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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공간의 신학적 해석과 신학교육

은바리라이프 2010. 7. 26. 19:50

사이버공간의 신학적 해석과 신학교육   

                                                         손원영 교수

 

 

I. 서 론

정보화시대의 도래와 함께 신학교육의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왜냐하면 정보화시대의 주요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지털화(digitalization), 네트워크(network), 통합성(integration), 그리고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이 신학교육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교육의 디지털화는 전통적인 교수와 학습자, 그리고 교육내용을 그 근본부터 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들어 전통적인 신학교육에서 교수는 특정한 신학적 지식을 유일하게 담지한 주체이고, 학생은 신학적 지식을 갖추어야만 하는 객체였다면,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신학적 지식을 함께 창조적으로 구성해야하는 공동의 신학자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보화시대는 전통적인 의미의 신학교육에 큰 도전이 됨과 동시에, 새로운 신학교육을 위한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정보화시대의 신학교육은 가상공간으로서의 사이버현장을 전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가상공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은 채 신학교육이 진행될 경우, 우리는 그 가상공간이 마치 신학교육을 위한 절대적인 공간으로 우상화할 위험성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가상공간에서의 신학교육은 마치 비기독교적인 교육으로 간주됨으로써 다른 현장에 비해 가치절하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정보화시대에 새로운 신학교육의 현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이버공간은 신학적 해석을 필요로 하며, 그 토대 위에서 정보화시대에 요청되는 신학교육의 실천이 탐색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다. 첫째, 최근의 신학교육에 대한 중요한 이슈를 비판적으로 점검한 뒤, 그것이 디지털사회 속에서 어떠한 신학교육을 요청하는지 탐색해 본다. 둘째, 사이버공간에서의 신학교육을 위해, 새로운 교육현장으로 등장한 사이버공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셋째, 앞의 두가지 시도를 통해 드러난 결과를 토대로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될 신학교육의 방향을 제안한다. II. 신학교육의 재구조화 최근 신학교육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다양한 관점에서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윌러와 팔리(Wheeler & Farley)가 편집한「지각변동: 신학교육의 구조에 대한 상황적 접근」(1991)이란 책은 과거 근대적 신학교육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토대 위에서 재구성될 것을 주장한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신학교육의 해체 및 재구성작업이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얼마나 설득력있게 수용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에 진행되었던 신학교육의 구조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신학교육의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들은 어떠한 맥락에서 신학교육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것은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의 용어를 빌리면, 크게 세가지 범주에서 신학교육의 구조변화를 의미한다.그것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 지구화(Globalization), 그리고 선교(Mission)라는 범주이다. 달리 진술하면, 첫째, 상황화란 신학교육이 발생하는 현장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으로써, 전통적인 신학교육의 현장이 수정되어 다양한 현장을 고려할 것을 의미한다. 둘째, 지구화란 신학교육에서 중시되어야할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써,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교육의 교육내용을 수정하여 전지구적인 다양한 문제를 고려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셋째, 선교란 신학교육의 목적을 묻는 질문으로서, 전통적인 신학교육의 목적을 수정하여 선교지향적인 목적으로 변화될 것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는 이러한 스택하우스의 분류를 수용하는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주제를 숙고하고자 한다. 첫째, 평신도신학에 근거한 신학교육 목적의 재구성(선교), 둘째, 프락시스(praxis) 개념에 근거한 신학교육과 목회와의 관계재설정(상황화), 그리고 셋째, 영성의 개념에 근거한 신학교육의 지식과 방법의 재구성(지구화)의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신학교육과 평신도 교육에서 목적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적은 교육의 방향성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이 가치중립적(value-free) 활동이 아니라 가치지향적인(value-oriented) 규범적 활동으로 전제될 때, 교육의 목적은 교육이 나아갈 바람직한 가치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의 성패는 교육의 목적이 바르게 설정되었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된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학교교육의 위기를 교육목적의 위기로 진단한 포스트만(Neil Postman)의 지적은 신학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시사적이다. 그러면 과거의 신학교육은 어떠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고, 그 정당성은 어떠한가? 사실 이러한 질문의 해답은 그렇게 간단히 진술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학교육의 목적을 어느 하나로 단순화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학교육의 역사도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의 목적을 현대로 좁혀 이해할 때, 그것은 한마디로 "목회자의 양성"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팔리(Edward Farley)는 이것을 일컬어 "성직자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이라고 부른 바 있다. 즉 신학교육이란 교회에서 봉사할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으로서, 소위 목회활동에 필요로 하는 목회자의 여러 가지 기술적(know-how) 기능을 교육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교육의 목적은 과연 얼마나 정당성(rightness)을 갖고 있는가? 