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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영지주의자?

은바리라이프 2010. 2. 8. 16:49

사도 바울이 영지주의자였다니…. 크리스천 그대는 그가 영지주의자였다는 말에 강한 저항을 느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누구던가? 2,000년 기독 신학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그가 아닌가? 달려갈 길을 가열하게 달려가서 의의 면류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던 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던 그가 영지주의자였다는 말인가?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

오히려 바울이 영지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할 만큼 증거가 많이 있다. 한국에서는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운 사이비 기독교 세력들이 이러한 자료들이 자신들의 신앙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을 그악스럽게 막고 있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대도 잘 알고 있는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 <The Jesus Mysteries>에서 바울이 영지주의자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핵심 내용만을 간추려 보겠다.

바울이 영지주의를 반대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영지주의자들이 바울을 영지주의의 창시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그 함마디의 장서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와 <바울의 계시록>이 포함되어 있다.

현대의 고전학자들은 바울의 편지 중 7종만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위조된 것이라고 본다. 바울의 초기 편지 모음에는 목회 서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 목회 서간에서만 바울은 반영지주자이며 교회의 조직자이자 교회 기강의 버팀목이며, 모든 이단자에 대한 확고한 적대자로 나타난다.

그런데 2세기 초반에 로마의 클레멘스 문자주의 기독교 주교는 오히려 바울을 이단자라고 맹렬히 공격하는 편지를 썼다. 바울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고대 그리스 문화를 수용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 처음 배운 것이 그리스어였다. 그는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만을 인용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지배를 받는 이교도 도시에서 설교했다. 그 도시들 가운데 안디옥은 아도니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고, 에베소(에페소스)는 아티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으며, 고린도(코린토스)는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다소(타르수스 : 오늘날 터키의 중남부)에서 출생했다. 당시에 그곳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이교도 철학의 최고 중심지였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가 발생한 곳도 바로 다소였다. 그러니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리스도교 교리와 미트라스 신앙의 가르침 사이의 현저한 유사성을 바울이 몰랐다고는 보기 어렵다. 바울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용어와 구문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예컨대 프뉴마(pneuma, 영혼), 그노시스(gnosis, 신성한 앎), 독사(doxa, 영광), 소피아(sophia, 지혜), 텔레이오이(teleioi, 입문자) 등이 그것이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더욱 위대한 카리스마타를 열심히 추구하라'. '카리스마타(charismata)'는 미스테리아 용어인 '마카리스모스(makarismos)'에서 유래한 말인데, 미스테리아를 목격한 사람의 축복받은 본성을 가리킨다.

바울이 영지주의자였다는 주장을 결론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계보가 바울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비밀 가르침을 구두로 전수받았다고 주장했다.
•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위대한 사도'인 바울이 썼다는 많은 복음서를 가지고 있었다.
• 많은 영지주의자 집단이 바울을 그들 집단의 창시자라고 주장했다.
• 2세기 중반에 바울의 편지를 받은 여러 공동체는 마르키온파 영지주의 본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바울의 반영지주의인 목회 서간은 2세기 후반에 위조된 것이다. 진짜 편지들을 살펴보면 바울은 반영지주의자가 아니며, 결코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지 않는다.
• 2세기 초의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바울을 공격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예수의 참된 가르침과 '모순'되며 바울을 '예수의 적'이라고 주장했다.
•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났다. 다소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 그리고 바울은 자기 편지에서 미스테리아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의 미스테리아의 집사'라고 일컬었다. 이 말은 이교도의 세라피스 미스테리아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이교도 현자들의 말을 인용했고, 이교도 교리를 가르쳤다.
• 올바르게 번역하기만 하면, 바울의 편지들은 강력한 영지주의 가르침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바울은 정식으로 영지주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영적 입문자의 스승이었다. 그는 신비한 셋째 하늘을 여행했다. 그는 예수가 다만 인간 육신의 탈을 쓰고(혹은 육신과 닮은꼴로) 왔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 의례적인 종교를 비난했고, 성서를 '비유'와 '상징'으로 보았다. 또 그는 '중보(중재자)'이며 '이 세상의 신'인 여호와 율법을 거부했다.
• 문자주의자들은 부활이 그리스도 재림 후에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재림 후 무덤에서 되살아나 육체적 불멸성을 얻게 된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부활이 지금 이 자리에서 가능한, 신비한 체험이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가르쳤다. 바울이 나타내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한 위대한 비밀은 복음서에 적힌 대로, 예수가 문자 그대로 이 땅을 걸었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한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한 계시이다.
•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편지도 비밀 가르침을 암호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동시에 두 가지 방식으로'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가르쳤다. 바울의 편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동시에 여러 수준으로 읽힐 수 있도록 꾸며진 것이기 때문이다.
• 바울은 사도들을 안타까워했다. '초보적인'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더 심오한 수준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이런데도 바울이 영지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독일 성서학자였던 루돌프 불트만 또한 영지주의 사상이 바울의 어떤 사상 기원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바울과 영지주의 사상에 공통하는 인간 실존의 이해에도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영지주의 역시 바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특별히 기독론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불트만은 '영지주의의 변형된 특징들'이 바울의 로마서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영지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설명하여 지면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예수 가르침의 중심을 꿰뚫어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지주의는 여러 가지 철학과 종교, 문화의 성격을 띠며,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 지중해 연안과 이집트, 페르시아, 중동, 인도 지역까지 넓은 지역에 고르게 오랜 세월 동안 분포하며 퍼져 있었던 고등한 정신문화의 한 지류였음에 틀림없다.

