버리실까요?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백성들아, 항상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토로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주 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라. 그분께서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신4:31)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12:22)
위의 진리는 시간이 가면서 계속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속박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외침을 들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샤드락과 메샥과 아벳네고가 불타는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한때는 젊었으며 지금은 나이 들었으나 의인이 버림 당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그러나 어둠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대해 저는 여러분에게 네 가지 사실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들을 살펴보게 될 때, 우리는 왜 예수님의 얼굴이 갈보리의 어둠 속에서 쓸쓸한 모습이었는가에 관해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Ⅰ. 이 말씀은 무서운 저주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포기하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주 예수님께 끔찍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는 동안 하셨던 말씀과 어둠 속에서 십자가위에서 하셨던 말씀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역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곁에 선 백성을 위함이오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2). 어둠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울부짖으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으나 주께서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22:1∼2)
공생애 시절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도다. 내가 항상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그러나 어둠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저주받은 나무 위에 매달리신 그분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분이셨습니다.
"아버지, 원컨대, 내게 주신 자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이는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나를 사랑하셨음이니이다."(요17:24)
고통 속에서 그 잔인한 십자가 위에 달리사 피흘리셨던 그 분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이 매일같이 기뻐하는 존재였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길의 시작 곧 옛적에 자신의 일들을 하시기 전에 나를 소유하셨으며 영원 전부터 처음부터, 땅이 있는 때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내가 그분 곁에 있어서 그 분과 함께 나온 자로서 날마다 그 분의 기쁨이 되었으며 항상 그분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8:22∼23,30)
십자가의 무서운 못에 박혀 매달려 계시던 그분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써, 이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7:5)
영원토록 하나님의 얼굴은 예수님의 즐거움이 되셨고, 하나님의 존전은 예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가슴은 예수님의 거하시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땅위에 계셨던 33년 동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한번도 아버지의 마음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결단은 한번도 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으로 예수님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길에서 예수님은 한번도 곁길로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하심을 떠나서는 단 한순간도 사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어둠 속에서 그분의 얼굴에 비쳐져야만 했던 실망과 고독감은 얼마나 컸을까요! 분명히 이 말씀은 끔찍한 저주의 말씀이었습니다!
Ⅱ. 이 말씀은 비할 데 없이 애처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둠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라고 고함치셨을 때, 그 애처로운 말씀은 그분이 받으신 고통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말해줍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요한은 자신을 반성하고 십자가 밑에 서있으려고 돌아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증오심을 토해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지독하게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가시로 장식된 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채찍질했고, 때렸으며, 침뱉고 그분의 수염을 확 끌어당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발가벗기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상스럽고 야비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비웃었고, 무자비한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웃고 내기를 걸었으며 십자가에 달린 도둑들은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마디의 불평이나 저항의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손에서 고통받으시면서 주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을 바라보셨을 때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큰소리로 고함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결코 어느 누구도 이보다 더 가슴아픈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Ⅲ. 이 말씀은 깊이 있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깊이 절망하셨던 예수님의 쓸쓸한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면, 우리는 스스로 이런 의문을 가져볼 것입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버리셨을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갈보리에서 버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셨을 때 부르짖던 그 고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하시는 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던지고 나서 잠시 후에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 부르짖으나 듣지 않으니 내가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1∼3)
바로 이것입니다! 그 질문의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질문을 외쳤을 때 골고다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성난 군중들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몇 군데 기록된 성경 말씀을 당신께 보여드리겠습니다.
" 오 강하신 하나님이시여 ……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죄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합1:12∼13)
" 주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으니, 이는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21,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온 인류의 죄는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 위에 놓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문자 그대로 죄가 되셨습니다(고후5:21). 하늘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쳐다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안 완전히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되셨을 때, 그분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드님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우리 선조들이 주를 신뢰하였고 그들이 신뢰하였으므로 주께서는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함을 얻고 주를 신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1,4∼6)
독자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제대로 깨닫게 하기 위해 저는 "그들"과 "그들을"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중에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혹하게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말씀 속에서 이같은 차이점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둠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가 되셨을 때, 그분께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죄의 벌레였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린 것을 궁금하게 여기십니까? 그것은 쉽고 단순한 내용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죄가 되셨습니다(고후5:21).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의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어둠이 온 땅을 덮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사실을 당신은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4)
그러나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인간으로서 죄가 되었을 때 그분께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를 다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주께서는 거룩하시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실 이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주께서는 거룩하시며 저는 죄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저를 보실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주의 분노의 주먹을 제게 퍼부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자신의 몸 속에 우리의 죄를 떠맡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완전히 혼자가 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고 완전히 포기 당하셨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합시다. 그런데 이처럼 버림받는 일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운명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하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의로운 일인즉,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님의 임재와 그 권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7∼9)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으며 하나님의 분노의 불길아래 있게 된다는 것과 이같은 파멸 주님의 임재하심으로부터 떠나는 것임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저버리실 것이며 완전히 포기하실 것입니다.