특히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시대적 요청에 얼마나 부합하고, 또 다원화되고 정보화된 이 시대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더 나아가 신학교육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신학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1950년대 콩가르(Yves Congar)에 의해 촉발되고 크래머(Hendrik Kraemer)에 의해 보편화되기 시작한 평신도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목회자(성직자) 양성이라는 현대 신학교육의 정당성은 도전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laos tou theo)으로 이해되는 평신도의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직자와 대립되는 의미에서 목회적 돌봄의 대상자나 혹은 성직자를 보조하는 일반 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와 일반 교인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달리말해 신학교육의 목적이 단순히 성직자 양성이라는 명분은 적어도 평신도신학이 강조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성직자 양성이라는 신학교육의 이념 속에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이원화시킨 뒤, 평신도에 대한 성직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단순히 성직자만을 위한 교육이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서, 평신도신학에 근거한 보다 포괄적인 의미, 곧 '하나님의 백성' 교육이라는 의미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신학교육의 목적은 성직자양성으로부터 평신도신학에 근거한 선교지향의 '하나님 백성의 리더쉽' 교육으로 수정됨으로써 그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학교육과 영성 최근 신학교육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또 다른 질문은 신학교육에서 사용되는 학문연구의 방법과 그에 따라 획득되는 지식의 적절성에 대한 논의이다. 미국의 경우,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대학으로 평가받고 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 1876)의 출현이후, 현대의 대학은 교양인 양성에서 전문가의 양성으로, 인식의 상상적 방법으로부터 객관적 지식에 이르기 위한 과학적 방법으로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대학교육에서 다루어야할 지식과 방법은 객관적 지식과 과학적 방법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대학의 도래는 하버드, 예일, 시카고대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에도 영향을 끼쳐 현대과학적 방법론을 신학연구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현대과학의 실증주의적 인식론이 신학교육에서 주도권을 가지면서, 사고·감정·의지 등 인간의 앎의 전 능력을 포함시켜 진리를 전인적으로 추구하는 신학적 연구의 본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그 결과, 신학교육에서 다루어야할 지식은 파편화되었고(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의 엄격한 분리), 실증주의적 연구경향에 의한 지식의 빈곤화는 신과 인간에 대한 통전적(주관적/객관적) 탐구를 통해 진리를 전인적으로 추구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신학교육의 방법과 지식의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팔리(Edward Farley)의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게 주목을 끌고 있다. 그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의 신학(theologia)이란 오늘날처럼 여러 학문 중의 한 분야가 아니었으며, 그 본래의 의미는 "인간 영혼의 성향"(a habit(habitus) of the human soul)을 뜻하였다. 그래서 팔리는 학문의 지나친 전문성과 그에 따른 파편화된 지식을 극복하기 위해, 오늘날처럼 신학이라는 학문이 분해되기 전의 그 원래의 통전적 모습, 곧 "아비투스"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 아비투스란 "지혜를 추구하는 습관 혹은 그 소질(aptitude)로써, 이론적 작업이라기 보다는 실천적(practical) 활동을 의미하며, 구원을 지향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비투스로서의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과 기도, 그리고 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이르도록 제시하는 지혜, 특히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의미한다.이런 점에서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 "신학(theologia)이란 일차적으로 사고방식이 아니라 생활방식"이라고 주장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다. 이러한 아비투스 개념의 회복은 미래의 신학교육이 '영성'(spirituality) 지향적 지식과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팔머(Parker Palmer)가 설득력있게 주장하였듯이, 신학교육을 포함한 현대교육이 합리성과 객관성 그리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극단적 분리만을 강조하였다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는 영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말해 로저스(Frank Rogers)가 "영성이란 전체성·신비·관계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으로 정의한 것처럼, 서로 파편화된 것을 하나로 묶는 "관계성의 총화"로서의 영성이 현대 신학교육의 파편화를 극복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이분화시킨 뒤 전자에 의한 후자의 종속을 정당화하는 계몽주의적 인식론은 파편화된 지식과 비인격적인 객관적 탐구방법만을 절대화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팔머는 그러한 객관주의적 인식론을 거부한다. 그 대신 그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사이의 상호참여와 침투, 그에 따른 관계성에 근거하여, '사랑의 인식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에 알려져야 하고(to know as we are known), 그 결과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관계성을 일컬어 그는 '교육의 영성'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팔머에게 있어서 이러한 관계성의 영성은 종종 타자성(otherness)의 영성으로 동일시된다. 왜냐햐면 진정한 관계성은 낯선 타자를 얼마나 '환대'(hospitality)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환대란 라틴어의 '호스페스'(hospes)에서 온 말로써, 주인과 손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즉 영성이란 낯선 타자를 환대함으로써 얻어지는 인식과 존재의 변화라고 할 때, 그것은 신학교육의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성의 영성에 의해, 신학교육에서 지금까지 소원화되었던 정서적이고 영성적 지식과 방법이 환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적 관점(feminist perspective)과 제3세계의 관점이 신학교육의 지식 구성원리로 활용될 때, 신학교육의 지구화는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신학교육이 영성에 근거한 지식과 방법을 지향할 때, 영성지향적인 신학교육은 아비투스로서의 신학의 본래의 의미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영성에 의해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지식이 통전적으로 관계를 맺고 또 인간의 전인적 방법으로 진리에 이름으로써, 신학교육에서 중시되어야할 지식과 방법이 그 적절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3. 신학교육과 프락시스 최근 신학교육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기되는 또 다른 질문은 신학교육이 '목회' 곧 예배, 성례전, 교육, 상담과 행정을 비롯한 다양한 목회의 '실천적 활동'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질문은 신학의 존재이유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이다. 일찍이 바르트(Karl Barth)는 "신학이란 교회를 위한 학문"이라는 명제를 천명한 바 있다. 