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탈출 ; The Shawshank Redemption

1994년 미국

감독 : 프랭크 다라본트

출연 : 팀 로빈스, 모간 프리먼, 밥 건톤, 윌리엄 새들러

‘쇼생크 탈출’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인 ‘사계 Different Seasons’에 수록된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를 영화화한 것이다. 스티븐 킹이라고 한다면, ‘캐리 Carrie’(브라이언 드팔마감독, 1976년), ‘샤이닝 SHiNiNG’(스탠리 큐브릭감독, 1980년), ‘데드 존 The Dead Zone’(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감독, 1983년) 등과 같은 호러물이나 ‘미저리 Misery’(롭 라이너감독, 1990년) 등의 서스펜스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스탠 바이 미 Stand By Me’(롭 라이너감독, 1986년)나 이 작품과 같이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추궁하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특히, 이 영화는 라스트 신에서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전개로 보는 이들에게 상쾌한 해방감을 주고 있다.

감독인 프랭크 다라본트는 ‘나이트 메어 3 - 꿈의 전사 A Nightmare on Elm Street 3 : Dream Warriors’(척 러셀감독, 1987년)나 ‘플라이 2 The Fly II’(크리스 월러스감독, 1989년) 주로 호러물의 각본을 썼고, 실질적으로 이 작품이 감독 데뷔작(1990년 ‘생매장 Buried Alive’이 데뷔작이지만)이다.

펼쳐두기..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꼭 내가 이별이라도 통보한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긴 그녀는 ‘딥 임펙트’를 보고서도 눈물을 보일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했기에(영화를 본 후에 울지 않은 영화가 한 편도 없었다), 눈물이 이해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극장을 벗어나던 사람들이 나를 보던 매서운 눈초리는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의미 깊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쇼생크 탈출’은 헐리우드에서 만들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이다. 여기에서 ‘미국적’이라는 의미는 미국의 가치관, 혹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의미한다.

자유를 끝없이 추구, 혹은 열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테마이다. 인간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들 인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또한 이 사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한 발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모든 속박과 부조리와 직면했을 때, 희망을 잃지 않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영화는 묻고 있다.

즉, 영화 속의 쇼생크라는 교도소는 단순히 어떤 한정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 혹은 세계이다. 앤디는 가장 비인간적인 장소인 교도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자부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의 긍정적인 생활 방식은 서서히 다른 죄수들에게도 전파되어서,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의 앤디는 종신형의 신분인 주제에 왜 자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맥주를 마신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혹은 ‘책을 읽는다’ 등과 같은 지극히 사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감옥에서 앤디에게 “한 가지 얘기해 줄까?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수도 있지. 이 안에 희망은 없어. 그걸 받아들이는 게 좋아!”라고 레드가 멕시코로 향하면서, 내뱉은 대사는 매우 상징적이다.

“꿈. 희망. 꿈을 갖고 살든지 아니면, 희망 없이 죽든지. 희망의 긴 여행을 떠날 있는 자유로운 사람.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를 만나서 포옹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태평양이 꿈속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이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는 스티븐 킹의 원작의 타이틀인 ‘Rita Jayworth’와 ‘Redemption’이다. 단순히 한국판 제목인 ‘쇼생크 탈출’은 자유를 위한 탈옥만을 강조한 생뚱맞은 의미도 없지는 않다. 자유가 이 영화의 중심 테마인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영화 속의 자유는 상당히 왜곡된 형태의 개인적인 - 혹은, 선택받은 자들의 자유이다.

리타 헤이워드에 감춰진 비밀


리타 헤이워드 Rita hayworth는 말할 필요도 없이 194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은막의 섹스 심벌이다. 그는 원작의 타이틀 외에도 영화에서는 두 등장한다. 첫 번째는 레드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면서, 앤디 등과 함께 본 영화가 리타 헤이워드가 주연으로 나온 ‘길다 Gilda’(찰스 비더감독, 1946년)이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본 앤디가 레드에게 부탁한 포스터가 당연하게도 리타 헤이워드였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앤디는 록 햄머로 탈옥을 위해서 판 구멍을 숨기기 위해서 야릇한 포즈의 포스터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 포스터 속의 인물은 리타 헤이워드를 시작으로 해서, 마를린 먼로, 라켈 웰치였다. 이 3명의 은막의 섹스 심벌로, 감독은 앤디가 교도소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리타 헤이워드의 포스터가 앤디의 감방에 장식된 것이 1949년이었고, 이어서 마를린 먼로의 포스터는 1957년, 끝으로 라켈 웰치의 포스터는 탈옥 직전인 1966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3인의 포스터는 단순히 시간의 경과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포스터들이 가진 숨은 의미는 라스트 신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앤디의 증발로 당황하고 있던 소장을 비롯한 간수들과 죄수들은 라켈 웰치의 포스터가 숨기고 있던 벽을 뚫은 구멍을 발견한다. 이 구멍이야말로 포스터의 진정한 의미이다.

