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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들의 자유 ‘쇼생크 탈출’ (2)

은바리라이프 2010. 2. 7. 00:18
영화 ‘쇼생크 탈출’의 무대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쇼생크 교도소이고, 두 번째는 앤디가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과 탈옥 후의 교도소 밖 - 즉, 미국이다. 세 번째는 태평양의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멕시코의 어느 마을이다. 그런데, 이 설정은 은유이고, 또한 상징이다. 먼저 영화 속에서 기억해내야만 하는 점이 있다. 바로 쇼생크에 대한 부분들이다. 쇼생크는 단순히 교도소가 아니다. 쇼생크야말로 미국 그 자체이다.

쇼생크는 미국의 은유

앤디가 탈옥 도구로 사용한 록 햄머를 교도소 내의 작업장 등에서 몰래 훔친 것이 아니라, 레드에게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레드는 교도소 밖에서 물건을 들여와서, 죄수들에게 물건을 판다. 당연히 시세보다 비싸게 판다. 그의 물품에는 담배, 껌, 위스키, 카드, 영화 포스터 돈만 낸다면, 어떤 물건이라도 구해준다. 결국, 쇼생크도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단지, 물질적으로 바깥 세계에 비해서 풍요롭지 않고, 또한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교도소 내의 죄수들은 교도소의 소장이나 간수, 더 나아가서는 바깥 세계로부터 착취를 당한다. 일례로 앤디가 교도소 내의 비공식 회계사가 된 것은 교도소 밖의 공장의 지붕을 보수하는 공사에 일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그들은 바깥 공기를 잠시 동안 - 영화에서는 일주일이었다 - 흡입하기 위해서 무보수로, 게다가 담배 한 갑씩을 상납까지 하면서, 지원자로 뽑히려고 한다. 또한, 동생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 해들리 - 소장이나 간수들 역시 바깥 사회로부터의 착취 - 는 과도한 세금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교도소 내의 지배자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터무니없는 세금과 착취, 그리고 바깥 세계라는 대목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이다. 미국의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한 번씩은 들어본 ‘보스톤 차 사건’이다. ‘보스톤 차 사건’은 재정난에 허덕이던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인지조례 등으로 과도한 세금을 매기고, 게다가 당시 미국인들이 주로 마시고 있던 차의 유통을 제한하고, 무거운 세금을 물린 것이 그 원인이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바깥 세계’는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다. 그리고 ‘쇼생크’가 바로 미국이다.


또한, 탈옥한 앤디가 멕시코로 가는 것은 ‘서부 개척’의 은유이다. 이 영화의 숨은 주제는 ‘프론티어 정신’인 셈이다. 프론티어 정신이란, 흔히들 말하는 개척자 정신인데, 강건함과 인내, 창의, 현실성, 투쟁심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서부극의 대명사인 존 웨인의 ‘Westward Ho!’(로버트 N. 브래드버리감독, 1935년)는 19세기 미국을 상징하는 슬로건이었다. ‘Westward Ho! 어이~, 서부로 가자’는 말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삼아서, ‘매니페스트 데스티니’(명백한 사명, 혹은 운명)에 몸을 맡기고, 서부로 서부로 진출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진출한 서부는 바로 멕시코의 영토였던 캘리포니아였다.

당시 존 오설리번이 논설에서 미국인은 “전 인류에 신의 원칙들을 명백히 실현할 운명을 부여받은 국민”이라며, “전체 서반구는 우리 위대함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 말은 미국인은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남의 땅을 빼앗을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으로 미국의 침략전들 - 멕시코와 스페인과의 전쟁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의 정당성이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앞선 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소장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요한복음 8장 12절’로 이어진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프론티어 정신의 결과물이다. 서부로 진출하기 이전인 미국의 동부지방을 개척한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은 희망과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으로 왔다. 그런 그들에 의해서 미국의 동부지역은 18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개척되었고, 뒤늦게 신천지인 미국에 온 이주민들은 동부지역을 벗어나서, 서부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거기에 산업혁명으로 농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새로운 생활을 찾아서, 서부로 가는 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서부로 가지 않고, 그 지역에 안주했다면,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비 노동자가 늘어남으로서, 당연히 저임금과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했을 건 불을 보듯이 뻔하다. 즉, 그들이 안주가 아닌 이동을 선택함으로서, 미국이라는 사회는 안정될 수 있었고, 급속한 공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영화에 대입하면, 탈옥한 앤디가 최초로 서부로 진출한 이주민들이다. 앤디를 따라서 멕시코로 간 레드는 일자리를 잃은 소작농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소작농이 영화 속에는 있다. 바로 하트렌이다. 레드나 하트렌은 쇼생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노동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쇼생크를 나가라고 하는 죽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유 -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사지로 내몰렸다. 결국, 안주를 택한 하트렌은 자살할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앤디라는 희망이 있었던 레드는 신천지를 향했다.