신학의 기능을 교회를 돕는 학문으로 정의하려는 그의 주장은 당시의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신학교육과 관련하여 볼 때, 여전히 우리 시대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신학교육은 신학을 이론신학(theoretical theology)과 응용신학(applied theology)으로 나눈 뒤, 후자에 대한 전자의 우위, 곧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 패러다임(theory-to-practice paradigm)을 생산해내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신학교육은 교회의 목회적 활동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교리적이고 논리적인 작업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현재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 미래의 신학교육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기되는 '실천 경시'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신학교육은 교회에서 발생하는 목회적 실천의 문제와 관련한 '실천신학'과 보다 긴밀한 관련성을 맺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신학이란 교회를 위한 학문"이라는 바르트의 명제는 1960년대의 세속화신학을 비롯한 해방신학 및 정치신학의 등장으로 많은 비판을 받게되었다. 즉 신학이란 교회를 위한 학문이지만, 교회만을 위한 학문은 아니라는 비판이다. 이 점에서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의 설명은 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에 따르면, 신학은 "역사적 실천에 대한 반성의 작업"이다. 그래서 신학은 오직 우리의 삶에 대한 "제2의 스텝"(the second step)으로써, 우리의 실천적 삶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구티에레즈의 주장은 신학이 교회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역사 전체와 관련된 학문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만을 섬기는 학문이 아니라 교회를 뛰어넘어 사회와 역사를 향한 프락시스(praxis) 지향의 학문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학이 갖고 있는 프락시스 지향의 학문성은 최근 수정주의신학자로 알려진 트레이시(David Tracy)나 브라우닝(Don Browning) 등의 주장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특히 브라우닝은 모든 신학이 실천지향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근본적 실천신학"(fundamental practical theology)라고 부른다.여기서 우리는 신학이란 아카데미의 상아탑에 안주될 수 없으며, 교회와 사회, 그리고 역사를 향한 프락시스 지향의 학문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럼 점에서 볼 때, 미래의 신학교육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를 향한 '프락시스'(praxis) 지향의 목회적 실천의 활동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III. 사이버공간의 신학적 해석과 신학교육 현장의 재구성 앞에서 제시된 새로운 신학교육의 요구와 함께, 정보화시대의 등장으로 사이버공간이 신학교육의 새로운 현장으로 그 가능성이 탐색되고 있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미진한 형편이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와 신학교는 사이버공간을 단순히 기술적 차원의 문제로 접근하여, '도구의 활용'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와같은 태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이버공간이 제시하는 근본적 문제, 곧 패러다임의 전환의 문제를 간과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사이버공간에서의 신학교육의 문제는 단순히 사이버공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앞서, 사이버공간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이버공간이 신학교육의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가지 정도의 신학적 반성이 탐구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미디어의 변화와 '계시'와의 연관성의 문제요, 둘째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등장에 따른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문제이다. 이런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사이버공간은 신학교육의 현장으로 그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1. 계시와 멀티미디어 기독교신학에서 계시(revelation)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기독교신앙의 핵심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폭로'(disclosure)를 다루는 것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가능성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르트(Karl Barth)가 말한 바처럼, 하나님은 인간과 질적으로 다른 '절대타자'(Ultimate Other)라고 할 때, 그 분과 인간 사이의 연결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이 절대타자인 하나님을 완전히 인식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다만 가능성은 절대타자이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제한시켜 유한한 존재에게 자신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계시란 적어도 '하나님의 자기제한의 사건'이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기제한이란 계시의 방법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가능성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미디어를 계시의 문제와 연결시켜 이해할 때, 계시의 방법과 그에 따른 신-인의 연결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각각 그 독특한 계시의 이해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각각 조명이론(illuminative theory)과 만남이론(encounter theory)이다. 우선 조명이론이란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학 속에 발견되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으로써, 인간지성에 대한 하나님의 빛의 조명을 의미한다. 이들은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나, 죄에 의하여 어둠에 쌓여있음으로 초자연적 신의 빛에 의해 지성이 계몽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 만남이론이란 루터와 칼빈같은 종교개혁자에게서 발견되는 것으로, 인간의 잠재성에 대한 지성적 계몽이 아닌 인간을 초월하는 실재와의 인격적 만남이 계시라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이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성서)을 매개로 하여 초월적 실재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성령의 내적인 증언'으로서의 정서적인 측면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최근 조명이론과 만남이론을 부분적으로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3의 계시이해로서 새로운 계시의 이론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주로 해방신학자들과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프락시스 모델'이다. 