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사도행전 자료

사마리아=구다

은바리라이프 2010. 7. 22. 22:56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본문 : 요한복음 4:9-10


1.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
  당시 유대인들이 성경을 해석해서, 지키도록 한 ‘미쉬나’에는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그릇을 함께 쓰지 않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어떤 유대 랍비의 글에 의하면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든지 사마리아인을 집으로 받아들이면 그 자녀들이 잡혀가게 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그의 책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당시의 유다와 사마리아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천대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멸시와 천대를 받은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창녀보다, 사생아보다, 이방인 노예보다 더 낮은 단계의 계층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유대인의 포로귀환 이후 배척당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 위에 그들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 일로 인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더욱 경멸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말고 다른 곳에 또 다른 성전을 세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산 성전간의 종교적인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긴장은 하스몬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 때 극에 달했습니다. 요한 히르카누스는 B.C 100년경에 세겜을 정복하고 그리심산 위에 있는 성전을 파괴해버렸습니다.

  그 후 두 종족간에는 증오에 가득찬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 후에 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사람의 뼈를 뿌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복수였습니다. 그리심산의 성소가 파괴된 이후 유대인에 대한 이들의 증오심은 끊임없이 불타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모독당했고, 이 일로 그 해 유월절 행사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적대적이 되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다인들'이라 불렀습니다. 구다인들은 페르시아 '구다' 지방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이방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을 구다인으로 부른 것은 더 이상 사마리아인들을 이스라엘의 피를 지닌 족속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설사 너희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더러운 이방 족속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인들을 매우 부정한 여인들로 매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인들을 '요람에서부터 월경을 했던 자들'로 여겼습니다. 그녀의 남편들도 이 여인들로 인해 부정해진 자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누웠던 침대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들이 닿았던 음식이나 음료수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지역을 경유하면서 사마리아 사람으로부터 음식과 음료수를 받아먹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이와 같은 차별은 근거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이 혼혈민족이 된 것은 대제국 앗시리아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압제받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민족적인 비극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아픔은 19세기 남미 원주민이 겪은 아픔이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민족혼합정책에 의해 남미의 많은 원주민 여인들은 서구 압제자들에 의해 자신의 남편, 아들들을 잃고 나서 강제로 압제자의 씨를 그들 몸에 담아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에 의해 태어난 후손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의 슬픈 역사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터전을 초토화시킨 그들의 원수는 그들의 아버지였습니다. 강요받은 선택은 그들의 인생이었습니다. 감당해야할 아픔이자 비극이었습니다.

  압제의 시절이 끝나고 동족과 함께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였음에도 동족은 그들을 더럽다고 멸시하고, 냉대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하고 자신들이 힘써 세운 성전을 부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파괴시켜버렸습니다. 그들이 느낀 허탈감,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동족 사마리아인들이 겪은 아픔을 이해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서로 하나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두 번 죽인 것이었습니다.


2.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을 피하기 위해 베뢰아 지방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땅을 지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았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여인은 예수님께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님은 여인의 아픔, 그리고 여인으로 상징되는 사마리아인들의 아픔을 이해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인은 상종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 주셨습니다.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진지하게 여인을 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존중받아야할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말처럼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런 친사마리아적 행동은 당시에 어떻게 평가되었을까요? 사마리아 여자와의 쇼킹한 만남에다 이틀이나 그 마을에서 유숙한다고 했을 때는 앞으로 닥쳐올 일이 충분히 예감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의 지식인들은 별의별 방법으로 예수를 시험하고 질문을 던지다 잘 안 되자, 최후의 카드, 유대식 색깔공세의 무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한 8:48)는 비난입니다. 좋은 것은 사마리아인에게, 비판은 유대의 권력층에 집중하니 그런 모진 색깔공세가 나올 법도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런 비난은 한차례가 아니라 예수를 줄곧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를 기피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마리아의 존재를 끝까지 의식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인상적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란 말은 굳이 안 넣어도 뜻이 잘 통하는데, 그럼에도 예수님의 의식 속에는 사마리아가 항상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마리아로 이제는 주저 없이 진출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사도행전 8:5), 그에 따라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또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갔다고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 공동체 속에서 지역차별·인종차별은 완전히 사라졌고, 모두가 하나님의 형제자매로서 같이 기쁘게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비슷한 낙인을 찍어 민족분열을 지속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관계를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형성했습니다. 그를 토대로 교회공동체 전체가 편견과 차별을 넘어 평안하고 든든하게 땅끝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던 놀라운 이야기 앞에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반성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편견을 가지고 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어리석음과 악함을 잘 아십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를 버리시거나 냉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우리를 친근하게 대하십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든지, 무어라고 하든지 주님은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잘 이해하시며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렸습니다. 주님이 먼저 편견을 갖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이나 편견에 좌우되지 않고, 주님의 마음과 생각과 말씀을 따랐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하며,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냉대하지 않으신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의 자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아파하며, 슬퍼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되어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