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탐구 ①
차정식(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
그리스도교의 창조적인 개척자 바울이 걸은 길을 추적해 보면, 일차적으로 다소-예루살렘-다메섹-아라비아-다메섹의 궤적을 그린다. 다소가 그에게 헬레니즘 문명의 시혜를 제공했던 디아스포라의 고향이었다면, 예루살렘은 바울이 가말리엘이라는 걸출한 랍비 문하에서 바리새적 수련을 거치면서 맹렬한 그리스도교의 핍박자로 활약하던 곳이다. 또한 다메섹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을 색출, 압송하기 위해 가다가 강렬한 빛의 체험과 더불어 회심의 계기를 맞은 도시이다. 그러면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오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그 대신 갔다는 아라비아는? 그 아라비아는 어디였고, 왜 바울이 그곳을 찾아간 것일까?
첫 번째 의문은 답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여기서 아라비아는 아라비아 사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 주,(provincia Arabia)를 가리킨다. 이곳은 당시 나바티아 왕국(Nabatean Kingdom)이 자리잡은 땅으로 사해 남동쪽 일대에 길게 뻗어 있었다. A.D 106년 로마제국의 한 주로 병합되기 전 이 왕국은 바울 당시 아레타스 4세의 통치하에 있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들창 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도망치도록 협박한 장본인이 아레타스 4세와 동일인이라면(고전 11:33) 당시 이 왕국의 영향력이 다메섹까지 미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근래의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는 이 지역에 상당수의 성읍들이 분포한 사실을 전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도시로는 페트라(Petra)와 보스트라(Bostra) 등이 알려져 있다. 바울이 비교적 컸을 아라비아의 이런 도시로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어느 자그만 촌락을 근거지로 삼아 일정 기간 머문 것인지, 사람을 피해 저 홀로 이곳저곳을 떠돌 듯 전전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바울 스스로 아라비아로 간 사실만을 언급할 뿐 아라비아의 어느 곳을 어떤 목적으로 가서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스테리를 풀기 위한 길은 오로지 추리밖에 없다. 그런데 그 추리는 막연한 상상과 조금이라도 구분되어야 한다. 나는 일단 바울이 자신의 급격한 회심과 변신으로 인한 정서적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는 차원에서 아라비아행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으리라는 심증을 품는다. 그것은 자신의 새로운 확신을 공증할 인간적 권위의 요람인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찾는 대신 사람이나 환경이나 두루 낯설기 그지없었을 아라비아를 택했다는 점에서 구심적으로 사교 관계를 트기보다 원심적으로 자신과의 고독한 대화를 지향한 결단이라 할만하다. 그것은 실세와의 유착을 외면하고 독립적인 모험을 택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 낯설고 새로운 길 위에서 바울은 기존의 교회 지도자들이 신봉한 자족적 신학을 뛰어넘는 도전적인 신 이해의 지평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새로운 신념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차원에서 적절한 기회를 얻었을 경우 그곳 아라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 추측이 성립하려면 적어도 다메섹의 경우처럼 그 지역에 일군의 신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아무런 물적, 심적 후원 없이 홀몸으로 광야에서 선교를 할 수는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비아에 그런 공동체가 있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설사 선교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바울은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도 그는 그 일에 대체로 어설펐을 것이고, 일련의 시행착오를 통해 그는 다음의 행보를 조심스럽게 짚어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자신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한편으로 자중자애하며 다른 한편으로 노심초사하는 가운데 뜸을 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메섹 도상에서의 원형 체험을 신학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이 걸어야 할 모진 앞날의 여정을 전망했을 법하다. 그는 그렇게 엑스터시의 체험 속에 뒤집어진 자신의 초상을 섣부른 열정으로 소진시키지 않고 자신의 내부로 깊이 침잠함으로써 그 영혼이 충분히 영글고, 그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신과 사명을 위한 기획이 적시를 만나 무르익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 점에서 아라비아는 바울에게 실험실이었고 수양관이었으며 훈련장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마냥 안온한 감상의 온실이 아니었던 것은, 그가 그곳에서 앞으로 걷게 될 머나먼 선교적 여정을 채비하는 정중동의 몸부림을 보여주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라비아의 피정에서 실종되지 않았다. 그 척박한 외지에서 고립될 겨를도 없이 마치 연어가 제 생명의 고향으로 회귀하듯 그는 회심의 고향인 다메섹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용납해준 형제들과 더불어 3년간의 공동 생활을 하며 또 다른 수련기를 거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3년이 지나자 바울은 비로소 예루살렘을 찾아 자신보다 먼저 사도 된 베드로와 예수의 아우 야고보 등을 만나 15일간 교제한다.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오른손의 악수’를 나눈 그는 그들과 머무는 동안 예수의 살아 생전 일화들을 전해들으며 또 자신의 회심담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으로 향하는데, 그 와중에 자신을 처음으로 파송하고 이후 선교 활동을 일정 기간 후원해준 안디옥 교회에 일년쯤 정착한다. 바울과 안디옥 교회의 이 인연은 아마도 바나바의 주선으로 트였을 것이다. 그 전에 그는 자신의 고향 가족들과 친지들과 만나기 위해 다소를 잠시 들렀을까?(행 11:25)
안디옥에서 시작된 바울의 원거리 선교 여행은 고된 만큼 화려한 면이 있다. 일찍이 구브로의 뱃길을 경유하여 갈라디아(지금의 소아시아 일대)를 돌아온 바울의 여정은 그 뒤로 그 반경을 더욱 확대하여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지금의 발칸 반도 일대)로 이어졌고, 마침내 죄인 아닌 죄인의 신분으로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에 닿기에 이르렀다. 그 지중해 연안의 땅을 육로와 해로를 통해 종횡무진 누비던 바울은 그 지역 선교를 일단락지으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고 회상한다. 굳이 그가 이런 원족의 행보를 통해 이방의 낯선 곳들을 찾아다닌 내력은 사뭇 감동적이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인즉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것이다. 바울이 개척자 중의 개척자라고 할 만하다면 그의 이러한 철저한 탐험 정신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동부를 평정한 뒤로 그 서부의 끝인 서바나(오늘날의 스페인)까지 갈 요량으로 로마 교회와의 연대를 추진하며 내친김에 그 교인들에게 물심양면의 후원을 요청했다. 그러한 사전 작업의 결과 남은 것이 바울의 최후 걸작인 로마서다.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 그는 이방인 교회의 모금 전달을 위한 예루살렘행의 위험을 두고 근심한 흔적을 보여준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어 죄수로 로마를 밟는 파란만장을 경험했다.
그가 로마에 이르러 서바나행의 꿈을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 역사적 기록은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암시를 던지지만 대중들 사이에 퍼진 전설은 마침내 바울을 서바나까지 안착시켜 그곳에서 그의 마지막 선교의 꿈을 이루어준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배에 오른 바울은 서바나로 향하고, 훗날 서바나에는 바울의 선교 활동을 기념하는 유적들이 생겨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그는 전설 속에서조차 고독하지만 고고한, 그러나 고립되지 않은 채 꿋꿋이 독립적인 행보로 그의 선교적 탐험을 위한 장정에 올랐다. 그는 그 끝나지 않는 길의 여운을 살려 그리스도교를 세계화한 불세출의 족적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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