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뉴스/문화읽기

성경을 통해 본 통일(32) 이효삼 목사

은바리라이프 2010. 5. 22. 00:20

성경을 통해 본 통일(32) 이효삼 목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통일 언행 “누가 저 쓰러진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솔로몬 사후 남북으로 갈라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그 후 9백년이 지난 예수님 당시까지도 갈라져 반목과 질시 속에 있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우대화된 갈릴리, 사마리아, 유다의 세 지역으로 나눠 통치되었다. 우리는 남북 분단 50여년이라지만 그들은 9백여 년 동안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런 가운데 통일하시는 (요 11:51-52,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실”)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한 율법사가 와서 “영생 얻으려면 어떻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눅 25-28)고 했다. 그때 율법사는 다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으로서 풀어가기 위한 이 예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서로 증오가 가득 찬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이 고난의 현장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웃이 되어 가는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면서 처음의 질문인 영생이란 것은 하나님 사랑해야 하는 것임은 물론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러야 진정한 영생에 거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누가복음 10장29-37절 말씀을 분석해 보자. 여기서 많은 이들이 본문을 오해한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묻는 율법사에게 “그것도 몰라?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지!”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예수님은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대답하지 않으셨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이웃’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을 가지셨다.

 

여기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기준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의 이웃’이 누구인가의 기준이 틀리다.

 

▷ 율법사의 질문: 누가 내 이웃입니까? Who is "My" neighbor?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마치시고>

▷ 예수님의 반문: 누가 그(쓰러진 자)의 이웃이냐? Who is "His" neighbor? 율법사는 ‘나 중심’(I-centered)의 사고 속에 있었다.

 

나를 중심해서 이 사람은 이웃이고 저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다. ‘너 중심’ 또는 본문처럼 ‘그 중심’ (He-centered)의 사고를 하시고 행동하신다. 그래서 이웃이 누구냐에 대해선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대신 네가 이웃이 될 것이냐 아니냐 하는 실천의 문제(“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를 제기하고 계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사고체계를 ‘나 중심적인’ 세상 기준의 체계가 아니라 ‘그 중심적인’ 하나님나라의 시민의식의 체계로서 살아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나’가 문제이다. 나의 편견과 특권을 버려야 그에 대한 이웃 사랑을 가질 수가 있는데 그거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서야 비로소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가 없는 이유를 알겠다. 율법사의 입장에서 보자. 그가 이웃을 알려면, 우선 강도만나 쓰러져 반쯤 죽은 유다인의 이웃이 되어야 하고 또 그 동안 원수시 했던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