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성극(대본)

증인들의 고백2

은바리라이프 2010. 9. 9. 21:28

증인들의 고백2

권성일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기념하는 부활주일로 연결되는 중요한 절기이다. 학생들이 경우, 부활주일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순절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학생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아야 한다. 대강절이 있으므로 성탄절이 더 돋보이고 기다려지는 것처럼, 사순절을 부활주일을 기다리며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기간이다. 말하자면, 학생들에게 있어서 부활절이 얼마만큼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느냐는 것은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사실 중․고등부의 경우, 대부분이 부활주일 예배와 행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순절 기간 동안에 필요한 교육과 활동은 미흡한 상태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고등부 학생들은 위한 사순절 교육활동이나 프로그램을 찾아내고, 개발하고, 나아가서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중요한 교육적 문제로 생각된다. 이번 “사순절 부활절 예배를 위한 드라마”는 사순절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고난주간과 기쁨의 환희의 절기인 부활주일을 연결하는데 쓰일 수 있는 ‘드라마’이다. 먼저 “증인들의 고백 (2)”이라고 드라마를 소개한 다음, 이 드라마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는지 조언을 해 보겠다. 굳이 “증인들의 고백 (2)”라고 단서를 붙인 것은 기존의 “증인들의 고백”이라는 드라마가 있기 때문이다.

나오는 이들: 눈뜬 자, 바라바, 가룟 유다, 사도 요한, 막달라 마리아

드라마형태 : 모노드라마

소 품: 유대인 복장들, 밧줄

때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당시

눈뜬 자의 고백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나의 이 두 눈 때문에 나는 항상 어두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부모님들이 죄가 많아서 내가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하더군요. 소경으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죄인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나아주신 부모님을 원망했습니다.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어머니는 저를 낳아주신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죄책감 속에서 살아오셨습니다. 저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살아오셨지요. (……) 앞을 보지 못하는 저에게는 인생의 희망도 꿈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나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사는 곳에 예수라는 한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니 꽤 이름 있는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저도 그 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앞을 못 보니 그 분에게로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그 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 둘러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이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난 화가 났습니다. 내가 자기들의 노리갠가! 내 자존심은 생각지도 않고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무시하고 죄인 취급했습니다. 부끄러워 그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앞 못보는 소경이었으니까요…

그 때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진흙으로 나의 눈에 바르시고, 마치 지난 날 나의 한을 어루만지시듯 내 두 눈을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네 눈을 씻으라”

저는 그분의 말씀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래 “실로암 실로암 실로암” 저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실로암 못으로 찾아갔습니다. (엎드려 눈을 씻는 모습)

“아~보인다! 막대기 같은 것들이 서 있는 것이…, 반짝이는 물들이…, 이것이 사람의 모습입니까?”

바위처럼 짓누르던 무거운 멍에도 이제는 속시원히 벗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소경도 죄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바라보며 마음껏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솟아오른 저 산들, 하늘을 나는 새들, 푸른 나무들, 들에 핀 백합화, 맑은 냇물 모두가 너무나 아름답고 놀라운 하나님의 솜씨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엄청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바로 저 소리! 골고다 언덕의 저 못박는 소리 때문입니다.

“주님, 가시관을 쓰시고 골고다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당신을 보게 하시려고 나의 두 눈을 열어주셨습니까?

쇠못에 박힌 채로 죽어가는 늘어진 당신의 몸뚱이를 보게 하시려고 이 눈이 열렸습니까? 아~나의 이 두 눈이여, 참으로 다시 감겨졌으면 좋으리라! 나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도다! 도대체 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뻔뻔스럽게 잘도 살아갑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람의 목숨을 개 목숨보다 값싸게 여기면서도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군요.

“예수! 예수! 그를 풀어주라”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소리를 쳤지만, 내 목소리는 “바라바”를 외쳐대는 군중들의 함성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주님 저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소서!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죄 없는 사람도 죽이고 마는 지도자들과 저 무지한 백성들의 감겨진 눈을 열어주소서!“

바라바의 고백

거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 같은 살인강도에게 이런 날이 다 오다니… 예수라는 자가 십자가에 달리던 바로 그 날 아침이었습니다. 살인과 강도로 옥에 갇혀있던 나에게 사실 희망이라곤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었죠. 군병들이 옥에 갇혀있던 우리들을 데리러 왔을 때 “이제는 끝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군병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바 석방이다. 어서 나가!”

“뭐! 석방이라고 당신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놈은 참 운이 좋군! 너 같은 흉악한 강도 대신에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도 있다니”

함께 갇혀있던 자들도 모두 귀를 의심했습니다.

