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누가문서의 저자와 바울서신과의 관계

은바리라이프 2010. 2. 18. 20:01

누가문서의 저자와 바울서신과의 관계

김 희 성(조교수)

서론.

누가문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것의 저자와 바울서신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누가복음의 편집부분을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사도행전의 자료를 밝히며, 역사기술과 픽션 사이의 장르를 규정하여 거기에 묘사된 바울상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을 연구하는데 큰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학계에서 바울서신이 누가복음의 편집 자료가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그 복음서의 자료가 마가복음,Q, 특별자료 등으로 너무 뚜렷한 것들이 있어서 그런지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또한 행전과 바울서신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이미 학계에서 지적된바와 같이, 행전의 바울상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상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그래서 학계에서도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다만 그것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설들만 제기되고 있다. 일단의 신학자들, 예를 들면 W.G. Kümmel, G. Schneider, H.-M. Schenke, C.K. Barrett, A. Weiser, E. Plümacher 등은 행전의 저자가 바울서신을 몰랐다고 추론한다. 그 반면에 다른 이들, 예를 들면 G. Klein, C.H. Talbert, C. Burchard, J. Lambrecht은 행전의 저자가 바울서신을 알고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A. Lindemann는 좀 더 구체적으로 누가가 직접 로마서, 고후 10-13?장과 갈라디아서 등의 바울서신을 제한적으로 알았다고 가정하면서 그가 이 서신들을 “아주 적은 범위에서만 사용했다”고 언급한다. 마침내 M.S. Enslin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가가 항상 바울서신들을 아주 중요한 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연구사의 이러한 여러 주장들 가운데서 본인은, 누가가 “바울사역에 대한 몇 개의 본질적인 사실들을 잘못 알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Lindemann과 Enslin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이 연구를 통하여 누가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서신을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문학적 기술로 독특하게 상당히 많이 사용했음을 밝히려고 한다.

본 소고의 연구는 누가문서와 바울서신들의 비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비교에 있어서 특히 언어비교와 주제분석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비교의 대상은 진정한 바울서신에 속하는 문서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전후서, 로마서, 고린도 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등에 한정한다.

본론.

여기에서는 Nestle-Aland 26판과 1964년 판 관주 성경전서의 관주를 참조한 가운데 언어와 주제에 있어서 서로 연관성이 높은 구절의 글들만을 비교하며 다루겠다. 두 문서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서로 비교되는 부분들을 한번은 누가문서의 순서에 따라 정돈하고 또 한번은 바울서신의 순서에 따라 정돈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문서의 순서에 따라 정돈해야 누가문서의 어디에 바울서신의 병행구가 집중되는지 알게 되고, 바울서신의 순서에 따라 정돈해야 바울서신의 어디에 누가문서의 병행구가 집중되는지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밝혀진 집중구들을 통하여 비로소 누가가 바울서신의 어디를 풀어서 사용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두 가지 방법으로 정돈한 것을 다 소개하면 분량이 너무 많아 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누가문서의 순서에 따라 정돈한 것만을 소개하겠다. 그 반면에 바울서신의 순서에 따라 정돈한 것은 소개하지 않고 그렇게하여 바울서신을 풀어 쓴 것이 분명한 곳만을 본 소고에서 언급하겠다.

누가문서의 순서에 따라 정돈하는데 있어서 먼저 누가문서 가운데 그 일권에 해당하는 누가복음과 바울서신과 서로 비교되는 부분을 살펴보고 그 관계를 해명하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누가문서의 이권에 해당하는 행전과 바울서신과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1. 누가복음과 바울서신과의 관계.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에 서로 언어적이고 내용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들을 누가복음의 장절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1. 병행구 비교표.

눅 1,19: ἀπεστάλην λαλήσαι πρὸς σὲ καὶ εὐαγγελίσασθαί σοι ταύτα (특별자료); 살전 3,6: εὐαγγελισαμένου ἡμίν τὴν πίστιν καὶ τὴν ἀγάπην ὑμών.

눅 1,58: συνέχαιρον αὐτῇ(특별자료); 롬 12,15: χαίρειν μετὰ χαιρόντων.

눅 1,59: καὶ ἐγένετο ἐν τῇ ἡμέρᾳ τῇ ὀγδόῃ(비교. 창 21,4) ἦλθον περιτεμείν τὸ παιδίον(특별자료); 빌 3,5: περιτομή ὀκταήμερος.

눅 1,70(비교. 행 3,18.21): καθὼς ἐλάλησεν διὰ στόματος τών ἁγίων ἀπ’ αἰώνος προφητών αὐτού(특별자료); 롬 1,2: ὅ προεπηγγείλατο διὰ τών προφητών αὐτού ἐν γραφαίς ἁγίαις.

눅 1,79: ὁδὸν εἰρήνης(특별자료); 롬 3,17: ὁδὸν εἰρήνης. 

눅 2,22: παραστήσαι τῷ κυρίῳ(특별자료); 롬 12,1: παραστήσαι ... τῷ θεῳ.

눅 2,52: χάριτι παρὰ θεῷ καὶ ἀνθρώποις(특별자료); 롬 14,18: εὐάρεστος τῷ θεῷ καὶ δόκιμος τοίς ἀνθρώποις.

눅 9,62: οὐδεὶς ἐπιβαλὼν τὴν χείρα ἐπʾ ἄροτρον καὶ βλέπων τὰ ὀπίσω εὔθετός ἐστιν τῇ βασιλείᾳ τού θεού (특별자료); 빌 3,13: τὰ μὲν ὀπίσω ἐπιλανθανόμενος τοίς δὲ ἔμπροσθεν ἐπεκτεινόμενος.

눅 10,7: ἐσθίοντες καὶ πίνοντες(Q편집); 고전 9,4: φαγείν καὶ πείν.

눅 10,7: ἄξιος γὰρ ὁ ἐργάτης τού μισθού αὐτού(Q편집); 고전 9,14: οὕτως καὶ ὁ κύριος διέταξεν τοίς τὸ εὐαγγέλιον καταγγέλλουσιν ἐκ τού εὐαγγέλιου ζήν.

눅 10,8: ἐσθίετε τὸ παρατιθέμενον ὑμίν(Q편집); 고전 10,27: πάν τὸ παρατιθέμενον ὑμίν ἐσθίετε.

눅 10,16: ὁ ἀθετών ὑμάς ἐμὲ ἀθετείʹ ὁ δὲ ἐμὲ ἀθετών ἀθετεί τὸν ἀποστείλαντά με(Q편집); 살전 4,8:τοιγαρούν ὁ ἀθετών οὐκ ἄνθρωπον ἀθετεί ἀλλὰ τὸν θεὸν τὸν καὶ διδόντα τὸ πνεύμα αὐτού τὸ ἅγιον εἰς ὑμάς.

눅 10,20: τὰ ὀνόματα ὑμών ἐγγέγραπται ἐν τοίς οὐρανοίς(특별자료); 빌 4,3: ὧν τὰ ὀνόματα ἐν βίβλῳ ζωής:(비교. 시 69,29).

눅 11,7: μή μοι κόπους πάρεχε(특별자료); 갈 6,17: Τού λοιπού κόπους μοι μηδεὶς παρεχέτω.

눅 11,48: συνευδοκείτε τοίς ἔργοις τών πατέρων ὑμών(Q편집); 롬 1,32: συνευδοκούσιν τοίς πράσσουσιν.

눅 11,49: ἀποστελλώ εἰς αὐτοὺς προφήτας καὶ ἀποστόλους, καὶ ἐξ αὐτών ἀποκτεινούσιν καὶ διώξουσιν(Q 편집); 살전 2,15: ἀποκτεινάντων Ἰησούν καὶ τοὺς προφήτας.

눅 11,52: τὴν κλείδα τής γνώσεως(Q편집); 롬 2,20: τὴν μόρφωσιν τής γνώσεως.

눅 12,19: φάγε, πίε(특별자료); 고전 15,32: φάγωμεν καὶ πίωμεν.

눅 12,42: ὁ πιστὸς οἰκονόμος(Q편집); 고전 4,2: ζητείται ἐν τοίς οἰκονόμοις, ἵνα πιστὸς τις εὑρεθῇ.

눅 12,47: ὁ δούλος ὁ γνοὺς τὸ θέλημα τού κυρίου αὐτού καὶ μὴ ποιήσας πρὸς τὸ θέλημα αὐτού(특별자료); 롬2,18: γινώσκεις τὸ θέλημα + (가르치지만 행하지 않음에 관한 말씀)

눅 13,23: εἰ ὀλίγοι οἱ σῳζόμενοι(Q편집); 행 2,47: τοὺς σῳζομένους; 고전 1,18:τοίς δὲ σῳζομένοις.

눅 14,11: ὅτι πάς ὁ ὑπών ἑαυτὸν ταπεινωθήσεται, καὶ ὁ ταπεινών ἑαυτὸν ὑπωθήσεται(특별자료); 빌 2,8: 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 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υσεν.

눅 16,2: ἀπόδος τὸν λόγον τής οἰκονομίας σου(특별자료); 롬 14,12: ἕκαστος ἡμών περὶ ἑαυτού λόγον δώσει τῷ θεῷ.

눅 17,18: δούναι δόξαν τῷ θεῷ(특별자료); 롬 4,20: δοὺς δόξαν τῷ θεῷ.

눅 17,30: ὁ υἱὸς τού ἀνθρώπου ἀποκαλύπτεται(Q편집); 고전 1,7: τὴν ἀποκάλυψιν τού κυρίου.

눅 18,9: τοὺς πεποιθότας ἐφ’ ἑαυτοίς(누가가 즐겨쓰는 단어이고 누가의 특별자료에 속함); 롬 2,19: πέποιθάς τε σεαυτόν.

눅 20,21: οὐ λαμβάνεις πρόσωπον(마가편집); 갈 2,6: πρόσωπον ὁ θεὸς ἀνθρώπου οὐ λαμβάνει.

눅 20,35: τυχείν καὶ τής ἀναστάσεως τής ἐκ νεκρών(마가편집); 빌 3,11: εἴπως καταντήσω εἰς τὴν ἐξανάστασιν τὴν ἐκ νεκρών.

눅 21,8: μὴ πλανηθήτε(마가편집); 고전 15,33: μὴ πλανάσθε.

눅 21,24: καὶ Ἰερουσαὴμ ἔσται πατουμένη ὑπὸ ἐθνών, ἄχρι οὗ πληρωθώσιν καιροὶ ἐθνών(마가편집); 롬 11,25: ὅτι πώρωσις ἀπὸ μέρους τῷ Ἰσραὴλ γέγονεν ἄχρι οὗ τὸ πλήρωμα τών ἐθνών εἰσέληῃ.

눅 21,28: ἡ ἀπολύτρωσις ὑμών(마가편집); 롬 8,23: ἀπολύτρωσιν τού σώματος ἡμών.

눅 21,34: καὶ ἐπιστῇ ἐφʾ ὑμάς αἰφνίδιος ἡ ἡμέρα ἐκείνη(특별자료); 살전 5,4: ἵνα ἡ ἡμέρα ὡς κλέπτης καταλάβῃ .

눅 22,20: τού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ί μου(마가편집); 고전 11,25: τού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στι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눅 22,31: ἰδοὺ ὁ σατανάς ἐξῃτήσατο ὑμάς τού σινιάσαι ὡς τὸν σίτον(특별자료); 고후 2,11: ἵνα μὴ πλεονεκτηθώμεν ὑπὸ τού σατανά.

눅 23,43: σήμερον μετʾ ἐμού ἔσῃ ἐν τῷ παράδείσῳ(특별자료); 고후 12,4: ἡρπάγη εἰς τὸν παράδεισον.

눅 23,43: μετʾ ἐμού ἔσῃ(특별자료); 빌 1,23: σὺν Χριστῷ εἶναι.

눅 24,23: καὶ ὀπτασίαν ἀγγέλων(특별자료); 행 26,19: τῇ οὐρανίῳ ὀπτασίᾳ; 고후 12,1: ὀπτασίας καὶ ἀποκαλύψεις κυρίου.

