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유익할 때
(전1:2-3,눅4:1-13)
지금부터 약 2800년전 이스라엘의 임금은 아합이었는데, 그는 정치적으로는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군대가 강성해졌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비 이세벨이 바알 숭배를 크게 조장해서 백성들의 신앙을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사는 선지자란 이름답게 엘리야는 용감했습니다. 무모할 정도로까지 용감했습니다. 8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홀로 맞대결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이런 용기는 엘리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용기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만 나오는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금새 사라지는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던 그 눈이 현실을 보자 용기는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850명의 바알 선지자와 싸워 승리한 엘리야에게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악한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이세벨이 보낸 군대가 눈 앞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런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그 말 한마디에 호렙산으로 도망쳤고, 로뎀 나무 밑에 쓰러져버렸던 것입니다. 왜였습니까? 혼자였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왕상19:10,14).
대학교 4학년 때 ROTC 2년차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뭔가를 잘못해서 훈육관이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야 이제 죽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라는 시간에 훈육관 사무실로 가는데, 저만치서 동료 하나가 오는 것입니다. “너 왠일이냐?” 저와 같은 이유에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대여섯 명이 더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인간은 아무리 두려운 상황일지라도 같이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함께 하는 동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그래서 그를 절망케 하는 것은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고독감입니다. 하다못해 강아지라도 있으면 좋은 데 그마저 없을 때 인간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홀로 공포와 고난을 이겨내야만 했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처럼 젖먹이 시절, 기저귀 갈아대는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또래 꼬맹이들과 싸우기도 하고, 만약 컴퓨터가 있었다면 엄마 몰래 컴퓨터 게임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예수에게 마리아는 가끔씩 네가 태어날 때 천사들이 노래했고,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유향과 몰약과 황금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사명을 갖고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현실은 그런 것과는 멀었습니다. 날마다 율법학교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앙의 정치 무대에 나서서 공회 의원,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이 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은 저 산골 나사렛에서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하는 노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2살 때, 아직 세상이 뭔지 모를 때는 감히 성전에서 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토론도 하면서,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하는 제법 기특한 소리도 했지만, 나이 서른이 되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12살의 소년이 똑똑한 소리를 하면, 옷이 허름해도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관심을 갖지만, 30살의 노총각이 아무런 명함도 내밀지 못한 채 똑똑한 소리를 하면 대개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어디서 주워 들은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좀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인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님을 세례요한에게 보내 세례를 받게 하셨고,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였으며,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는 메시야 임명식까지 해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사실을 예수님이 분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들린 음성이 정말 자신의 것임을 온 몸으로 체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풍진 세상에 나가서, 온갖 죄인들을 구하려면 단단히 무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다시 예수님을 광야로 끌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혼자였습니다. 엄마도 없고, 동생들도, 친구도, 제자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광야로 가야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고독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12)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만 혼자였던 것입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이 혼자 계실 때의 상황은 혼자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자그마치 40일을 혼자 있으면서, 게다가 금식까지 한 후였습니다. 헛 것을 보았을 법하고,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입니다. 누가 어떤 조건을 내걸더라도 먹을 것만 준다면 다 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첫 번 시험에서 마귀는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저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만 합니다. 너의 능력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절하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도둑질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네 능력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분명 있으셨을 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떡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떡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저버리고 마귀 말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마귀와 타협하지 않고도 먹고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권위와 영광을 가져야 메시아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먹고 살만 한 사람들이 얻고 싶어 하는 것이 명예입니다. 영광입니다. 정말 그런 것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으려면 마귀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한 번만 절하면 됩니다. 날마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입니다. 그래 이 번 한 번만 하는 거야. 그러나 그것은 생각에서뿐입니다. 현실에서는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습관이 됩니다. 게다가 마귀에게 절하면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선언을 하는 셈입니다. 얻지 못하면 그만이지, 하나님께 드릴 경배와 섬김을 마귀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딱 잘라 거절하십니다.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도움을 시험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도우시는지 아닌지를 알아야 인류를 구원하는 그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을 시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드온이 농부로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사사가 되어야 할 때였습니다. 나같은 농부가 정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지를 확신하지 않고는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즉 기드온의 시험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느냐를 알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극한 상황에서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마귀의 시험을 모두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이겨내셨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의 평판이나 명예를 의지하지 않고도, 또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지 않고도 메시아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셨습니다. 어떻게 홀로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까? 40일간의 고독과 굶주림 속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성령에게 이끌리어 40일을 광야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습니까? 엘리야에게 물과 떡을 가져다 준 것처럼 그렇게 하셨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 회당에서 들었던 말씀, 엄마 마리아나 아버지 요셉에게 들었던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제가 사우디에 있을 때입니다. 회사동료들이 있었지만 저는 외로웠습니다. 왜 내가 사막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 와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기는 했지만, 건설회사에서 하는 일들은 제가 꿈꾸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괴로웠습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넣고는 이제나 저제나 사표를 멋지게 던지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의 모교회 성가대원들이 저에게 찬양곡집 한권과 수 십 명의 싸인과 격려글이 담긴 카드가 배달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의 격려 글이 반갑고 위로가 되더군요. 그러나 그것들은 오히려 사표를 빨리 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카드를 다 읽고 찬양곡집을 펼치니, 첫 페이지에 당시 성가대 총무였던 정성덕, 지금은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장로가 되었는데, 그 친구의 필체로 이런 구절이 써져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세기 28:15)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사표를 찢어 던지고, 하나님께서 이 곳에 보내신 목적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왜 나에게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이 필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내 생각대로 펼쳐지지 않았던 인생길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인도하시는 걸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함께 하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도 마귀에게 넘어가지 않으셧습니다. 엘리야도 이세벨에게 쫓기는 공포 가운데서 그 두려움을 이겼던 것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1시간 가량 달리면 중미산이 있습니다. 이 산에 천문대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천문대에서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볼 수 있는 별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도권의 밤하늘이 너무 밝아졌기 때문이랍니다. 온갖 조명이 밤하늘을 밝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면 우리의 신앙은 흐려집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로 보입니다. 하나님보다 명예가 보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기보다는 세상의 교훈을 따라 권세를 얻어 떵떵거리며 살아야 성공한 것 같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독이 필요합니다. 고독할 때 우리는 인생의 근본 문제들을 고민하게 됩니다. 고독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전도서1:11, 2:1-11, 5:10). 세상 사람들은 결코 들을 수 없는 것을 고독이 듣게 합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고독 중에 그 음성을 다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깨달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명예, 권세는 쓰레기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마귀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의 종노릇하게 되고, 평생을 돈, 명예, 권세의 종노릇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종으로 삼으라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일을 잘하려면 우리에게 가끔씩 고독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돈, 명예, 권세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임받는 충성스런 종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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