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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헬레니즘 오리엔트서 탄생” 파르티아

은바리라이프 2010. 7. 23. 00:19

(25) “헬레니즘 오리엔트서 탄생”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5> 헬레니즘의 산실, 니사
“헬레니즘 오리엔트서 탄생”

투르크메니스탄의 남부도시 마리에서 카라 쿰 사막 언저리를 따라 서북 방향으로 45분쯤 날아서 밤 8시 5분, 수도 아슈하바트에 도착했다. 같은 방향으로 실오리 같이 늘어선 카라 쿰 운하가 사막 속에서 가끔씩 숨박꼭질 하듯 출몰하곤 한다. 어둠 깔린 아슈하바트 상공에서 내려다 보니 가로등 불빛이 한결같이 연한 주황빛깔이다. 알고보니 가스등을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지 가이드 도냐의 말에 따르면, 주민들에게 가스는 무료 공급한다고 하며, 내년부터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을 잇는 1400km에 달하는 가스관 부설공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세계 가스 매장량의 10%를 차지하는 ‘가스 왕국’다운 모습이다.

투르크메니스탄 말로 ‘사랑의 거리’란 뜻의 아슈하바트는 새 도시다. 1948년 대지진으로 옛 도시는 자취를 감추고, 폐허 위에 오늘날 60만 인구를 헤아리는 수도를 건설했다. 특히 옛 소련연방에서 독립한 뒤 최근 10년 동안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지금은 1200여개 외국기업이 들어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거리가 깔끔하고 건물이 화려하며 사람들도 활기차 보인다. 이것저것 신기한 일들도 눈에 많이 띈다. 그러나 ‘실크로드 재발견’장정에 나선 필자로서는 오늘보다, 오늘을 있게 한 어제에 더 관심이 쏠렸다. 더욱이 그 어제가 오해되었거나 감춰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밝혀내는 데 우선 눈길을 돌리게 마련이다.

흔히들 헬레니즘을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의 한 원류로 간주하면서, 발상지를 서구로 어림잡는데, 이것은 큰 착각이다. 사실 그 발상지 등에 관해서는 지금껏 명쾌한 해명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으레 찾아야 할 곳을 찾지 않아 그럴 법도 하다. 아무튼 늘 고민해 오던 문제라서 이 기회에 한번 그런 해명에 도전장을 던지고 싶었다. 문제의 고갱이는 헬레니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뤄졌는가 하는 것이다.

헬레니즘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계기로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를 비롯한 오리엔트 문화가 만나 탄생한 동서문명의 첫 융합물이다. 그 중심 발상지는 서구 어느 곳이 아니라,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일원을 석권하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를 계승한 파르티아다. 10년간의 원정을 통해 세워진 알렉산더 제국은 건국자가 급사하자 내홍이 일어나면서 아시아의 셀레우코스와 아프리카의 프톨레미, 유럽의 안티고니즈의 3부분으로 조각났다. 셀레우코스마저도 얼마 못가 소아시아의 페르가몬과 흑해 남안의 비치니아, 카스피해 동남부의 파르티아, 파미르 고원 서북부의 박트리아 속디온 등 8개 소국으로 사분오열된다. 이런 이합집산 과정을 아우른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더 제국의 건립부터 프톨레미가 로마제국에 멸망될 때(기원전 30년)까지 약 300년 동안 지속된다. 이 기간에 그리스-로마와 가장 오랫동안 공존하고 부대끼면서 헬레니즘 탄생과 성장을 주도한 세력은 파르티아다.

파르티아(기원전 247~기원후 226)는 카스피해 동남부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이란계 유목민 아르사케스 일족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방 총독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다. 그래서 일명 ‘아르사크 왕조’라고도 한다. 중국 옛 사서에서 파르티아를 지칭하는 ‘안식(安息)’은 이란어 ‘아르사크’의 음사라고 한다. 전성기에는 강토가 유프라테스 강부터 인더스 강까지 광활한 지역을 망라한 대제국으로 서방의 로마제국과 자웅을 겨루며 실크로드 육로의 서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서 교역의 중간조절자로서 중국 비단의 로마 수출을 차단하고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기도 했다.