레드가 앤디의 탈옥을 회상하면서, “나는 600년은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알 있듯이, 앤디가 파낸 구멍은 교도소와 바깥 세상을 연결하는 창구인 동시에, 자유를 향한 앤디의 희망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자유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표면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영화의 중심 테마인 자유는 사회의 질서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교도소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좀 더 나은 환경으로의 이동일 뿐이다. 즉, 최하층에서 중산층, 혹은 최상층으로 가는 뒷구멍일 뿐이다. 교도소라는 비인간적인 사회로부터 탈출해도, 앤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비인간적인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이다.

1946년 미국에 의해서 비키니섬에서 원자폭탄의 실험을 행할 때, 폭탄에 리타 헤이워드의 포스터가 붙여졌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리타 헤이워드가 되었든 마를린 먼로나 라켈 웰치가 되었든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왜곡된 욕망 - 성의 상품화와 풍요라는 이름의 소비문화이다.

즉, 리타 헤이워드 등은 속물적인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그 여신의 구멍 - 성적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 을 통해서 앤디가 복귀를 희망하는 사회는 또 다른 교도소 - 비인간적인 사회일 뿐이다. 결국, 자유를 열망하는 앤디는 교도소를 탈옥해서, 미국 안이 아닌 미국 밖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택은 하나다. 바쁘게 살든지, 아니면 바쁘게 죽든지.

속죄와 종교적 의미

그렇다면, 또 다른 키워드인 Redemption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Redemption의 의미를 M파스에게 물어봤더니, “종교에서 근본적으로 고통 · 죄 · 유한성 · 죽음과 같은 부정적이고, 무능력의 상태로부터 인류를 구원함을 의미하는 교리”라고 한다. Redemption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속, 속죄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성경이나 그 문구들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영화의 포스터로도 사용된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라스트 신의 한 장면이나 록 햄머를 숨겨둔 성경이 바로 ‘출애굽기’인 것이나 소장의 비밀금고를 숨기고 있는 액자의 글귀가 성경의 문구에서 온 “심판의 날은 곧 오리라”인 것 등 끝없이 등장하고 있는 동시에,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하 출처 : 공동 번역)

바로 포스터에 사용된 “희망은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반면에 두려움은 사람을 죄수로 만들 수 있다 Hope can set you free. Fear can hold you prisoner”는 이 구절을 응용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2절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말은 구약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산제물 - 살아있는 동물의 피로 죄가 사해졌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박힘으로 인류의 죄가 영원히 사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속죄’라는 의미의 단어가 영화나 원작의 타이틀에 들어간 것은 어떤 의미인 것일까?

누명을 덮어쓰고, 투옥된 앤디가 간수나 죄수들의 폭력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신의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앤디에게 있어서 교도소의 수감은 십자가 처형이고, 탈옥한 것은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끝으로 소장의 비밀 자금을 가지게 된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속죄 Redemption라는 단어에 축약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 수도 있다. 앤디를 예수 그리스도의 현체화로 설정할 수도 있다. 무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을 의미하고, 쇼생크의 죄수들은 유대인(혹은, 인류)을, 소장과 간수는 빌라드 총독과 예수를 박해한 세력이 된다. 예수의 속죄라는 은총을 받은 인물이 레드이다.

또한, 예수의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자주 말해지는 갈라디어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라는 부분은 앞서 말한 리타 헤이워드 등의 포스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마가복음 13장 35절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이 부분은 앤디의 감방을 수색하던 소장이 성경을 보고, 좋아하는 구절을 물었을 때에, 앤디가 대답한 부분이다. 구절은 ‘최후의 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기다리고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신(야훼)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모든 죄를 알고 있기에, 항상 올바른 일을 하라는 의미로,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교도소 소장인 노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살인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로, 신입 죄수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신약성서를 가지도록 하였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그가 믿고 있던 구석이 바로 이 구절이다. “어떤 짓을 하더라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 구절로, 자신의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것은 현재의 교회들의 위선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신의 심판을 거론하면서, 선행을 입에 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살인조차도 저지른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만 하면, 자신들의 죄는 모두 사라졌다고 믿고, 다시 악행과 회개를 거듭할 뿐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교도소장의 비밀 금고를 가리고 있는 액자와 앤디가 소장에게 마지막에 남긴 “심판의 날은 곧 오리라 His judgement cometh and that right soon”는 아마도 이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가 아닐지 싶다. 영화의 전개상 심판이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이라고 생각한다.

‘쌀나라의 카더라 통신’의 이반옹에 따르면, 이 구절을 구태여 성서에서 찾는다면, 시편 96편 13절의 “야훼께서 세상을 다스리러 오셨다. 그 앞에서 즐겁게 외쳐라. 그는 정의로 세상을 재판하시며 진실로써 만백성을 다스리신다”나 요한계시록 14장 7절의 “그리고 큰소리로 ‘너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찬양하여라. 그분이 심판할 때가 왔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샘물을 만드신 분을 예배하여라.’ 하고 외쳤습니다”가 더 적당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가 그렇다고 하는데.

역시 선택은 하나다. 바쁘게 살든지, 아니면 바쁘게 죽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