눅 24,25: ὦ ἀνόητοι(특별자료); 갈 3,1: Ὦ ἀνόητοι.

눅 24,34: λέγοντας ὅτι ὄντως ἠγέρθη ὁ κύριος καὶ ὤφθη Σίμωνι(특별자료); 고전 15,5: ὅτι ὤφθη Κηφᾷ.

눅 24,36ff.(특별자료); 고전 15,5: ὤφθη (Κηφᾷ) εἰτα τοίς δώδεκα.

1.2. 누가의 복음서에서 바울서신 사용의 예.

이 비교표에 따르면 우선 인상적인 것은 바울서신과 언어적으로나 주제적으로 비슷한 문구들이 누가복음에서는 모두 누가의 특별자료, Q전거의 편집부 혹은 마가적인 전거의 편집부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일부는 그렇겠지만 모두가 누가와 바울 사이에 내용적이고 어휘적인 공통점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누가가 바울이 받아들인 것과 유사한 다른 전승들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것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편집하면서 그의 전거를 변경할 때 바울서신을 편집 내지는 전거 변경의 자료로 삼은 것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들을 통하여 강화된다.

1.2.1. Benedictus(눅 1,68-79).

셉튜아진타의 구절들이 많이 등장하는 Benedictus에서 70절의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는 행 3,21과 동일하며 약속과 성취 개요를 표현하는 누가의 편집적 어귀이다. 이것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롬 1,2의 말씀을 누가가 편집적으로 사용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행전과 로마서의 비교에서 누가는 행전을 집필할 때 분명히 로마서의 서문을 많이 사용하기(행 9,15 비교. 롬 1,1; 행 13, 2 비교. 롬 1,1; 행 13,33-34 비교. 롬 1,4; 행 17,31 비교. 롬 1,4; 행 1,25 비교. 롬 1,5; 행 6,7 비교. 롬 1,5(16,26); 행 9,15 비교. 롬 1,5) 때문이다. 로마서의 서문에 대한 관심은 이미 누가복음 집필 때에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9절의 “평화의 길”은, 신약에서 평화의 길에 관한 사상이 이 두 군데밖에 없음으로, 롬 3,17을 참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2. 70인 제자들의 파송과 귀환 보도(눅 10,1-20).

이 보도 가운데 눅 10, 2-16까지는 대체로 Q의 자료에 의존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Q와 편차가 나는 7절의 “먹고 마시라”는 말씀과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 8절의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을 먹고”란 말씀은 모두가 고전 9-10장에 병행구를 가지고 있다. 편집구의 이러한 병행들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누가가 바울서신을 사용했다는 데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누가는 고전 9-10장을 참조한 것만이 아니라 Q와 차이가 나는 16절의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는 말씀은 살전 4,8의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요 ...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는 말씀을 풀어쓴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성결에 대한 요구외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보도하는 살전 4장엔 누가문서에 대한 병행구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행 15,20: 살전 4,3; 눅 10,16: 살전 4,8; 행 20,34: 살전 4,11; 행 8,39: 살전 7,17; 행 1,9: 살전 4,17). 또한 이 보도의 마지막 부분인 귀환시의 말씀(눅 10,17-20)은 특별자료에 속하고 그 가운데 마지막 절(20)의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라는 말씀은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빌 4,3을 풀어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누가가 눅 10,1-20을 집필할 때에 Q자료와 특별자료를 전거로 사용하면서 바울서신의 말씀들을 가지고 그 전거들의 몇 군데를 수정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1.2.3. 율법사에 대한 화선언(눅 11,45-52).

이 화선언은 Q자료에 속한다. 누가는 이것을 개별적으로 상당히 손질했다. 이러한 손질 가운데 Q와 차이가 나는 48절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 옳게 여기는 도다”라는 말씀은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한다”는 롬 1,32의 말씀과, 49절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는 말씀은 “유대인은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라는 살전 2,15의 말씀과, 52절의 “지식의 열쇠”라는 어귀는 롬 2,20(우리 성경엔 19절)의 “지식의 규모”라는 어귀와 유사하다. 누가는 그의 두 문서를 집필할 때 살전 2,11-15(비교. 행 20,31: 살전 2,11; 행 8,14: 살전 2,13; 행 2,23: 살전 2,15; 눅 11,49: 살전 2,15)과 롬 2,11-22(비교. 행 10,34: 롬 2,11; 행 10,35: 롬 2,13-14; 행 10,42: 롬 2,16; 눅 12,47: 롬 2,18; 눅 18,9: 롬 2,19; 눅 11,52: 롬 2,20; 행 19,37: 롬 2,22)을 애용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고로 율법사에 대한 화선언에서 마태가 제공하는 Q와 차이가 나는 이 세 구절들은 누가가 바울서신을 참조하여 풀어쓴 것으로 판명된다.

1.2.4. 충성된 종과 사악한 종에 관한 비유들(눅 12, 35-48).

이 말씀 군에서 종의 비유(35-38)는 정확한 마태의 병행구가 없더라도 Q(어록자료)에 속하며, 39-46은 약간의 편차로 마 24,42-51에 병행하는 어록자료에 속하고, 47-48은 누가의 특별자료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바울서신과 관계가 있는 것은 42절의 ὁ πιστὸς οἰκονόμος(비교. 고전 4,1)과 47절의 ὁ δούλος ὁ γνοὺς τὸ θέλημα τού κυρίου αὐτού καὶ μὴ ποιήσας πρὸς τὸ θέλημα αὐτού(비교. 롬 2,18)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신실한 청지기 비유(42-46)의 도입부에 등장한 청지기(οἰκονόμος)란 낱말이다. 이것은 원래 Q에서는 종(δούλος)이었는데(비교. 마 24,45) 누가가 종을 청지기로 바꾼 것이다. 이 낱말은 누가복음에 4번, 바울서신에 4번, 그 외에는 2번만 신약에 등장한다. 그런데 위의 비교표에 의하면, 눅 12,42의 이 단어는 내용적으로 무게가 있고 중요한 고전 4,2의 어귀에 방향을 맞춘 것 같다. 누가가 고전 4,1-2에 관심이 깊다는 것은 행전 26,16이 다음처럼 고전 4,1(ὑπηρέτας Χριστού)을 참조해서 풀어썼다는 사실을 통해서 밝혀진다. 고전 4,1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기독교 선포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칭한다. 행 26,16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군과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가 고전 4,1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일군을 바울에게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47절의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이란 말씀은 롬 2,18이하의 하나님의 뜻을 알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지만 자신을 가르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씀을 비유에 맞게 풀어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롬 2,11-22을 즐겨 풀어쓰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말씀 군에서 42절의 신실한 청지기란 어귀와 47절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다란 말씀은 누가가 바울서신을 참조하여 편집할 때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5. 공관적 묵시록 (눅 21,8-36).

예수의 종말에 관한 이 말씀은 마가 13,5-37을 전거로 갖고 있다. 이 중에서 바울서신에 유사하게 나오는 단어나 어귀들은 모두가 마가전거와 차이가 나는 편집부분에 등장한다. 8절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이란 말씀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 말로 고전 15,33에 해당어귀가 등장한다. 24절의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란 어귀는 롬 11,25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란 말씀에 유사 병행구를 갖고 있다. 28절의 “너희의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란 구절은 누가문서에 한번만 나오는데 롬 8,23의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에 상당구절을 갖는다. 34절의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는 말씀은 살전 5,4의 그 날이 도적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란 말씀과 유사성이 있다. 그런데 누가가 부활의 장 가운데 고전 15,5-33을 편집시 많이 참조한 것으로 밝게 드러나고(아래 7)항 참고),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기독인의 희망과 주의 날(살전 4,13-5,11)을 풀어썼다는 것(비교. 행 8,29: 살전 4,17; 행 1,9: 살전 4,17; 눅 21,34: 살전 5,4)도 그 가능성이 크다. 그런고로 마가전거를 개편한 부분에 나오는 구절들이 바울서신에 유사 병행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가 그의 전거인 마가복음을 참조하여 공관적 묵시록을 편집할 때 바울서신의 해당부분을 참조하여 수정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1.2.6. 낙원에 관한 말씀(눅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특별자료에 속한다. 이 말씀 가운데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빌 1,23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에 병행한다. “낙원”은 물론 계 2,7에도 나오지만 고후 12,4의 “ἡρπάγη εἰς τὸν παράδεισον”에서 연원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거기에 나오는 ἁρπάζω는 황홀한 가운데 3층천, 낙원으로 바울의 옮기움을 의미하는데 이와 유사한 의미로 행전에서 유일회적으로 성령에 의한 빌립의 옮기움(행 8,39)에 사용된다. 그런고로 누가가 고후 14,4에서 눅 23,43을 작성할 때 “παράδεισος”를, 행 8,39을 작성할 때 ἁρπάζω를 풀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가 고후 12,4과 빌 1,23을 기대어 작성했으리라는 결론의 도출이 가능하다.

1.2.7. 부활하신 분의 현현(눅 24장).

시몬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현현에 관한 34절의 표현(ὅτι ὄντως ἠγέρθη ὁ κύριος καὶ ὤφθη Σίμωνι)은 특별자료에 속한다. 주께서 시몬에게 나타나셨고 그래서 진실로 살아나셨다는 이 구절은 부활절의 원고백을 진술한 것이다. 이것과 유사한 고백어투는 고전 15,5(ὅτι ὤφθη Κηφᾳ)에 등장한다. 이 두 현현 고백어투의 차이점은 현현의 대상으로 고전 15장에서는 Κηφάς가 언급되었다면 눅 24장에서는 Σίμων이란 헬라적인 이름이 사용되었다는 것뿐이다. Σίμων이란 이름과 Κηφάς란 별명에 결합된 이 두 가지 고백어투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의 가설이 제기될 수 있다. 첫 번째 가설: 원래적인 헬라어 이름에 결합된 그리스도 현현 고백어투(눅 24,34)와 헬라어로 표기된 별명에 결합된 그리스도 현현 고백어투(고전 15,5)가 각각 전승되었다. 두 번째 가설: 고전 15,5의 고백어투를 누가가 사용하면서 공관전승에 낯선 Κηφάς 대신에 거기에 익숙한 Σίμων을 대치했다. 이 두 가설 가운데 첫째 것이 가능성이 더 크지만 둘째 것도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고전 15장을 알고 자주 사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다음의 사실들이 강화시켜준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의 예수가 여러번 현현했다는 점도 고전 15,5-8에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누가문서는 고전 15,5의 게바에게 현현했다는 말씀 앞의 신앙고백적인 어투와 그 후의 단락들인 죽은 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의 부활에서도 중요한 어귀들을 다양한 곳에서 병행(행 10, 40: 고전 15,4; 행 13,28-31: 고전 15,3-6f.; 행 9,3f.: 고전 15,8; 행 8,3: 고전 15,9; 행 14,26: 고전 15,10; 행 3,15: 고전 15,12.20; 행 1,22: 고전 15,15; 행 26,23: 고전 15,20; 눅 12,19: 고전 15,32; 눅 21,8: 고전 15,32)으로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누가문서를 편집할 때 부활의 장인 고전 15장에서 게바에게 현현한 것과 여러번 현현한 것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 그렇다면 다른 전승 사용의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 -, 그 앞의 신앙고백적인 어투와 그 후의 단락들인 죽은 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의 부활에서도 중요한 어귀들을 편집적으로 여러번 다양한 곳에서 사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바울서신 사용의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2.8. 그 밖의 예들.

누가가 바울서신을 풀어썼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어귀가 매우 유사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눅 1,59의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려고 와서”란 어귀는 빌 3,5의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를 기대었을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누가문서와 빌 3,5-13 사이에 병행구(비교. 눅 1,59: 빌 3,5; 행 23,6: 빌 3,5; 행 8,3: 빌 3,6; 눅 20, 35: 빌 3,11; 눅 9,62: 빌 3,13)가 많기 때문이다.

