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이스라엘

헤롯의 성전공사

은바리라이프 2010. 7. 17. 19:39

오벨산에는 축제 때마다 찾아오는 그랍테 왕후와 아디아베네의 왕족 별장이 있었다. 시온산 중턱에는 고관(高官)들의 으리으리한 저택(邸宅)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서쪽의 힌놈 골짜기는 경사가 심해서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은 디로베온 골짜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디로베온 골짜기 상부는 그나마 평탄해서 민가와 시장이 들어 설 수 있었다. 그리고 하부로 내려가면서 조금씩 좁아지다가 오벨산과 시온산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좁아지면서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천혜의 요새라고 여기게 된 것이었다.

블라스투스는 모리아산과 오벨산 사이의 구릉지를 매립하면서 성전산이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한 바도 있었다.

아그립바는 성전 뜰의 토대(土臺)가 되는 웅장한 석벽(石壁)을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석벽을 쌓지 않은 상태의 디로페온 골짜기를 상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이내 바위투성이 모습이 떠올랐다. 석벽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의 크기가 어른의 가슴 높이에 이르렀으며,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서 맞잡아야 끝에 닿았으니 그토록 큰 돌을 먼 곳에서 가지고 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저 곳에 있던 바위들을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서 석벽을 쌓았습니다. 뒷부분은 모리아산의 흙을 채워나가면서 말입니다.”

블라스투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역사(役事)가 아닐 수 없었다.

“저 석벽이 몇 년에 걸쳐서 축조되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헤롯께서는 40세가 되던 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당시 극동지역 사령관이었던 마크 안토니로부터 유대 왕 칭호를 받았습니다. 용병을 거느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돌아와서는 욥바와 갈릴리 지역을 평정하고 43세 때에 하스몬 왕조의 안티고노스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서 상주(常住)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8세가 되던 해부터 성전 본당 건축공사가 시작되었으니 석벽 축조공사는 15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석벽 공사가 끝나면서 수십만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뜰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오벨산과 시온산이 만나서 계곡을 이루는 지점에는 로마의 수도교(水道橋)와 비슷한 아취 형 2층 다리를 놓으면서 시온산 중턱의 하스몬 궁전에서 성전 뜰로 들어갈 수 있는 길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유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업적이 아닙니까? 두고두고 칭송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뜰이 조성되고 난 후, 헤롯이 낡고 초라한 멜기세덱 성전을 헐어버리고 다시 짓겠노라고 말을 했을 때, 사제들이 반대를 하면서 성전 본당 건물이 들어 설 자리를 중심으로 사제의 뜰, 백성의 뜰, 이방인의 뜰로 구분을 하면서 이방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사제들 입장에서는 헤롯의 조상은 이두메 출신이고, 로마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하면서 반대를 한 것이랍니다. 혹시 성전을 헐어버리고 다윗처럼 궁궐이라도 들어앉히면 어쩌나 해서 반대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젊은 사제들이 목수와 석공(石工) 일을 배워서 자기들 끼리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건물이 무너지는 대형 사고도 있었습니다.”

매립한 땅에 건물을 지으려면, 자연 침하(沈下)를 기다렸다가 훗날 공사를 한다거나 기초를 단단히 다진 다음 건물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도 경험이 부족한 사제들이 서둘러 공사를 하다가 사고를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길이가 25, 높이가 8, 너비가 12규빗이나 되는 돌들을 차곡차곡 쌓고 보면 부실한 기초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기 마련이었다.

무너진 돌을 걷어내고 기초를 다진 다음 다시 짓기 시작하면서 예정보다 늦게 1년 5개월 후에야 준공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아그립바는 판테온 신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곳 안내원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두 사람 키가 넘을 정도로 땅을 파고 석회, 자갈, 물을 일정한 비율로 혼합해서 채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단단하게 굳은 다음에야 건물을 세웠습니다.’

판테온 신전은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집정관을 수행하면서 3년에 걸쳐서(BC27~BC25) 지은 건물이었다. 판테온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듯이 모든 신을 한 건물에 집합시켰다. 제우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메르쿠리우스 등 지중해 일대의 신들이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아그립바가 판테온 신전을 회상하고 있는 중에도 블라스투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는 자랑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젊은 사제들에게는 황소 같은 힘이 솟구쳐서 피곤한 줄을 몰랐다. 공사 중에는 병들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다. 주께서 함께 하신 것이 분명하다. 밤에는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아침이면 말짱하게 개였기 때문에 은혜를 입은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젊은 사제들에 의하여 본당 건물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헤롯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안토니요새 건물과 시온산 정상에 새 궁전과 세 개의 탑을 동시에 진행시켜나갔던 것이다.

하스몬 궁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궁전을 짓게 된 내막(內幕)을 블라스투스는 ‘말 못할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을 나중에 들려주겠노라고 말한 뒤 성전 뜰을 가리키면서 다시 말했다.

“사제와 백성의 뜰을 구별하는 담장은 무릎 정도의 높이(1엘레)입니다. 백성과 이방인 뜰을 구별하는 담장 높이는 3엘레이어서 키 작은 사람은 발뒤꿈치를 세워야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1엘레 높이의 담장에는 아람 문자로 ‘그 누구도 지팡이나 신이나 전대나 먼지가 묻은 발로 들어오지 못한다.’ 3엘레 높이의 담장에는 라틴어 헬라어 아람 문자로 ‘이곳을 넘을 경우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새겨진 경고문이 붙어 있다고 했다.

1엘레 높이의 담장은 성전 현관 앞 계단 아래에 있는 번제단과 도살장 그리고 거대한 수조 ‘놋바다’와 장작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는 곳을 포함해서 본당 건물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담장 안쪽, 그러니까 성역(聖域)에 해당하는 사제의 뜰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건물은 당직 사제들이 거쳐하는 곳입니다. 건물의 한쪽 구석에는 침묵의 방이 있습니다. 침묵의 방에는 고의적(故意的)으로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어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곳에 있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사면(赦免)과 복권이 되기 때문에 무한정 기다리고 있습니다.”

블라스투스는 3엘레 담장을 관통하듯 서 있는 건물을 가리키면서 다시 말했다.

“첫 번째 건물이 산헤드린입니다. 바로 옆 건물은 대제사장 집무실입니다. 두 건물 중앙에도 백성과 이방인 지역을 구분하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증인으로 출석시킬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이랍니다.”

산헤드린 건물 외에도 백성의 뜰에는 정결의식을 마친 대제사장이 밀폐된 공간에서 일정기간을 보내야 하는 별실(別室)과 성전 경비대장 집무실 그리고 경비(警備)를 전담하는 레위인들의 숙소, 사제들 족보를 보관하면서 금전 출납 업무까지 맡고 있는 문서고(文書庫)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성전 본당 지붕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블라스투스가 또 다시 묻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질문부터 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아그립바는 그의 질문을 받고나서야 지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작지만 뾰족한 것들이 수없이 박혀 있었다.

“까마귀 방벽입니다. 까마귀들이 배설물을 마구 쏟아내는 바람에 뾰족한 것으로 지붕을 덮어버렸습니다.” (소설 파국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