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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말한다 / 사도행전 3장 1절~16절

은바리라이프 2010. 3. 18. 16:16

온 몸으로 말한다 / 사도행전 3장 1절~16절

 

 

오래전에 흑백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함께 보며 밤이 늦은 줄도 몰랐습니다. 그때야 텔레비전 드라마 중간 중간에 나오는 상품광고도 신기하고 재밌는 시절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기만 하면 최고로 좋은 상품으로 알았던 시절, 그때는 잘 생긴 남자 모델이나 예쁜 여자 모델의 모습만으로도 저절로 CF가 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CF 모델이 얼굴만 예쁘면 오케이(OK)’했던 시대가 지난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몸짱’이 일상용어처럼 자리 잡고, 몸의 움직임이 자유와 매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즘에는 ‘몸’을 쓸 줄 아는 모델이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바디랭귀지(Body language)'를 통해 오감을 자극하는 CF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몸부림’전략이라야 시청자를 웃기고, 또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디랭귀지 CF는 단순히 매끈한 몸을 앞세워 시각적인 충만감을 노리는 게 아니라 몸을 언어의 대체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하나폰의 국제전화 005 광고와 삼성애니콜 V540 CF입니다. 두 광고에서 걸출하게 몸을 사용하는 주인공은 연기자 최성국과 가수 이효리입니다.

국제전화 005 광고와 같은 경우, 보고도 웃지 않는다면 목석이 아닌지 의심해보는 게 좋을것입니다. 철이와 미애의 93년 히트곡 ‘너는 왜’의 익숙한 인트로 부분인 ‘오오오’ 소리만 나오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최성국의 보디랭귀지가 배꼽을 사정없이 흔듭니다. 최성국이 두 팔을 뻗고 무릎을 굽힌 뒤 엉덩이를 빼 알리려고 애쓰는 메시지는 바로 005의 ‘5’였습니다. 그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가도 ‘오오오’라는 음악만 흘러나오면 헐레벌떡 뛰쳐나와 몸으로 ‘5’자를 만듭니다. 최성국의 능청맞은 엉거주춤 포즈가 백 마디 말보다 강렬하게 5자를 뇌리에 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애니콜 V540 CF는 ‘섹시’ 보디랭귀지 광고입니다. 이효리가 비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야릇한 보디랭귀지 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리 스믹스의 ‘스위트 드림스(Sweet Dreams)’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만나는 사람들과 닿았다 뗐다 야릇하게 몸의 여기저기를 비비는 섹시 ‘스킨십’ 동작 퍼레이드로 이 CF가 전하는 메시지는 뚜껑이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슬라이드폰의 기능과 섹시한 미녀라는 모델의 특성을 적절하게 살리면서 제품 특성을 빗댄 보디랭귀지를 재치있게 연출해 제품에 대한 강한 구매욕을 자극한 것입니다.

요즘 세대는 특히, 대부분 보디랭귀지라는 아이디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고 또, 따라 하기를 좋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광고계가 CF모델이 제품을 들고 그저 씩~ 웃는 이미지 전략에서 온 몸으로 의사를 전하는 전략으로 그 방법과 형식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오래전에 신앙의 습관대로 마치 아직도 흑백텔레비전과 같이 여전히 변하지 않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또, 흑백텔레비전의 CF광고 모델과 같이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저와 여러분들도 온 몸으로 말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온 몸으로 말한다.’는 말 역시 CF광고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온 몸으로 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한, 신앙생활을 온 몸으로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을 다하여 증거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형식과 틀에 얽매인 외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몸과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일상에서 강하고, 진실 되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온 몸으로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입술로만 말씀을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 13:5), 소경을 고치시고(눅 18:38),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죄 사함을 위해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같이 온 몸으로 말씀하신 경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사도행전 3장 1절~1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온 몸으로 증거 하는 삶이 어떤 삶인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베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주는 치료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언제나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CF모델로 등장했던 최성국과 이효리가 온 몸으로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국제전화 005라는 것과 삼성전자의 핸드폰 신 모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다소 우스꽝스럽고 섹시하게 온 몸을 움직였던 것이 무의미한 동작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분명히 전달하고자 하는 전달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성경도 그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주는 사건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그것을 확고히 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온 몸으로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삶을 의미 합니다.