이 모델은 가톨릭교회가 계시를 이해함에 있어 이성을 중시한 나머지 도그마나 교회의 전통을 계시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 모델은 개신교가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을 통한 감정적인 계시이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 위에서 위의 신학자들은 제3의 계시이해로서, 프락시스 지향의 계시 이해를 제안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주장하는 제3의 계시이해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다음 세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간접적 방식"으로 폭로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일컬어 하지슨은 "계시의 간접성"(indirectness)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언제나 '매개'(mediation)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비유(parables)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개되고, 병자와 가난한 자와의 사귐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비유로서의 언어와 가난한 자와의 연대는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적 매개로서 프락시스의 모델이 된다. 둘째, 프락시스로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연속적 활동'으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과거의 한 사건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의 프락시스(예: 창조와 구원, 성화로 일컬어지는 삼위일체적 활동)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어떤 때는 지성적 방식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성령의 내적인 증언이라는 정서적 방식을 통해 계시하신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창조의 일회적 사건 속에 제한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는 한 계시적 활동은 지속된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주장한 구티에레즈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나 판넨베르그(Pannenberg)의 주장은 적절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정통주의신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과거에 기록된 성서나 교회의 전통에 축소될 수 없으며, 동시에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중시하는 것처럼 현재의 인간 경험 속에 제한될 수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하나님 자신의 프락시스를 통해 지속되는 사건이다. 셋째, 프락시스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해방과 자유의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 자신을 폭로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인간을 폭로시키는 사건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불의와 죄악, 그리고 그에 따른 억압의 현실을 폭로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본성을 지향하도록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해방과 자유의 사건이 된다. 이상의 현대적 계시의 이해를 수용하는 맥락에서 볼 때, 20세기에 등장한 멀티미디어는 신학적으로 적어도 세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될 수 있다. 첫째, 멀티미디어는 하나님의 자기제한이라는 '계시의 간접성'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언어 혹은 미디어를 매개로 하여 이해되어져왔다. 특히 옹(Walter ong)이 주장했던 것처럼, 미디어의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동반시켜왔기 때문에, 종교개혁적 사건으로 각각 받아들여졌다. 우선 유대교는 야웨의 말씀을 '구전'(oral)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음성과 시각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고 받아들였다. 이와같은 구전의 방식을 통한 계시의 이해는 하나님을 진노와 사랑의 열정적 감정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까지 중세의 교회는 '필사본'(manuscript)이라는 매체를 통해, 하나님을 지성적 존재로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지·전능·편재 등으로 설명하였다. 한편 종개개혁 이후, 성서가 '인쇄문자'(print)화 되면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쇄된 문자의 해석과 동일시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적 체험으로 축소되었고, 문자를 통해서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쇄문자에 의해 인간의 사유 공간 속으로 제한되었다. 결국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멀티미디어 역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이런 점에서 하지슨이 자신의 계시이해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활용한 것은 의미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은 구전과 필사본, 그리고 인쇄문자를 중재적 매개로 하여 자신을 간접적으로 계시하셨듯이, 21세기 정보화시대에는 음성언어와 시각언어, 그리고 문자언어를 모두 포함하는 '멀티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멀티미디어를 통한 신학교육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의 방법에 참여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계시는 멀티미디어를 통해 인간에게 '연속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특정한 미디어 속에 제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미디어를 자유롭게 활용하시고 또 특정한 미디어로부터 자유로우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앞에서 진술된 미디어의 역사가 암시하듯이, 하나님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 보여주듯이 음성언어인 구전 속에 갇혀있을 수 없다. 그리고 중세교회와 현대교회가 강조하는 필사본이나 인쇄문자 속에 감금될 수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들이 특정한 미디어를 하나님의 계시로 동일시하고 절대화하실 때, 그 특정한 미디어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미디어를 인간들에게 허락하신다. 그 결과 미디어는 변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계시는 지속될 수 있었다. 따라서 멀티미디어의 등장은 하나님의 계시를 인쇄문자와 동일시한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심판이며,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사랑과 은총을 지속하고자 하는 신의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멀티미디어를 통해 지속되며, 하나님은 끊임없이 미디어를 수정하시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멀티미디어를 통한 신학교육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오직 이 시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계시는 멀티미디어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지향한다. 하나님의 자기폭로 사건인 계시가 동시에 인간에게도 자신을 폭로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것은 멀티미디어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폭로의 사건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이 멀티미디어를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수단 혹은 현장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멀티미디어 속에 인간의 죄악이 넘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사이버 공간 속에서 수많은 음란물과 사이버테러에 의해 자유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인권이 짓밟히는 인간 자신의 죄악과 억압이 폭로된다. 