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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벗는 이유, 우리가 벗어야 할 이유

은바리라이프 2010. 7. 31. 12:55

그들이 벗는 이유, 우리가 벗어야 할 이유

 

 

 

성석환(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주안교회 교육목사)

 

 

하루에 서너 통씩 오는 음란 메일 덕분(?)에 이젠 웬만한 자극에는 끄떡없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좀 더 화끈한 것들은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 널려 있다. 마음만 먹으면 신분과 나이에 관계없이 언제든지 누구든지 접속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벗기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벗는 이들이 생겨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개 벗다. 누드 사진집 만들다. 예술행위라는 주장 속에 음란성 논란>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심심찮게 스포츠 일간지에서 보게 된다. 잘 알려진 연예인들로부터 평범한 대학생 또는 주부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누드를 찍고 또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신혼부부들이 자신들의 성행위를 기념(?)으로 비디오에 기록한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몇 몇 사이트의 누드동호회는 회원자격이 엄격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대체 왜들 벗지 못해서 안달일까?

 

그들이 벗는 이유
단지 벗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19세기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 식민지 원주민들이 누드(?)로 사는 모습을 보고는 야만인이라고 했다는데, 이제는 그런 소리했다가는 오히려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합의가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다원화, 다양화에 대한 욕구가 분출되어 누가 누구의 문화적 행위를 두고 일방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근대 이후 사람들이 이성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종교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대안들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이성이나 과학 등이 그러한 장치들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 동안 영혼에 대한 일방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몸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몸에 대한 관심은 근대 후기에 소비문화와 포스트모던 문화에 결합되어 상품화되었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몸에 대한 예술적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와 같은 명화에서 드러나는 육체는 신학적 육체이다. 즉 지금의 세속화된 몸이 아니라, 철저히 종교적 의미가 부여된 몸이었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의 몸에 대한 관심과는 분명 다르다.


헬쓰, 다이어트, 성형, 이제 누드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을 관리하고 몸을 판다. 더 이상 숨겨야 할 은밀한 것이 아니고, 드러내고 과시하는 대상이다. 여기에 상업적으로 조작된 미(beauty)와 광고 등 매스컴의 왜곡된 자극이 사람들을 더욱 충동시킨다. 비너스의 아름다움은 이제 나 자신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몸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확인한다. 최근의 벗기열풍이 다소간 사람들의 정체성 확인작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자신의 누드를 보면서 스스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당사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에서 발견된다.(참고: 주간동아, 388호, 2003년)


대부분의 인터넷 누드 동호회가 표방하는 슬로건은 자연주의(naturalism)이다. 옷으로 자신을 가리지 말고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서로 만나자는 취지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긍할만한 구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목욕탕에서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만나는 것, 또 가장 친한 사람과 목욕탕을 함께 가는 습관 등은 인간이 벗은 상태에서 가장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 벗으려는 욕구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라 볼 수 있다.

 

 

그들을 벗기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벗기 열풍에는 분명 건강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의 예술적 경지를 갖춘 품위 있는 경우는 희박하고, 대부분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 시도되거나 현대 문화의 자극적 성 이미지에 편승한 수동적 반응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특별히 연예인들이 앞다투어 누드집을 만든다고 설치는 것을 두고 예술적 표현이라 생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물 간 일부 연예인들이 다시 인기를 얻기 위해 동원하는 자극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최근에는 휴대폰을 이용한 모바일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보다 손쉽게 그리고 보다 은밀하게 타인의 육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몰카를 통해 온 나라가 음란한 관음증에 사로잡히는가 싶었는데, 이제는 아예 공식적인 서비스 품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손바닥 안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육체가 예술인지, 포르노인지는 보는 이들의 욕구의 종류와 벗기는 이들의 잇속, 그리고 벗은 이의 자기 주장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한 마디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돈을 바라는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리라. 자본가들은 돈을 욕망하고, 연예인들은 돈과 인기를 쫓고, 보는 이들은 자신의 성욕을 채우며, 벗기고 또 벗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벗어야 할 것들
이런 문화적 유행에 종교적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먹히지도 않고 적절한 대응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그래도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다르게 보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조금만 벗으면 음란하다는 주홍글씨를 써 붙이는 것도 옳지 않지만, 표현의 자유라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숙된 생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문화와 공존하되,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 속에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바르게 분별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예술이 돈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나, 돈을 위해서 벗으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 또 진정한 예술은 잘못된 공동체에 오히려 도전하지만, 타인이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예술일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몸과 마음으로 분리해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과 몸과 마음의 통합성을 위협하는 돈, 욕망을 분별하라고 말한다.(롬 12:1-2)

우리가 진정으로 벗어 던져야 할 것은, 하나님 형상을 가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이는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요일 2:16)"이기 때문이다. 자꾸 벗으려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옷을 벗지 말고, 욕망을 벗어 던지기를. 또 남을 벗기려 하지말고 재물에 가려진 자신의 눈의 비늘을 벗어 던지기를. 남만 뭐라고 하겠는가? 교회도 허위와 형식주의를 벗어 던지자. 누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미도 있다면, 교회와 성도도 본래의 교회와 거룩한 성도의 모습을 세상에 그대로 드러내 보이자. 진정한 교회와 성도의 본이 드러나서, 더 이상 그들이 재리와 욕망으로 인해 벗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빛과 소금/20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