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은 '현실'이다
이제 더 이상 가상현실은 없다. 디지털 데이터를 이용한 또 다른 사고체계와 현상, 문화의 변동이 있을 뿐이다.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실험적 형태로 개최한 세미나 '21세 정보화시대의 문화 변동'의 결과물을 묶어 단행본 『디지털 시대의 문화변동』을 출판했다. 이 연구소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전산화 사업의 완성하면서 불교 경전 전산화가 지니는 의미를 좀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각 학문 분야에 예외 없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문화의 변동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미나를 마련했다.
철학, 종교, 예술, 과학의 각 분야 전문가들은 이 책에서 자기 분야와 디지털 기술의 관계와 발전, 이에 따른 문화 변화추이를 구체적 예를 통해 제시하며 그에 대한 전망을 시도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환경·상황을 컴퓨터를 이용하여 모의실험(simulate)함으로써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마치 실제 주변 상황·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인간-컴퓨터 간 인터페이스 가상현실. 우리는 이것을 인공현실, 사이버 공간, 가상세계 등으로 부르기는 하지만 더 이상 가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는 이미 디지털 시대라는 시간이 공간을 채워나가는 세계에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디지털과 가상적 무엇인가로 표현되는 시대적 변화추이는 이미 어떤 학문적, 산업적, 문화적 분야의 틀을 넘어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으며 생활패턴은 물론이고 인간 사고체계 형성과정까지 지배력을 증가시키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가 남자 또는 여자이며, 한국인 또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인지한다. 가상현실의 발달은 이런 정체성의 근거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다. 가상현실은 맹렬한 기세로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이 책은 디지털 시대의 과학, 디지털 시대의 예술, 디지털 시대의 종교와 철학 등 모두 3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를 통해 과학연구나 예술창작 등 가상현실이 마땅히 영향을 끼칠 법한 분야 이외의 영역에도 가상현실의 그림자가 매우 폭넓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컴퓨터 게임, 대안의 삶, 세상 밖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가상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많은 사람들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하면 눈에 고글을 쓰고 손발에 센서를 부착한 채 3차원 영상 속으로 들어가는 세계를 생각한다.
그러나 김응남 게임디자이너는 "컴퓨터 게임과 가상현실"을 점검하며 이것은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가상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이 현실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엇비슷하게 재현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지 오감을 자극하는 수준에 머무는 가상현실은 무의미하다는 것. 가상 공간에서 정말 정교하게 제작된 꽃병이 있는데, 이것을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는 컴퓨터 게임이 의사 전달 수단, 가치관의 주입 수단, 고된 삶의 도피처, 또 다른 현실 세계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컴퓨터 게임은 그 긍정적 혹은 부정적 기능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삭막하고 재미없는 현실의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게 될 대안적 삶의 세계" 기능을 하고 있다. 이 같은 기능을 통해 온라인 게임의 세계는 단순한 오락의 차원을 이미 넘어섰으며, 실제 인간인 살아가는 것과 같은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쌈장 이기석을 필두로 게임 스타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TV에서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정기적으로 중계하는 등 가상 현실이 현실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미래 직업상을 제시하고있다.
또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은 가상 공간에서 자신의 분신 '아바타'를 위해 직접 돈을 지불하고 치장할 옷이나 장신구를 사주고 꾸미며 눈에 띄는 아바타를 키우기 위해 정성을 드리고 있지 않은가? 이 같은 현상은 가상 세계를 현실과 동일시하기 시작한 우리 시대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김 디자이너는 "과연 상업적인 목적을 저변에 깔고 있는 컴퓨터 게임 제작사들이 현실보다 더욱 멋진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하고 우려를 표시한다. 이 같은 우려에는 "컴퓨터 게임 세계에서 제작자는 신"이라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은 능력이 있는 제작자가 그에 맞는 책임감을 갖고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 김 씨의 걱정인 것이다. 그는 또 세상은 이미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견되는 새로운 미지의 대안적 삶을 향해 이주하고 있는 상황에 "우리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기술적 발전과 정신적 괴리를 극복할 방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디지털 생태계와 그 전망
서울대 미대교수를 지낸 김민수 박사는 "가상 공간과 디자인"을 다루며 우리가 이미 "디지털 가상공간을 통해 우리의 감감 중추 신경을 다시 포맷팅(reformatting)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육체로부터 감각을 이탈시키고 있는 '통과 의례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이 시대를 진단한다. 그는 가상공간이 우리의 마음이 접속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거주를 위한 건축적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풀어간다.
이 같은 시각에서 김 박사가 주목하는 것은 '사이버디자이너'이다. 사이버디자이너는 "생산과 소비의 물질적 도구의 차원을 넘어서 이른바 '비물질화'된 인간 상호 작용의 가능성과 함께 새로운 시공간 속에 형성된 예술적 생산과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정의를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문학가, 건축가, 음악가, 제품 및 그래픽 디자이너, 애니메이터의 뿔뿔이 흩어진 역할들을 멀티미디어라는 미디어 용광로로 녹여 가상 공간을 구축하고, 컴퓨터가 통제하는 '마음의 생태계'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방식을 디자인한다"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가상공간의 디자인은 과거처럼 단순히 물리적 이미지를 멋지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정보와 인지 구조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한 각별한 이해가 요구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한 인터페이스 디자인은 "인간이 마음의 생태계에서 거주하는 방식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행위"를 뜻하게 된다.
김 박사는 가상 공간의 건축 디자인을 구체적으로 점검하기 이전에 가상 공간에 대한 뒤죽박죽된 우리들의 개념을 먼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지적한다. 사람들은 현재 인터넷 웹사이트와 웹페이지를 동시에 사용하며 3차원의 입체적 '장소'와 2차원의 평면적 '쪽'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데, 이 같은 것이 가상 공간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 같은 혼란이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며 정서적인 혼동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며, '문화적 인터페이스'를 통한 기술 혁명에 대한 침착한 점검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임을 지적한다.