그리고 멀티미디어가 하나님의 계시의 방식이 될 때,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가오고, 동시에 자유와 해방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인터넷을 통한 신학교육은 멀티미디어 속에 팽배한 인간의 죄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도록 촉구하는 해방과 자유의 교육이 된다. 2. 교육현장과 선텍스트-텍스트-컨텍스트의 관계성 신학교육을 포함하여 기독교교육의 현장이란 한마디로 기독교교육이 실천되는 '자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리란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고 경험되는 자리"를 뜻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내용이 교사에 의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또 수용되는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전달되고 수용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구원의 사건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스튜워드(David S. Steward)가 제시한 기독교교육현장에 대한 이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교육의 자리란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서 "삶과 연관을 짓도록 돕는 장식"이다. 즉 기독교교육의 자리는 도시·건물·교실·가정 등과 같은 공간적 자리, 인간과 인간들이 서로 영적인 사귐이 일어나는 '상호작용'(interaction)의 자리 곧 코이노니아(koinonia)의 자리, 그리고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는 '영적인 자리'가 통전적으로 하나가 되는 자리를 의미한다. 은준관이 주장한 것처럼, 바로 이 세자리가 하나로 통합될 때, 그 곳은 기독교교육이 일어나는 신비의 현장이 된다. 결국 기독교교육현장이란 "구원의 자리"로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자리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 곳은 하나님과 대면(encounter)하는 계시의 자리이며, 인간의 응답(response)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교육의 현장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진심으로 만나 구원과 사귐을 가능케 하는 실천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구원의 장으로서 기독교교육현장을 범주화할 때, 교육현장(자리)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와의 관계성 속에서 해석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 사이의 관계성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관계에서 텍스트를 우선시 여기는 입장이다. 이것은 보수주의적 입장, 곧 정통주의신학에 근거한 기독교교육학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종교개혁 전통이래 현재까지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방법론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입장은 텍스트 곧 성서의 말씀 속에만 하나님의 계시가 담지해 있다고 봄으로써, 성서가 계시의 유일한 원천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입장은 성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현실에 적용하고 응용하는(applied) 데에 큰 장점을 갖는다. 하지만 이 입장은 성서자체를 문자적으로 절대화하여 교리화하려는 한계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서 자체가 갖고 있는 시대적인 한계와 특징을 간과한 채 복잡한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를 성서시대의 문제와 단순히 동일시함으로써 다원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입장에 선 신학교육은 컨텍스트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텍스트를 절대화하는 내용전달교육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다. 둘째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에서 컨텍스트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자유주의신학의 전통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특히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보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면서, 텍스트인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단지 인간의 종교적 경험으로 축소시켜 보려는 입장이다. 따라서 텍스트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정황 곧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하여 그 역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 입장은 성서란 인간의 종교적 경험의 산물 곧 컨텍스트의 산물임으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분석할 때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시대에 적절한 신앙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입장에 선 신학교육은 텍스트인 성서에 대한 이해보다 인간의 이성과 종교적인 경험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따라서 이 입장은 현재 우리가 처한 사회적 상황을 하나님의 계시가 개입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상황으로 보면서 우리 인간의 이성과 책임을 중시한다는 데에 큰 장점이 있다. 그러나 컨텍스트 중심의 신학교육은 텍스트를 컨텍스트에 축소시킴으로써 성서보다 인간의 경험을 절대시하게 되고, 그 결과 진리의 상대성으로 흐를 위험과 더불어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전통의 중요성을 소홀히 여길 한계가 있다. 셋째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비판적 대화를 중시하는 수정주의신학적 입장이다. 이 입장은 앞의 두 입장이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관심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텍스트의 절대적 우위나 혹은 컨텍스트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하기 보다,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비판적 거리두기와 비판적 관계맺기의 과정을 강조한다. 즉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비판적 대화를 강조하며, 특히 그 양자를 모두 앞서는 선텍스트(pre-text)를 제시하는 입장이다. 연구자는 이러한 선텍스트에 대한 입장이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갈등 및 부조화를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길로서, 정보화시대의 신학교육을 정당화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로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선텍스트의 개념이야말로 신학교육 현장이 구원의 사건이 가능한 만남의 자리로 정당화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이와같은 수정주의신학적 입장은 트레이시(David Tracy)와 하지슨(Peter Hodgson)의 비판적 상관관계방법(critical correlational method)에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하지슨은 트레이시의 비판적 상관관계방법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 신학방법론으로 주로 고려되던 구성요소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라는 두가지의 요소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신학을 연구하는데 고려해야할 구성요소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뿐만 아니라 '선텍스트'(pre-text)를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즉 세가지 구성요소란 첫째로 인간의 역사적 실존에 관한 '근원적 경험'(original experience)으로서의 선텍스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혹은 하나님의 자기 폭로로 일어나는 사건 자체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원초적인 근원적 만남으로 진술된다. 