눅 2,22의 “주께 드리고”는 롬 12,1의 “하나님께 드려라”를, 눅 2,52의 “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롬 14,18의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를, 눅 9,62의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는 빌 3,13의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를, 눅 11,7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갈 6,17의 “이후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를, 눅 17,8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는 롬 4,20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를, 눅 17,30의 “인자의 나타나는”은 고전 1,7의 “주의 나타나심”을 참조하여 풀어썼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의 두 구절은 다른 전승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누가가 바울서신의 글에서 다음처럼 참조했을 확률도 있다. 눅 14,11의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그리스도찬가 가운데 그의 낮아짐과 높아짐에 관한 구절인 빌 2,8을 풀어썼고, 눅 22,20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는 말씀은 교회의 예배에서 알게 된 바울적인 성만찬 본문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거의 동일한 고전 11,25b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누가문서와 바울서신 사이의 병행구들을 살펴본 결과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의 병행구들 사이에 다른 전승이 있을 수 있는 경우는 무척 드문 것처럼 보이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누가가 복음서를 편집할 때에 그의 전거를 조탁하기 위하여 바울서신을 가끔씩 사용한 것으로 드러난다.

2. 사도행전과 바울서신과의 관계.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하여 병행부분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1. 병행구의 비교표.

행 1,8: ἀλλὰ λήμψεσθε δύναμιν ἐπελθόντος τού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ἐφʾ ὑμάς καὶ ἔσεσθέ μου μάρτυρες; 살전 1,5: ὅτ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ἡμών οὐκ ἐγενήθη εἰς ὑμάς ἐν λόγῳ μόνον ἀλλὰ καὶ ἐν δυνάμει καὶ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ἐν πληροφορίᾳ πολλᾔ.

행 1,9: ἐπήρθη καὶ νεφέλη ὑπέλαβεν αὐτόν; 살전 4,17: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νεφέλαις.

행 1,22: μάρτυρα τής ἀναστάσεως αὐτού; 고전 15,15: ἐμαρτυρήσαμεν ὅτι ἤγειρεν τὸν Χριστόν.

행 1,25: λαβείν τὸν τόπον τής διακονίας ταύτης καὶ ἀποστολής; 롬 1,5: διʾ οὗ ἐλάβομεν χάριν καὶ ἀποστολήν.

행 2,1: τὴν ἡμέραν τής πεντηκοστής; 고전 16,8: ἕως τής πεντηκοστής. 

행 2,4: λαλείν ἑτέραις γλώσσαις; 고전 14,21: ἐν ἑτερογλώσσοις καὶ ἐν χείλεσιν ἑτέρων λαλήσω.

행 2,21(욜 3,1-5 인용 가운데 5절에 해당): καὶ ἔσται πάς ὃς ἄν ἐπικαλέσηται τὸ ὄνομα κυρίου σωθήσεται; 롬 10,13(욜 3,5 인용): πάς γὰρ ὃς ἄν ἐπικαλέσηται τὸ ὄνομα κυρίου σωθήσεται.

행 2,22: δυνάμεσι καὶ τέρασι καὶ σεμείοις; 롬 15,18: ἐν δυνάμει σημείων καὶ τεράτων.

행 2,23: τούτον ... ἔκδοτον διὰ χειρὸς ἀνόμων προσπήξαντες ἀνείλατε; 살전 2,15: (ὑπὸ τών Ἱουδαίων), τών καὶ τὸν κύριον ἀποκτεινάντων Ἰησούν καὶ τοὺς προφήτας.

행 2,33(5,31): τῇ δεξιᾷ οὖν τού θεού ύψωθείς; 빌 2,9: 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υσεν.

행 2,33: τὴν τε ἐπαγγελίαν τού πνεύματος τού ἁγίου λαβών; 갈 3,14: τὴν ἐπαγγελίαν τού πνεύματος λάβωμεν.

행 2,34: εἶπεν ὁ κύριος τῷ κυρίῳ μουʹ κάθου ἐκ δεξιών μου ... (시 110,1 인용); 롬 8,34(고전 15,25): ὅς καὶ ἐστιν ἐν δεξιᾷ τού θεού.

행 2,42: τῇ κοινωνίᾳ, τῇ κλάσει τού ἄρτου; 고전 10,16: οὐχὶ κοινωνία ... : τὸν ἄρτον ὅν κλώμεν, ...;

행 3,15: ὅν ὁ θεὸς ἤγειρεν ἐκ νεκρών; 고전 15,12(20): ὅτι ἐκ νεκρών ἐγήγερται.

행 3,15: Ἰησούν, ὅν δεί οὐρανὸν μὲν δέξασθαι ἄχρι χρόνων ἀποκαταστάσεως πάντων; 살전 1,10: ἀναμένειν τὸν υἱὸν αὐτού ἐκ τών οὐρανών.

행 3,15: ὅν ὁ θεὸς ἤγειρεν ἐκ νεκρών; 살전 1,10: ὅν ἤγειρεν ἐκ τών νεκρών Ἰησούν.

행 3,25: λέγων πρὸς Ἀβραάμʹ καὶ ἐν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ἐνευλογηθήσονται πάσαι αἱ πατριαὶ τής γής; 갈 3,8: προευηγγελίσατο τῷ Ἀβραάμ ὅτι ἐνευλογηθήσονται ἐν σοὶ πάντα τὰ ἔθνη.

행 3,26: ὑμίν πρώτον: 행 18,6: καθαρὸς ἐγὼ ἀπὸ τού νύν εἰς τὰ ἔθνη πορεύσομαι; 롬 1,16; 2,9.10:Ἰουδαίῷ τε πρώτον καὶ Ἓλληνι.

행 4,13:ἰδιώται; 고후 11,6(고전 14,23): ἰδιώται.

행 4,19: κυρίου δεκτόν; 고후 6,2: καιρῷ δεκτῷ.

행 4,20: οὐ δυνάμεθά γὰρ; 고후 13,8: οὐ γὰρ δυνάμεθά.

행 4,32: ἦν καρδία καὶ ψυχὴ μία; 빌 1,27: ὅτι στήκετε 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 μιᾷ ψυχῇ.

행 4,36: Βαρναβάς; 고전 9,6(갈 2,1): Βαρναβάς.

행 5,20: τὰ ῥήματα τής ζωής ταύτης; 빌 2,16: λόγον ζωής.

행 5,30(10,39): ὅν ὑμείς διεχειρίσασθε κρεμάσαντες ἐπὶ ξύλου; 갈 3,13: ἐπικατάρατος πάς ὁ κρεμάμενος ἐπὶ ξύλου.

행 5,36: λέγων εἶναί τινα ἑαυτόν; 갈 6,3: εἰ γὰρ δοκεί τις εἶναί τι μηδὲν ὤν φρεναπατᾳ ἑαυτόν.

행 5,41: ὅτι κατηξιώθησαν ὑπὲρ τού ὀνόματος ἀτιμασθήναι; 빌 1,29: ἀλλὰ καὶ τὸ ὑπὲρ αὐτού πάσχειν.

행 6,7: ὑπήκουον πῇ πίστει; 롬 1,5(비교. 16,26): εἰς 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

행 7,23: ἀνέβη ἐπὶ τὴν καρδίαν αὐτού; 고전 2,9: ἐπὶ καρδίαν ἀνθρώπου οὐκ ἀνέβη.

행 7,53: διαταγὰς ἀγγέλων; 갈 3,19: διαταγεὶς διʾ ἀγγέλων.

행 8,3: Σαύλος δὲ ἐλυμαίνετο τὴν ἐκκλησίαν; 고전 15,9(빌 3,6): ἐδίωξα τὴν ἐκκλησίαν τού θεού.

행 8,3: Σαύλος δὲ ἐλυμαίνετο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τὰ τοὺς οἴκους εἰσπορευόμενος σύρων τε ἄνδρας καὶ γυναίκας παρεδίδου εἰς φυλακήν; 갈 1,13: ὅτι καθʾ ὑπὲρβολὴν ἐδίωκον τὴν ἐκκλησίαν τού θεού καὶ ἐπόρθουν αὐτήν; 갈 1,23: ὅτι ὁ διώκων ἡμαάς ποτε.

행 8,14: δέδεκται ἡ Σαμάρεια τὸν λόγον τού θεού; 살전 2,13(살전 1,6): ἐδέξασθε οὐ λόγον ἀνθρώπων ἀλλὰ ἐστιν ἀληθώς λόγον θεού.

행 8,31: πώς γὰρ ἄν δυναίμην ἐὰν μή τις ὁδηγήσει με;: 롬 10,14: Πώς οὖν ἐπικαλέσωνται εἰς ὂν οὐκ ἤκουσαν; 

행 8,39: πνεύμα κυρίου ἥρπασεν τὸν Φίλιππον; 살전 4,17: ἅμα σὺν αὐτοίς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νεφέλαις.

행 9,3ff.: 바울에게 대한 예수의 현현; 고전 15,8: ὤφθη κἀμοί.

행 9,14.(21; 22,16): πάντας τοὺς ἐπικαλκουμένους τὸ ὄνομά σου; 고전 1,2: σὺν πάσιν τοίς ἐπικαλκουμένοις τὸ ὄνομα τού κυριού.

행 9,15: τὸ ὄνομά μου ἐνώπιον ἐθνών ... ὑπὲρ τού ὀνόματος αὐτού; 롬 1,5: ἀποστολὴν ... ἐν πάσιν τοίς ἔθνεσιν ὑπὲρ τού ὀνόματος αὐτού.

행 9,15: σκεύος ἐκλογής ἐστιν μοι οὗτος; 롬 1,1: κλητὸς ἀπόστολος.

행 9,23: συνεβουλεύσαντο οἱ Ἰουδαίοί ἀνελείν αὐτόν; 행 20,3: γενομένης ἐπιβουλής αὐτῷ ὑπὸ τών Ἰουδαίων; 고후 11,26: κινδύνοις ἐκ γένους.

행 9,24: παρετηρούντο δὲ καὶ τὰς πύλας ἡμέρας τε καὶ νυκτὸς ὅπως αὐτὸν ἀνέλωσιν; 고후 11,32: ἐφρούρει τὴν πόλιν Δαμασκηνών πιάσαι με.

행 9,25: διὰ τού τείχους καθήκαν αὐτὸν χαλάσαντες ἐν σπυρίδι; 고후 11,33: καὶ διὰ θυρίδος ἐν σαργάνῃ ἐχαλάσθην διὰ τού τείχους.

행 9,26: Παραγενόμενος δὲ εἰς Ἰερουσαλὴμ ἐπείραζεν κολλάσθαι τοίς μαθητής; 갈 1,18: ἀνήλθο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ἱστορήσαι κηφάν.

행 9,31: οἰκοδομουμένη καὶ ... καὶ παρακλήσει; 고전 14,3: ὁ δὲ προφητεύων ἀνθρώποις λαλεί οἰκοδομὴν καὶ παράκλησιν καὶ παραμυθίαν.

행 10,15: ἃ ὁ θεὸς ἐκαθάρισεν, σὺ μὴ κοίνου; 롬 14,14: ὅτι οὐδὲν κοινὸν δι’ ἑαυτού, εἰ μὴ τῷ λογιζομένῳ τι κοινὸν εἶναι, ἐκείνῳ κοινόν.

행 10,34: οὐκ ἔστιν προσωπολήπτης ὁ θεός; 롬 2,11: οὐ γὰρ ἐστιν προσωπολημψία παρὰ τῷ θεῷ

행 10,35: ἀλλ’ ἐν παντὶ ἔθνει ὁ φοβούμενος αὐτὸν καὶ ἐργαζόμενος δικαιοσύνην δεκτὸς αὐτῷ ἐστιν; 롬 2,13-14: ἀλλ’ οἱ ποιηταὶ νόμου δικαιωθήσονται. ὅταν γὰρ ἔθνη τὰ μὴ νόμον ἔχοντα φύσει τὰ τού νόμου ποιώσιν,  οὗτοι νόμον μὴ ἔχοντες ἑαυτοίς εἰσιν νόμος΄

행 10,36: οὗτός ἐστιν πάντων κύριος; 롬 10,12: ὁ γὰρ αὐτὸς κύριος πάντων.

