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뉴스/문화읽기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

은바리라이프 2010. 4. 1. 19:21
여러분이 아르바이트생인데, 시급이 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마 지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새로 지를 물건을 찾아볼 것이고, 미래에 대비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저축을 늘리기 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보기에 매우 정상적이고, 상식에 맞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인간이 단위 소득의 증대에 대해 지출이나 저축의 확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우 최근에 들어 생겨난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단위 소득이 증가하면 노동량이 감소하는 반응이 나타났고, 따라서 전체 소득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시급이 늘었으면 과거와 똑같이 일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행동 아니냐?"라고 따지시겠지만, 전통적인 사회에 살던 사람이라면 "시급이 늘었으면 일을 적게 하고도 같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데, 일을 줄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냐?"라고 따질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우리가 자본주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경제활동을 삶의 일부분, 그것도 매우 작고 하찮은 일부분으로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직업관을 보여주는 사농공상이라는 분류를 봐도, 돈을 가장 적게 만지는 선비가 가장 대접받았고, 돈을 많이 만질수록 격이 떨어져, 결국 돈을 가장 많이 만지는 상인은 가장 비천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돈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던 시대에는 돈을 많이 벌려는 노력은 곧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대부분 사람은 돈은 적절히 벌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당시엔 농사가 경제의 중심이었기에, 돈을 많이 벌고 싶어도 그럴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죠.

돈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돈을 벌려는 노력에 대한 멸시는 많은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해서 결국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바꾸는 능력을 얻게 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어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고대 그리스의 미다스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맘몬(돈의 신)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고,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돈을 사랑하는 저주스러운 마음(auri sacra fames)이 인간을 어려움에 빠트린다고 말했습니다. 유럽 중세 신학자들이 물질을 향한 탐욕(avarice)을 교만과 함께 가장 끔찍한 죄로 인정한 것은 당시 사회의 물질관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돈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막스 베버는 미국의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이러한 새로운 태도의 예를 찾습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해서 열심히 돈을 벌라."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르침은 우리가 보기엔 당연한 말이지만, 돈을 벌려는 노력을 죄악시하는 전통적인 사회의 가치관을 뒤엎는,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돈을 중요시하는 태도를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Der Geist Des Kapitalismu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정신이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진정한 자본주의가 탄생한 것이지요.

자본주의 정신을 옹호하는 이론적 토대를 놓은 사람은 바로 애덤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노력할 때 결국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 모두가 부유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과거엔 돈을 벌려는 노력이 이기심의 표현이기에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돈을 벌려는 노력은 모두를 유익하게 하기에 사회가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하게 되었죠.

사회가 돈을 긍정적으로 대하자, 전통적으로 돈에 대한 욕심을 부정적으로 보는 교회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고, 가능한 한 많이 저축하고, 가능한 한 많이 베풀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교회가 돈을 많이 벌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자면, 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상업이 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떠오르면서, 돈을 벌면 신분 상승이 가능한 시대가 열립니다. 이러한 때에 생겨난 속담이 바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라는 말이죠. 이 말은 "돈을 버는 일은 천하다."라는 말과, "돈을 열심히 벌라."라는 말 사이에 충돌이 느껴지는데, 이는 당시 진행되던 가치관의 변화 때문입니다. 게다가, "돈을 벌면 신분이 올라갈 수 있다"는 뜻까지 담고 있기에 당시 시대 상황에 잘 맞는 말이죠.

이처럼 돈을 적극적으로 버는 태도가 도덕적이고 올바른 태도로 인정되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열심히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전통의 가치인 공동체나 가정, 겸손과 절제는 무너졌고,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지요. 특히 "기독교"라는 전통이 돈을 중시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견제한 서구와 다르게(물론 20세기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교회가 자본주의에 편입되는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한국은 전통의 모든 종교(유교, 불교, 샤머니즘)가 무너져내린 공백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들어왔고, 이로 말미암아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자본주의 정신이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중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고,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막는 역할을 포기한 지난 20-30년 동안 사회 전체가 급격하게 자본주의화 하면서, 물질 이상의 가치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고, 남에게 큰 피해를 주더라도 나만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돈을 열심히 벌려는 자본주의 정신이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자본주의 정신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인류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편적 풍요"(universal opulence)에 한 발짝 다가섰습니다. 과거엔 부유한 왕, 부유한 귀족은 있었어도, 국민 대부분이 부유한 나라는 찾아볼 수 없었죠. 그에 비해 지금은 웬만한 선진국에선(미국 제외) 어느 이하로 가난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이는 자본주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신은 풍요와 함께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도덕도 예의도 염치도 모르고, 돈만 벌면 된다는 천박한 인식은 자본주의 정신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장 경제 체제에서 살아가지만, 자본주의 정신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 정신이 좋아서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괜찮겠죠. 자본주의 정신을 거부한다고 우파들이 말하는 "빨갱이"는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