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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 - 예정인가 자유인가

은바리라이프 2010. 6. 17. 08:52

제목: 인간의 운명 - 예정인가 자유인가

 

 

신창석 (효가대 철학과)

일시: 1996년 4월 4일(목) 오후 5시

 

 

 

1. 문제제기

인간의 가장 큰 철학적관심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은 실천적 물음이다. 즉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 행위(行爲)에 이르게 되었는가? 매 순간 순간의 행위가 결국 한 생애를 이루기 때문에, 삶 전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운명 전체에 대한 물음도 결국 내가 도대체 어떻게 지금 이 행위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 속에 집약되어 있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나는 하나 하나의 외적 행위는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행위의 결과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 생각(내적 행위, 결정)에 이르게 되는가? 이 물음은 또다시 두 가지 물음으로 압축된다. 즉 이 생각은 이미 예정(豫定)되어 있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의 자유(自由)에서 비롯되었는가? 이렇게 인간의 운명에 대한 “예정”과 “자유”의 갈등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 논쟁의 역사

이미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예정”과 “자유”의 갈등을 자연학적 관점에서 문제시 삼았다. 자연(본성)은 어떻게 이성적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의 고유한 행위를 위한 자유 공간을 획득할 수 있는가? 즉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에 따라 자연을 파악하는데, 이 법칙성을 이해하는 인간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기원 후 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뻴라지우스는 또 다시 예정과 자유의 갈등을 종교적 관점에서 문제시 삼고 대 논쟁을 벌인다. 즉 인간 운명의 궁극적 관심사인 구원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업적에 달려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에 의해 미리 예정되어 있는가? 구원은 하느님의 절대적 은총이라고 강조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예정을 주장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던 뻴라지우스는 구원도 인간적 자유의지의 선택 대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또 다시 9세기에 이르러 곳찰크(†869)와 에리우게나 사이에서 반복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에서 좌우된다. 즉 곳찰크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신이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예정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거나, 아니면 악마의 나라에 속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구원이 개인의 업적과 무관하게 결정된 것이라면, 결국 인간은 이 세상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을 필요도 없고, 선교할 필요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곳찰크의 예정설은 당시 강력하던 카롤링왕조의 영토 확장의 의지와 가톨릭 교회의 선교의지를 위협했기 때문에 견제 되었다. 반대로 에리우게나는 주장하기를,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어떤 죄인의 파면도 원하면 안된다고 한다. 또 하느님은 그야말로 초시간적으로 영원하므로, 아무것도 미리 보지 않고, 예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은 자유이다. 그래서 에리우게나는 죄인에 대한 처벌도 잘못 행사한 자유의 대가이며, 그 후회가 바로 지옥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에리우게나의 자유론 또한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약화시키고, 카롤링 왕조의 법적 질서를 방해했기 때문에 단죄되었다.

그 후로 14세기에는 하느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절충시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근대로 오면서 칸트는 자연적 필연성이 가지는 인과적 기계론(Kausalmechanismus)과 인간의 도덕적 자기규정을 분리시키고자 노력했다. 라이프니쯔는 스피노자에 반대하여 의지의 자유를 확고히 정립하고자 했다. 또한 헤겔은 세계와 역사의 절대자를 주장했으나, 이에 반대한 개인의 결단이 대두되기도 했다. 20세기에 이르러 하이데거는 싸르트르의 인본주의 편지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예정”과 “자유”의 갈등은 각각의 시대가 직면한 여러 가지 학문적,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에서 달리 고찰되어 왔다. 이 갈등은 세기를 거듭하면서 늘 새로이 포장된 채 다루어졌지만, 여전히 인간의 영원한 철학적 문제로 남아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갈등의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실 이런 갈등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유 의식을 성숙시켜 왔기 때문이다.