파르티아와 헬레니즘은 상승적인 함수관계였다. 파르티아는 새 융합문화인 헬레니즘의 자양분을 흡수해 성장할 수 있었으며, 헬레니즘은 파르티아라는 신흥 제국의 토양 속에서 찬란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런 함수관계는 그리스·오리엔트 문화 사이의 건설적 융합을 바탕으로 성립할 수 있었으니, 그 융합이 이뤄진 주무대가 다름아닌 파르티아다. 비유컨대, 그리스 문화란 ‘신부’가 파르티아란 ‘신랑’에게 시집와서 출산하고 키운 것이 헬레니즘이란 영아인 것이다. 그래서 헬레니즘을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 산실은 과연 어디였을까. 아무래도 이 나라의 초기 수도가 아니었겠는가하는 것이 필자의 평시 소신이었다. 그래서 아슈하바트에서 우선 찾은 곳이 초기 파르티아의 수도였던 니싸 유적지다.


니싸는 이슈하바트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코베트 다크 산맥 동쪽 기슭의 아늑한 대지에 있다. 이 고성은 몽골 군의 유린을 비롯한 2천여년간의 모진 풍상에 닳고 찢기어 허울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나 그 위용만은 잃지 않은 채 자못 으젓하다. 이 고성 유적에 관해서는 1946~60년 타슈켄트 출신의 매손이 이끄는 남투르크메니스탄 고고학종합조사단이 처음 실체를 밝혀냈고, 후일 러시아와 이탈리아 고고학자들도 참여해 면모가 드러났다. 고성은 왕궁인 5각형 내성(옛 니싸)과 그것을 에워싼 상업·거주 지역인 외성(신 니싸)로 구성된다. 입구 전망대에 올라서니 성터가 한눈에 안겨온다. 내성 벽은 진흙과 벽돌로 쌓았다. 높이는 20m나 되며, 정원과 신전, 탑, 방 등의 구조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는 깊이 남짓한 물저장고 자리가 4개나 남아있다. 건물 잔해 중에서는 아치형 왕실 기둥과 사방 20m의 중앙홀, 연회장으로 썼던 ‘붉은 방’, 불피움터가 있던 조로아스터교 원형사원 흔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웅장하고 견고했던 내성 안에 비해 외성 안 건물은 왜소한 데다 심하게 망가져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발상지 서구라고? 큰 착각
페르시아 계승한 파르티아가
그리스와 공존하며 탄생 주도

초기 수도 니사 유물 중
뿔잔 에로스상 유리병…
문화적 융합 잘 보여줘

니사 유적지에서 기원전 2세기에 출토된 다양한 모습의 각배들. 각배는 짐승의 뿔로 만든 술잔으로 그 끝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우리에게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가야와 신라에서도 비슷한 형태와 크기로 된 각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왼쪽 위부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인 켄타우로스 모양의 각배. 젊은 여자를 안고 있는 켄타우로스 형태의 각배. 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뒷다리와 몸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그리핀 형태의 각배. 큰 포도주병을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각배

흥미로운 건 포도주와 관련한 몇몇 유물이다. 양조장에서 관을 통해 포도주를 저장고(구덩이)에 보내는 구멍이 무려 500여개나 발견되었다. 여러 모양의 포도주 병과 함께 아람 문자로 포도주의 출납을 기록한 기원전 1세기께 석판도 나와 포도주에 대한 기호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와 함께 그리스 영향을 받은 유리병, 은동제 에로스상과 아테네상, 흔히 ‘류톤’이라 부르는 40여점의 뿔잔(각배)이 출토되었다. 발견된 보물창고는 크기가 사방 60m나 된다니, 그 속을 가득 채운 보물량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러한 유물들 일부는 수도의 투르크메니스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적 현장과 박물관 출토품은 헬레니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사실 니싸만큼 헬레니즘의 진면모를 극명하게 드러낸 유적은 드물다. 니싸인들은 정치적으로 오리엔트식 전제주의 왕권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식 시민사회의 행정제도를 도입했다. 더욱 두드러진 것은 문화적 융합이다. 한 궁전 안에 조로아스터교 화단과 그리스 신상들이 공존하고, 그리스식 양조법에 따라 현지산 포도주를 빚었다. 특히 뿔잔은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유물이다. 원래 짐승 뿔로 만든 이 잔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 민족들이 쓰던 것을 그리스인들이 신화로 승화시켜 로마에 전승되었을 뿐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적 공예품으로 선호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짐승의 뿔은 ‘코르누코피아’, 즉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에 뿔잔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풍요의 잔’으로 숭상하게 되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니싸 인들은 뿔잔을 받아들여 모양새뿐 아니라, 장식도 다양하고 섬세하게 꾸몄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헬레니즘의 동전 선상에서 가야나 신라도 이러한 잔을 적극 받아들여 여러 형태와 크기의 토기로 변용했던 것이다.