둘째는 하나님의 계시를 혹은 인간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을 만난 근원적인 경험의 '표현'으로서 텍스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서가 그것이다. 셋째는 근원적인 경험을 해석하는 자들의 '상황'(context)으로서, 이것은 텍스트와 다른 문화적 표현들에 의해 중재된다. 바로 여기에서 하지슨은 첫 번째 구성요소와 두 번째 구성요소가 종종 구별이 무시되거나 통합되어져왔음을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선텍스트와 텍스트로 구분함으로써, 지금까지 불필요하게 오해되었던 기록된 성서와 인간 경험을 각각 절대화했던 한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신학적 의미는 텍스트(text)의 이면에(뒤에) 놓여있거나 혹은 저자의 상황(context)이나 마음 속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pre-text)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달리말해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안에 즉 텍스트의 언어적 구조와 그 의미론적 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의'(in front of) 구원의 근원적 사건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지슨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앞서는 선텍스트를 강조하면서, 그 세가지 구성요소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이 신학적 구조로 적절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선텍스트, 텍스트, 그리고 컨텍스트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과정 속에서 우리는 신학교육현장을 범주화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달리 말해, 구원의 자리 혹은 구원의 근원적 현장은 텍스트를 관통하여 언제나 텍스트 앞에 존재하는 선텍스트로서의 구원의 자리이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자리요, 인간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원초적인 자리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웃과 만나는 구원과 해방의 현장이다. 바로 여기가 신학교육이 일어나는 현장이요 구원의 자리이다. 3. 신학교육현장으로서의 사이버공간 은준관은 밀러(Randoph Miller)와 쉐릴(Lewis Sherrill)처럼 성서(텍스트)에 근거하여 기독교교육현장으로 다음 네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성서에 나타난 교육현장의 원형인 예배공동체, 가정공동체, 학교공동체, 그리고 사회공동체이다. 그는 이 네가지의 현장이 성서에 나타난 근원적인 구원의 자리의 원형이라고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이 네가지의 현장이 주요한 교육의 현장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신학적 토대가 신정통주의신학적 입장, 곧 컨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우위라는 입장에 따라 교육현장을 분류했음을 비판하고자 한다. 즉 그들은 '선텍스트'의 개념을 통해 볼 때,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텍스트'에 근거하여 기독교교육의 현장으로 네가지를 지적한 것은 적절하였으나, '선텍스트'의 개념이 지시하는 것처럼 구원의 장을 폭넓게 미래에로 열어놓지 못한 한계점이 있다. 즉 텍스트를 꿰뚫고 그 앞으로 나가는 구원의 현장은 더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현장으로 예배-가정-학교-사회의 공동체를 넘어서 새로운 공동체를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그 구원의 자리는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언제나 새롭게 열려져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그분의 자유 속에 있으면서, 텍스트를 통해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 앞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신학교육의 현장으로 가상공간(cyber-space)을 상정할 수 있다. 사실, 사이버공간에 대한 성서의 언급은 없다. 다만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선텍스트 곧 구원의 현장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사이버공간 자체가 중요한 구원의 현장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의 장을 항상 인간에게 개방해 놓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선텍스트·텍스트·컨텍스트의 관계성을 해석학적 순환과정으로 이해할 때, 이것을 역사적 연속성으로 바라보는 통시적 관점(diachronic perspective) 보다는 공시적 관점(synchronic perspective)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선텍스트는 해석학적으로 볼 때,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이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 바로 지금 나의 구체적인 상황(context) 속에서 발생하는 구원의 동시적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의 현장으로서의 멀티미디어는 해석학적 순환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구원이 발생하는 현장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선텍스트로서의 사이버공간은 종종 "세계의 압축파일"이라 불리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세계의 모든 것이 내재되어 있다.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사건과 대화가 그 곳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비인간화의 모습도 현존한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정보가 교류되는가 하면 가장 퇴폐적인 정보도 유통된다. 바로 세계가 그 작은 컴퓨터 속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이버공간은 기독교교육현장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악의 실재와 대면하는 또 다른 폭로의 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사이버공간 속에서 실시되는 신학교육은 가상공간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면하는 공간으로 혹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는 실천의 현장으로 간주하면서, 창조적인 신학교육의 현장으로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IV. 가상공동체에서의 신학교육의 방향 1.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의 목적 정보화시대의 도래와 함께 등장한 사이버공간으로서의 '가상공동체'(virtual community)는 일반적으로 "물리적 토대는 없고, 비슷한 기호와 갈망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으로 모여 구성된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앞에서 살핀 멀티미디어의 선텍스트성의 측면에서 볼 때, 구원의 근원적 경험이 발생하는 기독교교육의 현장, 곧 신학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신학교육의 현장으로서 가상공동체는 (신)학교처럼 전통적으로 고정된 공간은 아니지만, 학교가 갖고 있는 다양한 기능이 현존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신학교육의 현장이 된다. 그 안에는 교실과 같은 가상의 물리적 공간이 있고, 또 다양한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만나 인격적인 교류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가상공동체는 신앙공동체로서 영적인 사귐을 나눌 수도 있다. 