그의 선택도 하나다. 바쁘게 살든지, 아니면 바쁘게 죽든지.

하트렌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이 영화의 하나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일단, 하트렌이 목을 맨 문지방(?)에 그가 새긴 “BROOKS WAS HERE”라는 글귀가 있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들 사이에 유행한 “Kilroy Was Here”라는 낙서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군들은 자신들이 어딘가를 점령한 기념으로 건물의 벽 등에 “Kilroy Was Here”를 남겼다. 미군이 간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공의 군인인 킬로이라는 이름을 만날 있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킬로이는 팽창하는 미국을 상징하는 대명사이다.

하트렌의 자살은 앞서서도 말한 땅을 잃고, 지역에 잔류한 농부들의 상징인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행하는 모든 일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의미도 있다. 즉, 힘없는 미국인들의 피로서 미국은 구축되었고, 또한 확대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서 치른 원주민들과의 소규모적인 전투를 비롯해서, 멕시코와 스페인 등과의 영토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흘린 미국인들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트렌의 자살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영화의 유일한 가치가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

쇼생크에서 50년간 산 브룩스 하트렌은 가출옥을 승인받는다. 하지만, 자유를 되찾게 되었는데도, 하트렌은 오히려 쇼생크에 남으려고 한다. 동료 죄수를 죽여서라도, 쇼생크에서 남은 생을 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트렌의 이 행동에 대해서 레드와 죄수가 나누는 대화는 매우 인상적이라 못해서, 머릿속에 각인될 정도이다.

레드 : 브룩스는 안 미쳤어. 교도소에 길들여졌을 뿐이야.

헤이우드 : 길들여져?

레드 : 50년을 있어봐. 바깥 세상을 몰라. 여기선 그가 대장이야, 모르는 없지. 하지만, 사회에선 아무 것도 아냐! 쓸모없는 쓰레기야.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헤이우드 : 알겠어.

레드 : 너도 알아둬. 이 철책이 웃긴 거야. 처음엔 싫지만, 차츰 길들여지지.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벗어날 수 없어. 그게 길들여진다는 거야!

헤이우드 : 망할! 난 그렇게 안 될 거야!

레드 : 그래? 브룩스처럼 오래 있어봐. 우리한테 종신형을 선고하고 삶도 빼앗지.

사회로부터 길들여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화이다. 즉, 쇼생크에 수감된 죄수들은 단순히 자유만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쇼생크를 벗어나서도 살아갈 수 없도록 길들여지고 있던 것이다. 하트렌이 자살하기 전에 보낸 편지의 내용도 이 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친구들, 바깥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어. 어렸을 때 자동차를 봤는데, 지금은 너무 많아.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어. 보호 감호대상이야. 가석방자 수용소에 있지. 직업을 가졌는데 물건을 담아주는 일이야. 남들보다 잘하려고 하지만, 난 실수를 자주 저질러. 지배인은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일을 끝내고, 공원에 새를 보러 갔지. 나는 제이크가 날 찾아올 것 같았어.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어디 있든지 그도 친구를 사귀고 있겠지.

난 밤에 자지를 못해.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꿔. 공포에 질려서, 잠에서 깬 내가 어디 있나 몰라!

도둑질이라도 해서, 쇼생크에 다시 가고 싶어. 매니저를 쏘고 싶기도 해. 그러기엔, 난 너무 늙었어. 난 여기가 싫어! 두려움 속에 살긴 싫어! 난 여기에서 살고 싶지 않아! 나 같은 늙은 도둑놈을 왜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어. 나 같은 늙은 도둑놈을 내쫓진 않겠지. 끝으로, 헤이우드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인간이 어떤 상황에 길들여진다는 것 이상으로 두려운 것은 없다. 미국에서 흑인이 노예에서 해방되었을 때, 상당수의 흑인들이 자유인이 아니라, 다시 노예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한 번 동물원이나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물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길들여짐은 단순히 노예와 같은 과거의 이야기도, 또한 동물의 세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제도적으로나 관습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길들여짐이 무서운 것은 사회의 부조리나 악습 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나아가서는 개인이 창조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 심사에서 원하지도 않은 가출옥을 손에 넣은 레드가 브룩스 하트렌의 전철을 밟을 때, 흘러나오는 나레이션은 길들여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있다.

