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죽임 당하는 사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
교회연합신문 2005.4.21.28
“가족의 이익이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것은 정의상 안락사라 부를 수 없어”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세계를 달구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 논쟁의 바람이 불고 있다. 따라서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안락사에 대한 개념 이해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의견들 가운데 기독교적인 관점에 대해 지난 2일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밝은 죽음을 준비하는 포럼과 한림대 생사학연구소에서 주최한 ‘소극적 안락사 논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발제문을 요약 발췌해 소개한다. - 편집자 주 -
안락사의 개념 ‘안락사(euthanasia)’는 어원적으로 ‘수월한 죽음(eu thanatos, easy death)’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안락사는 ‘한 사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위(行爲, action) 또는 무위(無爲, inaction)에 의해 그 사람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야기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행위가 안락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s)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설령 약물 등을 이용해 한 사람을 아무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더라도, 그 죽임이 그 사람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그것이 가족의 이익이나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었다면 정의상 그것은 안락사라고 부를 수 없다.
자발적 안락사 안락사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 안에도 세 가지 다른 유형이 있는데, 이들 각각은 독특한 윤리적 문제들을 일으킨다. 자발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는 죽임을 당하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수행되는 안락사의 유형이다. 이때 당사자는 명령, 의뢰, 신청 같은 적극적인 방식으로 안락사를 요청하거나 단지 소극적인 방식으로 안락사를 승인한다. 오늘날 서구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도록 법을 개정하려는 캠페인을 벌이는 대부분의 단체는 자발적 안락사를 위해 운동을 하고 있다. 때로 자발적 안락사는 의사 조력 자살과 구별하기 어렵다. 다음 세 가지 유형이 자발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첫째, 암으로 죽어 가는 환자가 자신의 생명을 고통 없이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을 가족에게 요청하는 경우. 둘째,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살할 능력이 없는 경우. 셋째, 약을 삼키거나 방아쇠를 당기는 바로 그 순간에 죽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이다. 반자발적 안락사, 비자발적 안락사 반자발적 안락사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는 자발적 안락사와 유사하다. 그러나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처럼 자신의 죽음에 동의할 능력이 있지만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안락사가 수행되었을 때, 이것을 반자발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라고 부른다. 이 유형의 안락사에는 두 가지 경우가 포함된다. (ㄱ) 계속 살기를 선택한 사람에 대해 안락사를 수행하는 경우와 (ㄴ) 죽는 데 동의하진 않았지만 만약 물었다면 동의했을 사람에 대해 안락사를 수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만약 인간이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을 이해할 능력(competence)이 없다면, 안락사는 자발적이지도 반자발적이지도 않을 것이며 비자발적일 것이다. 이러한 유형을 가리켜 비자발적 안락사(nonvoluntary euthanasia)라고 한다. 이런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은 세 부류이다. 첫째, 안락사에 동의할 수 있는 이해 능력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신생아와 중증의 정신 불구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이전에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상실한 사람들. 예를 들어 노인성 치매 같은 질병이나 노쇠로 인해 정신적 무능력자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셋째, 안락사에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혼수상태에 빠져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자발적 안락사, 반자발적 안락사, 비자발적 안락사라는 구분이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면,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는 안락사를 수행하는 사람의 행위에 따른 구분이다. 적극적 안락사(active euthanasia)는 안락사를 수행하는 사람이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킬 것을 처음부터 의도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능동적으로 취하는 형태이다. 치사량의 약물을 주사하여 환자를 안락사 시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는 당사자가 이전부터 존재하던 질병 등이 원인이 되어 죽음의 과정에 들어섰을 때 그 진행을 (일시적이나마)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이를 방치함으로써 안락사 시키는 경우이다. 이처럼 적극적/소극적 안락사의 구분을 자발적/반자발적/비자발적 안락사의 구분과 교차시키면 서로 다른 여섯 가지 유형의 안락사가 나오게 된다. 노인인구가 급증하면서 치매환자와 노인장애인이 증가함에 따라 생명의 신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생명의 질을 강조하여 삶의 질이 극도로 저하된 인간생명을 더 이상 지속시킬 필요가 없는 가치로 판단,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이처럼 안락사를 부추기는 배경에는 생명권에 대한 오해가 도사리고 있다. 1. 안락사와 치료중단 안락사에 대한 입장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소위 ‘죽을 권리 또는 선택할 권리’라고 하는 급진적인 자기 결정권적인 접근으로 모든 경우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입장이다. 실제로 올해 네덜란드가 안락사를 합법화하였으며 미국도 주에 따라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다. 이와는 반대편에 있는 극단의 입장은 소위 ‘급진적인 살 권리’를 주장하는 입장으로 어떠한 종류의 안락사도 반대하며 치료를 중단하는 것도 안락사이므로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위 두 입장의 중간으로 ‘죽어가는 환자에 대한 동정적인 진료’라고 부를 수 있는 접근방식이 있는데, 여기에는 죽음을 연기하는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인정한다. 2. 치료 중단의 한계 필자는 내과의사로서 중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예기치 않는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말기암 환자가 숨을 쉬지 않는 경우 과연 심폐소생술을 하여야 할 것인가? 수년 째 식물인간으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는 혼수상태 환자에게 적극적인 치료를 계속하여야 하나? 임종이 가까운 말기 암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후 계속 인공호흡기로 하루의 수명을 더 연장하는 것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죽음의 연장이다. 하지만 회복이 어렵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 쉽게 치료를 중단하려는 행위는 안락사에 다름 아니다. 3. 기독교 입장에서 본 안락사 가.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왜 하나님은 고난(고통)을 허용하시는가? 이 古典的 질문에 대해 R C 스프라울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첫째, 고통이란 기본적으론 원죄와 관련이 있다. 둘째, 그렇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이유에 따라 각 개인의 고통의 정도는 다르다. 셋째, 모든 고통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나.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마 27:50, 행 21:13, 빌 1:21). 우리는 마지막 테이프를 끊는 순간까지 그들을 격려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감격으로 일생을 마치도록 돕는 도우미들인 셈이다. 다. 생명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리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생명권과 생명결정권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생명결정권이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할 때, 인간은 자신의 마음대로 인간생명을 복제할 수 있으며, 자기 멋대로 인간생명을 헤치거나 죽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안락사나 자살은 이 두 가지 권리를 오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4. 안락사의 대안 가. 공동체의 돌봄 고난당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는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것이 예수께서 한 것’이라고 말한다(마25:35~40). 이를 위해서 교회는 먼저 개인 윤리와 사회의 법적 윤리를 세우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는 교회의 가족들을 위한 뒷받침 자원이 되어야 한다. 의료제공은 물론, 교회의 잘 적용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서 영적인 문제들까지도 해결해야만 한다. 나. 호스피스 그러나 자칫 우리는 존엄하게 죽는 것을 마치 우리에게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존엄한 죽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임종을 맞아야 하는 환자들에게는 일반 병원의 딱딱한 분위기와 생명연장장치 등의 최신식 장비들 보다는 오히려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주고, 통증을 적절히 조절해 주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특수한 환경이 필요하다. 5. 나오는 말 죽음의 공포와 육체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전인적(全人的)이고도 총체적인 접근을 하는 호스피스야말로 참된 치료이며 복음이다. 아무쪼록 최근 국내외의 안락사 논쟁을 계기로 우리 모두가 생명윤리에 눈뜨며, 도도히 흐르는 죽음의 행렬에 맞서 생명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 내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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