 

 

3. 본론

그렇다면 내가 지금 바로 이 생각, 이 결정에 도달할 때, 이 결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이 결정되는 것인가? 만약 예정되어 있었다면, 첫째 그 예정된 노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미리 존재했어야 할 것이다. 둘째 나의 결정을 바로 이 예정된 노정으로 움직이게 하는 현실적 영향력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셋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물체로 구성되어 있고 또 한 개인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 개인은 물체들의 상호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작용하는 모든 예정된 노정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결국 세계 전체로서의 천체(우주)와 나의 구체적 결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상호 작용력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자로 가득찬 우주에 있어서 하나의 작용은 다른 하나의 작용과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자연과학은 이미 천체의 전체적 변화가 지상의 물체에 끼치는 물질적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태양의 변화나 달의 기울기가 밀물 썰물, 해일, 태풍, 공기 밀도 등의 기상 변화에 미치는 영향과 태양빛과 달, 행성의 기울기에 따른 기상 변화가 인간의 감성과 생리 작용 그리고 심리에 끼치는 영향력을 현대과학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생물학에서도 빛과 온도 그리고 인력이 생명체의 성장과 운동에 끼치는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과학의 증명을 토대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천체의 변화와 인간 행위를 조정한는지, 그것도 구체적인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운전하는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천체의 변화와 인간 행위의 변동 사이의 상관관계가 증명된다면, 결국 인간의 운명은 예정된 노선을 가지고 있고, 이 노선으로 운전된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상관관계가 반증된다면, 인간의 운명은 자유로운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바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사람이 있다.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Ia, q.115, a.4)에서 “천체가 인간적 행위의 원인이겠는가?”(Utrum corpora caelestia sint causa humanorum actuum?)를 묻고 있다. 천체와 인간적 행위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의 반증은 다음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항상 영향을 받는 것의 존재 방식에 따라 영향을 끼친다.” 이 세계는 즉 소리는 소리에 울리는 것에 소리로서의 영향을 미치며, 열은 열에 반응할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에 영향을 끼친다. 물론 이 세계는 물리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천체는 순수 물리적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물리적인 것에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천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이 물리적 차원에 있는 그 만큼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물론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은 물리(물질)적인 부분(realis), 식물(생명)적인 부분(vegitabilis), 동물(감각)적인 부분(animalis) 그리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부분(rationalis)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없다면, 온전한 의미의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물리적 구성 요소에는 생명이 배어 있고, 생명적 구성요소에는 감각이 배어 있고, 감각적 구성 요소에는 정신(ratio, mens)이 배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천체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것에 영향을 끼치므로, 물리적 영향력으로 생명력에, 생명력에 대한 영향으로 감각에, 생명력과 감각에 대한 영향으로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고, 인간은 바로 이 정신에 따라 행위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 영향성 자체에 있어서 영향을 주는 것은 영향받는 것의 전제조건이고, 영향을 주는 전제조건은 영향받는 것에 단순히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성의 구체적인 방향, 강도, 양 질을 동시에 미리 결정한다. 구르는 당구공이 가진 방향, 각도, 속도 등이 고스란히 타격하기 이전의 큐대에 실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인간 정신의 결정 방향, 강도, 속도도 천체의 변화에 따른 물리적 변화에 달려 있다는 것이 예정설의 기초이다. 그런데 이런 논증의 결론은 이미 정신을 물질의 분비물로 보는 유물론적 대전제와 자연 변화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인과적 기계론(Kausalmechanismus)의 법칙성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논증은 정신이 물질의 분비물이라는 사실과 기계적 필연성만이 자연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