니싸 유적과 출토유물을 접하면서, 헬레니즘 문화의 발생과 성격에 관한 일부 오해를 새삼스레 되새기게 되고, 새 모색의 여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 문화는 어디까지나 오리엔트에서 탄생한 융합문화이지, 제3의 새로운 융화문화가 아니다. 오리엔트 문화가 그리스 문화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어 생긴 동화문화는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헬레니즘이 ‘기본적으로 그리스 문화’ ‘그리스화한 세계문화’ 라는 식의 주장은 얼토당토 않은 편견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되새김과 더불어 헬레니즘이 서양사상을 샘솟게한 원류의 하나라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란 의문을 안고 유적지 문을 나섰다. 멀어져가는 헬레니즘의 산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잉태하고 출산한 산고의 진실에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지 자성하게 되었다.

첫 동서 복합문명 헬레니즘

인류사 최초의 복합문명을 가리키는 헬레니즘은 원래 그리스인을 뜻하는 고유명사 헬렌에서 파생된 용어다. 19세기 중엽 독일 사가 드로이젠(1808~1884)이 처음 사용한 이래 서구문명사뿐 아니라 실크로드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어로 간주되고 있다.

통상 일컫는 헬레니즘 시대, 즉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출발(기원전 336년)부터 로마 제국의 이집트 정복(기원전 30년)까지의 기간과 기원전 139년 한나라의 장건이 비단길을 뚫은 이래 시작된 실크로드 교류사가 겹치는 시기는 100여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헬레니즘 유산은 실크로드 곳곳에 남아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한국 등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사상과 더불어 유럽 문화의 뿌리인 헬레니즘은 기원후 동방 문명의 문화적 얼개또한 규정했던 실크로드 문화의 모태이기도 한 셈이다.

둔황의 벽화, 석굴암, 불상의 주름
간다라의 그리스풍 불상이 모티브

헬레니즘이 실크로드를 통해 낳은 문화사적 열매로는 단연 불교문화의 전파를 들 수 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 인도 동북부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서 발흥했지만, 기원전 2세기 아쇼카왕의 포교로 서북 인도(간다라)에 진출한 뒤 헬레니즘과 만나 세계 종교의 뼈대를 세운다. 인도 토착신앙에 바탕했던 불교는 박트리아의 그리스인들이 진출했던 간다라 지역에서 개인 이성과 세속주의에 바탕한 헬레니즘 문화의 깔때기를 통과하면서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기원전 2세기 박트리아의 메난드로스 왕과 현자 나가세나와의 대화를 담은 팔리어 경전 <밀린다왕문경(밀린다팡하)>은 바로 이런 과정이 함축된 증거사료이기도 하다.

미술사적으로도 헬레니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은 동아시아 불상조각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그리스 신화 전통 아래 인간적 신상을 창안하는 데 천부적 재질을 지닌 박트리아, 간다라의 그리스인들은 인간미 가득한 불상을 처음 만들어 숭배 대상으로 삼았다. 로마벽화에서 파생한 명암법, 사실적인 옷주름 묘사 등도 전해져 바미얀, 키질과 돈황 등지의 저 유명한 벽화들과 고구려 벽화, 신라 석굴암 등에 헬레니즘의 향기를 흩뿌렸다. 지금도 유명 사찰 사천왕상의 어깨에서 볼 수 있는 사자의 견갑 장식, 중국·일본 불화 등에서 보이는 바람신, 뇌신 등의 문양 등도 헬레니즘 문화의 흔적들이다.

사가들은 헬레니즘의 실크로드 전파에서 두드러진 주역으로 그리스인들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의 힌두쿠시 산맥 기슭에 세운 박트리아를 꼽는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중앙아시아 오지에 남겨진 그리스 이주민들이 기원전 3세기 이룩한 이 고대왕국은 서북 인도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기원전 1세기 멸망 때까지 헬레니즘의 원기를 동방에 전파하는 전령사 구실을 톡톡히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