행 10,39(5,30): ὅν καὶ ἀνείλαν κρεμάσαντες ἐπὶ ξύλου; 갈 3,13: ἐπικατάρατος πάς ὁ κρεμάμενος ἐπὶ ξύλου.

행 10,40: τούτον ὁ θεὸς ἤγειρεν ἐν τῇ τρίτῇ ἡμέρᾳ; 고전 15,4:ἐ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ῇ. 

행 10,41: μετὰ τὸ ἀναστήναι αὐτὸν ἐκ νεκρών; 롬 1,4: ἀναστάσεως νεκρών; 빌 3,11: εἰς τὴν ἐξανάστασιν τὴν ἐκ νεκρών.

행 10,42: οὗτὸς ἐστιν ὁ ὡρισμένος ὑπὸ τού θεού κριτὴς ζώντων καὶ νεκρών; 롬 2,16: ἐν ἡμέρᾳ ὅτε κρίνει ὁ θεὸς τὰ κρυπτὰ τών ἀνθρώπων ... διὰ Χριστού Ἰησού

행 10,43: πάντες προφήται μαρτυρούσιν; 롬 3,21: μαρτυρουμένη ὑπὸ τού νόμού καὶ τών προφητών.

행 10,43: πάντα τὸν πιστεύοντα εἰς αὐτόν; 롬 10,11: πάς ὁ πιστεύων ἐπʾ αὐτῷ.

행 10,45(11,2): οἱ ἐκ περιτομής; 갈 2,12: τοὺς ἐκ περιτομής.

행 11,2f.: οἱ ἐκ περιτομής λέγοντες ὅτι εἰσήλθες πρὸς ἄνδρας ἀκροβυστίαν; 갈 2,7: ὅτι πεπίστευ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ής ἀκροβυστίας καθὼς Πέτρος τής περιτομής.

행 11,3: συνέφαγες αὐτοίς(=ἄνδρας ἀκροβυστίαν ἔχοντας); 갈 2,13: μετὰ τών ἐθνών συνήσθιεν.

행 11,17: τὴν ἴσην δωρεὰν ἔδωκεν αὐτοίς ὁ θεὸς ὡς καὶ ἡμίν πιστεύσασιν ἐπὶ τὸν κύριον Ἰησούν Χριστόν; 갈 3,2: ἐξ ἔργων νόμου τὸ πνεύμα ἐλάβετε ἤ ἐξ ἀκοής πίστεως;

행 11,27: κατήλθον ἀπὸ Ἱεροσολύμων προφήται εἰς Ἀντιόχειαν; 갈 2,11: Ὅτε δὲ ἦλθεν Κηφάς εἰς Ἀντιόχειαν.

행 11,29: ὥρισαν ἕκαστος αὐτών εἰς διακονίαν πέμψαι τοίς κατοικούσιν ἐν τῇ Ἰουδαίᾳ ἀδελφοίς; 고전 16,15(1; 고후 8,4): εἰς διακονίαν τοίς ἁγίοίς ἔταξαν ἑαυτούς.

행 12,17: Ἰακώβῳ; 갈 1,19: Ἰάκωβον.

행 12,17: ἀπαγγείλατε Ἰακώβῳ καὶ τοίς ἀδελφοίς ταύτα; 고전 15,7: ὤφθη Ἰακώβῳ εἶτα τοίς ἀποστόλοις πάσιν.

행 13,1: προφήται καὶ διδάσκαλοι; 고전 12,28(29): δεύτερον προφήτας τρίτον διδασκάλος.

행 13,1: Λούκιος; 롬 16,21: Λούκιος.

행 13,2: ἀφωρίσατε δή μοι ... εἰς τὸ ἔργον; 롬 1.1: ἀφωρισμένος 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ύ.

행 13,2: ἀφορίσατε δή μοι; 갈 1,14: ὁ ἀφορίσας με ἐκ κοιλίας μητρός μου.

행 13,27: καὶ οἱ ἄρχοντες αὐτών τούτον ἀγνοήσαντες; 고전 2,8: ἥν οὐδεὶς τών ἀρχόντων τού αἰώνος τούτου ἔγνωκεν.

행 13,28-31: ... ἀναιρεθήναι αὐτόν. ὡς δὲ ἐτέλεσαν πάντα τὰ περὶ αὐτού γεγραμμένα, καθελόντες ἀπὸ τού ξύλου ἔθηκαν εἰς μνημείον. ὁ δὲ θεὸς ἤγειρεν αὐτὸν ἐκ νεκρών, ὅς ὤφθη ἐπὶ ἡμέρας πλείους; 고전 15,3b-6f.: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καὶ ὅτι ἐτάφη 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 καὶ ὅτι ὤφθη ... εἶτα δώδεκα΄ ἔπειτα ὤφθη ...

행 13,33-34: ἀναστήσας Ἰησούν ... υἱός μου ... ἐκ νεκρών; 롬 1,4: τού ὁρισθέντος υἱού θεού ... ἐξ ἀναστάσεως νεκρών.

행 13,38: οὐκ ἠδυνήθητε ἐν νόμῷ; 롬 8,3: Τὸ γὰρ ἀδύνατον τού νόμου.

행 13,39: ἐν τούτῳ πᾷς ὁ πιστεύων δικαιούται; 롬 3,22.26; 10,4f.: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δικαιοσύνη δὲ θεού 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ύ Χριστού εἰς πάντας τοὺς πιστεύοντας. εἰς τὸ εἶναι αὐτὸ δίκαιον καὶ δικαιούντα τὸν ἐκ πίστεως Ἰησού.

행 13,45:(비교. 28,22): ἀντέλεγον: 롬 10,21(사 65,1-2 인용구의 끝 귀절에 해당): ἀντι- λέγοντα.

행 13,52: οἵ τε μαθηταὶ ἐπληρούντο χαράς καὶ πνείματος ἁγίου; 살전 1,6: μετὰ χαράς πνείματος ἁγίου.

행 14,15: ὑμάς ἀπὸ τούτων ματαίων ἐπιστρέφειν ἐπὶ θεὸν ζώντα; 살전 1,9: πώς ἐπεστρέψατε πρὸς τὸν θεὸν ἀπὸ τών εἰδώλων δουλεύειν θεῷ ζώντι καὶ ἀληθινῷ.

행 14,19: νομίζοντες αὐτὸν τεθνηκέναι; 고후 6,9: ὡς ἀποθνῂσκοντες καὶ ζώμεν.

ἀφορίσθητε.

행 14,19: λιθάσαντες τὸν Παύλον; 고후 11,25: ἅπαξ ἐλιθάσθην.

행 14,22: ἐπιστηρίζοντες τὰς ψυχὰς τών μαθητών παρακαλούντες ἐμμένειν τῇ πίστει καὶ ὅτι διὰ πολλών θλίψεων δεί ἡμάς εἰςελθεί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ύ θεού; 살전 3,2-3: εἰς τὸ στηρίξαι ὑμάς καὶ παρακαλέσαι ὑπὲρ τής πίστεως ὑμών τὸ μηδένα σαίνεσθαι ἐν ταίς θλίψεσιν ταύταις.

행 14,26: τῇ χάριτι τού θεού; 고전 15,10: χάριτι δὲ θεού ... ἡ χάρις τού θεού.

행 14,27: ὅτι ἤνοιξεν τοίς ἔθνεσιν θύραν πίστεως; 고전 16,9(고후 2,12): θύρα γάρ μοι ἀνέῳγεν μεγάλη καὶ ἐνεργής.

행 15,1a: τινες(비교. 24절) κατελθόντες ἀπὸ τής Ἰουδαίας ἐδιδασλον τοὺς ἀδελφούς; 갈 2,4: διὰ δὲ τοὺς παρεισάκτους ψευδαδέλφους

행 15,1b: ἐὰν μὴ περιτμηθήτε ..., οὐ δύνασθε σωθήναι; 15,5: δεί περιτέμνειν: 갈 2,3: οὐδὲ ... ἠναγκάσθη περιτμηθήναι.

행 15,2b: ἔταξαν ἀναβαίνειν Παύλον καὶ βαρναβάν καὶ τινας ἄλλους ἐξ αὐτών πρὸς τοὺς ἀποστόλους εἰς Ἰερουσαλήμ; 갈 2,1: πάλιν ἀνέβη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μετὰ βαρναβά συμπαραλαβὼν καὶ Τίτον.

행 15,3: ἐκδιηγούμνοι τὴν ἐπιστροφὴν τών ἐθνών(행 15,7e: ἀκούσαι τὰ ἔθνη τὸν λόγον τού εὐαγγελίου): 갈 2,2b: τὸ εὐαγγέλιον ὅ κηρύσσω ἐν τοίς ἔθνεσιν.

행 15, 9: οὐθὲν διέκρινεν μεταξὺ ἡμών τε καὶ αὐτών; 롬 10,12: οὐ γὰρ ἐστιν διαστολὴ Ἰουδαίου τε καὶ Ἕλληνος.

행 15,10: ζυγὸ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τών μαθητών; 갈 5,1: ζυγῷ δουλείας.

행 15,11: διὰ τής χάριτος τού κυρίου Ἰησού; 갈 2,9a: τὴν χάριν τὴν δοθείσαν μοι; 롬 5,15: ἐν χάριτι τῇ τού ἑνὸς ἀνθρώπου Ἰησού Χριστού.

행 15,12f.: ἤκουον Βαρναβά καὶ παύλου ἐξηγουμένων ὅσα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σημεία καὶ τέρατα ἐν τοίς ἔθνεσιν διʾ αὐτών. Μετὰ δὲ τὸ σιγήσαι αὐτοὺς ἀπεκρίθη Ἰάκωβος λέγων ...: 갈 2,9: γνόντες τὴν χάριν τὴν δοθείσάν μοι Ἰάκωβος καὶ κηφάς καὶ Ἰωάννης δεξιὰς ἔδωκαν ἐμοὶ καὶ Βαρναβά κοινωνίας, ἵνα ἡμείς εἰς τὰ ἔθνη.

행 15,20(29): ἀπέχεσθαι ... τής πορνείας; 고전 6,18: Φεύγετε τὴν πορνείαν.

행 15,20: τού ἀπέχεσθαι ... τής πορνείας; 살전 4,3: ἀπέχεσθαι ὑμάς ἀπὸ τής πορνείας.

행 15,24: ὅτι τινὲς ἐξ ἡμών ἐτάραξαν ὑμάς; 갈 1,7: εἰ μή τινές εἰσιν οἱ ταράσσοντες ὑμάς.

행 15,26: ἀνθρώποις παραδεδωκόσι τὰς ψυχὰς αὐτών ὑπέρ ...; 롬 16,4: οἵτινες ὑπὲρ τής ψυχής μου τὸν ἑαυτών τράχηλον ὑπέθηκαν.

행 15,27: Σιλάν + 16,1: Τιμόθεος; 살전 1,1: Σιλουανὸς καὶ Τιμόθεος.

행 15,29: ἀπέχεσθαι εἰδωλοθύτων; 고전 8,1: Περὶ δὲ τών εἰδωλοθύτων.

행 15,41(15,23; 9,30): διήρχετο δὲ τὴν Συρίαν καὶ τὴν κιλικίαν; 갈 1,21: Ἔπειτα ἦλθον εἰς τὰ κλίματα τής Συρίας καὶ τής κιλικίας.

행 16,1(19,22;20,4): Τιμόθεος; 롬 16,21(살전 3,2;고전 16,10; 고후 1,1; 빌 2,19): Τιμόθεος.

행 16,19-24: ἐπιλαβόμενοι τὸν Παύλον καὶ τὸν Σιλάν εἵλκυσαν εἰς τὴν ἀγορὰν ἐπὶ τοὺς ἄρχοντας ... καὶ στρατηγοὶ περιρήξαντες αὐτών τὰ ἱμάτια ἐκέλευον ῥαβδίζειν ...; 살전 2,2: ἀλλὰ προπαθόντες καὶ ὑβρισθέντες ... ἐν Φιλίπποις.