작곡가 김수철은 자신이 직접 연출한 88년 서울 올림픽, 93년 대전EXPO 행사 음악을 준비하는 과정과 결과물에 대한 구체적 실례로 보이며 "디지털 시대의 음악"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다. 김수철은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아이디어만 있으면, 아무리 큰 규모의 행사라 해도 아날로그시대에 행하지 못했던 것을 디지털이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아무리 잘 만들어진 컴퓨터 음악도 실제 연주자의 생생한 감동의 소리를 따라 갈 수 없다고 못박는다.
전통만 말하는 불교, 세상 자체가 가상 현실과 같은 것이라 말하다
사실 우리 나라, 중국, 일본 등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줄거리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인도신화나 불교설화에서 가져온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우리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날아라 슈퍼보드'는 삼장법사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불교경전을 찾아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악마나 귀신 등을 무찌르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한 만화로 꾸며놓은 것이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 인터넷 채팅이나 사이버 캐릭터로 유명해진 '아바타(avatar)'라는 말 또한 인도신화나 종교에서 그대로 따온 것으로 그 개념도 상당히 일치한다.
정승석 동국대 교수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가상 현실의 의미"란 글을 통해 불교나 힌두교에 있어 가상 공간·현실은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주체와 능력을 탐구하는 것이 힌두교와 불교의 최대의 관심사이자 쟁점이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소개다. 이 같은 쟁점은 현대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 발전 덕택으로 경험세계를 교란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가상현실과 그 파생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불교와 힌두교의 사상에서 가상 현실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 앞이라는 개인적 공간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가상 공간에 매몰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유아독존적 개인 탐닉, 자아 분열증, 자기 정체성의 상실 등은 자기 인식상의 교란으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이며,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찾는 노력이 불교나 힌두교의 주된 관심사인 것이다. 따라서 가상 현실과 현실, 아니면 그 모호한 구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한 기본적 해결 방향을 이들 사상과 경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나 힌두교의 인도사상이 제시하는 이들 혼란 또는 가상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정 교수는 인도인들이 생각했던 현실, 환영 또는 마야로 불리는 것들에 대한 개념을 쉽게 풀어 보이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현실과 환영을 점검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신이 되려는 인간의 꿈?
배국원 침례교신학대 교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기독교적 의미"에서 기독교 교리와 가상 현실 관계를 심각한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기독교 복음역사에 있어서 제3천년과 '제3의 위기설'이 시작되는 시기에 다가온 사이버스페이스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입장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배 교수는 사이버 섹스 등을 예로 들며 "교리의 사슬로 꽁꽁 결박해 놓았던 모든 감각의 죄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감각의 제국'을 건설하자는 약속이 곧 사이버스페이스의 의미가 아닌가"하고 반문한다. 사이버 인간은 육체의 감옥을 떠나 디지털 감각의 세계로 몰입하고, 물질이 정보로 대체되며 육체가 정신 패턴으로 대체되는 사회, 바로 그것이 곧 사이버스페이스의 매력이며 함정이 된다. 배 교수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컴퓨터 기술에 의해 강화된 인간 정신이 신의 위치와 시각을 가지고 진정한 전 지구적 신경 체계, 디지털 의식의 초문명을 이루고자하는 꿈"이라고 말하며, "신인류의 새 바벨탑"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사이버스페이스는 성육신의 비밀(秘密)을 탈육신의 비의(秘意)로 대체하는 개념을 보인다고 강조한다. 이제 "인간의 감각과 상상력을 마음껏 해방시키고 육체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전자두뇌 공간에서 영생을 추구하며, 신의 자리에까지 이르려는 욕망"을 구체화하는 도전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도가 디지털 문명을 거부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배 교수에 따르면 이미 미국에서는 사이버 공간에 "기독교 가상주제공원"을 마련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인은 성스러운 성경의 대목을 가상 공간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도마처럼 자신들의 손을 그리스도의 상처에 대볼 수 있으며,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감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미국 라스베가스 옆의 사막에는 "성서 가상공원" 건설이 진행중이다. 여기에는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장면을 가상현실로 재현하는 것이 명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실용적인 차원의 가상공간은 기독교와 양립하기 어렵지 않으나, 전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가상공간의 영토 확장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신은 웹사이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또 권상옥 연세대 교수의 "사이버스페이스와 가상 현실의 의학적 응용", 최종덕 박사의 "가상 세계와 다세계의 정보 창출성" 등과 같이 디지털 시대에 대한 전반적 흐름과 응용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다룬 글들이 실려있다.
모두 12명의 필자가 가상현실이라는 현상을 검토한 결론은, 아마도 이상하 박사의 다음과 같은 진단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가상공간이라는 사회현상은 우리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특별할 뿐이다. 그 공간은 그러나 결코 물리공간과 독립된 마음공간이나 환영, 또는 순수 정보공간인 것은 아니다."
가상 공간, 가상 현실로 다가와 있는 디지털 기술 및 그 응용 분야의 다양한 모습들은 이미 그냥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며 놀랍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냥 궁금해 할 뿐이다. 또 어떤 것들이 가능할까? 그래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글을 마무리하며 하나 같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분석하고 이를 뒷받침할 인문학적 또는 문화적 검증과 비전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단순한 유행이 아닌 외면하기엔 너무나 큰 흐름으로 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우리 시대 문화변동의 어려운 숙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편집자의 변: 출판 편집 및 인쇄 과정에서 정승석 교수의 제목이 표지와 목차에서는 "인도 전통 종교와 불교에서 가상 현실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가상 현실의 의미"로 인쇄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이 같은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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