“40년 동안 허락 받고, 오줌 누러 갔다. 허락 받으면, 한 방울도 쌀 수 없었다. 그것이 내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나는 사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교도소에 들어갈까만 생각했다. 두려움 속에 사는 건 끔직한 일이다. 브룩스도 그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돌아가는 것이다. 언제든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레드는 40년 동안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인 오줌을 누는 것조차도 누군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하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길들여짐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교도소라는 극악의 상황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다.

학생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강요되는 교육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 등 합법적으로 비합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길들이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말 사회에서 당연하게도 행해지는 길들이기를 나열한다면,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길들여짐 - 영화에서 본다면, 길들이는 간수와 길들여지는 죄수라는 구도가 되는데, 단순히 죄수만이 감옥 생활에 길들여지는 것일까? 아주 어릴 때 읽어서, 제목이나 작자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책에서 읽었던 대목이 있다.

“노예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대상인 흑인뿐만이 아니라, 백인들까지 피해자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당시에는 이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예 제도의 피해자인 흑인만이 아니라, 그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백인도 피해자가 된다는 이 말은 모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씩 머리통이 굵어지면서, 이 말에 납득할 수가 있었다.

노예 제도라는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 제도로 인해서, 일반의 백인들은 ‘흑인 = 노예 =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노예 제도는 상식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색 인종은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유색 인종은 자신들과 비슷한 모습을 한 동물에 불과했다.

이것이 시대의 상식이었고, 당연함이었다. 이 당연하고 상식인 사회적인 제도로 인해서, 백인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극악에 가까운 죄를 저질렀다. 일부의 이러한 제도를 만들고, 시행한 기득권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인들 역시 비인간적인 제도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소장의 명령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또한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토미를 사살한 해들리 역시 쇼생크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이다. 쇼생크가 길들이고 있었던 것은 죄수들만이 아니라, 그 가해자인 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포스터를 한번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연상시키는 탈옥에 성공한 앤디는 자유와 부활에 대한 희망이라는 종교적인 테마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희망은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반면에 두려움은 사람을 죄수로 만들 수 있다”는 카피는 인내와 희망, 생존, 해방, 그리고 구원이라는 영화의 전개가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여기에서 인내와 희망, 생존, 해방, 그리고 구원이라는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프론티어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동시에, 지금의 주제인 길들여짐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앤디 : 음악을 느껴본 적이 있어?

레드 : 어릴 때 하모니카를 불긴 했었지. 하지만, 여기서 모든 걸 잊어 버렸어.

앤디 : 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해.

레드 : 망각?

앤디 : 세상을 망각하면, 절대로 나갈 없어. 그걸 간직하고 있으면, 누구도 뺏어 갈 수 없지. 자신의 것이거든.

레드 : 무슨 소리야?

앤디 : 희망.

레드 : 희망? 이봐, 무슨 얘길 하는 거야?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이성을 잃게 하지. 이곳에선 쓸모없는 것이야. 자네도 받아 들여야 해.

앤디 : 브룩스처럼?

앤디는 언젠가는 자유 - 단순히 신체적인 자유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제도로부터의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교도소 내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인내하고 있다. 교도소 내에서 끝까지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고, 생존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앤디인 것이다.

반면에, 인간다움을 망각한 레드나 브룩스 등은 단순한 동물적인 생존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다움을 망각하지 않고 있던 앤디가 탈옥한 후에, 갈 곳은 인간다움이 살아있는 새로운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교도소 밖으로 탈옥에 성공한 앤디의 몸짓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가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은 국경선을 벗어났을 때였다.

이것은 가석방된 브룩스 하트렌이나 레드의 생활을 보면 명백하다. 레드 역시 브룩스 하트렌의 전철을 밟을 운명이었다. 그가 브룩스 하트렌과 달랐던 것은 앤디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부질없고 공허한 머릿속 상상이 아닌 앤디의 메시지를 통해서 현실이 된다.

“당신이 이걸 읽는다면, 이제 자유의 몸이겠죠. 멕시코의 마을을 기억하나요? 내 사업을 도와줄 좋은 친구가 필요해요. 체스판을 준비해두고, 당신을 기다릴게요. 기억하세요, 레드. 희망은 좋은 거죠! 가장 소중한 것이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발견되길 빌며, 그리고 건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