행 16,22: ῥαβδίζειν; 고후 11,25.: τρὶς ἐρραβδίσθην.

행 16,23: ἐν φυλακαίς; 고후 6,5; 11,23: ἐν φυλακαίς.

행 17,2-3: κατὰ δὲ τὸ εἰωθὸς τῷ Παύλῳ εἰσήλθεν πρὸς αὐτοὺς καὶ ἐπὶ σάββατα τρία διελέξατο αὐτοίς ἀπὸ τών γραφών διανοίγων καὶ παρατιθέμενος ὅτι τὸν χριστὸν ἔδει παθείν καὶ ἀναστήναι ἐκ νεκρών καὶ ὅτι οὗτός ἐστιν ὁ χριστὸς ὁ Ἰησούς ὅν ἐγὼ καταγγέλλω ὑμίν; 살전 2,2: αρρησιασάμεθα ἐν τῷ θεῷ ἡμών λαλήσαι πρὸς ὑμάς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ύ θεού ἐν πολλῷ ἀγώνι.

행 17,5: οἰκίᾳ Ἰάσονος; 롬 16,21: Ἰάσων.

행 17,31: καθότι ἔστησεν ἡμέραν ἐν ᾗ μέλλει κρίνειν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ἐν δικαιοσύνῃ ἐν ἀνδρὶ ᾧ ὥρισεν; 롬 1,4: τού ὁρισθέντος υἱού θεού + 롬 2,16: ἐν ἡμέρᾳ ὅτε κρίνει ὁ θεὸς τὰ κρυπτὰ τών ἀνθρώπων κατὰ 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 διὰ Χριστού Ἰησού.

행 18,5: κατήλθον ἀπὸ τής Μακεδονίας ὅ τε Σιλάς καὶ ὁ Τιμόθεος; 살전 3,6: Ἄρτι δὲ ἐλθόντος Τιμοθέου πρὸς ἡμάς ἀφʾ ὑμών.

행 18,2(26): Ἀκύλαν, ... Πρίσκιλλαν; 고전 19,19: Ἀκύλας καὶ Πρίσκα.

행 18,21: πάλιν ἀνακάμψω πρὸς ὑμάς τού θεού θέλοντος; 롬 1,10(비교. 15,32): ἐν τῷ θελήματι τού θεού ἐλθείν πρὸς ὑμάς.

행 18,21: πάλιν ἀνακάμψω πρὸς ὑμάς τού θεού θέλοντος; 고전 4,19(비교. 16,7): ἐλεύσομαι δὲ ταχέως πρὸς ὑμάς ἐὰν ὁ κύριος θελήσῃ.

행 18,24: Ἀπολλώς; 고전 1,12(3,5; 16,12): Ἀπολλώ.

행 18,25: ζέων τῷ πνεύματι; 롬 12,11: τῷ πνεύματι ζέοντες.

행 18,26(2): Πρίσκιλλα καὶ Ἀκύλας; 롬 16,3: Πρίσκαν καὶ Ἀκύλαν.

행 18,27: οἱ ἀδελφοὶ ἔγραψαν τοίς μαθηταίς ἀποδέξασθαι αὐτόν; 고후 3,1: ἤ μὴ χρᾐζομεν ... ἐπιστολών πρὸς ὑμάς.

행 19,9: ἀποστὰς ἀπʾ αὐτών ἀφώρισεν τοὺς μαθητάς; 고후 6,17: ἐξέλθατε ἐκ μέσου αὐτών καὶ

행 19,13: τὸν Ἰησούν ὅν Παύλος κηρύσσει; 고후 1,19: ὁ τού θεού γὰρ υἱὸς Ἰησούς Χριστὸς ὁ ἐν ὑμίν διʾ ἡμών κηρυχθείς διʾ ἐμού καί ...

행 19,21: διελθὼν τὴν Μακεδονίαν; 고전 16,5: Μακεδονίαν διέλθω.

행 19,21: δεί με καὶ Ῥώμην ἰδείν; 롬 1,11: ἐπιποθώ γὰρ ἰδείν ὑμάς.

행 19,21: τὴν Μακεδονίαν καὶ Ἀχαίαν ... Ἱεροσόλυμα ... Ῥώμην; 롬 15,23-26(바울의 여행 목적; 특히 인명 비교): [Ῥώμη], ... Μακεδονία καὶ Ἀχαία, ... Ἰερουσαλήμ.

행 19,21(비교. 행 20,22): πορεύεσθαι εἰς Ἰεροσόλυμα; 롬 15,25: Νυνὶ δὲ πορεύομαι εἰς Ἰερουσαλήμ.

행 19,22: Ἔραστον; 롬 16,23: Ἔραστος.

행 19,23: τάραχος; 고후 1,8: θλίψεως.

행 19,29: Γάϊον; 롬 16,23(고전 1,14): Γάϊος.

행 19,37: οὔτε ἱεροσύλους οὔτε βλασφημούντας τὴν θεὸν ἡμών; 롬 2,22: ὁ βδελυσσόμενος τὰ εἴδωλα ἱεροσυλείς;

행 20,1: ἐξήλθεν πορεύεσθαι εἰς Μακεδονίαν; 고후 2,13: ἐξήλθον εἰς Μακεδονίαν.

행 20,7: Ἐν δὲ τῇ μιᾷ τών σαββάτων; 고전 16,2: κατὰ μίαν σαββάτου.

행 20,24: τὴν διακονίαν; 고후 5,18: τὴν διακονίαν τής καταλλαγής.

행 20,24: ἀλλʾ οὐδενὸς λόγου ποιούμαι τὴν ψυχὴν τιμίαν ἐμαυτῷ; 빌 2,30: ὅτι διὰ τὸ ἔργον Χριστού μέχρι θανάτου ἤγγισεν παραβολευσάμενος τῇ ψυχῇ.

행 20,26: μαρτύρομαι; 갈 5,2: μαρτύρομαι.

행 20,28: ἐπισκόπους; 빌 1,1: σὺν ἐπισκόποις.

행 20,30: ἀναστήσονται ἄνδρες λαλούντες διεστραμμένα τού ἀποσπάν τοὺς μαθητὰς ὀπίσω αὐτών; 갈 4,17: ζηλούσιν ὑμάς οὐ καλώς, ἀλλὰ ἐκκλείσαι ὑμάς θέλουσιν, ἵνα αὐτοὺς ζηλούτε.

행 20,31: οὐκ ἐπαυσάμην μετὰ δακρύων νουθετών; 고후 2,4: ἔγραψα ὑμίν διὰ πολλών δακρύων.

행 20,31: τριετίαν νύκτα καὶ ἡμέραν οὐκ ἐπαυσάμην μετὰ δακρύων νουθετών ἕνα ἕκαστον; 살전 2,11: ὡς ἕνα ἕκαστον ὑμών ὡς πατὴρ τέκνα ἑαυτού παρακαλούντες ὑμάς ... .

행 20,34: ταίς χρείαις μου καὶ τοίς οὖσιν μετʾ ἐμού ὑπηρέτησαν αἱ χείρες αὗται ... οὕτως κοπιώντας; 살전 4,11: ἐργάζεσθαι ταίς ἰδίαις χερσὶν ὑμών.

행 20,35: δεί ἀντιλαμβάνεσθαι τών ἀσθενούντων; 살전 5,14 ἀντέχεσθε τών ἀσθενών.

행 21,19: ὧν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ἐν τοίς ἔθνεσιν διὰ τής διακονίας αὐτού; 롬 15,18-19: ὧν οὐ κατειργάσατο Χριστὸς διʾ ἐμού εἰς ὑπακοὴν ἐθνών.

행 22,1: ἀκούσατέ μου τής πρὸς ὑμάς νυνὶ ἀπολογίας; 고전 9,3: Ἡ ἐμὴ ἀπολογία τοίς ἐμὲ ἀνακρίνουσίν ἐστιν αὕτη.

행 22,3: πεπαιδευμένος κατὰ ἀκρίβειαν τού πατρῲου νόμου, ζηλωτὴς ὑπάρχων τού θεού; 갈 1,14: ζηλωτὴς ὑπάρχων τών πατρικών.

행 23,1: τής συνειδήσεως; 고후 1,12: συνειδήσει.

행 23,6: ἐγὼ Φαρισαίός ἐιμι υἱὸς Φαρισαίων; 빌 3,5: κατὰ νόμον Φαρισαίος.

행 23,35: ἐν τῷ πραιτωρίῳ τού Ἡρῲδου; 1,13: ἐν ὅλῳ τῷ πραιτωρίῳ.

행 26,16: προχειρίσασθαί σε ὑπηρέτην; 고전 4,1: ὡς ὑπηρέτας Χριστού.(?) 

행 26,23: ὁ χριστὸς εἰ πρώτος ἐξ ἀναστάσεως νεκρών; 고전 15,20: Νυνὶ δὲ Χριστὸς ἐγήγερται ἐκ νεκρών ἀπαρχὴ τών κεκοιμημένων.

행 28,31: διδάσκων τὰ περὶ τού κυρίου Ἰησού Χριστού μετὰ πάσης παρρησίας ἀκωλύτως; 빌 1,14: περισσοτέρως τολμάν ἀφόβως τὸν λόγον λαλείν.

2.2. 누가의 행전에서 바울서신 사용의 예.

위의 비교표를 살펴보면 인상적인 것은 행 6.21.24.25.27.28장에는 거의 바울서신에서의 병행구가 나오지 않는 반면에 사건의 묘사들, 인명과 지명들과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와 말씀들에는 병행구가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미 이 사실에서 행전의 병행구가 바울과 다른 이에 관한 전승에서라기보다는, 바울서신에서 수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이것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하여 먼저 바울서신에 병행구들이 많은 행전의 설교와 말씀들로부터 차례로 살펴보자.

2.2.1. 설교와 말씀들.

2.2.1.1.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행 2,14-36).

오순절 베드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다섯 어귀들이 바울서신에 병행구를 갖고 있다. 요엘 3,1-5의 인용문 가운데 5절에 해당하는 행 2,21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은 요엘 3,5만을 인용한 롬 10,13에 병행이 있다. 행 2,22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롬 15,18의 “능력과 표적과 기사”에 병행구를 갖고 있다. 행 2,23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는 살전 2,15의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를 병행으로 갖고 있다. 행 2,33a의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는 빌 2,9의 “하나님이 그를 높여”에 병행구를 갖고 있고, 행 2,33b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는 갈 3,14의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에 병행구를 갖고 있는데 이것들이 원어로는 동일한 어귀이다. 이 병행구들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하여 바울서신의 장절 순서대로 정리하여 위에 나타난 바울서신의 장절 주위를 살펴보면, 다음처럼 바울서신의 병행구들이 모여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문서는 롬 10,13 주위인 롬 10,12-14에 다음과 같은 여러 병행구들을 갖고 있다: 행 15,9의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는 롬 10,12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니라”에서; 행 10,36의 “만유의 주되신”은 롬 10,12의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에서; 행 2,21은 롬 10,13의 인용구에서; 행 8,31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는 롬 10,14의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에서. 또 살전 2,15의 주위인 살전 2,11-15절에도 누가문서와의 사이에 병행구가 많이 있다(참조. 위의 율법사에 대한 화선언 부분). 마지막으로 갈 3,14가 속해 있는 갈 3장(아브라함에 대한 약속: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과 누가문서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많은 병행이 있다: 눅 24,25과 갈 3,1; 행 11,17과 갈 3,2; 행 3,25과 갈 3,8; 행 5,30; 10,39과 갈 3,13; 행 2,33과 갈 3,14; 행 7,53과 갈 3,19.

이렇게 바울서신의 어떤 부분에 누가문서의 병행구절들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할 때 그 부분을 사용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누가가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편집 시에 살전 2,11-15, 갈 3,14, 롬 10,13; 15,18; 빌 2,9들을 참조했다고 볼 수 있다.