여기서 토마스 생명이 물리적인 것에 배여 있는 종속성(식물)과 감각이 생명체에 배여 있는 종속성(동물) 그리고 정신이 감성에 배여 있는 종속성(인간)은 동일한 방식의 종속성이 아니라, 각각 전혀 다른 종속방식이라는 것을 밝힌다. 즉 인간의 정신은 이성(理性)과 의지(意志)라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이성과 의지가 얼마나 물리적 영향력 아래 있느냐에 따라서 정신 행위의 예정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이성과 의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물리적인 것이나 천체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이성의 정신적 인식은 감각이 전달해 주는 감각이 전달해 주는 감각적 인식 내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감각은 물체로부터 표상이나 초상을 받아들이고, 그들로부터 개념을 파악하고 명제(문장)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작용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질이나 물체의 물리적 영향권에 들어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의지도 어떤 면에서는 물질과 직결된 물리적이고 생리적 욕구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의지의 직접적 대상은 감각 대상이 아니라, 이성이 전해 주는 정신적 개념이다. 심지어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자신의 “욕구”라는 개념을 따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의지의 할 일이다. 결국 의지는 감각의 영향을 받는 이성의 인식 결과를 자신의 의욕 대상으로 삼아서, 의욕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성보다는 물리적 영향권을 넘어서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인간적 행위는 본능이나 감각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이성으로 심사숙고한 정신적 대상을 의지로 결정하는 행위이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이 행위(actus hominis)는 감각적 욕구를 따른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비록 인간이 행하는 인간의 행위이기는 하지만, 지정한 의미의 인간으로서 행하는 “인간적 행위”(actus humanus)와는 구별된다. 토마스는 이성으로 숙고하고 의지로 선택하여, 자기 자신의 권리로 행하고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행위를 “인간적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인간적 행위란 그야말로 감각이나 본능의 영향권을 벗어나 이성적 척도로 재고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는 감각적인 것을 직접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인식하여 제공하는 개념적인 것을 선택한다. 즉 사고의 세계에서 성적 욕망이냐 참된 사랑이냐, 재물이냐 명예냐, 복종의 안락함이냐 자유의 고통이냐, 심리냐 명분이냐, 구차한 연명이냐 장렬한 자기희생이냐 등을 숙고하여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의지 행위이다. 심지어 의지는 이러한 선택을 위해 만물이 가지고 있다고들 하는 “자제보존의 법칙”을 초월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의 의지는 이성의 눈에 자체보존 보다 더 높은 것으로 비치는 어떤 초현실적인 것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이나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의지를 통해 자신의 극복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인간은 물리적 세계에 몸담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이성은 물리적 세계를 초월하는 사랑, 영원성, 자유, 행복 등을 자기 안에 파악할 수 있으며, 의지는 또한 이렇게 파악된 것을 자신의 보존을 넘어서까지 갈구할 수 있다.

4. 결론

결국 의지의 선택 대상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제공하는 개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천체의 영향권 밖에 있다. 그러므로 천체의 변화와 의지의 선택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도 설정되지 않으므로, 인간의 의지를 운전하는 의지 외적 영향력도 없고, 영향력이 없는 한 예정된 노정이라는 가설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인간 자신이 물리적 세계에 몸담고 있는 한, 인간의 운명도 물리적, 생리적 관점에 국한 해서는 예정되어 있으며, 결국 예언가나 점술가들도 물리적이고 감각적 세계의 흐름을 간파하여 이와 직결된 인간의 행위나 운명을 부분적으로는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 어떤 구체적 행위의 선택 앞에서 자신의 감각적이고 본능적 능력을 사용할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지는 그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의지에 의한 선택의 자유라는 여지가 보장된다. 그리고 예정이나 필연의 가능성은 이러한 의지의 선택 행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지가 선택한 사항이나 목적에 따른 제2차적 행위, 즉 의지의 선택 사항을 수행하기 위한 세부적 행위야말로 그 이전의 선택 사항에 의해 예정되며 선택에 필연성을 가지게 된다. 즉 목적으로서의 “서울행”을 의지가 결정한다면, 그다음에 서울로 가는 행위는 “서울행”이라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 필히 예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지의 선택 능력에는 자유를 설정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을 수행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외적 행위에는 예정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정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지, 의지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 예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의 행위는 자신의 운명의 의미나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그 삶의 여정이나 방법도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