맨 처음 당신에게 생명과 존재를 주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모든 선(善)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결별,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영원한 이별에 대해 다시한번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자신들의 종교나 인본주의적 철학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저주받을 자들아!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25:41).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추방 즉 그분의 임재하심으로부터의 추방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둘째 사망"(계20:14;21:8) 곧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가야할 영원한 처소인 불호수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유입니다. 저주받은 사람들은 죽게되는 것이 아니라 불호수에서 영원토록 불타며 생명의 주님과 분리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자신의 몸에 이 세상의 죄를 감당하셨을 때 고통받으셨던 것과 동일한 분리입니다.
만일 이 책을 읽고있는 독자께서 당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당신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개인의 구주로 모시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침례(혹은 세례)를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잘 나가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도 하고 예수님께 기도 드렸을 지도 모릅니다. 방언을 하고, 로자리오(천주교에서 쓰는 염주 같은 것)알을 돌리며, 마리아를 찬양하고, 매주 만원씩을 헌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선 당신 자신이 행한 종교와 허무한 윤리적 삶이 쓸모 없는 것임을 깨닫고 지옥으로 향하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 예수님을 부르며 회개하기 전까지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불호수에서 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영원히 버리실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여, 이러한 일이 당신의 운명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결단하기만 하면 바로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갈보리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피흘리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당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살아 계신다는 것을 당신이 믿기만 하면, 당신은 지금 당장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그분 앞에 고개 숙여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 예수님,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저의 사악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원주가 되어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볼 때, 만일 당신이 이렇게 기도하고 정말 그 기도의 뜻을 마음으로 고백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만일 당신이 이렇게 기도했다면 제게 편지나 전화로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당신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Ⅳ. 이 말씀은 매우 엄숙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이 소리는 땅을 진동시켰고 온 우주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하신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버림받은 아드님의 외침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기초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가 보이기만 하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16)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긍휼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지혜로 자신의 공의가 만족되고 자신의 긍휼이 우리 죄인들에게 값없이 흐르도록 하는 한가지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고난받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스스로 자원하여 이 대리인이 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담당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없이 기쁘고 좋은 일입니다. 선지자 나훔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께서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는 분이시니라. 주께서는 자신의 대적자들을 보복하시며 자기의 원수들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누가 능히 그분의 분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격렬한 진노를 감당하랴? "(나훔1:2,6)
오직 전능하신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설 수 있으며 그분만이 하나님의 분노의 열기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분노의 저주를 감당할 수 있으며 그 분노를 겪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보복의 분노를 참을 수 있으며 그 모든 분노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높일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뒤꿈치를 상하는 고통을 받을 수 있으며 그 상한 가운데서도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탄(히2:14)을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이룰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능력 있는" 분을 세우셨으며(시89:19), 그분은 강하셨기 때문에 사탄의 공격과 하나님의 분노를 이겨내셨습니다. 그런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위대하고 강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버림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고독한 얼굴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다시 한번 외쳐봅시다. 할렐루야!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제1장 변화무쌍한 얼굴
제2장 무서운 얼굴
제3장 실망한 얼굴
제4장 눈부신 얼굴
제5장 신성의 얼굴
제6장 담대한 얼굴
제7장 의무에 충실한 얼굴
제8장 업신여김을 당한 얼굴
제9장 상처난 얼굴
제10장 고독한 얼굴
제11장 하나님의 얼굴
제12장 변장한 얼굴
제13장 파멸시키는 얼굴
제14장 환희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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