아시아가 중화 문화권의 정신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흘러왔듯이 인도를 포함한 서구도 그들을 이끌어 주는 공통분모 격의 정신문화가 있었을 텐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나갔던 고대 미스테리아가 아닌가 싶다. 여기서 크리스천 그대가 내 말을 전적으로 수용할 만큼 마음이 열려 있다면 그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즉, 영지주의 가르침이 기록된 문서들을 살펴본다면 그 핵심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으며 불교와 도교, 이슬람 수피즘이나 유대 카발리즘이나 그리스 지혜의 교사들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영지주의를 어떤 특별한 의식을 통해 비밀 가르침을 행하는 밀교 집단이라는 협소한 의미로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영지주의 가르침이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주장하는 바와 같다면, 바울이 가르치는 예수는 기존의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야웨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미 구약에 예언된 바를 구현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한 후에 몸이 다시 부활하여 종말에 다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재림할 예수가 아니라, 영지주의 예수에 더욱 가깝다는 말이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전수하였건 상관없이 그들의 가르침은 헬레니즘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불교나 자이나교, 힌두교, 이슬람 수피즘, 동학, 원불교 가르침들의 원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들 스스로를 정통이라 주장하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영지주의에 대해 정의하고 평가하는 형식 논리가 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논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바울의 가르침의 본질은 영지주의자들의 것과 다르지 않으며, 쉽게 이해되지 않던 성서 기록의 많은 부조화들이 오히려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적용하면 쉽게 이해되고 풀려나가지만, 전통 신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이 부조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여기서 일일이 비교해 가며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대가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찾아서 비교해 보는 것이 그대의 이해에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어쨌든 영지주의 가르침들은 상당히 고등한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왜곡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스스로 정통이라 자처했던 문자주의 기독교는 어째서 영지주의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저항과 반감을 넘어 박멸하려고까지 했는가? 치열한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절대적 전제 왕권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줄 패러다임이 필요했는데, 기독교 특히 유대인들이 영지주의에 입문할 수 있도록 관심을 끌기 위해 당대 유대인들에게 친근한 타나크(TaNaK)를 접목하여 만든 문자주의 기독교가 그의 입맛에 딱 들어맞은 것이다.

국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권력을 튼튼히 보장해 주고 국가 질서를 안정된 방향으로 이끌어 줄 통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한반도에서도 이성계가 이 씨 왕조를 개창할 때 주도적인 브레인 역할을 한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통해 고려 왕조 국가 운영의 사상적 틀이었던 불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중국의 주자학을 끌어들였다. '불씨잡변'에 나타난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서툴고 조잡하기 그지없다.

