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그리스도교 : 역사 (5) by 그루터기

은바리라이프 2010. 3. 4. 21:22

그리스도교 : 역사 (5) by 그루터기

댜.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1. 패러다임 전환의 주도자 : 바울

스데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서 달아나 안디옥에 정착했던 헬라계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길을 앞서 닦았다. 당시 로마제국의 쌍 속주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수도였던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로서, 국제 교역의 중심지였고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육로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곳 안디옥에서 헬라계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은 막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고, 태생 유다인들과 태생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혼합 공동체가 창설되었다. 또한 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64쪽)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지칠 줄 모르는 정신적, 신학적 활동과 선교, 교회정치 활동을 통해 유다계 그리스도교 내에서 과연 최초의 중대한 전환이 준비, 시작되었으니, 곧 유다인 그리스도교로부터 전적으로 그리스어(나중엔 라틴어)를 사용하는 이방인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이 그것이었다. (165쪽)

우리는 앞서 바울의 신학은 예수의 선포와 확고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예수 전승은 바울 서신에서 우선은 어딘가 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 그런가? 그 전승이 전혀 다른 관점, 범주, 표상들 안으로 흡수, 변형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 전승이 전혀 다른 전체상황, 바로 헬레니즘 패러다임 안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나 다른 모든 세계종교들과 구별해주는 것,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또 언제까지나 그러해야 한다. (168쪽) 이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를 거리낌없이 그들의 헬레니즘적 맥락 안에서 읽었다. ...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의식율법은 자신들과 아무 관계 없다고 생각했고, 할례나 할라카에도 전혀 의무감을 느끼지 않았다. ... 애당초 선민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공동체 구성원이 되는데 결정적인 것은 결코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라는 가입의례에 의해 봉인되었다. (169-170쪽)

2. 교계제대로를 갖춘 교회의 생성

인간들의 공동사회에는 통상적으로 많은 임무, 직책, 기능들이 있으며, 신약성서도 일련의 직무들을 구별하고 있다. 복음 선포 기능은 사도, 예언자, 교사, 설교자, 권고자들이 담당했고, 그다음 자선, 구호 기능은 봉사자, 구호 담당자, 간병자, 공동체 봉사 과부들이 맡았으며, 끝으로 공동체 지도 기능은 첫 회심자, 책임자, 감독, 지도자들이 담당했다. (170쪽) 그런데 바울 공동체들은 일치와 질서를 어떻게 보존할 수 있었던가? 바울은 일치와 질서를 결코 다양한 면들의 평준화, 획일화, 위계화, 중앙집권화를 통해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치와 질서는 하나인 같은 영의 역사에 의해 보증된다고 믿었거니와, 이 동일한 영은 각 개인에게 모든 카리스마를 주지 않고 각자의 카리스마를 선사하신다(원칙: 각자에게 그의 것을!). 카리스마는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고(원칙: 서로서로를 위해!), 한 분 주님께 순종하며 사용해야 한다(원칙: 주님께 순종!). (171쪽) 

확실한 사실: 이미 유다계 그리스도교 패러다임의 교회는 단어의 가장 훌륭한 의미에서 민주적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 자유, 평등, 형제애의 공동체였거니와 바울의 공동체들은 더욱 그러했다. (175쪽) 팔레스티나 전통에서 매우 일찍부터 어느 정도 제도화가 시작된 이후, 바울 공동체들도 결국 제도화를 피할 수 없었다. 제도화는 유다교의 원로단과 안수 의식을 넘겨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 (178쪽) ... 주교들(그리소 사제들)의 특별한 "사도 계승"의 요체는 공동체, 교회 건설과 지도에 있으나, 그것은 복음선포에 뿌리박아야 한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카리스마를 "끄지 말고" 북돋아야 한다. 예언자들과 교사들도 고유한 권위를 보유한다. 결국엔 관철된 안수를 통한 서품은 자동적,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생하는 의식이 아니다. 서품은 사도들의 정신에 터해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할 믿음을 전제하고 또 요구한다. (180쪽)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회 그리고 몇몇 루터 교회도 오늘날까지 유지해오는 사제-주교 교회제도는 우연이나 변태가 아니라 바울에 의해 시작된 헬레니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의 일부이며, 또 그로 인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산물이다. (1) 단계 1. 지역에 터잡은 사제-주교들이 예언자, 교사 그리고 그밖의 카리스마적 봉사자들을 제치고 주도적인 그리고 마침내는 독점적인 공동체 지도자들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180쪽) (2) 단계 2. 공동체의 많은 동료 사제들을 마주하여, 갈수록 군주제적 1인 주교직이 도시에서 관철되었다. 성직자들과 백성의 분리가 결정적으로 관철되었다. (3) 단계 3. 도시에 있던 교회가 시골에까지 확장됨으로써 도시 교회의 우두머리였던 주교가 이제 교회 관할지역 전체 곧 교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82쪽) 비록 로마 공동체나 신자 개인들이 오랫동안 수위권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이제는 로마가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선도적 교회가 되었다. 유다계 그리스도교 패러다임(P I)에서 이방계 그리스도교 패러다임(P II)으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예루살렘 대신 로마가 그리스도교의 우두머리 담지자이자 대들보가 되었다. (184쪽)
 
예수 자신의 뜻과 첫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던 정신 그리고 바울 공동체들의 카리스마적 구조에 비추어보건대, 주교들 듣기에는 심히 거북하겠으나, 이 조직에 결코 절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신약성서 학자 호프만은 이 전개과정의 부정적 결과를 옳게 지적했다. "남자들과 신부들의 교회가 '강력하고 오래 지속'됨으로써 치러야 했던 대가는 무엇보다도 여성 모독, 성숙한 공동체의 퇴행, 교도권이 모든 권한을 전유함에 따른 성령의 은사들의 대대적 구축(驅逐),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열, 갈수록 화석화되어가는 전통에 의한 예언자적 선포의 대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일치' 혹은 '교리의 순수성'의 이름으로 체제 유지를 위해 희생되었다. (185쪽) 

- 한스큉, 이종한 옮김,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분도출판사,  2005 (재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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