2.2.1.2.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행 3,11-26).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 설교도 바울서신에 여러 개의 병행적인 어귀를 갖고 있다. 행 3,15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는 고전 15,12.(20)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와 살전 1,10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에 병행이다. 행 3,21의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는 살전 1,10의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에 유사하다. 행 3,25의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갈 3,8의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에 병행적이다. 행 3,26의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와 행 18,6의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는 합하여 롬 1,16(2,9.10)의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에 병행구를 갖고 있다. 여기에 병행구를 갖고 있는 바울서신의 장절 부분에 다음처럼 압도적으로 누가문서의 병행구들이 나온다.

고전 15,12(20)이 속해 있는 부활의 장인 고전 15장에 누가문서의 병행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이미 부활하신 자의 현현에 관한 항에서 다루었다. 살전 1,10이 속해있는 부분인 살전 1장의 공동체의 모범적인 신앙 부분에 누가문서의 병행구가 많이 나타난다: 행 15,27 + 16,1과 살전 1,1; 행 1,8과 살전 1,5; 행 8,14과 살전 1,6; 행 13,52과 살전 1,6; 행 14,15과 살전 1,9; 행 3,15과 살전 1,10; 행 3,15과 살전 1,10(행 16,19-24과 살 2,2; 행 17,2-3과 살전 2,2). 갈 3,8이 속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갈 3,1-18)의 부분에 누가문서의 병행구가 많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는 바로 위의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항에서 다루었다. 롬 1,16이 속해있는 롬 1장은 다음과 같은 많은 병행구를 누가문서에 갖고 있다: 행 9,15과 롬 1,1b; 행 13,2과 롬 1,1c; 눅 1,70과 롬 1,2; 행 13,33-34과 롬 1,4; 행 17,31과 롬 1,4 + 2,16; 행 1,25과 롬 1,5a; 행 6,7과 롬 1,5b(16,26); 행 9,15과 롬 1,5b; 행 18,21과 롬 1,10; 행 19,21과 롬 1,11; 행 3,26 + 18,6과 롬 1,16(2,9.10); 눅 11,48과 롬 1,32.

이처럼 베드로의 말씀 중에서 여러 개의 구절이 바울서신에 병행구를 갖고, 바울서신의 그 장절 주변에 누가문서의 병행구들이 집중적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역시 누가가 이 베드로의 설교를 작성할 때 바울서신을 참조하여 풀어썼음을 지시해 주고 있다.

2.2.1.3. 고넬료 집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행 10,34-43).

고넬료 집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는 이미 본인의 학위논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더욱 분명하게 누가가 바울서신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비교적 짧은 베드로 설교의 과반수 이상의 많은 구절이 바울서신에 다음처럼 아주 확실한 병행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설교를 여는 첫 구절인 행 10,34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는 롬 2,11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심”과 분명히 병행한다. 뒤따라오는 10,35의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은 롬 2,13f.의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와 내용적으로 유비가 있다. 행 10,36의 “만유의 주(οὗτός ἐστιν πάντων κύριος)”는 위의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난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롬 10,12의 “모든 사람의 주(ὁ γὰρ αὐτὸς κύριος πάντων)”에 원어적으로 분명한 병행구를 갖고 있다. 행 10,39(5,30)의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는 신앙 고백적 어투는 갈 3,13의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과 병행적이다. 행 10, 40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는 고전 15,4의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와 병행적이다. 행 10,41의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라는 신앙 고백적 어투는 롬 1,4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나 빌 3,11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와 언어적인 병행이다. 행 10,42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은 롬 2,16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말씀과 유사하다. 마지막 구절의 도입부인 행 10,43a의 “모든 선지자가 증거 하되”는 롬 3,21의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과 부분적으로 병행한다. 이 설교의 끝을 장식하는 행 10,43b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는 롬 10,11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과 병행이다.

고넬료 가정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중간에 있는 예수에 관한 간략한 역사를(37-39a) 제외하고 도입부와 종결부, 전반부와 후반부의 거의 모든 구절에서 바울서신에 병행을 갖고 있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또 하나의 특징은 이 설교가 바울서신 가운데 특히 로마서에 그 중에서도 롬 2,11-16과 롬 10,11-12에 집중적인 병행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적인 사실들과 다음에 오는 이유들로부터 누가가 고넬료 가정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를 갈 3,13, 고전 15,4, 빌 3,11과 함께 롬 2,11-16; 10,11-12을 중심적으로 참조하여 작성하였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첫째 고전 15,4은 이미 부활하신 자의 현현에 관한 항과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 항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누가가 많이 참조한 부활의 장인 고전 15장에 속하고, 둘째 롬 2,11-16은 율법사에 대한 화 선언의 항과 충성된 종과 사악한 종에 관한 비유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누가가 역시 많이 참조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는 인간에 관한 말씀인 롬 2장에 속하고, 셋째 롬 10,11-12도 위의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부분에서 누가가 많이 참조했다고 언급한 롬 10, 12-14과 함께 누가가 많이 참조한 더 큰 단락인 롬 10,1-14에 속하고, 넷째 갈 3,13도 위의 오순절 베드로 설교의 항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가가 많이 참조한 갈 3,1-19의 한 부분이고, 다섯째 빌 3,11도 역시 전반부인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의 관계 가운데 그 밖의 예들의 항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가가 많이 사용한 빌 3,5-13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2.2.1.4. 안디옥 회당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들(행 13,16-52).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들의 단락도 위의 설교들처럼 바울서신에 여러 개의 병행어귀를 가지고 있다. 행 13,27의 “저희의 관원들이 예수(를) .... 알지 못하므로(καὶ οἱ ἄρχοντες αὐτών τούτον ἀγνοήσαντες)”는 고전 2,8의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이것을) 알지 못하였나니(ἥν οὐδεὶς τών ἀρχόντων τού αἰώνος τούτου ἔγνωκεν)”과 언어적으로 병행한다. 행 13,28-31의 성경의 성취, 장사, 부활, 현현이 결합된 케리그마적 진술은 고전 15,3-6f.의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란 압축된 케리그마적인 신앙고백 어투에 내용적인 병행을 갖는다. 이것과 유사하게 행 13,33-34a의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는 것과 인용 가운데 내 아들이라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란 신앙 고백적 어투와의 인상적인 결합은 롬 1,4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란 전승에서 온 압축적인 신앙고백 어투에 용어적이고도 내용적인 병행을 갖고 있다. 행 13,38(한글성경은 13,39)의 “율법으로 너희가 ... 얻지 못하던(οὐκ ἠδυνήθητε ἐν νόμῷ)”은 롬 8,3의 “율법이 ... 할 수 없는 그것을(Τὸ γὰρ ἀδύνατον τού νόμου)”에 원어적으로 병행한다. 행 13,39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은 롬 3,22(26;10,4f.)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말씀에 병행한다.

이런 병행들은 누가가 편집할 때 바울서신을 기대어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행 13,28-31과 병행하는 압축된 신앙고백어투인 고전 15,3-5이 속해있는 고전 15장은 위의 부활 현현,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고넬료 가정에서의 설교 등의 항목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누가가 그의 두 문서를 집필할 때 많이 사용한 부분이고, 행 13,33-34a과 병행하는 압축된 신앙고백어투인 롬 1,4이 속해 있는 로마서의 서언 부분도 이미 Benedictus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가가 복음서와 행전을 집필할 때 자주 사용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두 부분은 누가가 편집할 때 어떤 전승에서 온 압축된 신앙고백어투를 수용하여 풀어쓴 것이라기 보다는 - 이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 오히려 고전 15,3-5와 롬 1,4에 있는 압축된 신앙고백어투들을 기대어 이야기식으로 풀어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롬 1,3f..에 바울 이전에 예수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취임됨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시 2,7을 누가는 행 13,33에서 완전하게 인용하였을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비슷한 사실을 통하여 강화된다. 이 구절에 연이은 행 13,34b-37에 병행하는 행 2,29-35 - 이 부분은 누가의 편집에 해당하는데 - 가운데 행 2,34에서도 바울서신(롬 8,34; 고전 15,25)에 사용이 암시된 구절인 시 110,1이 구체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2.2.2. 말씀들.

2.2.2.1. 아나니아와 주님 사이의 환상 담화(행 9,13-16).

이 담화는 형식과 내용과 언어 모두가 누가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편집적으로 13절에서 행 8,3을, 14절에서 행 9,1을 재사용하고 15절에서 11절의 위탁을 되풀이한다. 15b.16절에서 사울의 임무와 미래를 특징짓는다. 이러한 편집적인 담화에서 행 9,14(21; 22,16)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고전 1,2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내지는 롬 10,13의 요엘 3,5 인용구와 병행하고, 행 9,15b의 “이 사람은 내 이름을 ...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롬 1,1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와 유사성이 있고, 행 9,15c.16a의 “내 이름을 이방인 앞에 ... 내 이름을 위하여”는 롬 1,5의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에 병행을 갖는다. 여기 행전의 두 구절에 병행하는 롬 1,1.5은 위의 Benedictus와 율법사에 대한 화선언,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 설교, 안디옥에서의 바울설교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가가 즐겨 참조한 로마서 서언에 속한다. 특히 롬 1,5의 세 구성 요소가 모두 행전에 병행으로 나타난다. 누가문서에 한번 나오는 행 1,25의 “사도의 직”은 롬 1,5a의 “사도의 직”에,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행 9,15c.16a은 롬 1,5c에 병행하고, 행 6,7의 “이 도에 복종 하니라(ὑπήκουον πῇ πίστει)”는 롬 1,5b의 “믿어 순종케 하나니(εἰς 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에 원어적인 병행한다. 그러므로 누가가 롬 1,5을 행전에서 풀어 쓴 것이 거의 분명해 진다. 이러한 사실에서 누가가 이 환상 중의 담화를 바울서신을, 특히 로마서의 서언을 참조하여 작성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2.2.2.2.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변론(행 11,1-18).

이 단락은 도입(1-3), 베드로의 변론(4-17)과 청중의 반응(18)으로 구성되었고, 베드로의 변론은 또 다시 도입(4), 베드로의 보고(5-16), 수사적인 질문(17)으로 구성되었다. 베드로의 보고는 행 10장의 이야기에 대한 누가의 요약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요약적인 베드로 보고와 보고의 도입부 청중의 반응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전체 단락의 도입부와 수사적인 질문에만 다음처럼 갈라디아서, 특히 갈 2장과의 병행구가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행 11,2(10,45)의 “할례자들이”는 갈 2,12의 “할례자들을”에 병행하고, 행 11,3의 “무할례자”는 갈 2,7의 “무할례자”에, 행 11,3의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갈 2,13의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와 병행한다. 마지막으로 행 11,17의 믿음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사상은 갈 3,2의 “너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에 내용적인 그리고 어휘적인 병행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기사 배후에 안디옥 사건에 대한 어떤 희미한 흔적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가 이 기사를 작성할 때 갈라디아서의 안디옥 사건에 관한 기사를 기대어 사용했음을 더 분명하게 시사해 준다.

2.2.2.3. 루스드라, 더베 선교 후 안디옥으로 돌아간 두 사도(행 14,21-28).

행 14,15의 “이 헛된 일을 버리고 ...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는 살전 1,9의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에 병행적이다. 행 14,19의 “돌로 바울을 쳐서”란 글의 병행은 바울이 돌로 맞았다는 기사가 바울서신을 통틀어 한번밖에 안나오는 고후 11,25에 있다. 행 14,22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은 살전 3,2-3의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내용적으로 또 표제어 적으로 병행한다. 행 14,26의 “하나님의 은혜에”는 고전 15,10의 “하나님의 은혜로다”에 병행한다. 행 14,27의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이라는 구절은 고전 16,9 내지는 고후 2,12의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리고”에 병행한다.

