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몬 왕조는 로마의 동방정책이 강화되면서 시리아 군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진 철수할 때, 어부지리로 정권을 차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카베오 형제가 용감하게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계열의 디아스포라들이 예루살렘을 선점하고 있으면서 도시 명칭을 바꾸고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세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깜쪽 같이 속아 넘어갈 내용이었다.
니콜라우스는 마카비 독립 투쟁사라는 것을 액면(額面) 그대로 옮겨 놓고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했다.
‘유다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유대인 하스몬 가문에 속한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동이 되어 시작되었다. 이들이 항거(抗拒)의 기치를 내걸자 많은 유대인이 그들 주변에 모여들었고 결국 혁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혁명의 지도자는 마타디아의 다섯 아들 중에서 유다였다. 그의 별명은 쇠망치(마카비)였다. 사람들은 그를 유다 마카비라고 불렀다.’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혁명군은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 지형과 지리에 익숙하다는 강점을 살려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승리의 전기를 잡아나갔다. 3년간의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혁명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곧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의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제거하여 정화하였다. 이 날이 기스레브(9월) 25일이었다.’
‘유다 마카비가 싸우다가 죽고, 그의 형 시몬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유대의 대제사장 겸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시몬은 하스몬 왕조의 첫 번째 인물인 셈이고, 뒤를 이어 요한 히르카누스 1세, 아리스토불루스 1세, 알렉산데르 야나이우스의 미망인 살로메 시절에 두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히르카누스 2세가 말썽을 피우면서 폼페이우스 장군이 개입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로써 하스몬 왕조는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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