주자학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중국의 지성들이 불교의 높은 정신문화에 대응할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만들어 보기 위해 노력했던 총칭, 성리학이라는 여러 학파적 지류의 하나이다. 송 대에 와서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했는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理)'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륜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 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 질서, 신분 계급적 사회 질서, 가부장제적, 종법제적 가족 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理)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 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유교의 이와 같은 면은 국정을 운영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를 규율과 질서로서 이끌 수 있는 안정된 틀을 제시해 주고 국민들의 충성을 담보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불교 정신문화의 한계라기보다, 불교의 정신문화가 담보해 낼 수 있는 높은 이상이라 하면 완벽한 자율 속의 질서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자율적 질서가 균형을 잃으면 타율적 질서에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교는 불교의 높은 이상적 가치의 대안 모델이 아니라 차선 모델로서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불교의 정신 가치를 운용하는 자들의 나태와 한계라 할 것이며, 정도전이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불씨잡변'에 인용한 불교의 폐해들도 실은 기존 왕조를 뒤엎고 권력을 잡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의 명분에 불과했다.

이후 불교는 정권의 철저한 탄압을 받으며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고, 조선 정부는 사대문 안에 머리를 깍은 중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성 출입 금지령'을 공표하기까지 했다. 승려는 노비, 백정, 광대, 갖바치, 갈보('창녀'의 우리말) 등과 같이 8대 천민의 하나인 천민 계급이 되었고, 소위 살인죄의 피해자 대상에서 승려가 제외되는 '승살무죄(僧殺無罪)'의 관습법이 시행되는 연원이 되었다. (승려는 타살하여도 살인죄가 되지 아니함) 이러한 탄압과 박해 속에 조선의 불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 온 것은 선조들의 각고의 노력이었으며 또한 한국의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럽고 귀중한 조상들의 정신적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선교 일치를 지향하는 한국의 청정한 통불교 전통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것이다. 특정 종교 세력이 인기를 끌고 기득권의 비호를 받으면 분명 나태해지고 종교적 진정성이 없는 자들이 본질보다는 떡고물의 화려함을 좇아 모여드는 것이 사실이나, 이것은 불교라는 위대한 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깨닫지 못한 인간성의 나약함을 반영할 뿐이다. 불교는 이 나약함들마저 끌어안고 함께 갈 수 있는 위대한 정신 혁명의 힘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이미 그 출발부터가 인간성의 나약함을 넘어설 수 없는 열악한 교리적 한계를 안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까지 퍼져 있었던 영지주의 기독교는 영지주의 입문으로 이끌기 위해 초보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주의 기독교가 영지주의 기독교와 단절된 시점부터 자생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낙점을 받아 로마의 국교로 등장한 이후 강력한 탄압과 박해 속에 그 문서와 서적들마저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명맥은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갔다.

이후 문자주의 기독교의 주교들과 교부들이 세워 나간 기독교의 틀은 크게 보면 유일신 하나님, 삼위일체를 통한 예수의 신격화, 십자가 수난을 통한 인간 죄의 원초적 사함,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들은 애초부터 있었던 원형적 모델이 아니라, 문자주의 교부들의 논쟁과 변증의 산물이다. 문자주의 교부들은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는가 하는 희한하고 기막힌 주제들로 싸움질을 하기도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예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서구 기독교 신앙인들은 얼마나 될까? 아마 소수점 이하 몇 프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문자주의 기독교 정신 동력의 원천이랄 수 있는 서구에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은 진리를 가리키기 위한 메타포로 승화한 지 오래이다.

또한 한국의 신학자들이 고집스럽게 천착하고 있는 종말론적 구원관을 살펴보자면 유대의 묵시 종말적 사상은 유대 문화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며 고대로부터 유대 문화에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해 주었던 주변 고등 문화들의 영향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복음서상의 예수가 임박할 종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것이 지금 신학계의 정설이다. 임박하여 곧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은 지연되고 지연되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연되었으며, 그것에 대해 변론해 주는 기독 신학자들의 솜씨 좋은 언변 속에서만 진화되어 구차한 명맥을 이어 갈 뿐이다.

종말 사상은 유대 문화만의 산물이 아니며 전쟁이나 기근,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가혹함이나 가증스런 억압 세력들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비참한 민중들의 간절한 원(願)에 의해 어느 지역이나 어떤 시대에든지 발호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민중들에게 잔인하리만치 가혹했던 시대에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 와서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미륵 신앙이 있었으며 종말론적 예언서인 정감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종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저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곧 오실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이 지연되고 지연되자 서구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으며 변증해 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선 현대 신학의 종말론에 대한 변증들을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