이 부분에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지명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에 A. Weiser는 누가가 바울전승에서 보유하고 있는 “인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딤후 3,11) 당한 핍박에 관한 보도와 “한 번 돌로 맞음”(고후 11,25)에 관한 전승과 초대교회의 언어관습에서 이 장면들을 형성했다 고 본다. 누가가 다른 전승을 사용했다는 그의 주장도 부정할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가 바울서신을 참조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행전의 병행구가 나오는 바울서신 구절의 주위에 위의 여러 항목에서 제시한 것처럼 누가문서의 구절들에 대한 병행구들이 집중되어 출현한다. 행 14,15의 병행구인 살전 1,9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모범적인 신앙(살전 1,1-10) 부분은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에서 밝힌 것처럼 누가가 즐겨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행 14,22의 병행구절인 살전 3,2-3이 속해 있는 디모데의 파송(살전 3,1-13)에 병행구들(행 16,1: 살전 3,2; 행 14,22: 살전 3,2-3; 행 18,5: 살전 3,6a; 눅 1,19: 살전 3,6)이 많이 있어 누가가 즐겨 사용한 것같다. 행 14,19의 병행구인 고후 11,25이 속해 있는 바울의 고난에 관한 진술(고후 11,25-26) 부분에 누가문서의 병행들(행 16,22: 고후 11,25; 행 14,19: 고후 11,25; 행 9,23(20,3): 고후 11,26)이 있고, 이 부분 다음에 행전에 병행(행 9,24: 고후 11,32; 행 9,25: 고전 11,33)이 있는 다메섹에서의 탈출(고후 11,32-33) 기사가 따라온다. 이들과 유사하게 행 14,27의 병행구라고 볼 수 있는 고후 2,12가 속해 있는 바울의 사역에 관한 기사(고후 2,11-13)에 누가문서의 병행(눅 22,31: 고후 2,12; 행 14,27: 고후 2,12: 행 20,1: 고후 2,13)들이 나온다. 여기서 누가의 독특한 고린도후서의 사용법이 표출된다. 누가는 누가문서를 집필할 때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역사적인 사료가 될 수 있는 간략한 진술 부분을 골라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2.2.2.4. 예루살렘의 사도회의(행 15,1-29).

예루살렘의 사도회의는 1-5의 서론과 6-29의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고, 본론은 6-7의 상황묘사, 7b-11의 베드로의 말씀, 12의 무리의 청취에 관한 언급, 13-21의 야고보의 말씀, 22의 결정, 23-29의 안디옥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으로 짜여져있다. 이러한 회의 기사의 자료에 대하여 학계에서 의견이 갈린다. M. Dibelius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이 회의 보도는 전승에로 소급되지 않는다.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이방 기독교인의 할례에 대한 안디옥에서의 논쟁에 대해서만 알 것이다. 이 기초로 그는 행 15장을 구성했고, 전승에 소급될 수 있으나 회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칙령을 회의 기사의 끝에 두었을 것이다. 이 때 그는 그의 묘사에 원본의 용어를 그대로 혹은 꾸며서 사용하는 고대 역사가의 경향을 따른다. 그러나 현재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와는 달리 누가가 예루살렘 결정과 안디옥 갈등의 문제해결에 관한 전승들로 행 15장을 구성했다고 본다. 이런 가설들을 참조하면서 지금까지 해온 바와 같이 사도회의 기사의 바울서신 병행구를 정리해 보면 새로운 우리의 입장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행 15,1-5의 서론은 위의 비교표에서 보여주듯이 놀랍게도 갈 2,1-4의 예루살렘 방문 기사에 병행이 많다. 15,1a의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를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5절의 할례를 주라는 바리새파 중에 믿는 사람들; 24절의 마음을 미혹케 하는 우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갈 2,4의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에 내용적으로 병행한다. 15,1b의 “할례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와 5절의 “할례를 주 ... 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갈 2,3의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에 대조적인 병행구를 갖는다. 행 15,2b의 “바울과 바나바와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 하니라”는 갈 2,1의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에 내용적으로 병행한다. 행 15,3의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는 7e의 “이방인들로 ...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에서 동의이형으로써 반복되고, 7e는 갈 2,2b의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에서 대조적인 병행구를 갖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동의이형의 반복, 대조적인 병행구, 내용적인 병행들은 누가의 편집술에 속하고 이것은 문서를, 즉 갈 2,1-5를 근거로 함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말씀도 바울서신의 몇 곳에 병행을 갖고 있다. 행 15,9의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않으셨느니라”는 롬 10,12a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와 내용적으로 분명히 병행한다. 행 15,10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는 갈 5,1의 “종의 멍에”에 표제어 병행을 한다. 행 15,11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는 롬 5,15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쳤으리라“에 용어와 내용적인 병행을 한다. 행 15,9이 병행하는 롬 10,12a은 위의 오순절 베드로 설교와 고넬료 가정에서의 설교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누가문서에 병행구가 많고 그러므로 누가가 즐겨 사용한 롬 10,12-14에 속한다. 앞에서 다룬 부분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누가는 편집 시에 즐겨하는대로 롬 10,12을 풀어서 12a를 여기 행전 15,9에서 사용하고, 12b는 행 10,36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뚜렷이 누가가 사용한 예 이외에도 누가는 다음과 같은 바울서신의 병행구들을 풀어 쓴 것처럼 보인다. 행 15,12절 이하의 이방인 중에서 행한 바울의 보고를 듣고 이방인 선교를 허용한다는 내용은 누가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의 인정 부분인 갈 2,6-13 가운데 2,9의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사도들이 교제의 악수를 청하고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게 했다는 내용에 병행한다. 행 5,20의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 를 멀리하라”는 권고는 고전 6,9(8,1)의 “우상 숭배하는 자”와 6,18(살전 4,3)의 “음행을 피하라”를 합한 병행일 수 있다.

이상에서 M. Dibelius가 지적한 것처럼 누가는 고대 역사가(혹은 문학자)의 집필 경향을 따라 원본의 문구들이나 내용을 기대어 풀어 쓴 것처럼 보인다. 그는 특히 갈라디아서 2, 1-5의 예루살렘 방문과 6-10의 이방인 선교허락에 관한 기사를 기대어 썼고, 연이어 나오는 2,11 이하의 안디옥 갈등과 문제해결은 누가가 여기서 사용하기보다는 위에서 이미 다룬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변론(행 11,1-17)에서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전승자료는 A. Weiser나 여러 현대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바울서신이 보도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2.2.2.5.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인사(행 20, 18b-35).

누가의 작품에 속하는 이 고별인사도 바울서신에 다음처럼 상당히 많은 병행구들을 가지고 있다. 행 20,24a의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는 빌 2,30의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에 언어적으로 병행하고, 행 20,24b의 “주 예수께 받은 사명(τὴν διακονίαν)”은 고후 5,18의 “화목하게 하는 직책(τὴν διακονίαν)을 주셨으니”에 병행구를 갖고 있다. 행 20,26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μαρτύρομαι)”는 갈 5,2의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μαρτύρομαι)”에 병행한다. 행 20,28의 “감독자(ἐπισκόπους)”는 빌 1,1의 “감독들(ἐπισκόπους)”에 동일한 언어를 병행으로 갖고 있다. 행 20,30의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은 갈 4,17의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에 내용적 유사성이 있다. 행 20,31의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은 고후 2,4의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와 내용적으로 병행한다. 행 20,31의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 각 사람에게 훈계하던 것”은 살전 2,11의 “너희 각 사람에게 ... 권면하고”에 유사적인 병행을 갖는다. 행 20,34f.의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 이같이 수고하여”는 내용적으로는 살전 2,9(고전 4,12)에, 어휘적으로는 살전 4,11의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에 병행이 있다. 행 20,35의 “약한 사람들을 돕고”는 살전 5,14의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에 원어적으로 병행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구성하는 여러 용어(하나님의 교회, 모든 겸손, 주를 섬기다, 눈물로, 사명, 바울이 손으로 일했다는 것 등)들은 바울서신 내지는 제2바울서신에 나오기 때문에, A. Weiser는 이 설교를 누가의 창작으로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초대교회의 전승과 부분적으로는 바울에게 영향을 받은 전승에서 내용적이고 언어적인 개별요소들을 이 작별인사의 형성을 위하여 받아들였다고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G. Lüdemann은 바울이 손으로 일했다는 말은 누가의 바울서신에 대한 지식에로가 아니라 구전적인 바울전승에로 소급된다고 보며 하나님의 교회의 용례를 통하여 그것이 바울적 선교영역의 개별전승의 사용이지 바울서신의 사용이 아닌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들과 함께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누가가 이 고별인사를 개별전승으로 형성했다는 가설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바울서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의 병행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 행 20,31-35절의 여러 병행구가 살전에 차례로 나온다 - 누가는 이 고별인사를 작성할 때 데살로니가전서를 참조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는 율법사에 대한 화선언과 오순절 베드로 설교를 작성할 때처럼 여기에서도 살전 2,11-15와 공관적 묵시록을 작성할 때처럼 살전 4,3-17을 참조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전 5,1-16도 참조한 것처럼 보인다. 누가가 살전 5,1-16을 참조했다는 것은 행 20,31-35과 살전 5,6-14 사이에 위에서 제시한 어구적 병행(행 20,35: ἀντιλαμβάνεσθαι τών ἀσθενούντων; 살전 5,14: ἀντέχεσθε τών ἀσθενών) 외에 다음과 같은 여러 언어적 병행이 있기 때문이다: γρηγορέω: 행 20,31; 살전 5,6.10, νουθετέω: 행 20,31; 살전 5,12.14, οἰκοδομέω: 행 20,32; 살전 5,11, κοπιάω: 행20,35; 살전 5,12. 이 사실은 누가가 구전 전승보다는 문서를 참조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2.2.2.6. 바울의 변론의 서론(행 22,1-5).

A. Weiser는 서언과 청중의 반응(1-2)과 바울의 출신과 이전의 태도에 대한 진술(3-5)로 구성된 이 부분 중에서 바울의 출신과 교육, 그의 박해행위에 관한 보도들은 누가가 전승에서 온 개별요소들과 관련시킨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부분 가운데 행 22,1의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라는 서언은 고전 9,3의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나의 발명이 이것이니”에 병행한다. 바울의 출신과 이전의 태도에 대한 진술은 두 부분으로, 즉 교육과정을 표시하기 위하여 헬라적인 문학에 통례적으로 사용되는 출생, 성장, 교육의 세가지 테마와 바울의 박해활동으로 나누어진다. 세가지 테마 가운데 마지막 것인 22,3의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는 갈 1,14의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에 병행한다. 행 22,5(6; 9,2.3) 이하의 바울의 회심 내지는 소명이 일어난 장소로써의 다메섹은 바울서신 중에서 유일하게 갈 1,17에 나타난다. 바울의 출신과 이전의 태도에 대한 진술에는 바울의 소명(갈 1,10-24) 부분에 내용적이고 용어적인 병행이 약하게 나타난다. 이런 약한 병행이 그 배후에 어떤 바울전승을 갖느냐 혹은 갈 1,10-24을 갖느냐는 것은 누가가 그의 문서를 집필할 때 바울의 소명 부분을 참조했느냐 안했느냐에 달려 있다.

누가문서에 갈라디아서의 이 부분에 대한 병행구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갈 1,13a의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에 행 26,4.5의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이 병행한다. 갈 1,13b의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에 행 8,3의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가 병행한다. 갈 1,14의 병행구절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행 22,3이다. 갈 1,15a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에 눅 1,15의 “모태로부터”가, 15b의 “나를 택정하시고”에 행 9,15의 “이 사람은 택한 나의 그릇”이 병행한다. 갈 1, 15c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에 행 13,2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가 내용적으로 병행한다. 갈 1,16a의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은 행 9,3-7의 주의 현현 묘사의 내용적인 근거가 되고 9,15의 “내 이름을 이방인 ... 에 전하기 위하여”에 병행한다. 갈 1,17의 바울회심 내지는 소명의 장소로써 다메섹에 행 9,2f.; 22,5f.; 26,12f.들이 병행한다. 이처럼 갈 1,13-17의 모든 구절에 누가문서의 병행이 있다는 것은 누가가 그의 문서를 작성할 때 바울의 소명 부분(갈 1,10-24)을 여러번 참조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 중에서 누가는 그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방법대로 특히 갈 1,13과 15을 둘 내지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썼다.