그래서 교회를 의미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교제'(communio sanctorum)가 가상공동체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이와 다른 측면에서 가상공동체는 다양한 기호를 가진 임의적 사람들이 모인 가상사회(virtual society)이기 때문에, 오프라인의 사회처럼 선교의 현장도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 곳에서도 구현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상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컴퓨터 화면 속에 신학교육이 발생하는 근원적 경험의 거룩한 공간과 선교의 대상으로서 가상사회가 하나로 하이퍼링크되어 공존해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가상공동체에서의 신학교육이 지향해야할 목적을 발견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상공동체 안에서의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목적을 지향하게된다. 이것은 신학교육이 평신도신학이 지시하는 평신도의 회복과 그 선교적 사명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말해 현대 신학교육이 성직자 패러다임에서 선교지향의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것을 요구할 때, 가상공동체는 이 요구에 가장 적절히 응답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가상공동체에서의 신학교육은 전통적인 의미의 성직자 양성보다 평신도의 지도력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질 필요가 있다.결국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은 평신도신학에서 주장하는 명실상부한 평신도의 완전한 회복과 그 사역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고려할 사항은 가상공동체의 평신도교육이 보다 일관성있게 지속되기 위해 명실상부한 평신도신학에 근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평신도신학이 보다 철저하게 모든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의 구조 속에 반영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스(Paul Stevens)가 주장한 21세기 평신도신학의 방향은 의미있게 고려될 수 있다. 그것은 성직자 중심의 신학을 넘어서 하나님의 온 백성'의'(of) 신학을 지향하는 것이고, 비실천신학을 넘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for) 신학으로 발전하는 것이며, 학문적인(이론적인) 신학을 넘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 '의한'(by) 신학이 되는 것을 뜻한다.이와같은 평신도신학이 토대가 되어 가상공동체에서 신학교육의 목적이 설정되고 또 신학교육이 실천될 때, 정보화시대의 신학교육의 존재이유가 그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의 주체 가상공동체 속에서의 신학교육이 구원의 현장으로서의 선텍스트를 중시하고, 평신도신학에 의한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강조하며, 또 그에 따른 평신도사역(선교)을 지향할 때,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의 주체는 '평신도' 자신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사실, 신학교육에서 선텍스트와의 만남은 성직자만을 위한 것도, 혹은 일반 신도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구원사건으로서의 선텍스트는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래서 선텍스트로서의 신학교육의 현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신학교육의 주체들이다. 즉 누구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 누구나 그 창조적 작업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하나의 텍스트로 다가갈 수 있게된다. 이런 점에서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은 교사요, 동시에 학습자이다. 마치 평신도신학에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듯이, 가상공동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엄격한 이분법적 구분은 의미를 상실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두는 성직자/평신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오프라인 상의 성직자가 온라인 상에서는 평신도로 배울 수 있게 되고, 또 그 반대도 가능하다. 문제는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얼마나 주체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느냐에 따라 그의 역할이 구분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 하이퍼텍스트(hyper-text)를 구성할 때, 저자는 동시에 독자가 될 수 있고, 독자는 또 저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교사와 학습자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고, 대신 교육참여자 모두가 뫼비우스띠처럼 스스로 분리될 수 없는 '교사/학습자'라는 이중적 신분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진행되는 교수-학습과정은 선형적 학습으로부터 하이퍼미디어 학습으로, 일방적 수업으로부터 구성과 발견의 수업으로, 교사중심에서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학습자료에의 몰입으로부터 항해법과 학습법에로의 몰입으로, 학교로부터 평생학습으로, 고문같은 딱딱한 학습으로부터 재미있는 학습으로, 그리고 전수자로서의 교사로부터 촉진자로서의 교사로 변화되는 모습을 띄게된다.따라서 가상공동체 속에서의 신학교육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해, 모든 교육참여자들이 학습자/교사라는 '이중적 자기정체성'(double identity)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3.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의 내용선정 가상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신학교육은 그 교육내용으로서 '하이퍼텍스트'(hyper-text)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하이퍼텍스트란 컴퓨터의 조직능력들을 응용함으로써 텍스트를 전자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특히 텍스트가 음성언어, 동영상, 이미지 등의 다양한 멀티미디어와 연결됨으로써, 고정된 활자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가 하이터텍스트 속에 담게된다. 그 결과 활판인쇄로 고정되었던 텍스트는 독자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임의로 취사선택될 수 있는 텍스트로 변경됨으로써 텍스트는 불변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고, 저자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독자에 의해 계속 만들어져가는 것이라는 이해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하이퍼텍스트는 인쇄된 텍스트가 갖고 있던 확실성과 불변성의 권위체계을 해체시키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개방되어, 틸리히(Paul Tillich)가 비판한 반동적 문자주의(reactive literalism)를 극복하고 소위 성숙한 신앙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가상공동체 속에서 성서가 하이퍼텍스트로 이해될 때, 신학적으로 두가지 차원에서 큰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 성서가 하이퍼텍스트화됨으로써, 종래의 책이 가진 권위적인 절대적 의미는 해체의 시대를 맞게 되고 그 대신 '선텍스트'(pre-text)의 의미가 강화된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인쇄된 텍스트에 대한 상대화가 발생하게 됨으로써, 인쇄된 텍스트로서의 성서를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믿던 신념(성서무오설)에 큰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쇄된 