“바라바 자네더러 석방이라네”

그렇게 저는 영문도 모른 채 한번 더 목숨을 건졌습니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들으니 사람들이 나를 구해달라고 “바라바 바라바”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우습지 않습니까? 자기들을 괴롭히는 나 같은 사람을 풀어달라고 하다니…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전례가 있긴 하지만 그게 나일 줄이야. 아니면 나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 잡혔는가 보지요. 아무튼 “하나님 감사합니다(거만한 태도로)”

나라는 로마에 빼앗기고 정치가들은 자기 뱃속만 챙기니 이 나라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저 내 힘만 믿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지요. 나라를 빼앗은 로마놈들! 나라를 팔아먹는 더러운 지도자들! 참 아니꼬운 세상입니다. 나 대신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는 자 말입니다. 그 자도 참 운이 없습니다. 아무튼 내 목숨은 건졌으니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가룟 유다의 고백

이게 뭐냐구요? (밧줄을 들어 보이며). 내 목을 매달 밧줄입니다. 저는 지금 심한 죄책감을 이길 수 없어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저 때문에 예수님이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되었습니다. 은 30에 눈이 멀어 주님을 팔다니, 저 같이 못난 놈을 살 가치가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 다닌지도 3년이나 되었군요! 주님과 함께 우리들은 산도 넘었고, 풍랑 치는 바다도 건넜고, 병든 자들도 고치고, 들판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떡과 고기도 주었지요. 이분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줄 위대한 분으로 알았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과 일으키시는 기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그런 주님을 따라 다니는 것이 몹시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다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분이다”

“자, 로마인들을 내 쫓읍시다! 부패한 지도자들을 몰아냅시다”

주님께서 이렇게 한마디만 한다면 수천, 수만의 유대인들이 벌떼같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로마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할 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님을 저의 생각과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는 생각도, 민족의 지도자가 되려는 생각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의 마음은 그런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은 삼십에 예수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팔아 넘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아마 잡히시는 순간이 되면 드디어 주님은 때가 오신 줄 알고 봉기를 하시겠지?

하지만 저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겟세마넷 동산으로 가신 것을 확인하고 군인들과 사람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갔을 때, 주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포로가 되어 끌려가실 뿐이었습니다. 예수를 넘겨주고 은 삼십을 받았지만, 죄 없는 분을 팔았다는 죄책감이 나를 미치게 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달려가서 그들에게 은 삼십을 돌려주며

“내가 죄 없는 분을 당신들에게 팔았소. 다시 돈을 돌려드리겠소!”

하지만 그들은 그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돈을 성소 안에 던지고는 뛰쳐나왔습니다. 왜 제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하였는지… 한 순간의 저의 판단이 그만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고 말았습니다. 저는 평생동안 이 죄책감의 포로가 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죽어서 나의 죄 값을 치르겠습니다. 주님은 다른 제자들과 같이 저를 사랑하셨는데 저는 그 분을 배신했습니다. 저 같이 자기 욕심 때문에 스승을 파는 자가 또 있겠습니까!

제자 요한의 고백

아~사랑하던 나의 주님이 십자가의 형틀에 달리셨습니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 채 그저 달려만 계십니다. 거짓과 모함으로 꾸며낸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머리에 이고 고개를 떨구고 계십니다. 하늘도 빛을 잃고 대지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하늘이여 울어라!

초목이여 울어라!

대지여 눈물을 흘리라!

나의 주가 십자가에 죽으신다!

입으신 옷을 군병들의 손에 넘겨지고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며 ‘내가 목마르다~’

흉악한 죄인 중에 한 명처럼 양팔을 벌리고 숨이 끊어지신다!“

바다를 걸으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고치시던 그 능력들은 다 어디로 가고 저렇게 나약하게 달려만 계시는가! 이제 주님이 죽으시면 우리들을 어디로 가야합니까? 주인 없는 양 무리와 같이 우리들은 이대로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까? 결국, 이렇게 죽으시려고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그토록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셨습니까? 광야에서 떡을 먹던 수천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외치던 무리들은 다 어디로 가고.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도망치고, 이 해골의 동사에 홀로 달려 계십니까?