그런고로 바울변론의 서론에서 누가는 분명히 바울의 소명부분인 갈 1,10-24을 참조하여 집필했다고 할 수 있다.

2.2.3. 사건들.

2.2.3.1. 사울의 피신(행 9,23-26).

다메섹에서 도피에 관한 기사는 고후 11,32f.와 병행한다. G. Lüdemann은 누가가 여기서 전승에 서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C. Burchard와함께 행 9,24-25의 전거는 이미 고후 11,32f.에 근거한 바울적인 개인전승의 조각이라고 본다. 그리고 A. Weiser는 이 두 병행기사의 차이는 누가의 고린도후서에 대한 직접적인 사용을 반대하고 공통적인 점들은 어떤 전승의 영향을 알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견해는 그럴듯하나 너무 단순하다. 누가의 편집적인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면 차이점은 누가의 편집으로, 공통점은 누가가 병행구를 직접사용했다는 데로 돌릴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의 2.2.2.3 항에서 고후 11,32f.가 누가문서에 병행하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 바처럼 행 9,24: 고후 11,32의 “다메섹에서 ...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쌔”는 행 9,24의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에 병행하고, 고후 11,33의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는 행 9,25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에 병행한다. 이러한 병행은 누가가 고린도후서의 해당부분을 참조해서 집필한 거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위의 2.2.2.3. 항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가가 누가문서를 집필할 때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역사적인 사료가 될 수 있는 간략한 진술 부분을 골라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2.2.3.2. 안디옥에 온 예언자들과 유대 형제들을 위한 헌금(행 11,27-30).

행 11,27의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는 갈 2,11의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와 내용적으로도 유사한 병행구를 형성한다. 행 11,29의 유대 성도를 위한 헌금에 대한 보도는 바울서신에 여러 곳(고전 16,1.15; 고후 8,4; 9,1.13; 롬 15,25.31)에 병행적으로 나타난다. G. Schille는 이 보도를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에 대한 바울적 보도와 성급하게 일치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전에서와 바울서신에서 이 헌금은 동일하게 διακονία로 표현된다. 유대에 있는 성도들은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예루살렘 성도”의 동의이어식 표기일 수 있다. 그런고로 유대 성도에 대한 보도는 G. Lüdemann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바울적 보도와 발생적으로 동질이다. 그러나 이 보도가 누가에게 도달된 전승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A. Weiser의 주장은 일면적이다.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관한 바울서신 보도가 속해있는 부분 가운데 고후 8-9는 누가문서에 거의 병행이 없지만, 롬 15,23-32[비교. 행 19,21; 롬 15,25: 행 19,21(20,22); 행 11,29: 롬 15,25.31; 행 18,21: 롬 15,32]과 고전 16,1-15(비교. 행 11,29: 고전 16,1; 행 20,7: 고전 16,2; 행 19,21: 고전 16,5; 행 18,21: 고전 16,7; 행 14,27: 고전 16,9; 행 16,1: 고전 16,10; 행 18,24: 고전 16,12)는 누가문서에 병행이 많다. 그런고로 누가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관한 바울적 보도들인 이 두 부분을 참조하여 집필했을 가능성이 크다.

2.2.3.3.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파송(행 13,1-2).

이 부분에 나오는 선지자와 교사의 결합은 분명히 전승에로 소급되고 아마도 안디옥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G. Lüdemann은 A.F. Zimmermann의 견해를 빌어 주장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다섯 사람과 지명인 안디옥은 문서적인 안디옥 전승에로 소급된다. 그러나 누가가 이 부분을 편집할 때 바울(바울서신)을 참조했는지는 더 살펴보아야 한다. 행 13,1에 나오는 선지자와 교사의 결합은 그 외에는 신약에서 고전 12,28.29에서만 나타난다. 행 13,2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말씀은 판단하기 어렵지만 누가의 편집에 속하고, 롬 1,1에 내용적인 그리고 표제어적인 병행을 한다. 그리고 누가가 로마서의 서문을 즐겨 참조했다는 사실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런고로 이 부분도 전승을 사용하여 편집할 때 누가는 바울서신의 병행구들을 참조하여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2.2.3.4. 돌로 맞음[행 14,(5)19]과 빌립보 감옥에 투옥되는 두 사도(행 16,19-24).

바울이 돌로 맞았다는 보도는 여기 이외에는 바울서신에 고후 11,25b에 단 한번만 등장한다. 이 구절이 행 14,19에 병행하는데 거기서는 구체적인 장면으로 묘사된다. 인상적인 것은 행 14,19이 병행하는 고후 11,25b의 앞뒤의 어구인 25a와 25c에도 행전의 병행구가 각각 나타난다는 점이다. 고후 11,25a의 “태장으로 ... 맞고”도 행 16,22f.에 어휘적으로 병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구체적인 묘사가 거기에 나온다. 여기에서 태장으로 맞는다는 것도 신약에서 행전 이외에는 고후 11,25 이 한 곳에만 등장할 뿐이다. 고후 11,25c의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는 행 27장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에서 누가는 바울의 고난받음에 대한 진술 가운데 고후 11,25abc를 풀어서 행 14,19; 16,19ff.와 27장의 구체적인 장면묘사에 사용했다고 추론할 수가 있다. 누가가 이 부분들을 집필할 때 고후 11,25을 사용했다는 것은 고후 11,23의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가 행 16,23f.에 순서가 뒤바뀐 언급으로 병행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 강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고후 11,23-25의 병행구들이 등장하는 행 16,19-24의 빌립보에서의 투옥 부분은 살전 2,2의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라는 진술의 구체적인 묘사에 해당한다. 그런고로 행 14,19의 돌로 맞음과 행 16,19-24의 태장으로 맞고 감옥에 투옥되는 바울에 대한 장면들 가운데 전자는 누가가 즐겨 참조한 바울의 고난받음에 대한 진술(고후 11,23-27) 가운데 고후 11,25b을 기대어 묘사했고 후자는 살전 2,2을 근거로 하여 고후 11,25a를 기대어 장면화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2.3.5. 예루살렘과 로마 여행을 위한 결심(행 19,21-22).

행 19,21f.는 눅 9,51에게 내용과 기능과 문체에 있어서 병행하는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이정표로써 누가의 형성물이다. 이 편집 구절에서 언급되는 여행계획은 전승에로 소급된다고 G. Lüdemann은 생각한다. 역시 이것도 어떤 바울전승에서 나온 소식에로 소급되기보다는 바울서신에서 따온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편집적인 구절에 바울서신의 여러 어귀가 다음처럼 병행으로 나타남으로 누가가 자기 문서를 편집할 때 이것들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 19,21b의 “바울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고린도)로 다녀서”는 고전 16,5의 “내가 마게도니아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에 내용적으로 어휘적으로 분명히 병행한다. 행 19,21c의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는 롬 15,25의 “이제는 예루살렘에 가노니”와 아마도 고전 16,3의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에 병행한다. 행 19,21d의 “내가 거기(예루살렘) 갔다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롬 1,11의 “내가 너희를 보기 원한다”에 병행한다. 행 19,21의 마게도니아, 아가야, 예루살렘, 로마 등 여행지명들은 롬 15,23-26에 (로마), 예루살렘,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등으로 순서는 바뀌었으나 병행한다. 그런고로 행 15,25b.c.d.는 누가가 고전 16,5과 롬 15,23-26; 1,11 등을 사용하여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2.4. 인명과 지명들.

지금까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미 지명 가운데 바울서신에 병행이 없을 때 그것들(안디옥, 이고니아, 루스드라 등)은 물론 전승에서 사용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바울서신에 병행이 있을 때 어떤 것들(빌립보, 로마, 마게도니아, 아가야, 예루살렘 등)은 바울서신에서 사용한 것이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누가는 행 15-18장에서 로마서의 인명(롬 16)과 지명(롬 15, 23-26)을 많이 참조하고 그것을 기대어서 사용했다. 그렇다고 병행이 있다고 해서 모든 지명이 다 바울서신을 기대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것들은 바울적인 전승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이 결과가 병행이 있는 다른 여러 지명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행전에 나오는 인명도 바울서신에 병행이 있다면 바울서신에서 따온 것도 있을 수가 있고 전승에서 따온 것도 있을 수가 있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문서의 저자는 누가문서를 편집할 때 바울서신들을 참조했다. 그는 누가복음을 집필할 때 특별자료와 Q와 마가복음을 수용하면서 때때로 그 전거들을 조탁하는 소자료로써 바울서신을 사용했다. 특히 Benedictus, 70인 제자 파송과 귀환보도, 율법사에 대한 화선언, 충성된 종과 사악한 종에 관한 비유, 공관적 묵시록, 새 계명에 관한 성만찬 때의 말씀, 낙원에 대한 말씀, 부활하신 분의 현현 등을 편집할 때 바울서신 가운데 로마서의 서문(롬 1,1-5)과 유대인과 율법(롬 2,17-29), 고린도전서의 부활의 장(고전 15장), 데살로니가전서의 삶의 성결에 대한 요구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과 주의 날(살전 4,13-5,11) 등을 많이 참조하여 조탁에 해당되는 병행구들을 풀어썼다.

사도행전을 집필할 때에 누가는 복음서를 집필할 때보다 바울서신을 훨씬 더 많이 의존했다. 그는 행전의 여러 설교들, 말씀들, 사건들, 인명과 지명 등을 보도할 때 바울서신 가운데서 신학적인 중요 주제가 다루어지는 부분이나 역사적인 사료가 될 수 있는 부분과 중요한 말씀들과 인명과 지명들을 많이 참조하였다. 특히 로마서의 서언, 유대인과 율법(롬 2,17-29), 바울의 사명, 사역과 여행계획(롬 15,14-32)과 마지막 인사(롬 16,1-23), 고린도전서의 부활의 장(특히 고전 15,1-34)와 연보, 여행계획, 마지막 권고와 인사(고전 16,1-20), 고린도후서의 바울의 사역(고후 2,11-13), 바울의 수고와 고난(고후 11, 25-26)과 다메섹 탈출(고후 11,32-34), 갈라디아서의 바울소명(갈 1,10-24); 예루살렘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바울 인정(갈 2,1-10), 안디옥에서 베드로와의 논쟁(갈 2,11-13)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갈 3,1-18), 빌립보서의 바울의 구금, 복음의 선포와 신앙의 일치(빌 1,12-30), 그리스도의 찬양시(빌 2,5-11)와 타락에의 경고와 사도의 모범(빌 3,1-21), 데살로니가전서의 교회의 모범적 신앙(살전 1,2-10), 바울사역의 회상과 교회의 복음영접(살전 2,1-15), 디모데의 파송(살전 3,1-10),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살전 4,1-18)과 주의 날과 기독인의 삶(살전 5,1-16) 등을 참조하여 사용했다. 그는 고대 역사가나 문학자처럼 전거를 풀어서 사용했다. 예를 들면 롬 1,5abc를 풀어서 행 1,25, 행 6,7과 행 9,15에서 사용했고, 고후 11,25abc를 풀어서 행 14,19, 행 16,19ff.와 행 27장의 구체적인 장면묘사에 사용했으며, 갈 1,15abc를 풀어서 눅 1,15, 행 9,15, 행 13,2에 사용했다.

이상은 누가가 편집 시에 바울사역에 관한 다른 전승이 부분적으로 있어서 그 전승을 사용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를 통하여 누가가 바울서신의 모든 병행구를 다 사용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라도, 또한 누가가 사용한 바울에 관한 다른 전승이 소수가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위에서 제시한 근거들은 누가가 편집 시에 바울서신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이제 누가문서의 자료로써 바울서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은 누가-행전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며 동시에 어려운 과제를 안겨준다. 누가문서, 특히 행전의 Text를 분석하는데 이제는 반드시 바울서신과의 관계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이 고대 문학자의 기풍에 따라 병행구절들을 참조하여 새로운 장면이나 설교나 이야기식으로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가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병행이 있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행전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기보다는 병행되는 바울서신에서 그것을 찾아 행전의 바울역사를 재구성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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