증인이라는 것은 직접 체험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증인이라는 것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하는데 말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3장 15절에서 베드와 요한은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말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고치셨다는 것과 베드로와 요한 자신들은 오직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삶을 통해 전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접 체험하지 않는 사람을 증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법정에서도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당 사건에 직접적으로 체험하거나 목격하지 않는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직접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은 증인으로서 자격미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 또한,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증인으로서 충분한 요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증인으로 인정받은 사도임을 고백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1~13까지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여전히 함께 하시며 역사하시는 성령의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 있게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진 참된 증인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을 온 몸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을 통해 만날 수 있으며 말씀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가며, 목숨을 버려가면서도 온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만남과 체험을 통한 확실한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진정으로 만나고 체험하신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정확한 증거가 될 것이며 성령의 확증이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며 성령의 확증으로 자신의 삶에 가득 채워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의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을 보면서 초대교회의 순교자인 이그나티우스의 고백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당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내게 있는 것으로”라는 고백과 순교자 이그나키우스의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라는 고백이 너무도 일치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온 삶을 다하여 그분을 증거하고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그분의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둘째로 “온 몸으로 말한다.”는 것은 겉치레와 같은 습관으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한 상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절에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정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 기도하였습니다. 제 삼 시인 오전 9시와 제 육 시인 정오, 그리고 제 구 시인 오후 3시에 말입니다. 이것은 꼭 지켜야만 하는 율법 규례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9:39절에 보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시간이 되어 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시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관습을 따라 성전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구걸을 위해, 사람들에 의해서 운반되어져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을 매우 큰 덕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에 올라가던 수많은 사람들은 구걸을 하고 있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하나님께 상을 얻기 위하여 동전을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습관을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고, 3절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했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도 습관을 따라 구걸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도로서의 많은 시간들을 습관을 따라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조차 습관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므로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급하여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직분상, 그저 예배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하니 시간 때우기 식의 형식적인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된 김남준 목사님의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게으름이라는 책을 보면 “영적 게으름이란 잠시도 쉬지 못하고 바쁜 생활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잠시도 쉬지 않고 습관을 따라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기도회에 참석한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지 않는 여러분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게으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목하였다는 원어적인 의미(아테니사스)로 대상을 향한 집중적인 응시를 말하며 이것은 사도행전 1장 10절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자세히 쳐다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이르되’라는 것은 습관이나 형식적으로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보고 동전이나 던져주는 구제행위를 하려고 주목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함으로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영혼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에 의해서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모든 생각과 판단의 초점, 그리고 자신의 온 신경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맞추었을 때 성령의 감동과 그 분의 역사를 위한 시선과 행동이 날 수 있었으며, 오직 그분의 말씀에 따르는 것,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며 온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결정적인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맥아더 장군이 최전방의 전선을 시찰하고 있을 때 모든 부대가 후퇴한 상황에서도 후퇴하지 않고 여전히 전선을 지키고 있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맥아더 장군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당시 스무 살의 한 일등병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진지(陣地)에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전쟁이 터진 지 나흘째, 이미 한강 이북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그곳은 남한의 부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강방어선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날아와 상황을 돌아보던 참이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 이 군인에게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곧바로 한국전 참전은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등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등병은 신동수(辛東秀) 옹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속한 부대는 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였다고 합니다. 당시 100명 중 7명만 살아남았고 그는 결국 다리가 절단되었지만 그의 충만했던 애국심이 유엔군 참전이라는 큰 성과를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병사가 애국심에 충만했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영적 전투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참전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걷게 되어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린 것과 같이 그러한 찬양과 기쁨과 영광이 넘치는 삶이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온 몸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CF모델로 나온 최성국과 이효리의 몸동작들을 보여주었던 광고의 목적은 최성국과 이효리를 알리기 위함에 있지 않고 오직 제품을 알리기 위한 것에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으로 저와 여러분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고침 받은 장면에 주목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주고 난 후의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쳐주고도 12절에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오히려 자신들의 주변으로 모이는 사람들을 책망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의 행동에 대한 해답은 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치료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치료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감추고 오직 자신 안에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 몸으로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겸손의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자기 피알(PR) 시대'입니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며,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진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므로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경쟁력 시대에 겸손은 오히려 성장의 장애물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겸손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은 자신을 빛나게 하는 길이며, 타인으로부터 존경받게 하고, 오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가운데 성자라고 불릴 만큼 큰 업적과 아울러 흠모할만한 신앙과 인격을 지녔던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질문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겸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럼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였답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이라고 했고 "모든 미덕의 바구니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식도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하기위한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져야 가치가 있습니다. 능력도, 돈도, 아름다움도, 권력도 바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하기위한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질 때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빈 깡통이 더욱 소리가 요란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튀는 물고기 도마에 먼저 오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겸손을 강조한 말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숨기는 것을 당연시하였고, 자신의 잘난 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습니다. “생명력 있는 씨앗은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세상에 나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섬기는 언어 중에서’라는 열린 편지의 내용 중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온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생명력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며 그것은 굳이 저와 여러분이 억지로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이름이 있는 곳에 저와 여러분 또한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 합니다.

등고자비(登高自卑)란 말이 있습니다. 몸이 귀해질수록 겸손을 잃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베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40년 동안이 걷지도 못하고 구걸만 하던 사람을 고쳐주었으나 그것을 자신들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다만, 그분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이 고통과 절망의 삶 속에서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근원적으로 변화되는 영광의 통로였으며, 이로 인해 남자만 오천이나 되는 수가 예수님을 믿는 능력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의 삶은 습관과 형식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 몸으로 말하는 삶을 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능력의 삶이며 기쁨의 삶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회복의 통로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온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삶이란 증인으로서의 삶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한 삶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은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고침 받은 후의 모습과 같이 기쁨과 영광을 맛보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