주님! 그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벗어 던지고 내려오시지요. 저희와 함께 이제 그만 갈릴리로 가시지요. 주님을 외면하면 예루살렘은 이제 올라오지도 맙시다

<요한의 노래-노래 혹은 낭송으로>

하늘이여 울어라 초목이여 울어라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아 눈물을 흘리라

나의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도다

주님의 얼굴은 검게 변하고 주님의 숨소리는 희미하게 들린다

요한아 네 어머니라 요한아 네 어머니라

어머니 마리아를 나의 손에 부탁하시고

나의 주께서 운명하신다

얼마나 목이 마르실까? 물 한 그릇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한이라도 남지 않으련만…나를 품에 안으시던 주님의 가슴은 이제 꺼져가는 등불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님! 우리들을 지켜주소서!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소서!”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

저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귀신들이 내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저를 귀신들린 여자라고 멀리 했습니다. 제 가족들까지도 저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요. 귀신이 하나도 아닌 일곱씩이나 저를 괴롭혔으니 제 사정은 설명하지 아니해도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저를 괴롭히던 일곱 귀신을 모두 내어쫓으신 이후로 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의 가족들과 이웃들 모두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귀신이 들려 미쳐 있던 제가 멀쩡한 정신으로 말도 하고 행동도 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여러 여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하늘 나라의 복음이야말로 우리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소식이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지은 죄를 책망하시고 정죄하시기보다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시려고 애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루살렘에서 오리쯤 떨어진 곳, 베다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입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과 같이 내려갔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인 지 사흘이나 되었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문상을 왔던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마치 자기 가족 중에 누가 죽었을 때의 슬픔처럼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나사로를 사랑하셨지요. 바리새인들처럼 말로만 겉으로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사로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이라고 내어 주실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아직도 주님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거기 모여 있던 모은 이들의 눈이 나사로의 무덤을 응시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몸에 흰 천을 감은 채 나사로가 걸어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지만…이런 기쁜 일이 있은 지 몇 일 후에 참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은 삼십에 그의 양심과 예수님을 팔았고, 나머지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한밤중에 이루어졌고,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없음을 알고 풀어주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 역시 용기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폭도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예수님은 다음 날 오천에 곧바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입니까? 정당한 재판의 절차도, 변론의 기회도 없이, 모든 이들이 곤히 잠자는 한밤중에 재판이 진행되다니요.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우리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제자 중 요한과 몇몇 여인들만이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아래서 그 분의 죽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이렇게 당당하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요? 저는 또 다른 엄청난 일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꼭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해야합니다. 주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고 안식일 아침 아직 어두웠을 때, 저는 주님이 묻히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무덤의 문은 열려 있었고 주님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나사로의 무덤 앞에 있었던 돌이 굴려지듯이 주님이 계셨던 무덤 앞의 돌도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 큰 바위가 어떻게…제가 이 소식을 전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뛰어와서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무덤 문을 지키던 군병들도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저는 그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어떤 자들이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단 말인가? 바로 그때 저는 그 무덤 안에서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머리 쪽에, 다른 한 천사는 발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동산을 지키는 동산지기인줄 알았지만, 저를 보고 “마리아야” 하실 때에 그 분인 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입니다.

저 같은 미천한 여자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다니!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들이여 노래하고 또 노래하라

사랑하는 주님이 죽음의 문을 여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셨네

<성가대 찬양-“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마지막 절은 다같이>

명곡감상

헨델의 ‘메시야’ 중 “할렐루야”를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감상함으로써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에 이어 부활의 기쁨에 함께 동참한다.

<드라마의 효과적 사용방법>

드라마를 따로 공연하기보다는 고난주간이나 부활주일 예배와 연결하여 예배 가운데 공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중․고등부의 경우, 드라마의 길이를 고려하여 다른 예배 순서의 시간을 줄이거나, 드라마에 맞는 예배를 기획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예를 든다면, 주님의 고난이나 부활을 노래하는 성시낭송, 사순절과 연관된 동영상 시청(프로젝트가 있는 경우), 예배 참여자 전원의 침묵기도 시간등이다. 다른 순서들이 많으면 자칫 산만하게 드라마 예배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나오는 <성가대 찬양>과 <명곡 감상> 시간의 경우는 드라마와 분리되기보다는 드라마의 정절 부분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극적으로 연결시키는 기획이 필요하다. 참여자들은 마지막 독백자인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에 이어 헨델의 메시야 가운데 “할렐루야”를 감상함으로써 부활의 기쁨을 한층 더 체험할 수 있다. 명곡 감상을 위해서 좋은 음악 시스템을 준비하는 노력도 있어야 함은 물론, 명곡감상이 끝나면 서로 부활절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모노드라마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 충분한 연습시간을 가지고 준비를 해야 하고, 유대인 복장을 입음으로서 사실감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에게 부탁을 할 수도 있겠으나 부서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준비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교사들의 경우, 드라마를 준비하는 가운데 사순절을 뜻깊게 보낼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만약, 드라마를 고난주간이나 부활주일이 아니 다른 사순절 기간에 공연할 경우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이나 명곡 감상을 생략하거나 조정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