성서를 포함하지만 그 이상이라는 이해에 도달함으로써, 문자 및 교리 중심의 근대적 기독교신앙의 패러다임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텍스트를 꿰뚫고 나가는 선텍스트에 보다 긴밀히 관심을 가짐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원적 대면에 신학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 결과, 교리와 문자 중심의 근대적 신앙은 '종교체험' 중심의 신앙으로 그 패러다임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성서가 하이퍼텍스트화됨으로써, 독자는 성서를 통시적(diachronic)으로 보려는 입장으로부터 해방되어, 성서를 '공시적'(synchronic)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이것은 성서의 독자가 성서를 통해 텍스트에 앞선 하나님의 구원행위 곧 선텍스트에 이르려고 시도할 때, 성서에 대한 '역사-비판적 접근'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동영상적 자료를 활용하는 '공시적 접근' 혹은 통전적 접근이 더 효과적이라는 입장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독자는 공시적 접근을 통해 보다 쉽고 재미있게 말씀을 실행하는 자(reader-as-player)와 말씀을 선택하는 자(reader-as-route-chooser)로서 성서를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적으로 말하면, 독자는 텍스트를 통해 그 텍스트가 가능케되었던 근원적 경험에 이르게 되고, 또 그 과정을 역으로 하여 다시 독자의 상황 속에서 근원적 경험을 창출하게 되는데, 그 연결의 방법으로서의 멀티미디어는 하나의 해석학적 방법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가상공동체에서 교수-학습되는 신학교육의 내용이 하이퍼텍스트의 성격을 갖게될 때, 신학교육의 내용선정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사항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고정된 인쇄문서(성서를 포함하여)로 동일시하기보다는 구원의 근원경험으로 이해함으로써 매말랐던 텍스트의 내용들이 독자들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된다.이것은 신학교육의 내용이 프락시스와 경험 중심으로 선정될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평신도들이 삶의 일상적 현장에서 씨름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통해 이미지와 사운드가 하이퍼텍스트와 결합될 수 있도록 교육내용이 조직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독교적 지식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텍스트 앞에 놓여있는 선텍스트가 공시적 접근에 의해 지금 바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시간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이해되기 위해,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동영상 자료들이 텍스트의 해석작업을 통해 개발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텍스트의 전문가, 조직신학자, 실천신학자, 그리고 멀티미디어를 제작할 수 있는 교육공학자들의 협력적 작업이 요청된다. 특히 선텍스트가 저자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임을 전제할 때, 하이퍼텍스트를 위한 동영상의 개발에 예술가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신학교육의 내용으로 하이퍼텍스트화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제시될 때, 바로 지금의 컨텍스트를 고려한 다양한 텍스트간의 링크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의 원리가 고려될 수 있다. 하나는 영성의 원리요, 또 하나는 지구화의 원리이다. 먼저 영성의 원리란 '관계성/환대'의 원리로 이해된다고 할 때, 신학교육의 내용선정시, 이점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왜냐하면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이 근대성이 갖고 있는 병리현상, 곧 '파편화'(fragmentation)의 문제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한 선텍스트를 통한 창조성과 근원경험이 창출되기보다는 오히려 파편화를 더욱 가속화시켜 우리의 삶이 또 다른 형태로 분리되는 부작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상공동체가 신학교육의 내용을 선정할 때, 온라인의 내용과 오프라인의 내용 사이의 연관성, 브라우닝이 주장하는 "근본적 실천신학"이란 차원에서의 통합적인 신학의 추구, 그리고 아비투스라는 본래의 신학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맥락에서 교육내용을 선정하는 것이 요청된다. 또 하나는 지구화의 원리로서 신학교육의 내용선정시, 바로 지금 이 사회와 세계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상호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슨(Peter Hodgson)에 의하면, 20세기말로부터 시작하여 현재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한 주요한 문제는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해방과 자유의 문제요(정치적 해방, 경제적 해방, 여성해방 등), 생태계의 위기와 지구의 보존의 문제요, 또 대화의 문제(종교내/간의 갈등의 해결, 토착화의 문제 등)이다. 이 세가지 문제는 한마디로 지구화의 문제이다. 브라우닝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신학적이고 목회적 차원에서 '지구화'란 다음과 같은 네가지이다. 그것은 ①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보편적 선교, ② 세계의 다양한 교회 사이의 에큐메니칼한 협력(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경의 전제), ③ 기독교와 다른 종교 사이의 대화와 협력, 그리고 ④ 세계에 대한 교회의 선교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의 내용을 선정할 때, 하지슨이나 브라우닝이 제시한 이 시대의 지구적 문제들을 신중히 고려하여 교육내용으로 하이퍼링크시키는 작업이 요청된다. 결국 성서의 말씀과 근원적인 구원의 경험,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 주제들과 해석이 하이퍼텍스트화되면서,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은 영성과 아비투스를 지향하는 신학적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V. 결 론 과거의 신학교육은 성직자 중심, 목회현장과의 비연계성, 그리고 비영성의 측면에서 비판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신학교육은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는 맥락에서 평신도신학에 근거한 하나님의 백성 지향, 프락시스 지향, 그리고 영성 지향이라는 의견에 모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보화시대의 신학교육은 이와같은 맥락에서 설계되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보화시대는 인쇄문자를 미디어로 하는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 곧 음성언어·시각언어·문자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동영상을 활용한 멀티미디어의 환경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정보화시대의 신학교육은 멀티미디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연구자는 멀티미디어가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계시 및 텍스트-컨텍스트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여, 멀티미디어는 하나님의 계시의 현장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텍스트에 앞서는 선텍스트의 의미, 곧 구원의 현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가상공동체의 신학교육이 진행될 것을 제안하였다. 결국 정보화시대의 신학교육은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개방성의 정도에 따라 가상공동체에서의 신학교육의 성공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